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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을 위한 지침(Councels on Discernment)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 참된 순명(obedience)에 대하여
진실하고 온전한 순명은 덕 중에서 가장 뛰어난 덕이다.
이런 순명의 덕이 없이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일이란 없다.
미사든, 기도든, 관상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진실한 순명 안에서 한다면 보다 큰 선익이 될 것이다.
순명은 항상 모든 것에서 가장 최상의 것을 이끌어 낸다.
누군가 순명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할 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곳에 찾아오실 것이다. 내가 나의 의지(뜻)를 포기하고 나의 윗분의 손에 내 뜻을 맡기고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뜻을 가지실 것이다. 만일 하느님께서 이것에 있어서 나를 져버린다면(fail)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져버리는 것이 된다. 따라서 모든 것에 있어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것을 바라실 것이다. 만일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진리이시다는 것에 비추어 그분은 옳은 분도 아니며 그분의 본성에 있어서도 하느님이 될 수도 없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도는 “저에게 이런 덕(virtue)을 허락해 주십시오. 혹은 이런 생활 방식을 허락해 주십시오”라든가 “주님 저에게 당신을 허락해 주십시오 혹은 영원한 삶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당신이 뜻하시는 것 외에는 제게 주지 마십시오. 주님, 모든 일속에서 당신께서 뜻하시는 것을 당신이 뜻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진실한 순명에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라는 말이 없듯이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것도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것이 모든 순명의 독(poison)이 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처럼 하느님의 신실한 종의 가장 우선시되고 귀중한 지향(aim)은 무엇이 하느님을 가장 찬미하게 하는 것인지 귀기울이는 것이다.
2. 가장 힘있는 기도와 가장 고귀한 일에 대하여
가장 힘있는 기도와 가장 고귀한 일은 비움의 정신(empty spirit)에서 생겨난다. 빈 마음이란 무엇인가? 빈 마음이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고정된 행동 방식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이로움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빈마음은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귀한 뜻 안으로 깊이 잠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지체들(눈, 귀, 입, 심장, 모든 감각)이 이렇게 잠길 수 있도록 힘있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에게 현존하시고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길 바랄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3.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자신의 뜻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고, 헌신(devotion)과 평안(peace)을 갖고 싶어하며, 다른 사람처럼 가난해 지거나 혹은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하기 위해서는 낯선땅, 수도원, 은둔처등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은 순전히 자기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또 사람들은 헛되이 평안을 찾는다. 외적인 것- 즉 특정 장소, 생활방식, 사람, 행위, 고독,
가난, 낮춤(degradation)등에서 - 에서 평안을 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건, 무엇이 되었건 간에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며 평안을
주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평화를 구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서 떠나는 것부터(forsake) 시작해야 한다. 그럴 때 모든 것에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한 왕국과 심지어 세상을 포기했다(renounce)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에게 매여있다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더나아가 그가 자기 자신을 포기했다면(renounce) 그가 부든, 명예든 다른 무엇을 갖고 있든지, 그는 모든 것을 떠난 것이다.(forsake)
4. 내적으로 외적으로 실천되어야 할 자기 부정의 이로움에 대해서
이승의 삶에서 자신 안에게 단념할 것(forsake)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단념한 사람은 결코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여기에 충실히 매달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대가 모든 것을 끊고(forsake) 벗어나는 꼭 만큼 하느님은 그 속으로
들어오신다. 여기에서 진실한 평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없다.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보다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그대가 옳다면 그대가 하는 일도 옳은 것이다.
거룩함이 특정행위로부터 오는 것(building holiness upon action)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존재의 방식(a way of being)에 따라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을
거룩하게 만들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일이 아무리 거룩하다하더라도 그 일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거룩해 질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즉 먹고, 자고, 밤새워 단식하는 일등이 거룩해진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가하는 문제에 매달리기 보다는 우리가 착해질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문제는 그 일이 이루어지는 근원(ground)이다.
5. 무엇이 우리 존재와 근원(ground)을 선하게 하는 것인지 살펴보라.
자신의 지향이 완전히 하느님을 향할 때 사람의 존재와 근원은 선하다.
하느님을 구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과 온갖 선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태도로 돌맹이를 밟고 서 있는 것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초연하지(detachment) 못한 채 성체(the Body of our Lord)를 모시는
것보다 더 경건한 태도다.
하느님을 붙잡는(cling) 사람을 하느님도 붙드시며 덕이 우리에게 붙는다.
6. 초탈(detachment)과 하느님을 얻는 것에 대하여
잘 지내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던 잘 지내며,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던 잘 지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잘 지낸다면 참되게 하느님을 소유한 (has) 것이다.(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참되게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어디에나 곧 교회, 외딴 곳과 은둔처에서 만큼이나 길거리에서도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실제로 하느님을 오로지 하느님만을 소유했다면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한다. 하느님을 어지럽힐 수 있는 다(multiplicity, 多)가 없는 것처럼, 어떤 것도 이 사람을 어지럽히거나 조각내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모든 다(多)가 일(one,一)이되고 일비다(一非多 one
unmultiplicity)가 되는 일자(One, 一者)안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받아드려야 하며 그분의 태도와 지향과
사랑안에서 항상 스스로 하느님의 현존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대가 교회나 은둔처에서 하느님을 생각하듯 그대가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숙고하라. 군중들 가운데에서 낯선 곳에서(unlikeness),
소란 속에 있을 때 이와 동일한 태도를 그대 안에 간직하라.
그대들이 하는 일에서 동일한 태도와 동일한 신뢰와 하느님을 향한 동일한 사랑과 진지함(seriousness)을 가져야 한다. 이런 일관성을 갖는다면 어떤 것도 그대와 그대에게 현존하시는 하느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 즉 그분을 만나기 위해 이리저리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특별한 행위, 사람, 장소에서 그분을 찾는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악한 벗들뿐만 아니라 선한 벗들, 거리뿐만 아니라 교회도, 나쁜 말과 행위뿐만 아니라 착한 말과 행위까지도 장애물이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참되게 얻는 일은 어디에 달려있는가? 하느님을 참되게 얻는 것은 태도에 달려있고 하느님을 향한 내적인 이성(reason)과 지향(intention)의 방향에 달려 있는 것이지, 특정 방법(unchanging manner)으로 꾸준히 관상하는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본성적으로 그러한 지향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며, 고생스러울 뿐만 아니라 최선의 방법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이 만들어낸 하느님을 소유해서도 안되며 그것에 만족해서도 안된다. 그 생각이 사라질 때 하느님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존하시는 하느님, 인간의 관념과 모든 피조물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을 소유해야 한다.
그런 하느님은 인간이 일부러 멀어 지려고 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면 여길 수록, 아니 본래 그러한 것보다 더
신성한 것으로 여기면 여길수록, 하느님은 그를 더욱 기뻐할 것이다.
이런 것은 세상에서의 도피, 사물들로부터의 멀어짐, 세상으로부터의 고립과 분리에 의해서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영적인 고독을 배워야 한다. 어디에서든 누구와 함께 있든 사물을 꿰뚫고 들어가는 법을 배워야 하며,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 하느님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얻도록 애써야 한다. 이것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많은 훈련을 쌓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마땅히 노력하지 않고도 하느님의 현존과 더불어 빛을 발하고 사물들로부터 본질을 얻어내야 하며 사물들을 사물들로서 있게 해야한다.
7.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일을 가장 올바르게 할 수 있는가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사람은 두 가지 중 한가지를 해야 한다.
즉 자신의 일속에서 하느님을 소유하는 법을 배워 일속에서 하느님을
굳게 붙들든지 아니면 자신의 일을 모두 포기하든지 해야 한다.
사람은 해야 할 여러 가지 활동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 속에서 하느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먼저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도록 하고, 그의 느낌과 생각, 의지와 능력을
하느님과 결합시키면서 그의 마음속에 하느님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함으로써 어떤 것도 그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 없게 해야 한다.
8. 보다 성장하기 위한 지속적인 열성에 대하여
자신의 일에 과도하게 확신을 갖거나 자신의 이성이 느슨한 방식으로는
자신이 성취한 일에 만족할 수 없다. 늘 이성과 의지라는 두 가지 힘이 자신에게 확고히 자리하게 함으로써 가장 높은 수준에서 최선을 다하게 되고
안 밖의 해로운 것들을 분명하게 막을 수 있어야 한다.
9. 죄의 경향성이 어떻게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할 수 있는가
죄를 범하려는 충동이 쓸모 없거나 이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죄의 충동에 거의 초연한 사람이 있고 또 반면에 심하게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
심하게 흔들리는 사람은 외적 자아는 분노, 교만, 관능 등에 의해서 흔들리더라도 보다 깊은 본성은 어떤 형태의 죄도 짓지 않는다는 것을 헤아려서 이에 대항하여 단호하게 싸운다. 이런 사람이 받을 상급이 더 크다.
완덕은 투쟁의 결과이며 바오로의 말처럼 “덕은 약함 속에서 완전하게”되기 때문이다. 죄의 충동이 죄가 아니라 죄에 동의하는 것, 분노에 굴복하는 것이야말로 죄이다. 의로운 사람은 죄의 충동 자체를 없애려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충동이 없다면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확신을 갖지 못할 것이며 투쟁과 승리가 가져다 주는 상급을 놓치기 때문이다. 죄의 충동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부지런하게 덕을 실천하게 한다. 사람이 약하면 약할 수록 더욱 더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 덕과 악덕 모두 의지가 문제다.
10. 의지는 어떻게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의지가 선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 무엇에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혼란스러워 할 필요도 없다. 선한 의지를 갖고 있다면 아무 것도, 사랑도 겸손도 그 외의 어떤 덕도 결여하지 않을 것이다. 악한 의지가 악에 대한 강한 힘을 갖는 것 못지 않게, 선한 의지는 선에 대한 강한 힘을 갖는다. 선한 의지는 더 큰 힘이 존재한다. 나의 의지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내가 능력은 결여하고 있다하더라도 행할 의지를 결여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것을 행한 것이며,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논박하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 보시기에는 무언가를 행할 의지를 갖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언제 의지가 올바른 의지가 되는가? 그것은 자기를 구하지 않고 그것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의지로 변형되고 순응할 때 완전하고 올바르게 된다.
나에게는 없는 열정적인 헌신을 지니고 있는사람을 볼 때 나는 어떻게
그 같은 사랑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느님이 영혼의 핵 속에 숨어 계시듯, 사랑은 영혼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므로 사랑은 전적으로 의지에 달려 있다. 그래서 더 많은 의지를 갖는 것은 더 많은 사랑을 갖는 것이다.
만일 성 바오로와 같은 황홀경에 빠져있는 동시에 한 접시의 수우프를 원하는 환자를 알고 있다면 자신의 황홀경에서 벗어나 곤궁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실로 하느님을 위해 우리가 애써 얻으려고 했던 황홀경이든, 영성이든 위로든 무엇이든 기꺼이 포기한다면,
만일 그것이 오로지 선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소유하게 될 것이다. 바오로는 “나는 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했다. 하느님의 벗들은 위로 받지 못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위로든 메마름이든 그들에게는 그자체가 가장 큰 위안이 된다.
11. 하느님이 자신을 감추고, 헛되이 자신만을 찾고 있을 때 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멀리 사라져버렸다고 생각될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가장 큰 위로를 느꼈을 때 했던 바로 그대로 하면 된다. 큰 슬픔 가운데 있을 때도, 어떤 환경 속에서든 동일하게 행동할 수 있는 법을 배우라. 하느님께서 자신을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것 이상 좋은 충고는 없다. 선한 의지는 결코 하느님을 잃을 수도 없으며 헛되이 찾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한 의지를 지녔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하느님의 의지(뜻)을 지닌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해 줄 수 없다. 모든 것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전망 안에서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다. 모든 것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순명 해야한다. 그럴 때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이 아무리 크다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을 통해 오는 것이라며 하느님이 먼저 고통을 당하신다. 인간에게 닥치는 고통이나 좌절이나 실망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로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보다는 하느님께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선을 위해서 하느님 스스로 그 고통을 참으시고, 우리들이 하느님께서 당하시는 고통을 기꺼이 겪으려하며,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면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이 된다. 수치는 명예로, 쓴 것은 단것으로, 어둠은 빛으로 변한다. 하느님은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가장 달콤한 순간에도 동일한 분이시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는 고통과 그릇된 일들이 유익한 것으로 바뀔 수 있다.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죄 조차도.
12. 죄에 관해서, 그리고 우리가 죄 중에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뜻 안에 올바르게 자리잡으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자신이 지은 죄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하고 바라지 않는다. 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더 큰사랑이 오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 진다. 하느님은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신뢰해도 좋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이끌어 내시고자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하시지 않는다. 한 순간도 이전에 지은 죄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하신다. 하느님은 과거의 모습에는 전혀 상관하시지 않으며 현재에 관여하신다. 하느님은 기꺼이 죄에 정면으로 대면하시며 참아내신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보다 높은 단계로 상승할 것이라는 것을 내다 보실 때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신다. 죄를 범하지 않고 위대한 일을 성취한 사람은 거의 듣지 못했다. 우리가 주님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는 것, 그래서 더 큰 겸손과 헌신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13. 두 차원의 회심에 대하여
회심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시간적이요 감각적인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이다. 시간적이고 감각적인 회심은 인간을 아래로 더 큰 비애로 이끈다. 아무런 향상도 없이 우리를 비참하게 할뿐이다. 신적 회심은 다르다. 하느님께로 들어올려, 부동의 의지 안에서 모든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신적 회심은 영혼을 온갖 슬픔과 불만을 넘어 들어올리고 영혼을 하느님 안에 고정시키는 영적인 기쁨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14. 참된 확신과 희망에 대하여
진실 되고 완전한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께 큰 희망과 신뢰를 둘 때 드러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하느님을 완벽하게 신뢰하는 것만큼 복된 일도 없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크게 신뢰하는 사람을 잊지 않으시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하신다.
15. 영생의 두차원의 확실성에 대하여
영생에 대한 두 종류의 확실성이 있다. 첫째는 하느님 자신이 영생에 관해서 우리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믿음, 또는 계시를 통해서 드리내신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며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난다. 둘째는 하느님과 인간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친밀감을 통해서 하느님을 완전히 신뢰함으로써 의심할 수 없이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분명한 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피조물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런 확실성은 첫번째 확실성보다 훨씬 강하며 훨씬 더 완전하며 더 참된 것이다. 이런 확실성은 영혼의 모든 기능들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16. 참된 회개와 복된 삶에 되하여
가장 훌륭한 회개와 가장 유익한 속죄는 하느님 아닌 모든 것, 신적이 아닌 모든 것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흔들림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는 것이다. 그럴 때 어떤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즉시 용서 받을 것이며 죄의 고통은 누그러질 것이다. 진실한 참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수난 속에 잘 나타난다. 그분이 하신 일과 참으신 일, 그분의 삶과 수난을 닮는 것을 생활 습관으로 만들라. 어느 때든지 그분을 생각하라.
참된 회개는 사물을 넘어 오로지 하느님께로 높여진 마음이니 그 상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부지런히 행하라. 이 상태에 방해가 되는 것은 멈추도록 하라. (철야든, 단식이든) 하느님은 행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이면에 있는 헌신을 보고 계실 따름이니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분께 온전히 확신을 갖는다면 죄로 인해 망가진 모든 것의 온전한 구주(general redeemer)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음, 지성, 육체, 영혼, 힘 등 모든것의
17. 그리스도와 많은 성인들 했던 것처럼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자신을 평화중에 있게 할 수 있으며 하느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나 성인들의 삶에 미치지 못하고 그런 마음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불안과 낙심을 하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우리들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라. 하느님은 결코 떠나시는 법이 없다. 그분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가실 수 없다하더라도 그분은 문보다 더 멀리 계시는 법이 결코 없다.
하느님은 인간의 구원을 특정 방식으로 붙잡아 매두지 않으셨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길을 걷도록 해야하며 다른 길이 갖고 있는 좋은 점들을 그 곳으로 빨아드리도록 해야한다. 성인들의 험난한 길을 따르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성인들의 삶의 방식을 존경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들의 길을 갈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도 분별 있게 따라야지 그대로 모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 누구도 문자적으로 그분을 모방하도록 부름 받지는 않았다. 그분이 행하신 다른 일들도 있지만 그분은 그 일들을 영적으로 따르기를 원하셨지 문자적으로 따를 것을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분을 현명하게 따르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분을 따라야 한다. 형식과 방법은 매 상황마다 따로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사막 속에서 혼자 있는 것보다는 군중 속에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어렵고, 큰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작은 것을 포기하기 더 어렵다. 중요하게 보이는 것보다는 사소한 일을 하기가 더 어렵다. 사람을 모름지기 자신의 약함 속에서 주님을 따라야 하며 그분이 멀리 계시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18. 좋은 음식과 옷 그리고 유쾌한 벗을 적절하게 대하는 방법
음식과 옷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며 마음과 정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넘어서게 하라. 하느님이외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하라. 그러나 만일 뜻하지 않게 부유해졌다 하더라도 평정을 잃지 않도록 해야한다. 우연히 접하게 된 고난과 불명예와 마찬가지로 기꺼워할 수 있다. 금식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것을 기뻐하는 사람은 그만큼 완전한 권리와 선한 양심을 갖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옷이나 음식이나 언어에서 나타나는 색다름(특이성)을 피하라. 예를 들어 과장된 언어의 사용이나 괴짜스러운 부자연스러움 같은 것을 피하라.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가능한 한 완벽하게 그분의 모습을 그대들 안에 간직하도록 하라.
19. 왜 하느님은 진정으로 선한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는데 방해받는 것을 허락하시는가
신실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벗들이 병에 걸리게 하시거나 그들이 기대고 있는 받침대를 무너지게 하신다. 철야, 단식 등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이런 일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기쁨, 버팀목, 희망을 발견한다. 이와 같이 선한 일들이 받침대와 버팀목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자신 자신만이 유일한 버팀목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신다. 이럴 때 사람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과 하느님의 관대하심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된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무기력해지고 결핍을 느낄수록 하느님을 더욱 깊이 통찰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가장 값진 선물을 더욱 민감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20. 우리 주님의 성체에 대하여 : 어떤 태도와 헌신을 가지고 얼마나 자주 받아 모셔야 하는가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세와 태도를 깊게 생각해야 한다. 우선 자유로운 마음으로 우리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양심에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한다. 둘째로 하느님께 뜻을 집중시킴으로서 하느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기쁨을 얻어서는 안된다. 세째로 우리 주님에 대한 사랑이 매번 반복되는 성찬에의 참여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것과 성체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감소해서는 안된다.
지치고 우울하고 둔해서 주님께 나아갈 용기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더욱더 하느님께 나아갈 필요가 있다. 성체를 통해서 분산되었던 감각이 일치되어 조화를 이룰 것이며 저속한 것을 지향했던 그들 중 몇몇은 높이 들려 참된 제물처럼 하느님께로 향하게 될 것이다. 가난 이외에 하느님께 드릴 것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흡족해하고 만족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보화란 하느님의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라. 너무나 많은 죄를 지어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느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셨다. 죄는 그분을 통해서 성부께 죄를 씻기 위해 드리는 모든 제물들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유로운 기회다. 감사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분께 나아가라 그분만이 하느님을 향해 드리는 감사에 대한 완전하고 확실한 참된 척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몸을 받되 우리의 삶을 질서정연하게끔 하는 헌신과 묵상과 더불어 받아들일 수 있음으로써 들어 높여 질 수 있다.
21. 열성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서 어떻게 자유로운 마음을 유지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한다. 어느 때라도 그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요청된다. 첫째는 쓸데없는 생각들로부터 마음을 조심스럽게 지키면서 영적으로 혼자가 될 것이며 둘째로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어떤 것이든 그러한 생각들로 산만하지 말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신을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데 신경 써야 한다. 숙련되지 못한 사람이나 미숙한 사람이 숙련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애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우리는 질료적인 그 어떤 것도 추구해서는 안되며 그 속에서 어떤 우리의 유익을 구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늘 하느님의 유익을 찾아야 하며 획득해야한다.
만일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께서 주신다면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앞서 의지가 주어지면 모든 것이 가능하고 완전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의지에 달려있다고 했던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의지는 두 가지로 이해 되야 한다. 첫째는 우연적 의지와 비본질적 의지가 있고 둘째로 창조적이며 섭리적인 의지가 있다.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과 합일을 추구할 수 있는 초연한 순간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합일의 순간을 선행하거나 뒤따르는 훈련된 초연함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인간은 하느님의 위대한 것들과 그것들 속에 있는 하느님 자신을 받아드릴 수 있다. 오직 한번 자아를 포기하는 것과 자아와 더불어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러한 포기를 자주 되풀이해야 한다. 사람이 단지 순명, 가난과 같은 덕의 관념을 마음에 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시험해도 좋다는 열망과 자기 자신을 검토하면서 덕의 열매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 역시 좋은 일다. 또 단지 덕스러운 행동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덕의 뿌리를 획득할 때까지 계속해 가야한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덕의 행위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야 우리는 완전한 덕에 도달한다.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될 때까지 자기를 비우는 것을 배우자.
22. 하느님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 삶의 좋은 태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의 좋은 길을 스스로 선택하게 해 보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길이라는 것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것을 늘 견지하는 동시에 다른 길들을 자신의 길에 통합시키도록 해 보라. 우리는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 무언가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염려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의 길이 다른 하나와 조화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그 둘 중 하나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표지다.
하느님은 왜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세례의 은총에서 멀어지기 전에 어린애 상태에서 죽도록 하지 않으시는가? 하느님은 파괴자가 아니라 완성자 이시다. 그분은 본성을 완성하시는 분이지 그것을 팽개치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의 은총은 본성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최상의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그것을 완성시키시는 분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바르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큰 선이나 일이라고 해서 작은 선이나 열등한 일을 파괴하도록 해서는 안될 일이다. 오히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최상의 완전을 달성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일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항상 이를 모든 장소에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의 길은 결코 끝나는 법이 없을 것이다.
23. 내적인 일과 외적인 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적인 면을 소홀히 하거나 포기하거나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 그것과 더불어 그것으로부터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내면적인 것이 활동으로 변화되고 자신의 활동이 내면적인 것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이럴 때 자유로움 안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자신을 단련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내적인 활동에 집중해야 한다. 독서든, 기도든 외적인 일을 할 때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라. 만일 외적인 활동이 내적인 활동을 방해한다면 내적인 것을 우선해야 한다. 둘이 조화된다면 이것이 가장 좋은 일이며 하느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가? 언제 자신과 자신의 노력을 제거할 수 있게되는가? 하느님께서 인간을 겸허하게 할 때에 만 겸손은 완전하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인간은 만족하게 되며 덕도 충족하게 된다. 하느님은 어떻게 인간을 무로 이끌어 내리시는가? 겸손과 높아짐(humble and exaltation)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높아짐의 가장 높은 높이는 겸손의 가장 낮은 깊이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겸손하면 할 수록 그는 더욱더 높아질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가질수록 그분의 사랑을 덜 갖게 되며 우리가 적게 가질수록 우리는 그분과 그분의 것을 더욱 많이 갖게 될 것이다. 영적으로 가난해 진다는 것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경원시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지혜로울 때 그 사람은 진정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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