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들과 함께한 과수원 길(수필문)
의찬아! 일어나라. 새벽부터 우리는 짐을 챙기고 시골 장호원으로 복숭아 과수원집 딸을 채온 그곳으로 달려가고자 채비를 서두른다.
아들은 힘든 모습으로 눈비비고 일어나 아버지의 힘찬 호령소리를 듣고있다.
아들나이 이제 만 다섯이라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잘 안 들어오지만 그래도 아들은 제법 말귀를 알아듣는다. 주말 출발시간 새벽4시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중부고속도로의 정체와 싸워야되고 시골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 지쳐 과수원 품앗이 일을 돕는데 큰 지장을 일으킬것이다.
우리집 처가는 6남매이고 그중 우리집 아내는 막내딸이라 귀염만 받은 과수원집 막내라
보지도 않고 데려와도 말썽 안 피우고 잘살거라나 뭐 그런 말을 듣고있던 참에 앞뒤 따지지않은채 구애하여 결혼에 골인하였다. 결혼 후 아들 의찬이와 딸 현진이가 생겨 매년 8월 여름휴가만 되면 우리가족은 만사 제치고 시골 처갓집 복숭아밭으로 휴가를 떠난다.
과수원 원두막은 여름인데도 시원한 산들바람과 지하수로 우리는 시원한 여름을 보내며
과수원 복숭아를 따러 오신 형님식구들와 처형댁과의 만남의 광장을 열어가는 모임의 장소이기도하다. 바구니에 가득 담아낸 복숭아는 선별과정을 거쳐 박스에 포장하고 읍내 작목반에 출하한다. 올해도 이곳에서 출하한 복숭아가 서울의 고급 백화점에서 비싸게 팔린다니 그저 흡족하기만하다. 처자식을 데리고 원두막에서 일하다 보면 주변에서 울어대는 매미들의 합창소리로 짬을내어 매미채를 들고 여기저기 매미를 수집한다. 아들에게 매미와 잠자리를 잡아주는 일도 나의 어린시절의 꿈같았던 풍경이다.
점심때가 다가와 집에서 맛있게 만들어온 식사를 마쳤는데 옆에 대접에 소주를 부어논 대접이 안보였다. 힘들다고 장인어른이 사다논 술인데 먹지 못하고 받아만 놓은것이 없어진것이다. 나는 급히 술잔이 어디로 갔는지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아들 녀석이 그걸 물인줄 알고 단숨에 마셔 버린것이다. 갑자기 당황한 우리 식구는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이녀석이 잠시후 갑자기 이리저리 쓰러졌다.일어났다를 반복한다. 어찌보면 어찌나 우습던지 배꼽을 빠뜨릴 정도로 기가 막힐 노릇이고 나는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고, 아내는 그런아이를 보고 어쩔 줄 모른다. “이왕 엎어진 물 기다리고 보면 나을것이야” 하시는 장인어른의 침착함에 우리는 아들의 원맨쇼를 한동한 쳐다보고 있던 기다림에 시간의 고통이 우리에게 필요했다.
아들은 아빠를 잘 따른다. 엄마는 안전에도 없다. 과수원에 일하다가 차에 복숭아를 싣고 작목반에 가려고 원두막을 떠나는데 아들이 기겁을 하며 떠나는 차를 따라오기 시작한다.
나는 미처 아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약100미터쯤 가다가 백미러를 보니 아들이 울며,“아빠”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니 아버지의 깊은 책임감과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용솟음친다.
달려오며 울어대는 아들을 힘껏 안아주었다.
“사랑한다 언제까지나 아들아” 그리고 이런 마음이 사랑하는 딸을 내게 넘겨준 장인어른의
마음일 것 이라고도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아들이 고3학년이 되었다. 아들의 입시준비로 시골의 휴가도 없고,
매년 여름 찿아 가던 한여름의 추억도 시간의 흐름 앞에 무색하다. 올해는 처갓집에 못찿아가 늘 죄송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아내가 말을 꺼낸다. “아버지 농사도 올해로 마지막일 것 같다고, 근력이 다하실 때까지 일하시겠다고 하지만 올해들어 아버지의 모습과 건강이 예전같지 않으시니 우리 자식들이 모종에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예요” 이라고...
그 말에 동감하면서 막내사위가 나서서 형님들 앞에 나설 형편도 못되니 참 답답한 심정이고 또 형님들이 나서서 이야길 안하시니 “우리는 지켜볼 수 밖에” 라는 입장이다.
도시에서 직장생활하며 농촌으로 귀농하는 젊은이도 많다지만 우리 처갓집 식구들 중에는 귀농을 꿈꾸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팔순이 다되신 연로하신 부모님을 계속 이렇게 편히 모시지 못하는 자식들의 근심도 해가 갈수록 더해만 간다.
첫댓글 잠시 옛 추억에 잠겨본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