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은 밤이지만 문화재가 곁에 있어 주위로는 가로등의 밝은 불빛이 있고
밤을 잊은 사람들 소리에 눈은 감고 귀는 반뜨고 그렇게 침낭 안에서 새우잡이로 지내다가
새벽 1시가 훌쩍 넘긴 시간에 일어나 자리를 깨끗이 정리한다
몸은 천근만근이요 두 다리는 묵직하고
발바닥에 자리 잡은 미더덕(물집)은 고통이란 말썽을 뇌리 깊숙이 전해주었지만
별 반응이 없자 지쳤는지 별로 아프지 않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시간 쌀쌀한 느낌마저 드는데 어디 가서 따뜻한 차 한잔 마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날까지 354km 진행
술정리 동 삼층 석탑 (옛 송림사 통일신라시대 사찰)
탑이란 하늘을 보며 우뚝 솟아 있는데 부처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유골이 있건 없건
상징적으로 부처님을 모신곳으로 여긴다.
텅 빈 들판처럼 보이지만 여기가 바로 통일신라시대의 송림사란 걸 말없이 전해준다
창녕 향교
향교는 지역 사회의 인재를 양성하고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지방의 국립 교육기관인데
조선시대 전국 팔도에 328개 정도 향교가 있었고 남한에만 234개의 향교가 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담장에 붙어 까치발로 안을 들어다 본다면 공자께서도 주무시다가 놀란 소리로
너는~잠도 없냐!~며 한마다 하실 것 같다.
억세게 운 좋으면 공자께서 차 한잔 하라고 하실지도 모르고
향교에서 걸음을 창녕읍 교리마을 방향으로 옮겨가며
산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은 조용하기만 하고
지척에 둔 어둠이 나를 점점 작게 만든다
어쩌다 만나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들도 하나, 둘 뒤로 사라지고
점점이 보이는 마을 불빛은 더욱 외롭고 초라하게 만든다
이 길은 나와는 무슨 인연이 있었던가
서글프게 우는 소쩍새란 녀석은 왜 새벽마다 찾아와 옆에서 울음을 터트리는지
몇 해 전 4월 봄날 소풍 떠나듯 먼 길 떠나신 아버지 생각에
월명사가 지었다는 제망매가를 읊조려 본다.
죽고 사는 길 예 있으매 저하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다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
새벽과 어둠은 뼛속까지 찾아와 있고
마을에서 벗어나니 새로 생긴 왕복 4차선 5번 국도와 옛 5번 국도가 옆으로 같이 이어진다
고암면 원촌리의 어은하 저수지 앞을 지나며 금방이라도 뭔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올 것 같은 분위기고
이름부터 특이한 어은하 저수지에는 용왕과 인어의 사랑 이야기와 바다에 살아야 할 청어란 녀석도 이곳에 살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전한다.
유서 깊은 어은동(원촌리)은 고려시대 국가에서 관리하던 숙박시설인 청산원이 있던 곳인데
한양과 통영을 오고 가던 요충지였던 곳이라고 마을 유래비에 써두었다
12지 저수지를 지나 대합면에 들어와
일제 강점기무렵인 1914년에 대곡면과 합산면이 합쳐져 대합면이라 불리던 곳
이른 시간이지만 들(田) 일 하시는 분들이 많아 불 켜진 식당이 한 곳 있어 들어가서 양해를 구하니
아침밥을 준비해서 한상 가득 들고 나오신다.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꿀맛 같은 아침밥 이 길을 나서며 이른 아침에 아침밥은 처음인 듯하다.
스스로 익어 가기만 기다리는 보리밭
세상에 실력으로 되는 게 있고 그렇지 못한 게 있다면 그중에 농사일도 그중의 하나가 아닌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점차 영글어 가는 보리밭을 지나며 생각해 본다.
살다 보면 잘 되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잘 안 되는 일도 없고
길을 걸으며 머릿속에 넣었다가 늘 꺼내서 파먹는 짧은 지식들
이른 아침에 따듯한 밥을 먹었더니 힘이 나고 걸음도 가벼워진다.
좌, 보리 우, 마늘밭 사이에난 도로 길가에 이팝나무가 끝없이 자리를 잡았고
대구가 지척이라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길 끝에는 과연 어떤 즐거움이 기다릴까
비슬산 자락의 비둘산이 보이고 그 옆에 티피산이 보이는데 그사이로 차천따라 마늘밭이 끝없이 이어지고
부지런한 농부님들이 포근한 햇살과 함께 이른 아침에 마늘밭에서 일하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계시면 몇 가지 여쭈어 보겠는데... 입이 근질근질할 시간이다
댕댕이 한 마리가 아스길을 전세를 내셨나
어슬렁어슬렁 마중을 나와 주셨고
밤새 동네의 안전을 책임지셨나 의기양양 어깨가 아주 무거워 보이는데
아니면 이쁜 암컷 댕댕이와 꽁냥 꽁냥 노닐다가 집으로 가시나
방향을 현풍 향교로 잡고 가는 길에
마치 어느 배경 좋은 집안의 무덤 같이 생겼는데 , 조선 영조 6년에 만든 현풍 석빙고 모습이다.
윗부분에 통풍구가 보이지만 출입문은 여기서는 보이지 않고 반대쪽에 자리하는 것 같다.
석빙고와 얼음 그리고 물그릇
그릇이 생기기 전에는 누구나 두 손으로 물을 떠 마셨거나 땅바닥에 엎드려야 했지만
그릇이 생기고부터 연장자나 손위 순서로 정해져 졸(卒)은 물 뜨러 가거나 가장 나중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꽁꽁 언 얼음은 누가 먹었나...
영조시대에 살았다면 한겨울을 제하고 나면 얼음은 구경도 못했을 것 같다
석빙고 위의 작은 언덕 같은 산에는 신성한 땅임을 알리는 붉은 홍살문이 네 방향에 자리 잡은 제단으로 사직단이라 부른다.
홍살문 하나만 있어도 신성한 땅임을 알리는데 동서남북 네 곳 방향이라니 삼국사기, 고려사, 신동국여지승람에도 고증된
민족과 종교를 초월한 국난 극복을 이기고자 만든 제단이다.
옛 흔적은 사리지고 없지만 사직단의 기운이 사방팔방 널리 퍼지기를 기원하며
발걸음을 향교로 이어간다.
현풍 향교 지금은 공사 중이라
전형적인 전학 후묘(前學後廟)의 배치로 된 곳이다.
공사 중
어느 분들의 공덕비인지
대구시 달성군 현풍읍은 뒤로는 유가읍이 자리하는데 네 명의 임금을 배출한다는 비슬산(琵瑟山)이 있고
앞에는 드넓은 토지와 낙동강과 그리고 데니산을 지척에 두고 있다
가까운 곳에 누나집이 있지만
고향집 어머니께 찾아간다며 같이 가자고 한다.
며칠 전에 다녀왔으니 형님과 두 분이 같이 다녀오시라 하고 낙동강을 건너 고령군 개진면으로 향한다.
이곳 현풍에서 길은 두 가지인데 현풍, 논공읍 위천리에서 낙동강을 건너 다사면 송곡리, 배만재, 성주군 용암면까지 20km로
현풍, 고령 개진면, 용소마을, 용암고개, 용암면까지 20km로 두길 모두 비슷하다.
길은 가능한 직선길 원칙이라 용암고개로 진행한다
고령군 개진면 부리마을에서
부리마을 앞 부동 삼거리 불량 감자네 아홉 식구들
숫자 0은 가장 작거나 가장 큰 숫자이고
숫자 9는 꽉 찬 의미겠죠
솥에 넣고 푹 쪄서 쇠젓가락으로 콕 찍어 먹으면 좋으련만
길가에 앉아 계시는 할매분께 예전에 현풍에서 상주로 가던 길이 어디냐 여쭈어 보고
이리로 상구 가다가 고령군 성산면 가기 전에 새터만데이 고개와 지릿재 고개 두 개를 넘어야 한다고 하신다
마을을 지나며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 드신 할매분들이라 앞으로 10년 후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며
사람과 길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본다.
길이란 오솔길에서 수렛길 그리고 점차 직선화되고 넓어진 길
이제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오솔길은 대부분 사라졌고
옛사람 역시 오솔길처럼 그렇게 사라지고 없다
생리마을을 지나며
이곳은 고령군 개진면 새터만데이 고개 넘으면 성산면이다.
현풍에서 성주로 가는 길인데 지금은 포장이 되어 좋긴 한데
그늘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고 아스길에 열기는 뜨겁고 오르막길이 잠시 이어진다.
길가에 계시는 할매분과 밀린 수다 좀 떨고
성산면 땅에 들어와 본 새터만데이
성산면 오곡리 함안조씨 집성촌마을을 지나
정자에 잠시 누워 열기를 식혀본다
좌측 효자 조성인 효자각인데 비석은 있고
우측은 또 다른 지붕 안에는 비석은 없으나 편액은 걸렸는데
진주하씨와 나주임씨 효열비로 병간호하던 남편이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르고 자결하셨다는 분이다.
특히 진주하씨는 남편(조성필)이 사망하자 3년상을 치렀는데 이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또다시 3년상을 치르고
남편 무덤가에서 자결하셨다고 한다.
이후에 지역의 유림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정려각을 세웠다고 전한다.
.지릿재로 올라가는데 도로갓길에 꼬마자동차가 길가에 나와있다
아직 새것인데 누가 버린 듯
저놈이라도 타고 갈까 했으나 바퀴가 허공에 떠있어 굴러가지 못한다.
지릿재로 오르며 본 낙동강과 멀리 가장 높은 곳은 비슬산
그늘도 없고 산정에서 느끼는 더위와는 차원이 다른 아스길 더워
지나온 지릿재와 아스길
언제나 길을 내 발끝 앞에서 펼쳐지고
뒤꿈치로 사라진다.
고령군 성산면 성산대교 인근 식당가에서
잔치국수 하나는 안되는데 몰골이 좀 불상했던지 주인 할매께서 국수하나 해 주셨고
아드님은 콜라 한 병 서비스로 내어 주셨습니다.
더운 날은 역시 잔치국수라며 기분 좋게 먹고 나와
이곳에서 다사면 송곡리 배만재로 해서 성주군 용암면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용암마을을 지나 용암고개를 넘어 용암땅으로 가느냐 인데
일단은 직선길 원칙이라 용암마을로 가서 용암고개를 넘는다.
이놈이라도 타고 가야 하나
운교마을을 지나가며
잠시 쉬어가면 좋을듯한 느티나무와 정자가 보이고
용암고개(고령 4터널 위)로 올라가는 길에
지맥길 능선인 용암고개
용암면 선송마을을 지나
염농산제언 공덕비
1919년 3,1절이 있던 해 홍수 피해가 심한 용암면 들판에 염농산이란 분이 사재를 털어 두리방천 둑을 쌓아 홍수를 막고 새내(新川)들을 개척하여 농토를 학보해 준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공덕비
염농산은 기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각고의 노력으로 축척한 재산을 민족과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희사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성주땅 용암면에 들어와
더버라
지나는 길에 편의점 앞에서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오신 분들과 이야기 나누는데
앞에 머리 두건 하신 분은 아가씨로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며 저한테 결혼했냐!~고
ㅎㅎㅎ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연락처를 주셨어 저장해 두었고
성주군 용암면에서 선남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리티재를 넘어야 하는데
인근에 중부내륙 고속도로상에 남성주 참외 휴게소가 있으며
여러 가지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다.
마치 공룡의 몸통 같은 비닐하우스에는 참외가 노랗게 질리도록 익어가고
선남면 장학리 마을을 지나
선남면과 성주읍을 가르는 별티재를 지나며
산이던 물이던 모두 다 사람 살리는 데로 모여드니 드디어 참외나라 성주읍이 보인다.
성주를 가운데 두고 북으로는 월항, 초전이 있고
서쪽으로는 대가야, 박진, 금수, 가천,
동쪽으로는 선남면
남쪽으로는 수동면과 용암면이 자리하는데 다들 아시겠지만 성주는 노란 참외의 땅이다.
고운 선생이 홍류동 계곡에 짚신만 벗어 놓고 홀연히 신선이 되었다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참외나라 성주
서쪽은 81.352권의 팔만대장경을 모신 해인사가 자리한다.
성주에 들러 참외를 사고 해인사에 들러 팔만대장경을 구경한다면 딱 좋을듯하다
용트림하듯 한 바퀴 크게 돌아가는 도로길
지석묘도 하나 보이고
어느 가정집 심술궂은 어르신께 미움을 받았는지
도로가에서 대단한 생명력을 가진 느티나무가 노랗게 질린 듯 서 있다
밑 둥치를 1m 이상 껍질을 벗겨내고 그것도 부족했던지 그 위에 오일스텐 기름을 칠해 두었다
하지만 , 느티나무는 보란 듯 아주 잘 살아 잎을 피우고 가지를 아래로 늘여 트렸다.
가지마다 물의 기운을 올려 줘야 하는데 얼마나 살까 싶지만
꼭 살아남아라며 합장하고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참외가 시원찮아 별로라고 하셨는데
성주 참외 많이 사드시기 바랍니다.
수도산에서 금오산으로 향하는 지맥길 고당산 동쪽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와 성주군 월항면에서 백천에 합류하는 25km의 하천인데 이름은 이천이다
시간 나면 한번 가보고 싶은 하천으로 기억해 두고
오늘은 참외나라 성주시내에 주막집을 찾아들어 봇따리 던져두고 읍성과 향교에 마실 나가듯 다녀온다.
성주향교에 도착하니 문은 닫혀있고 담장 너머로 사진을 찍으려니 향교를 관리하시는 어르신께서
어디서 왔냐며 물으신다.
저짜서 와서 이짜로 간다고 말씀드리니 대단하다며 향교 문을 열어 주신다.
이곳에 들어가니 예전에 예기 속의 중용글귀 교육이라도 받았던 것처럼 명륜당이며 대성전을 찾아가고
성주 향교는 좌학우묘(左學右廟)로 다른 향교와는 다른 구조를 하고 있는 향교이다.
성주향교는 태조 7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또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나 선조 38년에 대성전부터 다시 지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처마 아래에 기둥 위에 다포(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만든 건축 양식)를 올렸는데 사찰 대웅전에
쓴 건축 양식이며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서 서울의 문묘, 익산향교 대성전, 대구향교 대성전과 함께 보기 드문 양식을 하고 있다.
공자께서는 죽음 이후를 생각해 보셨나 모르겠는데... 유교에는 삶만 강조하였고 죽음 이후는 없는 것 같다
사람이 태어나서 늘 하나의 걱정거리가 있다면 아마도 생로병사 중 가장 무서운 죽음 이후의 일들이다
대부분의 종교사상들은 죽음을 극복하는 문제와 죽지 않고 사는 문제, 또는 천국이냐 지옥이냐 아니면 극락이냐 천국이냐 문제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공자가 쓴 논어에는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또 "사람도 모두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공자는 살아 있을 때 잘하자 그 뒤 죽음이란 자연스레 찾아오는 것이고 일단은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삶이 먼저다
그리고 공자가 해설서를 썼다고 하는 우환(憂患)을 대비하고자 만든 주역(周易)에도 대부분 생명을 예찬했지만
죽음에 대한 말씀은 전혀 없으셨다.
이러함에도 조선의 국왕들은 자식이 죽거나 비(妃)가 운명을 다 하였을 때 과연 유교식대로 앉아만 있었을까
아니라면 명산대찰(名山大刹)에 들어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빌거나 내 생에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을까
죽음이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
이런 날은 어디 가서 불로장생 할 수 있다는 막걸리, 파전으로 한잔하는 게 장생불사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하며
공자의 대성전을 나온다.
성주읍이 보이고 그 뒤로 이천을 건너면 대황산과 칠봉산 그리고 멀리 정견모주를 산신으로 모시는 가야산이 서있다.
늦은 시간이지만 향교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지킴이 아저씨께 감사인사 드리고 성주 읍성으로 향한다.
성주 읍성 북문인 성지문(星智門)
성주(星州)의 성(星) 자와 사람이 갖추어야 할 5가지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북쪽을 가리키는지(智)를 넣어
성지문이라 쓴듯하다
성주는 가야 12국 중에서 성산가야의 옛 터전이고
가까운 선석산 아래 세종대왕 자(子)의 태실을 모셔둔 곳이기도 하고 참외, 수박으로 유명한 고을이다.
성터 밖에는 옛 성주 목사, 경상도 관찰사등을 하셨던 분들의 선정비나 불망비가 20여기 세워져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것을 관리 차원에서 한 곳에 모셔둔 것으로 보인다.
불망비나 선정비에서 보듯 성주는 선조 때 9년간 경상감영이 있던 곳이기도 했고
참고로 경상감영은 서라벌인 경주-사벌국인 상주-성주ㅡ대구 달성군ㅡ안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구벌인 대구로 옮겨
지금까지 대구를 지킨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최종 이전한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경상감영의 정청(政廳)으로서 대구에 경상감영이 정착하게 된 선조 34년에 이곳에 세운 건물이다.
20여기 선정비들 중에서 가장 멋지고 큰 것 3기
좌측 성산 기공비: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성주목사 이보혁을 기려서 세운비석
가운데 남궁공 선정비:조선 중기 성주 목사를 지낸 남궁공숙 전정비
우측:조선 후기 성주 목사를 지내셨던 오공도일 영세 불망비
성안에 자리하는 성주사고지 실록관
조선 전기 때 사고는 춘추관, 전주, 충주. 성주 네 곳에 보관했는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불타 버렸고
광해군 때 전주에 있던 실록 본을 필사해 춘추관, 오대산, 태백산, 마니산, 묘향산 다섯 곳에 보관했다
읽어 보시고
오늘 끝마치는 날인데 끝내기는 싫고
새벽에 일어나 발바닥 깊숙하게 전세 내듯 자리 잡은 미더덕 문제로 진통제 하나 먹고 출발한다.
새벽 01시 조금 넘은 시간 성주 군청 앞을 지나며 초전면과 월곡저수지를 지나 김천시 농소면 경계지역인 활기재 고개로 향한다.
발바닥과 어깨 통증이 심해서 진통재 몇 알 삼키고
날이 밝을 무렵 진통재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그런가 통증 없이 걸음 할 수 있어 좋고
초전면에서 김천시 농소면으로 올라가는 913번 지방도로
우측은 사드 방패막이가 자리하는 군부대가 자리하고 그곳 계곡에서 성주군 초전면을 지나 낙동강으로 향하는 백천 발원지가 있다.
수도산에서 구미 금오산으로 이어지는 지맥길인 활기재가 바로 앞에 자리 잡아 있고
이제 김천땅에 도착해서
김천땅은 남에서 북으로 흘러와 다시 동쪽으로 휘어져 흐르는 감천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오는 직지산천이 있고
북쪽으로는 고대국가였던 감문국 속문 산성을 품은 백운산
동쪽으로는 금오산 자락을 품었고
남쪽에는 숙종의 비(妃)인현왕후의 전설을 간직한 청암사를 품은 수도산
서쪽에는 천년고찰 직사사를 품은 황악산이 웅이에서 초점까지 백두를 거느리며 김천을 지켜 준다.
활기재에서 한 장 담고
농소면 노곡리 어느 농장인데 하천가에서 가지고 온 돌을 쌓아 정원을 꾸며 놓았는데
나름 이쁘게 꾸며 놓았다
노곡리 마을 안으로 들어와
작은 도랑을 사이에 두고 음지와 양지로 구분해서 사는 동네인 듯
농소면 입석리에 들어서니 두 분 장군께서 이곳은 처음이지 라며 크게 웃으시고
입석리 석불 입상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번 과거에 꼭 급제하도록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 길을 걸었던 조선의 수많은 양반들
부처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고 아주 사소한 과거 장원급제를 빌어봤을 것 같다.
이곳 석불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약사여래불이다.
오래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허리 아래까지 시멘트로 묻어 버렸다는...
밤마다 내 허리 돌리도 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어렴풋이 들린다는...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이곳에서 상주시 공성면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혁신도시-개령면 -감문면 937번 지방도-공성면 이화리-공성면까지 직선거리 23km
또 하나는 농소면-김천교-김천역 뒷길-김천시청-김천 일반 사업단지-어모면-경상대로(옛길) -공성면 23km
거리는 둘 다 비슷하다
일단은 김천역으로 가서 만나볼 사람도 좀 만나보고
김천시 농소면을 지나고
오늘 가는 길에 김천에 사시는 새벽님과 대전에서 구미에 일이 있어 가시는 콜리님과 동강님도
잠시 만나기로 한다.
모래강인 감천은 수도산 서봉 서쪽에서 발원해서 대덕면 -지례면 -구성면- 김천시-계령면- 구미시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맑은 하천이다.
모래강인 감천을 건너가며
김천에서 문경이냐 추풍령이냐
김천에서 추풍령이나 괘방령을 넘는 대간길은 충청도 영동-황간-옥천-신탄진-청주-천안삼거리길이다.
삼남대로 땅끝에서 강진,영암,나주,장성,정읍 전주까지
통영에서 고성,사천,진주,산청,함안,남원,임실 전주까지 거리는 230 km로 거리가 비슷하고
영남대로 부산,밀양.청도,대구,선산,상주까지 210km, 거리
통영, 고성, 함안, 창녕, 현풍, 고령, 성주, 김천, 상주에서 만나는 곳까지 거리는 250km로 통영에서 오는 길이 조금 더 길다
먼 길 찾아오신 콜리님과 동강님을 만나서 잔치국수 맛나게 먹고
두 분은 구미로 향하고 저는 새벽님을 만나러 김천 시청 방향으로 간다.
새벽님을 만나서
길을 걸으며 어느 지역을 가던 친분을 쌓은 분들과 연락을 하고 만나고 헤어진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고 그러다 보면 주름이 하나 둘 깊어만 가는데
그동안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도 계셨고, 자주 찾아가 봐야 함에도 발길이 향하는 곳이 너무 더디다 보니
어쩌다 지척에 지나감에 만나지를 못해 마음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다.
모두 다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김천 시청 앞을 지나
하루 한 끼 혹은 두 끼로 왔더니 살은 4kg 도망가고
뱃살은 어디 갔는지
김천시 어모면 앞을 지나
달고 시원한 어모배
그늘 없는 회색빛 아스길
걸음이 느리다.진짜 느리다
가끔 지나가는 차량들이 옆에 서서 어디까지 가는지 몰라도 테워 주시겠단다.
걸어야 끝나는 게임이라 감사한 마음만 받겠다며 정중히 사양하고 배꼽 인사 드린다.
멀리 보이는 곳 동지골산까지 가면 상주시 공성면인데
끝날 때가 다 되어가니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친다. 464km 지점
남은 거리 20km 정도 남은 것 같다.
미더덕이 발바닥 깊이 자리 잡은 탓에 고통이 심하여
김천 시장에서 사 온 만원짜리 슬리퍼로 갈아 신었는데
지압 슬리퍼인지 미더덕이 고통이 심하다며 빨리 버리란다.
마음이 시키는 건 뭐든 빨리해야 만수무강의 지름길이니 길가에 냉큼 모셔두고
가는 길에 미루나무가 반기듯 서있고
너무 더워 그늘에 잠시 앉아 있다가
산에서 더위는 찜질방 수준이라면
도로가의 더위는 살을 테우는 느낌이 든다.
여남재
김천땅에서 상주땅이 바로 코앞이다.
도로 가운데 보이는 산은 백두대간 백학산과 조망 하나로 본다면 국내 어느 산과도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갑장산
그 사이 병성천이 흐르는 곳에 터를 잡은 어여쁜 아가씨를 닮은 서산이다
상주시는 남쪽에서 북으로 흘러와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맑은 병성천이 자리하는 곳이며
임진왜란때 북천 전투를 지켜보며 조선이 이기기를 빌었던 북천이 상주를 가로 지른다.
동쪽으로는 조망 하나로 본다면 명산중 어느산과도 견주어도 될듯한 갑장이 있고
북으로는작약산
서쪽으로는 속리산과 탁트인 조망과 암릉이 압권인 백화산
남쪽으로는 기양과 수선이 상주를 감싼다.
공성면에 들어와
점심은 잔치 국수, 저녁은 자장면으로 오늘은 밀가루 잔치하는 날인가
공성면을 지나가며
해는 백두대간 웅이산에서 백화산 라인으로 넘어가고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자정 무렵에 상주 시청에 도착하겠다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발바닥의 통증이 심해 가는 길에 어디 가서 잠이나 자고 가면 좋으련만
무논에 개구리 잔치하는 날이라 잠자기는 애초에 틀렸을 것 같고
공성면 초오 2리 마을 앞에 버스 승강장이 있어 자리 펴고 누웠다가
개구리 소리 핑크 핑크 소리에 잠을 자는 건지 마는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에 개구리가 개굴개굴... 핑크핑크 소리를 낸다.
아!~~~ 몇 시간 동안 누웠다가 일어나 다시 길을 걷는다.
초오 1리 버스 승강장은 무논에서 떨어져 있어 잠시 자고 일어나
상주시 청리면을 지나고
청리역 앞을 지나
경북대 앞을 지나니 어둠이 물러나고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먹을 것 몇 개 사서 나온다.
상주 향교에 들러
이른 아침이지만 향교를 관리하시는 분께서 나와 여러 가지 설명을 해 주셨고
고려 992년 성종 때 창건되었다.
문헌상에는 상주목사를 지낸 최자 선생이 지은 보한집에 1247년에 상주 향교의 유생들이 가시를 지어 받쳤다는 기록이 있어
현존 향교 중 가장 이른 시기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이후 광해군 때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산중의 제왕 호랭이도 무서워한다는 곶감나라 상주
상주 시청 앞을 지나가며
끝마칠 때가 되어 가니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고
길가 어느 편의점에 가서 우산하나 사서 들고나니 마음이 편안하다.
임란 북천 전적지 앞에서
임진년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한 조선 중앙군 60명과 권길 박걸이 소집한 장정 800명이 왜군 1만 7천 명과 용감하게 싸웠으나
전원 순국한 곳 멍청한 장수 한 사람이 지랄을 해서 패전한 전투로
1592년 4월 15일 부산 동래읍성 전투를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왜군
이 무렵 선조 임금은 크게 당황하여 순변사 이일 장군을 경상도 상주로 내려 보낸다.
하지만, 상주로 내려보낼 병력이 없으니... 가보고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말면 말라는 식으로 보내 놓으니
순변사 이일이 모병을 하는데 유생들과 지방 서리,사대부 자식들은 몸이 허약하다거나 공부해야 한다고 다 빠져나가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힘없는 농민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상주시 병성천과 북천이 만나는 곳(현, 임란 북천 전적지) 8백여명의 병졸을 만들어 일본군을 대적하는데
4월 중순 어느 날 김천에서 농민이 찾아와 왜놈들이 근처에 이르렀다고 보고하자 순변사 이일이 "무슨 헛소리로 부하들의
사기를 꺾느냐"며 농민의 목을 베어 버린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이일은 갑옷도 입지 못한 채 도망가고 대부분 전사한다. 이 일은 훗날 탄금대 전투에서도 도망친다. 도망도 싸움의 기술이라지만 이일의 훗날은 어땠을까
이후의 기록을 보면 1601년도에 부하를 죽였다가 살인죄로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죽었는데 임진왜란의 최악의 장수로
신립, 원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지저분하고 더러운 장수?로 알려져 있다.
신립 장군은 당대 최고의 장수로 충주 남한강이 흐르는 탄금대에서 한방에 모두 거덜 낸 장수이나 도망은 치지 않았고
원균 역시 한방이 있는 장수로 칠전량에서 모든 걸 한꺼번에 말아먹은 장수다
이일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근무지 이탈(도망)과 무고(誣告)를 일삼은 장수로 기억된다.
이제 비도 내리고 더 이상 갈 곳도 없다
영남대로길의 완결편은 통영에서 상주로, 부산에서 상주로 이후에 한양으로 이어지는 과거길
긴 걸음 멈추고 집으로 가자
며칠 동안 몸은 비록 힘들었지만 배운 게 많았던 길
훗날 어디 가서 이야깃거리 하나 더 만들었던 길
늘 곁에 두었지만 사랑해서 업고 다니지 않았던 배낭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들어보며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기도 했지만
바람을 막아주고
포근한 잠자리도 만들었으며
때로는 편의점 마냥 먹을 걸 내주었다
이제 배낭을 내려놓으며...
그동안 11번의 천리(400km 이상) 길을 걸었으나 단 한 번도 배낭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한결같은 믿음을 지녔던 배낭
많은 걸 가지고 다니게 했으나 한 번도 써보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이제 너도 이제 쉬고 나도 쉬고...
다음 갈길은 어디로?
첫댓글 어떠한 글이라도 그냥 쓰지는 글은 없겠지요. 그 지역에 대해서 조사하고 검색해보고 하나라도 빠뜨린곳은 없는지 확인하는 일이 실제 걷는것보다 더 어려울것 같습니다.
많은 정성과 애착이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어떤 길로 걸음하시던 항상 그 걸음을 응원합니다
이번 통영대로 4부작은 집중하면서 읽었습니다.ㅎㅎ 항상 나도 저렇게 걸어야 하는데~ 하면서요~ 언제가는 방장님과 같이 길동무가 되는날을 꿈꾸며 몸을 만들겠습니다.ㅎㅎ 고생하셨습니다.
남들은 일생에 한번 걸을까말까한 천리길
10번 넘었으면 졸업이란걸 할 때도 되셨을건데... 그 멈추지않는 고행길에 존경을 표하며.
건강하게 집으로 잘 돌아가심에 감사함 담아봅니다.
늘 먼 걸음 무탈하시고
건강하세요.
한뎃잠 고생많으셨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종주를 하면서 느끼는데, 아직 인정(산정)은 살아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 덕분에 더욱더 즐겁게 걷는 것 같습니다. 방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보리밭의 싱그러움도 좋고,
석양이 너무 아름답네요.
간걸음의 끝이 임란 북천 전적지 앞에서 끝났군요.
천봉산 입구라서 몇번 갔던 곳인데 ㅎㅎ
수고 많았습니다.
다음 행보도 응원합니다.
통영대로가 끝이 났군요
지나온 지역마다 사진과 설명 잘봤습니다
더운날씨에 장거리 행군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상상도 안되는 천리길을 11번씩이나 하셨군요.
카자흐스탄 여인들과 대화도 하고 향교 관리하는 분에게 얘기도 듣고 할매분과 담화도 나누면서 교류도 하고 지역 역사도 살피면서 추억을 만들며 걸으시는군요.
건강관리 다리 관리 잘 하시고 이어지는 걸음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