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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라는 말은 건물이나 하나의
본당 공동체, 하나의 신앙
공동체,교회 구성원들, 세계교회, 그리고 가끔은 어떤 교회 예식을 표현할 정도로 다양하게 쓰인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단순히 인간적인 제도로 여겼을 때 그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인정하게 된다. 사실 조직이나 법규 그리고 금전과 규칙이라는 것
이 분명히 필요하고 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모두 합쳐 놓
은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교회의 본질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가 무엇
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내용이 인간적인 결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믿는다. 특히 주님께서 그 교회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이에 관한 짧막한 이야기가 있다.
★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외국인이 도시 외곽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살고 있는 동료 신부를 방문하기 위하여 공항에 내렸다.
그는 버스를 잡아 탔으나 정확한 주소를 모르고 있었다. 그가 아는 것
은 오직 동료 신부가 그 본당에 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한 가지만은
분명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그 성당에도 십자가가 높이 솟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붕들 너머로 보일 십자가만 찾아 보고 있었
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이제는 높이 솟은 십자가 마저도 볼 수 없
게 되어 버렸고, 이제는 그에게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을 직접 찾아내지 않으
면 안되게 되었다. 조그만 술집 하나가 문을 닫지 않고 있어서 그리로
들어가 물었다.
"성 베드로 성당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성 베드로의 교회는 오늘 로페즈씨 댁에서 모이는데요."
여기서 교회는 참으로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교회는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께
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제자들의 모임 안에 현존하셔서 제자들을 당신의 손발이
되어 활동하도록 움직이시는, 그 그리스도의 현존의 표징인 제자들의 공동체가
'교회'라고 불린다.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손발로서 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 전 생애를 통
해 추구하신 하느님 나라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교회를 통해서 이 사업을 계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사랑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와같은 삶을 통해서 탄압이나 차별,
또 폭력 따위가 없는 정의와 평화의 질서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보증하는 눈에 보이는 표징임과 동시에, 이것을
통해서 하느님이 역사(役事)하시고, 그 완성을 가져오는 도구이기도 하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나인 교회는 전체주의적 획일성의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에페소서 2장 4절부터 6절에서 하나인 교회의 본질을 살필 수 있다. 사도 바오로
의 가르침은 예배도 다양하고 가르침도 다양하고, 교회의 질서도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경우에 "영의 일치"와 "평화의 끈"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서로 사랑을 가지고 서로 너그럽게 대함"으로써 교회의 단일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인 교회'란 말은 하나라는 숫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교회가 하나를 이
루는 일치성(一致性)은 그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또한 윤리적으로 노력
해서 이룩할 일도 아니다. 더구나 획일적으로 만드는 일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교
회의 일치성을 외적현상 -교회, 교회법, 교회행정으로- 보는 것은 오해이다. 왜냐
하면 교회의 일치성의 근거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삼위일
체이신 하느님의 일치성에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만방에 흩어져 있는 만민
을 하나의 하느님 백성으로 모으신다. 이 안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일치하는 체험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이다.
결국, 교회의 일치성을 말하는 '하나인 교회'는 교회 신자들 간의 단일성에 기
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단일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교회란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존재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닮아야 하
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일치성의 기준은 하느님 나라의 단일성에 있다. 한 분 교황만을 우두머
리로 모시고 있다고 해서, 또는 행정상의 일치로 해서 가톨릭 교회만이 '하나인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억지인 것이다. 하나인 교회는 진리를 향한 일치를 근거로
해서만 고백될 수 있다. 즉,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이룩하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
다양한 조건을 가진 인류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공동체를 우리는 폭넒게 '하나인
교회'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은 하느님 나라의 거룩함에서 나온다. 본시 모든 종교의 거룩함
은 속된 것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거룩함'은 언제나 속된 것을 통해 이를 성화시킴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매개물을 통해서만 그분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거룩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신 예수는 하느님의 백성의 죄를 대신 짊
어지고 희생 당하는 거룩한 희생제물이시다. 성령은 예수의 영으로서 거룩한 희생
을 통해 속된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거룩한 힘이시다.
이점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으로써 세상을 거룩하게 할 부르
심을 받고 있는 거룩함의 성사인 것이다. 즉, 교회의 거룩함은 그 자체로서 거룩하
다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었으며 이를 닮아야할
존재라는 의미이다. 다시말하면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거룩함을 순명하는데
에서 드러나는 것이며, 이는 세상의 죄를 없애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은 홀로 거룩하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아버지로서 드러내시기를 원하고, 또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완성되기를 원하므로
속히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기를 기도한다. 하느님이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하신
다는 표현방식이 의미하는 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에제키엘 예언서 36장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하여 더럽혀진 하느님의 이름이 잘드러나 있다.
"주 야훼가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가는 곳에서 뭇 민족에게 멸시를 받게 한 거룩한 내 이름 때문에 행동할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을 다시는 멸시를 받지 않고 오히려 들 날리게 하거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너희에게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뭇 민족은 이를 보고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에제 36,22-23).
에제키엘 예언서가 분명히 말해 주듯이, 하느님은 몸소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하신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모아들이시고 새로이 하여 다시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심으로서 당신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신다. 따라서 하느님이 당신 백성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시는 바로 거기서 하느님의 나라도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교회에서 무엇보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 홀로 거룩하
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영을 통해서 신앙 안에서 당신의 아들을
따르는 이들을 변하게 하시고 성화시키신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힘이 비록 믿는 이들이 죄인들이고 또 그 죄인들이 모인 교회일지라도 바로 그들
을 통하여 활동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이에게 사랑과 기쁜 소식을 증거함으로써, 모든 이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파견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신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뜻은 십자가와 부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그리스도
의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모든 시대, 모든 지역 그리고 모든 인간들에게
이 계시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보편적인 교회가 된다. 본시 가톨릭 교회는 공번된
교회, 보편적 교회를 뜻한다. 교회의 보편성은 하느님 나라의 보편성에 근거한다.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보편적이라는 용어가 '가톨릭' 혹은 '공번된' 이라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가톨릭이란 말 자체는 교회의 분열이래 한정적인 뜻으로 사
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넓고 풍부한 의미가 많이 축소된 느낌이다.
교회의 보편성이란 그 교회의 존재양식이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고 삼위일체이
신 하느님을 닮을 때 부여되는 것이다. 즉, 교회의 구조, 활동, 가르침 전체가 하느님
나라를 세상 안에 드러내고 있을 때 바로 하느님 나라의 보편성에 의하여 교회
는 보편적이 되는 것이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보편성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따라서 이 백
성은 단일 유일한 백성으로 머무르며,모든 세대를 통하여 온 세상에 확장되어,
시초에 한 인간 본성을 만드시고 흩어진 당신 자녀들을 마침내 한데 모으시고
자 하신 하느님의 의도를(요한 11,52) 성취시켜야 할 것이다. 이 목적으로 하
느님께서 당신 성자를 보내시어,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시고(히브1,2), 모든 사
람들의 스승이요 왕이요 사제로서 당신 자녀들의 새롭고 보편적인 백성의 머리
가 되게 하신 것이다. ... 하느님 백성이 지니고 있는 이 보편성은, 가톨릭 교
회로 하여금 전 인류를 그 재화와 함께 효과적으로 영구히 머리이신 그리스도
와 그 성령의 일치 안에 하나로 모으게 하는 주님의 선물이다. ... 하느님 백
성의 이 보편적인 일치는 세계 평화를 미리 보여주고 촉진하는 것이므로, 가톨
릭 신자이건, 다른 그리스도 신자이건, 혹은 달리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되도
록 불린 사람이건 간에, 모든 사람이 이 일치에로 초대를 받는 것이며,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다 이 일치에 속해있거나 혹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교회헌장 13항)
교회는 사도들의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또 그들의 파견임무를
지속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 교회는 사도적 교회라고 불리운다.
교회의 사도성은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데 그 기반이 있다.
본시 사도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을 말한다. 그래서 사도란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들이다. 증인이기에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데
요구되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들이 바로 사도들이다. 그러나 한편
사도는 개인적으로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사도가 될 제자들을 열 두명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부르셨다. 제자 공동체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그분을 증거하는 사도직을 수행하
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교회'라고 할 때 소수의 개인
들이 사도직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공동체로서 사도직을 계승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도성이 가리키는 공동체적 측면은 그리스도 - 그분이 임명한
사도 - 사도들이 선정한 후계자들 - 이들이 선정 임명한 자기 후계자들, 이런
계통으로 이어지는 법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공식적으로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라고 선언되어 있
다. 다시말하면 주교들은 사도적 권한을 계승하고 있으며 사제들, 평신도들, 수도
자들은 주교들의 사도적 권한에 종속되어 사도성에 참여한다. 교회법이 규정하는
바, 사도들의 후계자들로서의 주교의 사도적 권한은 교회가 공동체로서 사도직을
계승하는 한에서, 또 이를 위해서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성이란
주님이 짊어지고 가신 십자가를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짊어지
고 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도직 수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교회의 창립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 왕국을 전세계에
펴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참여하며, 또한 그들을 통하여 전세계를 그리스도께
로 향하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한 교회의 활동을 모두 '사도직'이라 부른다.
교회는 모든 지체들을 통하여 이 사도직을 여러가지 모양으로 수행한다. 사실,
그리스도 신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도직에 부르심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교회 안에 여러가지 직책이 있지만 그 사명은 오직 하나뿐
이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성화하며, 다스리는
임무를 그리스도한테 받았다. 평신도도 또한. …… 교회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전체 사명을 자기 나름으로 완수하고 있다. (평신도 사도직 교령 2항)
하느님 나라의 성사적 도구인 교회는 오늘날 사람들이 눈여겨 보는 외적인 규
칙이나 규율에 있지 않다. 만일 우리가 질서와 정돈, 기계적인 규칙성이라는 외적
인 제도를 교회 안에 세워 놓고, 거기에 교회의 본질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겉으로 드러난 교회의 모습은 '하느님 나라'의 구현을 전제하지
만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이 점에 관한 비유를 하나 들어본다.
'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하나는 인조수이고 하나는 자연수이지만 생김새는 똑같
다. 인조수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줄기, 잎, 꽃, 열매들이 아름답고, 빛깔이
고우며 모양도 화려한다. 이 나무와 자연수와 꼭 닮았다. 모양도 빛깔도 비슷해서
매우 매혹적이다. 그러나 이 나무는 뿌리가 없고 수액도 없다. 이 나무에는 생명이
없고 죽음 뿐이며, 인위적인 생명, 생명 비슷한 것 밖에 없다. 이 나무는 보기에는
아름다우나 내적인 생명력이 없고 진짜 열매를 맺지 못하며, 열매들은 먹을 수가
없고, 하늘의 새들도 와서 쉬며 열매를 따먹지 못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자연수는 사람이 손댄 흔적이 거의 없다. 나무를 심고 다
듬으며 물을 줄 뿐이다. 그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눈에 보이
지는 않으나 하느님께로부터 오고, 생명을 주는 물줄기가 있다. 이 신비로운 물줄
기는 꽃과 줄기와 잎과 열매들을 생각하게 한다. 또 열매는 먹을 수가 있다. 이 나
무에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내부의 생명이 있는데 인조수에는 없다. 인조수가 아무
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까지나 죽은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자연
수는 생명의 나무일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의 외적인 요소를 소홀히 해도 좋으며, 겉으로 드러난 교회의 모
습에 대해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질서와 규칙은 하느님
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 안에 당연히 필요로 한다. 다만 교회의 본질을 식별하는
네가지의 기준은 단 하나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외적인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 안에 하느님의 영, 즉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
다.
다시 말하면 풍선을 공중에 띄울 수 있게 하는 것이 공기이듯이 교회는 단 하
나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 그 토대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 토대는
경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과 다양성으로 특징지어져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동체를
세우셨다는 것을 믿는다. 이를테면 그분은 인간과 함께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에집
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이 백성의 성실한 벗이 되셨으며, 나아가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를 소집하시어 그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신 분도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공동체, 즉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 안에서 생활
한다. 신앙은 동료 그리스도인들 없이는 성장이 둔화되고 만다. 교회야말로 그의
고향이고, 그의 가정이며, 그의 어머니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보다 앞서
간 이들, 그리고 그들 당대의 사람과 더불어 자신들의 신앙을 함께 나누고, 또 그
들 자신들보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건네준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 공동체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
라'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고백문을 통해 교회가 하
느님의 영으로 인해 생활하고 있으며, 그 스스로가 성령의 활동자체라는 것을 고
백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교회의 전 지체들을 서로
서로 일치시키고 또 그 교회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
에 전념하였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
놓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이 구절들을 보면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공동체 의식, 일치감, 소속감,
또는 형제애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잘 알았고 심지어 함께 살기조차 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
들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
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
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
이 구절들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보살피고 있었고, 특히 그들의 재산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 줌으로써 이러한 보살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단순히 공동체로서만 살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
스도교 공동체로서 살았다. 그들을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만들었던 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그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한마음 한 뜻으
로 일치할 수 있는 기초가 된 것이다(사도 4,32). 이것은 그들이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보살피고 나누며 함께 일하는 이유였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그리스도교 공
동체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빵을 서로 나누어 먹
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으며(사도 2,42), 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그
들의 집에서 성찬례를 거행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다(사도 4,33).
1. 독일 가톨릭 교리교육 협의회 편, 이순성 역, 현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삶, 광주 가톨릭 대학 전망 편집부,1990.
2. 이봉우 엮음,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분도출판사, 1990.
3. 천주교 명동교회 교육관 편집부, 예수와 공동체, 천주교 명동교회 교육관,1989.
4. 천주교 명동교회 교육관 편집부, 믿을 교리 2, 천주교 명동교회 교육관,1990.
5. 호세 마린스, 정승현 역, 민중의 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2.
6. 앙뜨완느 슈브리에, 프라도회 옮김, 참다운 제자, 가톨릭 출판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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