푸념
최희명
자식을 키우는 일은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 속 주인공이 돌을 들어 올리는 행위 같습니다. 들어 올려도 또 들어 올려도 계속 떨어져 내리는 돌은 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아들입니다. 가서는 안 될 길임을 아는데 굳이 우기며 가고야 마는 내 자식의 고집이 천 근 무게로 가슴에 와 박힙니다. 돌이 문제인지 들어 올리는 방향이 문제인지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합니다. 포기할 수는 도저히 없어 다시 한 번 설득해보는 내 말속에는 어느덧 가시가 돋고 돌은 또 떨어져 내 발등을 찧습니다.
커다란 멧돼지가 와락 품에 안기는 태몽을 꾸고 낳은 아들은 천사였습니다. 커다란 눈에 크고 검은 눈동자, 뽀얀 피부에 오만한 코를 가진 아이를 보고 있으면 먹지 않아도 배부르게 벅찼습니다. 그 천사는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허술한 벽을 사이에 둔 이웃에게 늘 미안했습니다. 갓난아이가 귀한 요즘에 들으면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인데 그때는 그랬습니다. 이웃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얼른 먹여주고 얼른 안아 줘야 했습니다. 덥거나 갑갑한 걸 못 참는 아이는 그 상태가 되면 불에 덴 듯 울어 젖혔습니다. 아이가 더위를 느끼게 하거나 갑갑한 옷, 모자 등을 착용케 하는 건 이웃에게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호 불호가 분명하다 못해 극명하기까지 한 아들은 입기 싫은 옷은 절대 입지 않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는 헌옷을 뜯어 내가 만든 걸 주로 입혔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만화 캐릭터가 들어 있는 옷만 고집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골라놓고 은행 계좌번호와 가격이 적힌 쪽지를 내밉니다. 그렇게 우겨서 산 물건들이 물론 호사스럽게 비싼 건 아닙니다. 그러나 제법 값이 나가는 재킷이나 신발을 잃어버려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 아들이 부모는 난해합니다. 대책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조바심 난 사람이 결국은 채근을 포기하고 찾으러 나섭니다. 아이는 제 나름의 조절패턴이 있어서 급하고 느긋함을 조절하고 있다는 생각이고 부모는 그 기능이 역작동하고 있다며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미식가이기도 한 아들은 죽이나 식혜 등 먹기 싫은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민물장어나 활어 생선 초밥을 좋아하고 뜨거워야 맛있는 건 뜨겁게, 시원해야 맛있는 건 아주 차갑게 해서 제대로의 맛을 즐깁니다. 자식 입에 음식 들어가는 모습이 행복인 부모는 분주히 그것들을 공급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놈이 장가를 들면 배우자가 얼마나 힘들겠나 하는 걱정도 됩니다. 편중된 취향을 고쳐주려고 많은 생각과 행동을 취했지만 변한 것은 내 목소리뿐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해 3월에 느닷없이 자퇴를 선언한 아들은 바윗덩어리 고집으로 제 뜻을 관철시키고 지금은 시립도서관을 오가며 유아독존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배울게 없고 선생님들은 모두 속물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주고받은 설전들이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만든 채 아이는 입을 닫았고 부모는 가슴이 굳어 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제 생각이 모두 옳은 것처럼 느껴져도 훗날 찾아올지도 모르는 후회의 뼈저림을 감당해야 할 자식이 미리부터 가엾습니다. 또한 지금 이 상황의 원인 제공을 한 것이 바로 부모 자신들인 것 같아서 두 다리에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나이 서른이 넘어 얻은 아들이 소중한 나머지 안으면 깨질라 불면 꺼질라 하며 키워서 그럴까요. 내가 더 오래 살았으니 내 말이 옳다며 아이에게 사고할 틈을 주지 않고 결론에 개입한 과오를 인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부모의 일상적인 조언 한 마디도 듣지 않으려 방문을 꽝꽝 닫아 대는 자식에게 화를 낼 수만도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밤새워 컴퓨터 게임을 하는 걸 알면서도 부딪히기 싫어 못 본 체하는 책임감 없는 부모가 되어 갑니다. 캥거루처럼 자식을 주머니에 넣어 키우다가 이제야 무겁다며 준비 없는 자식을 밀어 내고 싶어 합니다.
아들은 우리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 안방을 혼자 차지하고 삽니다. 작곡을 한다고 화성 음악을 조율하는 아들은 우리의 귀를 염려치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즐기는 대중가요의 음량이 조금만 높아도 나한의 얼굴이 됩니다. 기억해 보니 나도 그런 얼굴로 자식을 대한 적이 있습니다. 말을 않기에 무슨 꿈을 꾸는지 알지 못합니다. 나 또한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서며 목적지나 목적을 말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그저 기도할 따름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주고받으며 살기를 이제야 기도할 따름입니다.
우격다짐으로 받아낸 계획대로 검정고시 통과하고 대학을 가면 좀 나아질까요. 알람 시계 소리가 아침을 깨우는 엄마의 목소리보다 불편해서라도 저 혼자 금방 일어나게 될까요. 온도와 습도에 길들여진 이 주머니를 떠나 저만의 세상을 향해 출발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마이동풍인 듯 스쳐 듣는 부모 말이 기억 속에 남았다가 필요한 시간과 공간에서 적절하게 작용할까요.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내 기도가 이루어져, 하나의 인격을 가진 보통의 성인으로 세상 속에서 모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속의 작은 배려와 따뜻한 가슴으로, 제 주변과 소통할 수 있는 어른으로 살아주면 정말 좋겠습니다. -2007년 12월-
첫댓글 자매님의 진솔한 고백과 자식에대한 염려와 소통과 대화의 답답한 심정을 들으며 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시시각각으로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속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세태차이도 차이 이거니와 '관계성' 안에서 서로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각자 자기입장만 고수하면 항상 어려움과 고통이 따르게됨을 일상생활 안에서 매일 겪게됩니다. 7년이 지난 지금 아드님은 어엿한 청년으로 변해있을 것이란 상상을 해 봅니다. 자식은 부모의 오랜 인내와 고통 그리고 집착이 안 사랑에서 태어나는 열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최근 제가 건강상의 문제로 제 카페에조차 들어오지 못합니다. 건강을 되찾으면 감사 인사 다시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