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37:1–24
[서론] 뉴턴이 발견한 질서, 그러나 창조하지는 못했다
아이작 뉴턴은 만유인력을 비롯해 인류 역사에서 자연의 질서를 가장 깊이 탐구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과가 떨어지는 만유인력 현상에서부터 천체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자연이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와 법칙 안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러나 뉴턴이 한 일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지 자연의 법칙을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욥 37:15). 인간은 자연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번개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고, 비가 내리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답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 왜 제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곧바로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폭풍 가운데 나타나셔서 창조세계에 대해 질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폭풍 가운데서도 들려온다
본문 2절은 “하나님의 음성(콜)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콜(קוֹל)은 '소리, 음성'이라는 뜻입니다. 문맥에 따라 '천둥소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엘리후는 폭풍과 천둥을 바라보면서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콜)을 듣습니다. 중요한 것은 폭풍이 없어져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폭풍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욥에게 폭풍은 고난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폭풍은 결국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가 됩니다.
이것은 복음서의 풍랑 사건과 연결됩니다. 제자들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막 4:41). 욥기에서는 하나님이 폭풍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폭풍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폭풍이 있습니다. 가정의 폭풍, 경제적인 폭풍, 관계의 폭풍, 교회의 폭풍, 국가와 사회의 폭풍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폭풍이 없어지지 않은것이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폭풍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폭풍을 없애 달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폭풍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둘째,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오묘함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 14절은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펠레)을 깨달으라(야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야다(יָדַע), '알다'입니다. 욥은 알고 싶었습니다. 왜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친구들도 욥의 고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엘리후도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인간에게 묻습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알고 있느냐? 또한 본절에 표현된 '오묘한 일'과 본문 5절의 "하나님은 놀라운(펠레) 음성을 내시며"에서 펠레가 중요합니다. 펠레(פֶּלֶא)는 '놀라운 일, 기이한 일,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오묘한 일'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인간의 지식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아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요구합니다.
현대철학에서도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주제입니다. 특히 인간은 세계를 관찰하고 설명할 수 있지만 세계의 궁극적 의미를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뉴턴의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뉴턴은 우주의 질서를 밝혔지만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DNA를 연구하고, 우주를 관측하고, 인공지능을 만들지만 여전히 질문해야 합니다. “왜 세계가 존재하는가?” “왜 인간은 존재하는가?” “고난 속에서도 삶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과학은 이런 질문을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문을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경이로움 앞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은 하나님의 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그러므로 성도의 믿음은 “모든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설명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기도했는데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의롭게 살았는데 고난이 올 때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일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나는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것이 '야다'의 한계를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셋째, 인간의 지식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본문 23–24절이 결론입니다. 23절 “전능자(샤다이)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여기서 샤다이(שַׁדַּי), 곧 '전능자'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24절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야레)하고…” 여기서 야레(יָרֵא)는 '두려워하다'에서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본문 37장의 최종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다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현대인은 인간의 이성을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내가 이해해야 믿겠다.” “내가 설명할 수 있어야 받아들이겠다.” “내가 통제할 수 있어야 안심하겠다.” 그러나 본문은 인간에게 묻습니다. “네가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뒤 제자들은 놀라며 묻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바로 여기에 본문의 신약적 완성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은 폭풍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폭풍을 다스리신다. 신약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폭풍 가운데 해야 할 최종적인 행동은 절망이 아니라 경외와 신뢰입니다.
[결론]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을 신뢰하라
아이작 뉴턴은 자연의 질서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창조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많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알아도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가르칩니다.
ㆍ폭풍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콜, קוֹל)을 들으십시오. 고난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ㆍ내가 다 알(야다, יָדַע)수 없는 오묘한 사실(펠레, פֶּלֶא)을 인정하십시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ㆍ전능하신(샤다이, שַׁדַּי) 하나님을 경외(야레, יָרֵא)하고 신뢰하십시오. 우리의 지식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없어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폭풍을 이해하지 못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폭풍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제가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합니다.” 이것이 야다(알다)의 한계를 넘어 야레(경외)로 나아가는 믿음이며,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에게 주는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