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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당수요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아그네스
동일성 회복의 시와 기이한 설화의 시(조해옥, 문학평론가)
1. 사물들의 거처에 대한 상상-조용미, <<기억의 행성>>
조용미 시인의 시는 시적 자아의 자기에 대한 탐구가 두드러진다. 그동안 시인은 아픈 육체를 통해 자신과 사물과 우주를 이해하는 시의식을 보여주었다. 시인은 그의 새 시집 기억의 행성에서 와병(臥病)의 시간과 ‘소리’와 ‘빛깔’에 대한 사유로 그의 시적 성찰이 되는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탐색하고자 한다.
내가 바라보았던 천장의 무늬와 색깔과 온도를 모두 다 떠올릴 수 있을까
천장을 보며 보냈던 시간들은 우물을 들여다보며 보냈던 시간과 같아
내가 보았던 것은 하늘의 우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열리지 않는다 천장은
門이 아니므로
늘 닫혀 있다
뚫고 나갈 수 없다,
열고 나갈 수 없다
천장은 열리지 않는 뚜껑이므로
천장과 바닥 사이에
門이 있다
門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천장에 대해서라면 아직 빛깔과 밝기와 표정들에 대해 모두 말할 수 있겠다
천장을 보며 보냈던 시간들은 우물이 말라가는 시간과 같아
내가 보았던 것은 우물에 핀 이끼가 저희들끼리 한 세계를 이루었다 천천히 거두어들이는 미세한 풍경의 일지였다고 말할 수밖에
-「천장을 보라보는 자는」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의 화자는 “우물에 핀 이끼가 저희들끼리 한 세계를 이루었다 천천히 거두어들이는” 오랜 시간을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 자이다.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병환 중의 화자는 문이 없는 천장에서 우물을 연상한다. 와병(臥病)의 화자가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은 천장에 한정되며, 그의 의식은 사각형에 갇힌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천장에서 우물을 상상함으로써 그의 의식은 몽상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의 와병의 시간은 그 시간을 견뎌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열리지 않는 문, 아니 문이 본래 있을 수 없는 천장에서 화자는 빈 “우물에 핀 이끼가 저희들끼리 한 세계를 이루었다 천천히 거두어들이는 미세한 풍경의 일지”를 관찰하는 그는 깊고 둥근 우물 안에서 벌어지는 생성의 세계가 끝없이 축조되었다가 허물어지는 것을 본다. 그 세계가 비록 마른 우물 벽에서 이끼가 벌이는 영상에 불과할지라도, 누운 몸에 갇힌 화자는 그의 유일한 몽상의 스크린이 된 천장에서 상상 속의 이끼가 벌이는 세계의 처음과 끝을 경험한다. 따라서 그에게 와병이라는 육체적 구속은 깊은 사유의 전제가 되며, 사각형의 감옥인 천장은 우물 속의 신비한 자족의 세계를 펼쳐놓을 수 있는 몽상의 장소로 바뀐다. 변하지 않는 와병의 현실은 세상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는 인식의 시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조용미 시인은 모든 사물의 거처로서의 물과 빛에 대한 상상을 펼친다. 인간의 목소리처럼 숲은 물소리를 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벚나무의 가지는 숲의 모든 물소리를 빨아들이고, 숲의 모든 빛을 빨아들여 검게 빛난다. “비 오는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다//숲의 벚나무 가지들이 검게 변한다 숲 속의 모든 빛은 벚나무 껍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흑탄처럼 검어진 우람한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은밀히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소리의 거처」) 벚나무를 우람해지도록 키우고 살찌게 하는 것은 숲의 물소리와 빛이다. 벚나무의 검은 가지에 대해 펼치는 시인의 시적 자아의 상상이 그로 하여금 물과 빛이 숲의 사물들을 낳고 자라게 하는 생명의 원천임을 발견하게 한다.
빛깔들은 모두 물에 수렴된다. 물속의 많은 빛깔들은 외피에서부터 푸른빛, 초록빛, 싸늘한 흰빛, 노란빛, 어둠의 색깔을 거쳐 따뜻한 분홍빛에 도달한다. “푸른빛 초록빛 싸늘한 흰빛 노란빛/그리고 검은,//검은 건 빛이 아니라서/그냥 어둠, 이라고 해두지/물이 숨을 가득 채울 때 보았던 건/따뜻한 분홍빛// (중략)//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고요한 곳이 있다면/그건 아마 물속일 거야”(「물속의 빛」) 물은 모든 것의 수렴체이면서 반대로 각각의 형상들과 다양한 빛깔과 소리들을 낳는 모체이다. 사물들은 물에 응집되고, 동시에 모든 사물들이 거기에서 태어난다. 여기에 생과 죽음의 경계는 없다.
강정 갔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위해 제를 지내는 사람들을 만났다
건너편 바위에 앉아 오래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가 넘지 못했던 강 건너편 나무 아래까지 향냄새가 날아왔다
가까운 산과 먼 산의 계곡을 흘러내려온 물이 합수되는 지점,
물은 그의 심장을 단번에 싸늘하게 움켜쥐었을 것이다
강가는 넓고 더없이 평화로웠다
강 저쪽으로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들은 햇볕에 우리는 그늘에 속해 있었다
(중략)
강정 차가운 물 위엔 햇살이 들끓고
강정 밖에는 여우비가 내렸다
내년에도 제를 지내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강을 찾을 것이다
버즘나무 껍질과 그늘은 한층 더 두꺼워질 것이다
-「강정 간다」 부분
위의 시에서 “넓고 더없이 평화로”운 강가의 분위기는 강의 이편과 저편을 부드럽게 덮는다. 그늘진 이편과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저편, 즉 죽음으로 나뉜 이편과 저편의 경계는 선명하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는 강 건너편과 우리가 있는 이편 사이에 무심한 강물이 흐른다. 이편과 건너편, 죽음과 이승은 마치 물이 둘 사이를 나누는 것처럼 흐른다. 그러나 물은 이편과 저편에 모두 닿아 있다. 순간적 생성과 소멸이 버즘나무의 껍질이 한층 더 두꺼워지는 시간, 버즘나무의 가지와 잎새들이 더 무성하게 자라고 피어나서 한층 더 두꺼운 그늘을 만드는 시간의 흐름이 무심히 전개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마찬가지로 죽음과 생 사이를 물은 무심하게 흐를 뿐이다. 생과 죽음의 경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생겼다가 스러지는 것이다. 그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지만, 물은 그 경계를 지우면서 흐른다.
2. 부재의 확인을 통한 초월-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시인은 그의 새 시집에서 죽음의 초월과 신성함을 다루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부재를 자신의 몸으로 겪으면서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그의 시적 자아는 식물이 된 아버지와의 친연성을 확인하여 자신과 아버지와의 동질성을 회복시키고(「석산꽃」), 아버지의 부재를 확인함으로써 그러한 부재를 초월하고자 한다.(「홍시」) 시인은 「눈의 정글」과 「개밥바라기」에서 만물을 관통하는 죽음이 지니는 신성함을 노래하기도 한다.
한 몸 속에서 피어도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해
무덤가에 군락을 이룬다
당신이 죽고 난 뒤
핏줄이 푸른 이유를 알 것 같다
초가을
당신의 무덤가에 석산꽃이 가득 피어 있다
-나는 핏줄처럼
당신의 몸에서 나온 잎사귀
죽어서도 당신은
붉디붉은 잇몸으로 나를 먹여 살린다
석산꽃 하염없이 꺾는다
꽃다발을 만들어주려고
꽃이 된 당신을 만나려고
-「석산꽃」 전문
화자는 아버지 무덤가에 핀 석산꽃을 꺾어서 아버지를 만나려고 한다. 붉은 석산꽃은 화자 자신에게 아버지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듯하다. 그는 꽃이 된 아버지를 만나면 드릴 석산꽃을 하염없이 꺾는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는 죽은 아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욕망이 꿈으로 표현되는 사례가 있다. 아버지의 꿈속에서 침대 옆의 초가 쓰러져 죽은 아들의 팔에 불이 붙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팔이 뜨겁다고 말하면서 아버지를 원망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아버지는 생전과 똑같은 아들의 목소리와 눈빛을 경험한다. 아들을 만나고 싶었던 아버지의 소원이 꿈속에서 성취된 것이다. 「석산꽃」의 화자가 “핏줄이 푸른 이유를 알 것 같다”라고 하거나 “-나는 핏줄처럼/당신의 몸에서 나온 잎사귀”라고 말할 때, 그의 내면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그는 자신의 손등에 비치는 핏줄에서 자신이 아버지의 몸에서 나온 잎사귀라는 인식을 갖는다. 아버지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그 흙이 붉게 피어올린 석산꽃은 아버지의 새로운 거처가 되었다. 여기에서 시의 화자는 죽음에 의해 나뉜 자신과 아버지와의 절대적 거리를 초월하여 그가 여전히 아버지의 자식임을 보여주기 위해 의식의 전환을 꾀하는 것이다. 석산꽃에서 아버지의 현현을 발견하는 화자는 자신의 몸에서 푸른 엽맥(葉脈)을 찾아내 아버지와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있다.
뒤뜰에서 홍시가
철퍼덕철퍼덕 떨어지는 밤
아버지 돌아가신 자리에
아버지처럼 누워서 듣는다
(중략)
임종 가까운데
자식 오지 않고
뻣뻣한 사지
이불 밖으로 나온 손
가슴에 얹어주던 어머니
큰방에 누워
뒤뜰 홍시처럼 가슴에
둥글게 주먹 말아 쥐고
마을 가로질러 가는
기차 소리 듣는다
-「홍시」 부분
「석산꽃」에서 석산꽃이 시인의 시적 자아가 아버지와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매개로 삼았던 것처럼, 「홍시」에서의 홍시는 시의 화자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확연히 부각시키는 사물이며, 동시에 아버지와의 친연성을 다시 한 번 직접 체험하게 만드는 사물이다. 시의 화자는 돌아가신 아버지 자리에 누워 아버지가 생전에 들었을 소리를 듣는다. 홍시가 철퍼덕철퍼덕 떨어지는 소리는 “임종 가까운데” 아버지의 곁에 있지 못했던 화자 자신의 심리적 무게를 대신하는 듯하다. 그는 아버지가 생전에 드시던 홍시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임종의 아버지처럼 가슴에 홍시처럼 주먹을 말아 쥔다. 그는 임종의 아버지를 고스란히 체험함으로써 아버지의 부재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과 별에서 동일한 신성을 찾아내는 박형준 시인의 시선은 그의 순결한 시혼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자신의 숨소리가/간벌이라도 되는 듯/눈발의 숲을 쳐내며,/눈의 정글 속 초원으로 나아간다/개는 자신의 영혼 속을 달리고/신이 개의 영혼 속을 달린다”(「눈의 정글」). 여기에서 신은 개의 죽음의 순간을 함께 한다. 눈발을 헤치고 떨면서 초원을 향해 달려가는 개를 도와 신은 바쁘게 달린다. “노인은 먹은 것이 없다고 혼잣말을 하다/고개만 돌린 채 창문을 바라본다./개밥바라기, 오래전에 빠져버린 어금니처럼 반짝인다./노인은 시골집에 혼자 버려두고 온 개를 생각한다./ (중략) /초저녁 창문에 먼 데 낑낑대는 소리,/노인은 툇마루 속 구덩이에서 귀를 쫑긋대며/자신의 발소리를 기다리는/배고픈 개의 밥바라기 별을 올려다본다.” 병석에서 오랫동안 일어날 수 없는 노인은 자신의 허기를 통해 자신이 없으면 허기를 면할 수 없는 고향집의 개를 떠올린다. 자신의 배고픔으로 개의 배고픔을 염려하는 노인의 심성에는 맑은 신성이 깃들어 있다. 노인과 개의 동질성은 금성이나 샛별로 불리는 개밥바라기별을 매개로 확인된다.
3. 노동기계들의 새로운 설화-조인호, <<방독면>>
조인호 시인은 그의 첫 시집에서 신화가 된 노동기계들을 노래한다. 노동자들의 가혹한 현실은 시인의 의식 속에서 설화적 공간으로 바뀌고, 녹슨 기계 같은 노동자들은 설화 속의 인물들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러한 현실의 설화적 변용은 바뀌지 않는 현실의 가혹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시집 방독면 속의 인물들은 노동자와 도시빈민으로 주어진 자신들의 삶의 울타리를 결코 뛰어넘지 못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신분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방법은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다. 도시 소외계층의 고통과 아픔은 철저히 현실적 한계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며, 그런 만큼 자신들의 삶의 조건에 속박된 존재들이지만, 조인호 시인은 그들의 삶에 설화적 요소를 부여한다.
「철가면」에서 용접공이었다가 실명하고 도축장 노동자가 된 사람은 자신의 한계적 삶에서벗어날 수 없도록 감시하는 송전탑 위로 기어올라감으로써 상징적으로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난다.
철과 장미의 문명 속에서 그는 용접공으로 일했다 철가면을 쓰면 산소용접기 밖으로 장미처럼 피어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그는 철과 장미를 사랑했다 불이 붙는 독한 술을 즐겨 마셨고 쇠못을 씹어 먹는 철인이었다 중금속에 중독된 그의 눈은 세상이 온통 붉은색 셀로판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용접 불꽃이 그의 눈을 멀게 만들수록 세상에 없는 단 하나의 붉은색을 지닌 철의 장미를 그는 볼 수 있었다 그의 피는 붉은 철로 철철 넘쳐흘렀고 그는 조금씩 녹슬어갔다
(중략)
그는 송전탑 꼭대기 위로 덩굴장미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번쩍, 가시철조망 같은 번개가 송전탑에 내리꽂혔다 고압전류 속에서 그는 자신의 철가면과 함께 흐물거리며 녹아들었다 철가면이 송전탑의 철근 속으로 들러붙고 있었다 송전탑 밑 지상의 사람들이 붉은 뼈를 드러낸 채 해골처럼 웃고 있었다 번개가 번쩍거릴 때마다
-「철가면」 부분
「철가면」의 용접공은 중금속에 중독되었고 실명과 화상 등의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이다. 그는 폐기되는 기계의 부속품이다. 그는 노동자라는 자신의 삶의 울타리에 갇힌 노동기계다. 그러나 그는 송전탑 꼭대기를 덩굴장미처럼 기어오른다. 비록 그의 몸이 송전탑에 들러붙어 녹아버렸을지라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자기의 울타리를 넘는 행위는 그로 하여금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에서 재개발로 생존의 거처에서 쫓겨나게 된 원주민 소년은 옥탑 물탱크로 잠입해 들어가고, 「形狀記憶合金」에서 해고된 노동자는 지하동굴로 걸어들어가 스스로를 원인(原人)으로 퇴화시킨다. 「무지갯빛 광석」의 “낮은 포복으로 좁은 파이프 속을 통과하는 지하인”이었던 노동자는 맨홀의 배관을 흘러다니다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서울 메트로 지하공구 속에서 누군가 모닥불을 피운다 그는 동굴 속 원인(原人) 같다 터널 시멘트 벽에는 원인의 손모양이 아우성치듯 찍혀 있다 오래전 공장에서 볼트와 너트를 조이던 그가 해고되던 날 그는 손에 쥔 몽키스패너를 뉴턴의 사과처럼 툭, 떨어뜨렸다 그날 그는 태곳적 원인을 발견했다 시간의 컨베이어벨트가 거꾸로 가동되기 시작했고 그는 퇴화해버렸다
캄캄한 터널 속으로 원인은 걸어들어갔다 지하철역에서 그가 찾은 것은 소방방재용 국민방독면이었다 터널 끝 어둠 속에는 조용히 그를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맥박처럼 다가오는 원인의 발소리를 온몸으로 흐느끼고 있는 것, 그것은 그가 싸워야 할 괴물 같은 형상들 기억들 합금들
(중략)
보라, 벼락처럼 떨어지던
몽키스패너의 궤적 속
고통 받으며 절규하던 기계들을,
마지막 기계가 쓰러져 죽던 밤
원인은 마침내 불을 발견했다
-「形狀記憶合金」 부분
해고자들은 동굴 속 원인(原人)처럼 퇴화해 버렸다. 원인이 된 그는 괴물 기계들과 맞서 싸워 “마침내 불을 발견”한다. 원인이 된 해고노동자가 노동의 도구인 몽키스패너를 무기 삼아 마지막 괴물기계까지 쓰러뜨렸을 때, 역설적이게도 그는 문명의 시작인 불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기계문명의 파괴자이지만,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불의 발견자가 된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탄생하였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거대한 기계”가 되었는지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形狀記憶合金 문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시간을 반복하는 괴물 기계이기 때문이다.
조인호 시인의 시에서 철가면과 방독면은 중요한 상징이다. 철가면은 용접공이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쓴 안전 용구이지만, 그것은 용접공이 용접공으로서의 생과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임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또한 방독면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존재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쓴 가면이다. 그러나 철가면이나 방독면은 소외된 존재들의 얼굴에 폐쇄된 사회가 억지로 덧씌어 놓은 가짜 얼굴들에 지나지 않는다. “훼훼훼 나만 홀로 자물쇠 같은 방독면 안에서 안전했네/방독면에 철컥, 잠긴 얼굴은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었네/그 어둠 안에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같은/공기를 나만 홀로 들이마셨네”(「傀儡戱」) 자신들의 얼굴을 빼앗긴 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을 수 없는 가면을 쓰고 무대 위에서 벌이는 참혹한 괴뢰희(傀儡戱)가 조인호 시인이 기계문명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해 새롭게 창조해 낸 설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