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2003학년도 모의 논술고사 (3차) 예시답안
일요일 없는 세상, 이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일요일이 서구의 요일개념에 그리스도 문화가 결합돼 만들어진 휴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한 세기도 안되는 사이 서구문명에 우리가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 우리는 하나의 기준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 하다. 이제는 이 기준이 단순한 서구 문명에 대한 동경이 아닌, 꼭 준수해야 하는 표준으로까지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만의 일은 아니어서 세계 곳곳에서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화가 서구 사회가 이룩해 낸 전형들을 다른 문명권과 나라에까지 강요하는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명의 충돌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세계화는 당연 다양성의 파괴자일 것이다. 그러나 문명의 충돌을 논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세계화는 또 다른 문화의 창조자일 수도 있다.
제시문 (가)는 인간 가치의 원천이 문화이며 이러한 문화가 지역 토착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나)글의 필자는 문화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카트만두의 문화를 예로 들며, 카트만두에서 잃어버린 유년시절을 찾은 듯하다고 한다. 다양성과 원형. 극명히 대조되는 어휘이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는 공통점이 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서양의 문화는 같지만, 각각의 모습은 번제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하는 다양성을 갖는 것이고, 이를 서로 업신여기지 말고 존중해 줘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모든 나라에 민속춤의 문화가 있지만 아일랜드와 이곳 한국의 땅에서 벌어지는 춤판이 각기 다르듯이 말이다. 이런 점에서 (가)와 (나) 글은 모두 세계화 시대의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는 문화의 획일화 현상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기우가 아닐까.
역사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중 하나가 동서양 문화가 교류한 흔적이다. 비단길을 따라 중국의 4대 발명품이 전해져 서양과학이 발전한 것도, 일본이 네덜란드의 난학을 받아들여 실용학풍을 세우고 고흐의 그림에서 일본양식이 나타나는 이유도 동서양의 문화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동서양 문화교류는 지속되어 가고 있고 우리는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들에게 우리 문화를 이식하고 있다. 한국에 불고기 버거가 등장하고, 미국 스타벅스 커피숍이 인사동에서 문을 여는 것이 이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문화의 충돌은 전쟁과 파괴를 유발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문화를 번성시키는 새 문화 창조의 번뜩임이 아닌가.
한국의 문화가 말살되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우리 문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외국과 교류없이 지켜왔던 것처럼 전통문화를 그대로 이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변화하는 조류에 맞춰 한 세기를 살다보니 이제는 일요일도 우리의 문화가 되었고, 아파트도 한국의 문화가 되었다. 일요일에 가족과 친척들이 모이고, 3세대가 함께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선을 보인다. 한국 문화는 고수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숨쉬고 살아가야 할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을 걱정해왔다. 그러나 우리 몸에 맞게, 우리 마음에 맞게 변형시켜 살다보니 나름의 새로운 우리 문화를 창조해 왔다. 세계화의 거센 조류를 걱정하며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헬레니즘 문화보다 더 융성한 문화로 기억될 한국의 문화를 생각해 보면서 말이다. 세계화는 더 이상 제로섬 싸움은 아니다.
(예시답안 2)
흔히 21세기를 지구촌, 세계화, 정보화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실로 최첨단 과학기술의 발달은 세계를 '하나의 마을'로 인식하게 할 정도로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좁혀 놓았다. 21세기의 지구촌에서는 문화적 교류 역시 그 어느 때 보다 활발하게 일어난다. 헐리우드 영화는 전세계에서 동시에 개봉되고, '오페라의 유령'을 영국에 가지 않고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가히 문화의 확산과 통합의 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의 확산과 통합이 항상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외국문화를 일방적으로 습득하고 모방하기만 한다면, 자칫 우리 문화의 정체성도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제시문은 한국문화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문화 교류는 진정한 의미의 양자간 혹은 다자간 교류가 아니라 문화의 상업화라는 시대적 경향속에서 비서구세계가 서구세계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 모방하는 과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문화의 상업화, 서구문화의 확산과 획일화에 대해 (가)글은 문화적 영역에서 '온전히 남아 있던 것을 해체하고 재가공하고 포장하고 판매하기' 보다는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둔 진정한 의미를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나)글에서 '문화의 자연(원형)을 복잡한 장식으로 치장하기보다는 대지에 심고 손으로 가꾸어야'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제시문의 주장이 우리가 흔히 듣는 '지역문화 육성', '다양한 문화 컨텐츠 개발'과 같은 구호와 다른 점은 인간 내부의 근본적인 문화적 원형의 중요성과 그것을 총체적으로 경험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역설한 부분이다. 시각을 우리 내부로 돌려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개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두 글은 모두 문화가 '가장 깊은 인간의 교류'를 통해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성숙해 가는 것'이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문화는 즐기기 위해 만들어지는 달콤한 '과자산'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가치와 정체성을 형성해 주는 소중한 '농작물'과 같다고 지적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관점이 한국문화의 미래에 대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타의적이든 자의적이든 간에 개화기 이후 한국의 근대 역사는 서구의 문화와 제도가 대량으로 유입되는 과정이었다. 문화의 이동 자체가 일방적이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과 같은 제3세계의 문화는 거의 고갈되어 왔다. 이는 앞으로 우리 문화를 더욱 보호하고 가꾸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국가의 문을 안으로 닫아 걸고 우리의 것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는 한 국가가 더 이상 독자적으로 생존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따라서 21세기 한국의 문화는 자신의 것을 보호하고 개발함은 물론 남의 것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생명력 있는 우리 문화의 텃밭이 필요하다. 한국적인 것, 한국인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원형'을 찾아 개발하는 내부의 노력이 절실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제시문이 말하는 '지역에 기반한 문화'나 '문화의 원형'은 세계화 시대에 처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