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4. 화요일. 저녁8시. 예술의 전당.
다니엘 호프&취리히 쳄버오케스트라
다니엘 호프
길쭉한 블랙 가죽 소파 위에서 그는 편안하게
누워있다. 그리고...17c 유화에서 방금 탈출한 듯한 섬세하면서도 신비한 두 눈은 카메라앵글... 아니 날 바라보고 있다. 얼굴보다 창백해서 더더욱 예민해보이는 두 손. 왼손은 복부 위에, 슬며시 아래로 떨어뜨린 오른손은 1742년산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쓰다듬고 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애무하듯이......
그의 두 손은 끊임없이 "전율"할 줄 안다. 음악가로서 음악에 반응하는건 물론이려니와 때로는 집필하며 글맛을 느낀다.
듣자하니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쭉 살고 있다한다.
어쩌면...과거에 그와 나는 서로의 옷깃을 스치며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비발디 4대의 바이올린과 현을 위한 협주곡>
약 20년 전이었다. 거실에 있는 볼록한 TV앞에서 온가족이 둘러앉아 광복 50주년 기념 음악회를 보고 있었다. 반짝반짝 빌로드처럼 윤이나는 4대의 끝내주는 피아노가 설치되더니 잠시후 4명의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나왔다. 한동일, 신수정, 이경숙 그리고 김영호 피아니스트였던거 같은데 피아노 연주 배치까진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휘자 정명훈씨가 나왔는데... 그날 밤에 연주된 곡이 바로 바흐의 [4대의 쳄발로와 현악합주를 위한 협주곡]이었다. 한여름의 지긋지긋한 무더위도 잊을 수 있을만큼 아름다운 선율!!
1995년에서 다시 2016년으로~~
무대 위에 차세대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3명의 영아티스트가 나왔고 이어 다니엘 호프가 등장했다. 진짜 꼬맹이부터 사춘기 소녀까지...고사리 손은 야무지게 쉴새없이 바이올린 줄을 오르내리고 있었고, 이따금 소인국 나라의 거인같은 인상을 주는 호퍼씨와 눈짓으로 호흡을 맞춰가며 그럴싸하게 연주하는걸 보노라면!! 문득 신동 소리 들을 무렵의 깜찍한 모짜르트를 떠올려본다. 그 시절의 모짜르트를 만났더라면 딱 이런 느낌이 들었을까?! 연주자들은 매우 어렸지만 호퍼씨는 그들 모두를 음악가 동료처럼 예의를 갖춰 대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 C단조>
호기! 객기! 열정! 박력!
나는 젊은 피아니스트에게서 이 모두를 기대할 수 있길 바란다. 이거 빼고는 젊음에대해 얘기한다는게 넌센스니까....물론 그들의 들끓는 무모함도 세월에 퇴색되고 연륜이 쌓이는 과정에서 결국엔 사그라들것이다.... 예술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무르익을 즈음엔 대가의 아우라외에 남는 것이라곤 심심하고 이내 무미건조한 인상뿐일테지...어찌보면 말년에 파우스트 박사도 그 점이 아쉬웠나보다. 그래서 소중한 영혼을 댓가로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젊음의 무모함을 그토록 얻고 싶었는지도...
쳄발로가 물러간 자리에 피아노가 대신했다.
피아노에게 영혼을 불어넣어줄 피아니스트는 나보다 무려 8살이나 어렸는데, 프랑소아 자비에 포와자였다. 어마어마한 이름이었다.
바라던대로였다. 혈기왕성하고 거침없고... 그런가하면 프랑스인다운 서정성도,
격정의 순간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스위스인다운 침착함도 엿보였다.
그토록 기대했던 익살스런 피날레는
"로시니와 미키마우스의 만남과 같은 결말." 이라는 한 평론가의 바람 그대로 이루어졌는데, 유쾌한 트럼펫과 화려한 피아노의 빛나는 기지덕분이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는 몇분동안 지속되었는데
특히 내가 앉은 자리 앞에 있던 고등학생 3인방 중 한명은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고래고래 질러댔다. 그래 그래...실컷 소리치려무나..
스무 두살무렵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 독주회에서 이 이모도 목청껏 질러댔었단다...
이렇듯 젊은 객기가 불러일으킨 흥분에 무대 너머 객석에서 더 젊은 객기가 목청껏 화답하고 있었다.
얼른 마치고 쉬고 싶었던건지 혹은 천성이 너그러워서인지...아니면 박수세레 받고 신나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한 두번 무대 위를 왔다갔다하더니 앙코르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수트 왈츠 2번을 연주했다. 19세기 폭이 넓은 크리놀린 스커트처럼 풍성하면서도 통큰 테크닉 그리고 짜릿짜릿한 감각에 매료되었다. 이 남자 정말!!...
젊은시절 안나 카레리나에게 뜨거운 연정을 품은 브론스키 같았다.
<바흐 브란덴부르크협주곡 5번>
하프시코드를 그것도 라이브로 오늘밤처럼
미련없이 충분히 바라보고 들어보긴 첨이다.
다니엘 호프의 1742년산 과르네리도 또 한번 모습을 드러냈고 이어 플룻도 등장했는데...
나무로 만든 조상격 악기는 아니어서 다소 아쉬웠다.
마르셀 푸르스트에게 홍차에 적신 마들렌느 과자가 잊혀진 과거를 되살리는 촉매제라면, 나에게 음악은 유년시절을 망각의 늪에서 건져올려주는 고마운 존재다.
어린시절 일요일 오후면 단촐한 분위기가 풍기던 아빠의 서재에서 어김없이 흘러나오던 익숙한 곡조. 그 뒤로 이 음악을 듣노라면 두툼한 마호가니 책장이 생각나고 안락한 서재에서 책을 벗삼고 즐거워하는 아빠의 젊은 한 때를 떠올리게 된다.
어느새 1악장 후반부로 진입했다. 쳄발로의 화려한 독주, 물론 그 당시엔 독주 악기를 위한 카덴짜란 개념이 없었겠지만, 서양음악사상 최초의 건반악기의 독무대가 펼쳐지는 65개의 마디 부분. 로코코 화가 앙리 와토의 유화같은 2악장의 애수도 3악장의 경쾌함도 좋지만 1악장 종결부 건반악기 독주 부분에서 느끼는 들뜬 희열에 비할순 없으리라....
<비발디~막스 리히터 사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비발디의 "사계 다시쓰기?!"
비발디 사계의 주요 멜로디는 살아있으되 선율의 재배열, 변형 , 화성의 변화도 감지되었다. 신기하게도 현대곡 치고 불협음의 빈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런! 신기하다고?? 그게 왜 희한하게 느껴질까?! 도데체 어느 시점부터 내 머릿 속에선 현대음악=불협화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공식이 형성된거지??!!
추가된 하프와 기타 현악기 그리고 허프시코드는 독주자 다니엘 흐프의 솔로 바이올린을 받쳐주는 베이스 역할을 했는데 마치 영화 배경 음악같은 낯익은 맬로디를 자아냈다. 다만 악장과 악장 사이의 모호한 종결과 휴지부 제시가 태생은 어디까지나 현대음악이란걸 간간 일깨워 주는 정도..
앙코르는 멘델스존이 십대 이른 나이 작곡한 바이올린협주곡D단조 피날레 그리고 브람스의 자장가였다.
물론 바이올린협주곡 전악장이 아닌 피날레 연주라지만, 현대곡 치고 비교적 대곡인 사계를 선보인 후 금새 곡예에 가까운 기교가 난무한 협주곡의 피날레 연주가 가능하다니...
불꽃처럼 탁탁 튕기는 초인적인 스피드, 꾸밈없고 걸쭉한 연주, 정확한 핑거링, 편안한 포지션, 모든 음역대에서의 깨끗한 소리 등등 더 말해 무엇하랴.....한마디로 비르투오소 그 자체였다!!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좀체 수그러들지 않자
그는 비장의 마지막 앙코르로 브람스의 자장가를 연주하며 유유히 무대에서 퇴장했다....시적인 퇴장!!
다음 앙코르 요청에 대한 부드럽고 예의바르며 재치있는 거절!!
이게 옛유럽의 우아한 모습이다!!
Q. 다니엘 호프씨, 한국 공연 이후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A. 10월 한달만 8개국 총 27번의 연주가 있을 예정이지요.
Q. 첫 무대에서 어린 연주자들과의 교감은 어떠셨어요?
A. Fantastic!!환상적이었지요.
Q. 마지막으로 여쭙습니다. 술은 좀 하시나요? 유독 좋아하시는 술이 있다면...?
A. 연주 후에 한잔 합니다. 소주가 좋아요. ㅎㅎㅎ
곤지암 뮤직페스티벌측의 사려깊은 배려로 이루어진 이 깜짝 이벤트로 오늘밤 후기를 마무리하련다.^^
첫댓글 시간을 넘나드는
멋진 후기 읽으며,
감동의 그 순간들을
다시금 되새길 수있어
참 좋았어요~^^
다니엘 호프과
취리히 쳄버의 실력과
연주가 역시나 뛰어나더군요~^^
감사해요 많이 많이 가르침 주세요 카페 선배님♥♥♥♥♥
콘서트홀에서 피숑님 옆에 옆자리에 앉았던 클라식 왕초보,
뭔가 크게 다르다고 느꼈었는데 정말 그런 거였군요
그리고 역시나!
놀라고 갑니다ㅎ
아~~감사해요 사장님 근데 저 역시 배워가고 있어요^_^음...꿈이 있다면 제 전공인 불문에 만족하지 않고 어렵겠지만 철학 논리가 바탕이 되는 미학 공부를 하고 싶긴 해요♥
여튼 담 공연때도 종종 뵈어요^_^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