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농고 설립 과정 개략>
충주농고와 충중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당연히 정부해서 만들어준 그런 결과가 아니였다.... 18금
- 충주에 끊임없이 만연되는 경쟁 또는 논쟁은,,,,
그래서, 여전한 일제 잔재이며, 그것을 충중에서 먼저 또는 같이
지금 고교평준화니 하는 서열파괴의 본래적인 교육 목적에 부합하는
생산젹인 논쟁과 쟁점을 이끌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희찬(41회) 생각)
충주에 중등교육기관의 설립은
1920년대와 30년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0년대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은 충주농업학교이다.
지금까지 보편적인 논의에서 충주농업학교는
충주공립보통학교 부설 충주간이농업학교
(1915. 4~1922. 2)의 후신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별개의 학교로 봐야 한다.
충주간이농업학교는 앞서
사립학교에서 본 호흥학교나 통명학교 부설 노동야학과
비슷한 측면도 있지만, 농업이 기반인 지역의
산업 경제 여건상 신규 이식 작물인 황색연초의
안정적인 생산과 보급을 위한
기술지도를 위해 운영된 성격이 짙다.
식민지 경제작물로서의 담배는
애초에 식민지 통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초세를 신설하면서 도입된 측면이 강하다.
이것은 과거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에
통치 자금을 만들기 위해 새로 도입한
여러 가지 세금의 부과 방식을
식민지 조선에 그대로 적용한 예에 해당된다.
그리고 충주농업학교 설립 경과를 정리할 때에
설립 운동은 1919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 충주농업학교 설립 추진 운동 전개 과정
충주농업학교는 당초에
실업학교(實業學校) 설립을 요구하며
전개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 구체적인 첫 기사가 1924년에 보인다.
이것은 1923년 12월 22일 충청북도평의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정운익(鄭雲益) 씨(충주) : 원래 충주는
역사가 특수한 지방으로 명치 42년(1909)[1908년]까지
관찰부(觀察部)가 재하더니, 청주로 이전된 후
대군회(大郡會)라 칭키 난(難)하나
청북(淸北)의 중심지로
동으로 제천, 단양의 물산이 차에 집주하고
한강(漢江)□□□로 상선(商船)이 래박(來泊)하며
서북(西北)으로 괴산을 인(隣)하고
북(北)으로 음성을 경계하야 4군의 생산물은
충주시장(忠州市場)에서 집산되고,
가지(加之)
조선철도(朝鮮鐵道)의 종점지지(終點之地)로
자동차가 연락되야 산간벽지라도 교통이 편리하니
파(頗)히 유망지지로 한갓 유감이 교육기관이
단이(但以) 보통학교 1개소로서
매년 졸업생이 경비 관계로
중등학교에 입학할 도리가 무하야
중도이폐지(中道而廢之)하고 허송세월함으로
유지 일반은 통탄에 불감하는 바이라.
비도(非徒) 충주 1군이라, 인접 4군이 여 충주로 동일하야
가위 동병상련하는 상태에 재하오니,
본부 당국에도 차 사정을 지(知)하고는
동전(同戰)이 불무(不無)할지요,
도 당국에서는 물론 찬조할 줄로 확인하오며,
건의의 범위가 다만 충주 1군만 포함함이 안이요,
사면 인읍을 통괄하야 현재 5군 각교의 학생으로서
16년도(1927)에 졸업할 자 5,367명의
전도를 인도코자 하는 목적이오니,
당국에서는 차를 심히 고려하시고 구제하시사 하면
충주에 실업학교(實業學校)를 설치하야
학기 5개년으로 교육케 하야 주시기를 희망하는
의미하에서 건의한 바이라 하니,
원구일이(原口一二) 씨(충주) : 정운익씨의 요구에 동정하야
간단히 일언을 술(述)코자 하는 바, 필요 사항은
본인이 다시 중언할 것이 없으나
충주에 실업학교 설치에 대한 수학년한은
3개년으로 하고
교사(校舍)는 수비대(守備隊) 철폐한 청사를 이용하면
1년 경비가 1만원이면 족할지니,
다대한 비용을 요치 아니하고도 경영할 방침이 유하다 하니
의장으로부터 차 건의를 의회에 평의하기를 구함에
제7 심의원 홍몽화(洪夢華) 씨(충주)는
충북은 충주가 중심인즉 실업학교를 증설하야
연년출래하는 졸업생을 수용함이 적당하다 하고
이 일이 있은 후 1924년 2월 17일에는
충주, 제천, 단양, 괴산군의 각 관계 군민 대표자
200여명이 집합하여 <충북 4군 대표 동맹대회>를 개최하여
실업교 설립을 촉구했고,
이 자리에서 청안-충주간 충북선 연장 문제 역시
주요 안건으로 다루었다.
다시 3월에는
음성군 인사도 참여하여 5군 대표자 중에
진정위원 14명을 선출하고 진정서를 도 당국에 제출하였다.
다시 ‘충주 우야(宇野) 좌평(佐平) 씨 외 269명,
제천군 한봉교(韓鳳敎) 씨 외 179명,
단양군 하성창(河性昌) 씨 외 498명,
음성군 조동환(趙東漁) 씨 외 179명,
괴산군 송병환(宋丙煥) 씨 외 290명의
내선인(內鮮人) 유지의 연서로써 도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대대적인 여론 환기 운동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던 실업학교 설립 운동은
1927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유지비(維持費) 문제로 사태가 심각하게 돌변하였다.
즉 당초 지방비에서 1/3을 보조하고
충주군 일원에서 2/3를 판비(辦備)하기로 약속되었는데,
이것을 도 내무부장이 파기함으로써
도평의원의 사임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현역 의원이 일괄 사의를 표하려는 움직임이 보임에 따라
도지사의 회유책이 전달되며 완화되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1928년으로 해를 넘긴 실업학교 설치 문제는
대규모 충주군민대회 개최와 이어서
호서 기자대회의 정식 안건으로 채택됨으로써
치열한 여론전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 당국은 기지검사(基地檢事)와 동시에
기지는 충주 군민의 부담으로 되어
27,000원을 기금으로 갹출하였으므로
1928년에는 반듯이 실현을 언약해 오던 중에
도 당국이 돌연 예산을 마련할 방도가 없다는 구실로
약속을 파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충주면민대회에서 전형위원을 선출해
도 당국에 책임을 묻는 동시에
충주면 학교비 학교조합 각 기관에 있는
공직자 총사퇴를 단행하는 초강수로 대응하게 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도 당국에서는
탕촌(湯村, 유무라) 내무부장을 급파해
해결책을 내놓겠다는 약속과 함께
공직자 총사퇴가 철회되고,
다시 1929년도에
청주사범학교 폐지에 대체 교육기관으로
충주에 실업학교 설치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 결과 1929년에 드디어
충주농업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하게 되어
지방비 예산에 계상하여
1930년에 개교 결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총독부의 설립인가가
1929년 11월 13일에 결정되었다.
2) 초기 개교시의 학교 규모 등
1929년에 계획된 학교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교기지(校基地) 5,627평 ◀ 건물 627평 ◀ 운동장 3,000평
◀ 작업 1천평 ◀ 교재원(敎材園) 600평 ◀ 실습지(實習地)
답(畓) 5,000평 전(田) 7,500평, 임지(林地) 75,000평
◀ 계 87,500평
이것이 현재 충주시 봉방동을 중심으로 위치했던
충주농업학교의 개략적인 규모로,
임지(林地)의 경우는 위치를 추가로 확인해야 한다.
학제는 3년제로서
당초 요구했던 5년제 중등교육기관에
조금 못미치는 결과였다.
충주실업학교 청원이 있었던 1924년에
청주실업학교는 수업년한 2년 연장을 신청해
곧바로 시행되었다. 하지만 충주농업학교는
3년제로 결정되어 출발했고,
<실업학교> 규정을 개정해
청주공립농업학교로 바꾸는 관제개정을 추진하였다.
수업료는 1원으로 하고
시험수수료도 1원이었는데,
이는 청주농업학교의 1원 50전과 2원에 비해
낮은 것으로, 소액인 이유를 동교의 목적에 감(鑑)하여
자연 차별한 것이라고 한다.
3) 개교와 그 의의
충주농업학교는 10년간의 긴 싸움 끝에
1930년 5월 5일에 개교식을 거행했다.
10년간의 끈질긴 상황을 돌이켜보면
식민지 상황에서 교육에 대한 치열한 요구와
그에 따른 식민 통치 당국의 정책 실행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개설을 결정한 시기가
충북선 연장이 충주까지 이어진 상황이었고,
일제의 중요 정책 변화중의 하나인
산미증산계획이 실행되던 시점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수업료와 시험수수료 등이
청주농업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을
‘동교의 목적에 감(鑑)’한 것이라는 단서는
농업 생산량 증대를 위한 전문 일꾼 양성에
목적한 것이 아닐까 예상해 본다.
그리고 이렇게 오랜 기간을 구걸하다시피 해서
학교가 하나 만들어진 과정을 청주와 비교해 보면,
이미 청주는 1911년에 청주실업학교를 개설하여
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1908년에 청주로의 도청 이전이
있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이미 1905년에
관찰부 폐지설이 있어서 충주군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이 있었고, 1906년의 충북재무관 보고가
청주에 대한 예찬론 일색의 뭔가 심상찮은 움직임과
궤를 맞춰 진행된 일종의 비밀스러운 작업이
도청 이전이라는 하루아침의 느닷없는
결과로 도출되었다.
그 이후로 학교 설립과 같은 기본적인 노력조차도
지역세의 위축에 의해 늦어지고 더뎌져
20세기 전반기의 변화에 대응하고
지역의 인재를 양성함에 있어 뒤처지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한 길고 지루하며 끝이 없는 싸움의 한 장면이
일단락된 것이 충주농업학교의 개교이다.
이러한 결과에 이어 충주 지역민들은
5년제 정식 중학교 설립 청원에 돌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