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배제 당한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서 밝혔듯이 그들의 공적 1호로 여긴 명성황후를 세계역사상 가장 잔인하게 시해한다.
7. 1896년 :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저지른 일제는 친일 내각을 재조직했다. 하지만 이는 한반도인들의 반감이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명성황후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고종이 2월 일제의 간악한 술수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한 나라의 국왕이 제3국의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니 일제의 처사는 국제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고, 일제는 정치적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8. 1897년 :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일본의 간악한 의도를 분쇄하고자 1897년 8월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한다.“대한제국은 세계 만국에 공인된 자주 독립의 제국이다”라고 선포하여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임을 국내외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국왕의 칭호를 ‘황제’로 고쳤다.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는 자주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9. 1903년 : 하지만 일본은 끊임없이 그들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쓰라 다로 당시 일본총리는 그의 자서전에서 동년 4월 수뇌회의에서 했던 발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일제와 러시아 간의 오랫동안 전개된 다툼을 적라하게 말해주고 있다. “ 우리는 한국에 대해 충분한 권리를 요구하고, 교환의 대가로 만주는 저들(러시아)에게 경영을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양보해 여러 해 동안 풀지 못한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자.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반드시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떠한 경우나 어떠한 어려움이 닺히더라도 한국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또한 이 요구를 주창하려면 아무리 전쟁일지라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전쟁을 해서라도 한국을 강탈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말해주고 있다.
10. 1903년 : 1895년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와 일제의 한반도를 둘러싼 끊임없는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자 대한제국은 일본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하여 외교적으로 대한제국은 엄중 영세중립국가임을 대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를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덴마크.청나라 등이 승인했다.
11. 1904년 : 그러나 일제는 한반도에서 독점적 지위를 강점하고 남진하는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구실로 2월8일 인천과 중국 뤼순에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를 비열하게 야간 기습 공격한 후 2월 9일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2월 23일 하야시(林權助) 주한일본공사는 중립선언을 포기하고 일제에 협력하도록 강압하는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대신들을 감금 협박하여 강제 체결하였다.
▲한국은 일본에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전력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 ▲한국과 일본은 상호 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 한반도가 전쟁터로 변하게 되었다.
동년 8월에는일본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부에 두게 하는 '제1차 한일협약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해 갔다. 뿐만 아니라 군사.경찰.교육.왕실 업무 등에도 조약에 없는 고문을 초청 형식으로 두게 함으로써 이른바 '고문(顧問)' 정치가 시작됐다.
일제는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 체결로 한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후, 러시아의 제1태평양전대 기지인 뤼순(旅順)항을 침범하여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뤼순을 되찾기 위해 총 49척의 함대와 3천여 명으로 구성된 발틱함대(짜르함대)를 에스토니아 항구에서 발진시킨다. 그러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틱함대는 다수의 죄수들이 포함된 오합지졸들이었고, 서유럽을 나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를 돌고 인도양과 인도차이나를 거쳐 무려 9개월 만에 대한해협에 당도하는 무모한 작전을 감행한다. 지구 둘레의 4분의 3에 가까운 2만 9천 km를 항해한 러시아 발틱함대는 동해에 도착하자마자 매복하고 있던 일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함대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거의 전멸하고 만다. 49척 전투함중 3척만 남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다.
이 해전이 있기 전, 세계의 군사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일제에 참패하리라고 생각한 이는 거의 없었다. 발틱함대는 1705년 11월 표트르 대제에 의해 창설된 이래 계속 보강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함대로서의 명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판단 역시 다를 리 없었다. 일본 국민 전체가 발트함대와의 해전을 국가 흥망의 기로라고 느끼면서 엄청난 공포에 시달렸다고 한다. 진해만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어뢰정 함장이 ‘세계 제일의 해군 장수인 이순신 장군의 영혼’에 승리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바라는 진혼제를 지내고 출전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이 얼마나 공포와 불안에 싸여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극단적인 사례로 유명하다.
어째든 이렇게 러시아함대가 일본에 패한 것은 일본이 영국과 맺은 영일동맹의 부산물이다. 즉 지구 4분의 3바퀴의 항해에는 반드시 중간 기착지를 통하여 물.식량과 연료의 보급이 필수였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세계 각지에서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앙숙관계였던 영국은 일본을 내세워 러시아와 대리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 함대의 중간 기착지를 제공하지 않았고, 보급품도 제공하지 않았다. 특히 연료 보급을 철저히 차단했다. 이러한 러시아 함대는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동해에 도착한 것이다. 러시아의 ‘오판(誤判)의 전쟁’은 철학의 깊이가 없는 일제로 하여금 끊임없이 피를 부르게 되는 오만방자함과 과대망상증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으로써는 악마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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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머스 조약에 앞서 악수하는 러시아 세르게이 비테(S.Vitte) 재무대신과 일본 고무라(小村壽太郞) 외무대신 |
12. 1905년 :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비열한 사무라이 나라답게 선전포고도 없이 야간 기습을 감행했던것은 자본과 자원이 풍부한 러시아와 장기전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영국과 미국에서 모집한 외채로 조달하고 있었지만 추가적인 자금 조달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할 수 있도록 미국에 비밀리에 중재를 요청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해 8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대통령은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다음과 같이 러시아의 패배를 강요하고 한반도를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러.일 강화회의를 알선한다. 동 조약 제2조에는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 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도 및 보고,감리 조치를 취하는 데 저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라고 명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보호·감리권(監理權)의 승인 ② 뤼순(旅順)·다롄(大連)의 조차권(租借權), 창춘(長春) 이남의 철도부설권의 할양 ③ 배상금의 청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북위 50° 이남 사할린의 할양 ④ 동해(東海)·오호츠크해(海)·베링해에 있는 러시아령(領)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조인 안이 발표되자 일본에는 엄청난 사회 혼란이 발생했다. 당시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피해는 러시아보다 엄청나게 컸다. 러일전쟁으로 발생한 피해를 살펴보면 20개월 동안의 전비(戰費)는 무려17억1600만엔, 러시아군 사망자는 5만여 명이었지만 일본군은 110만여 명이 전쟁에 참가하였고 사상자 27만여 명중 사망자는 무려 8만6000명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전쟁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가족이나 친지가 없는 집이 없고 천문학적인 전시 물가와 세금에 시달렸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러시아로부터 영토 할양과 20억엔 정도의 전쟁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츠머스 조약 안은 배상금은 전혀 없고 영토 할양이라고는 보잘것없는 남 사할린섬의 절반만을 받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격렬한 폭동이 일어났다. 조약이 체결된 9월 5일 도쿄에서 발생한 폭동은 정부 해산을 요구하며 시내 대부분의 경찰서를 불태우는 등 격렬하게 번졌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하여 군대를 동원하고서야 사흘 만에 겨우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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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츠머스 조약문 |
13. 1905년 : 영국과 일본은 이미 1902년 남진하는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하고, 동아시아의 이권을 분할하기 위하여 제1차 英日同盟(Anglo-Japanese Alliance)을 체결한바 있었다. 이에 미국 루스벨트대통령은 1905년 7월 포츠머스회담에 앞서 W.H.Taft 육군장관을 일본에 밀파하여 당시 일본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다음과 같은 ‘미·일비밀협약(美日秘密協約)’을 체결한바 있다. 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 품지않고, 미국의 지배를 승인할 것 ②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미·영·일 3국은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확립할 것 ③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은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할 것.
이 협약은 결국 일제가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미국으로 하여금 보장받는 대신에 미국의 필리핀 점유를 묵인한다는 교환조건으로 이루어진 일한병합의 예비 공작이었다. 일제는 같은 맥락에서 8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는다.
이에 앞서 1905년 1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헤이(John Hay)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 또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서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여기에서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은 러일전쟁을 종식시켜 동아시아에서 평화를 수호했다는 이유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하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 기록에서 1974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수상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더불어 가장 큰 오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루스벨트는 약소국가 한국과 필리핀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더러운 뒤거래를 통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자이다.
14. 1905년 :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엎은 일제는 1905년 11월 당시 일본에서 제일의 실력가로 불리는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진)를 한반도에 파견한다. 이토오는 일왕의 칙사를 자진한 자로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매국노들을 매수하여 '제2차 한일협약' 소위 '을사늑약' 을 강제 체결하였다. 회담장 안밖에는 하세가와 조선주둔군 사령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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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검을 한 일본군들을 배치시켜 그야말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을사늑약에 찬동한 대신은 8명중 5명으로 이를 을사오적이라고 한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다.
이토오가 고종황제를 협박했던 내용을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밝히고 있다. “제국 정부가 여러가지 고려를 거듭해 이제는 조금도 변통할 여지가 없는 확정안이다. 이에 대한 승낙도 거절도 당신 마음대로이지만, 만약 거절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겠소? 대와 관계에서 귀국의 지위는 장래에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져 더욱더 불리해질 것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리고 니시요쓰쓰지 긴타카(西四
公堯)가 1930년 작성한 [한말외교비사]를 살펴보면 “ 이토오는 서슴없이 회의장으로 들어와서는 언제까지 우물우물 생각한다고 해도 결말이 날 이야기가 아니니, 한 사람 한 사람씩 반대냐 찬성이냐 의견을 물을 테니 분명히 답해주길 바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말은 한국대신들의 회의를 이토오가 사회를 보았고, 대신들은 협박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늑약의 제1조는 “일본국 정부는 도쿄 소재 외무성이 오늘 이후 한국의 대외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의 외교권 박탈, 통감정치 실시,보호국화를 규정한 이 늑약은 외부대신 박제순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서명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외교권까지 강탈 당하여 최소 한도의 기본 체제마저 잃고 일제의 준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제일 먼저 한국에서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한편 고종황제는 1905년 11월 미국에 보낸 전문과 1906년 1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발표된 국서에서 을사늑약이 불법•무효임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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