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구름을 탓하지 않는다.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는 발걸음으로 걸어가라.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해 어느 것 하나라도 마다 하지 않고
긍정하는 대장부(大丈夫)가 되어라.
무엇을 구(求)한다, 버린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붙잡지 않는
대수용(大收容)의 대장부가 되어라.
일체(一切)의 경계에 물들거나 집착(執着)하지 않는
대장부가 되어라.
놓아 버린 자는 살고 붙든 자는 죽는다.
놓으면 자유(自由)요,
집착함은 노예(奴隸)다.
왜 노예로 살려는가?
살아가면서 때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설상가상(雪上加霜)인 경우도 있다.
그런다고 흔들린다면 끝내는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데
무엇에 집착할 것인가?
짐을 내려놓고 쉬어라.
쉼이 곧 수행(修行)이요.
대장부다운 살림살이이다.
짐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수고로움을 면할 수 없다.
먼 길을 가기도 어렵고 홀가분하게 나아가기도 어렵다.
자유를 맛 볼 수도 없다.
쉼은 곧 삶의 활력소(活力素)이다.
쉼을 통해 우리는 삶의 에너지를 충전(充塡)한다.
쉼이 없는 삶이란 불가능할 뿐더러 비정상적(非正常的)이다.
비정상적인 것은 지속(持續)될 수 없다.
아무리 붙잡고 애를 써도 쉬지 않고서
등짐을 진채로는 살 수 없다.
거문고 줄을 늘 팽팽한 상태로 조여 놓으면
마침내는 늘어져서 제 소리를 잃게 되듯이
쉼을 거부한 삶도 마침내는 실패(失敗)로 끝나게 된다.
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삶의 정지가 아니라 삶의 훌륭한 일부분이다.
쉼이 없는 삶을 가정(假定)해 보라.
그것은 삶이 아니라 고역(苦役)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선율(旋律)이라도
거기서 쉼표를 없애버린다면
그건 소음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쉼은
그 자체가 멜로디의 한 부분이지 별개(別個)의 것이 아니다.
저 그릇을 보라.
그릇은 가운데 빈 공간(空間)이 있음으로써
그릇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단지 덩어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지친 몸을 쉬는 방(房)도
빈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지 벽을 이용하는게 아니다.
고로 텅 빈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유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삶의 빈 공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쉼은 더욱 소중하다.
붙잡고 있으면 짐 진 자요.
내려놓으면 해방된 사람이다.
내려놓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유와 해방을 쫓아내는 사람이요.
스스로 노예(奴隸)이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하필이면 노예로 살 건 뭔가?
"산은 날보고 산 같이 살라하고
물은 날보고 물처럼 살라하네."하는 말이 있다.
산은 거기 우뚝 서 있으면서도 쉰다.
물은 부지런히 흐르고 있으면서도 쉰다.
뚜벅뚜벅 걸어가면서도
마음으로 놓고 가는 이는 쉬는 사람이다.
그는 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살찌게 한다.
그는 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한다.
풍요(豊饒)와 자유를 함께 누린다.
쉼이란 놓음이다.
마음이 대상(對象)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되받는
관념(觀念)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몸이 벗어나는 게 아니고 몸이 쉬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 지어 놓고 그 지어놓은 것에 얽매여
옴치고 뛰지 못하는 마음의 쇠고랑을 끊는 것,
마음으로 벗어나고 마음이 쉬는 것이다.
고로 쉼에는 어떤 대상이 없다.
고정된 생각이 없고 고정된 모양이 없다.
다만 흐름이 있을 뿐이다.
대상과 하나 되는 흐름,
저 물 같은 흐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쉼은 대긍정(大肯定)이다
오는 인연(因緣) 막지 않는 긍정이요
가는 인연 잡지 않는 긍정이다.
산이 구름을 탓하지 않고 물이 굴곡을 탓하지 않는 것과 같은
그것이 곧 긍정이다.
시비(是非)가 끊어진 자리
마음으로 탓할 게 없고 마음으로 낯을 가릴 게 없는
그런 자리의 쉼이다.
자유(自由)와 해방(解放)
누구나 내 것이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 그 길은 쉼에 있다.
물들지 않고 매달리지 않는 쉼에 있다.
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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