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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소 : 삼성동 섬유센터 17층 대회의실
제 목 : CEO칭기스칸 - 유목민에게 배우는 21세기 경영전략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 김종래 국장 저「유목민 이야기」본문 중에서 -
왜 유목민인가?
세계는 새로운 문명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인류가 석기문명에서 청동기문명으로, 다시 철기문명으로 바뀌면서 그전과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듯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전지구적인 격변의 대폭풍은 인류의 삶을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놓는 거대한 지각변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국내외의 수많은 학자들은 이 격동의 전환기를 다양한 개념으로 설명해왔다.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
피터 드러커는 <글로벌 경제>,
래스터 서로우는 <지식의 지배>,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로 이 거대한 변화의 윤곽을 그려보려고 애썼다.
이들 설명에 따르면 변화의 키워드는 디지털 또는 인터넷, 벤처, 글로벌, 탈냉전 등이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들이란 따지고 보면 결국 부분적인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미래학자들이 제시하는 그림들 속의 숨은 그림, 우리가 지금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는 변화의 핵심은 정착문명의 긴 지배가 마감되고 드디어 유목이동문명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발맞춰 우리도 새로운 경영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면
이 경영전략의 핵심은 한마디로‘유목이동마인드’의 형성이어야 한다.
이는 또한 우리가 ‘정착적 수직 사고’에서 ‘유목적 수평사고’로의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는 뜻이다.
유목민이란 누구인가? 유목민이란 영토가 아니라 사상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행, 경계, 오아시스의 위치를 아는 것 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왔다. 떠돌아다니는 삶을 위해 소지품을 간소화시키고, 정보 수집에 능란하며, 속도를 중시하는가 하면, 서로 접속하고 소통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들의 문명 형태였다.
반면, 우리는 근 1만 년 동안 정착 사회에서 살았다. 뿌리, 땅, 집 등의 소유가 최고의 가치였던 시대를 살아온 것이다. 정착문명은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야만이라 불렸던 유목문명과는 비교도 되지않을 성장을 이룩했다. 20세기 후반을 정점으로 인류는 역사이래 최대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다. 과대한 생산과 과대한 소비 시스템이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소유와 집착, 땅과 뿌리라는 근거지 의식과 습성들이 불편한 점으로 작용하면서 새로운 '이동형(型)의 문명'이 도래하기 시작한다. 마치 동물을 끼고 살던 옛 유목민의 마인드 같은, 수평적이고 열린 사고(思考)들이 '질서화'되는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야만인이던 유목민에게서 달아나고 달아난 끝에 인류는 다시 첨단 문명의 표상으로 유목민을 거론한다. 특히 서구 문명이 21세기를 '유목적인 것'으로 천착하는 데 앞장선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부유한 사람들은 즐기기 위해 여행할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동해야 하므로 결국은 누구나 유목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질 들뢰즈도, 기 소르망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이미 휴대폰, 노트북 컴퓨터, PDA 등이 사이버 세계의 기마 궁사(말을 타고 활을 쏘던 병사)들을 양산하고 있다. 말(馬) 대신 인터넷을 올라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 유목 이동적인 관점이란 모든 인간의 잠재적인 자세이며,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범주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런 이유 탓에 몽골에 대한 나의 관심은 과거 회고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것이 된다. 먼 옛날, 동포들에게 승전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건 질주를 감행했던 아테네 병사의 마라톤 거리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이동할 수 있는 넓이의 한계치가 아니다. 올림픽 경기장에서 100미터 선수가 출발하는 순간, 그것을 포착한 디지털 기기들은 그 소식을 베트남 수상 가옥에까지 퍼뜨려 버린다. 머지 않아 지상은 디지털 문명 속으로 들어앉을 것이다. 인간의 육신은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공간의 숙명 앞에서 막막한 거리감과 싸우지 않는다. 이것을 누가 새로운 유목민의 시대라고 말하지 않을 것인가?
칭기스칸의 성공비결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근교에 있는 돌궐제국의 명장 톤유쿠크 비문에 새겨진 유훈(遺訓)이다. 닫힌 사회는 망하고 열린 사회만이 영원하리라 뜻이다. 유목이동마인드의 핵심을 담고있는 이 말은 글로벌 인터넷티카 시대인 오늘날 CEO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교훈이 될 것이다.
그러한 '유목이동마인드'가 무엇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들어내준 사람은 13세기 몽골의 칭기스칸이다. 800년 전 칭기스칸은 고려에서부터 헝가리까지, 시베리아에서 베트남까지 무려 777만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대통합을 이루었다.
세계적인 정복자로 불리는 나폴레옹, 히틀러, 알렉산더가 차지한 면적을 합친 것보다 더 넓다.
당시 몽골유목민의 인구는 1백만~2백만 명에 불과했다.
칭기스칸은 이 소수의 몽골인들과 함께 유라시아의 1억~2억의 인구를 불과 30여년만에 통일해 냈다.
몽골세계제국은 짧은 시간에 탄생됐지만 무려 150여년이나 지속되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여기서 CEO 칭기스칸의 진면목을 찾을 수 있다. 그는 과연 어떤 비결, 어떤 경영전략을 가졌기에 '피눈물' 나는 몽골의 척박한 환경에서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여 자유무역지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더 나아가 인터넷이 발생하기 8세기 전에 이미 전세계적인 콤비네이션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일까?
CEO 칭기스칸의 성공비결 첫 번째는 꿈이다. 그는 큰 꿈을 가졌고 또 그 꿈을 동지들과 공유했다. 꿈을 공유하면 구성원 모두가 주인이 된다. 그러면 모두가 창의적 인간이 될 수 있다. 한 사람의 꿈은 꿈이지만 만인이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몽골인들은 이점을 심장으로 알았던 사람들이다. 때문에 칭기스칸의 군대는 상명하복식 조직의 폐쇄성과 경직성, 수동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는 학연이나 혈연, 지역 차별과 같은 정착문명 특유의 칸막이 의식이 없었다. 누구든지 노력한 만큼 그리고 공헌한 만큼 반드시 그 대가가 지불되도록 했다. 간단히 말해 철저한 성과급제 조직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구성원들은 조직에 대해 신뢰감과 자부심을 가졌으며 조직을 위해 열성을 다할 수 있었다.
이런 예가 있다. 칭기스칸은 정복전쟁에 앞서 개인약탈 금지라는 혁명적 조치를 취한다. 당시에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피정복지에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여자와 가축 등을 약탈했다. 칭기스칸의 조치는 이런 선착순 약탈을 금지하고 정확한 분배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었으며, 구성원들에게 '일한 만큼 성과를 얻는다'는 믿음을 강화시켰다.
이것은 경영의 측면에서 스탁옵션제를 연상시킨다. 몽골군 장수 중 한 사람인 모칼리는 제국 통일 이후 황하 이북의 중국땅을 다스리는 엄청난 스톡옵션을 받게 된다. 지금도 몽골에는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전통이 남아 있다. 나담축제의 말 경주에서 승리를 하면 기수와 함께 말 조련사에게도 똑같은 포상이 주어진다. 말에게도 그와 같은 영광이 돌아가는데, 이는 유목민들의 공정한 분배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이다.
몽골 유목민들이 성공한 두 번째 비결은 속도를 종교로 여겼다는 점이다.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내 영혼이 편안해지고 사후에까지 안식을 취하는 것이 종교다. 유목민들에게는 기동성이야말로 종교 이상의 가치였고, 속도를 저해하는 모든 행위를 악으로 규정했다. 정착해서 사는 사람은 그 땅에서 자라는 식물이나 곡식이 최고의 가치이다. 그들에게 속도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유목민들에게는 살아 남기 위해 속도가 최선의 가치가 된다. 소수가 다수를 공격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속도를 따라잡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다.
E=MC2이라는 물리학 공식에 대입시켜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에너지(전투력 혹은 기업경쟁력)는 질량(병력 혹은 투입된 예산 규모)에 비례하지만 속도(기동성 혹은 내부 역동성)에는 제곱비례한다. 소수였던 그들은 속도전을 통해 다수를 공격하는 원정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국가경쟁력도 국토의 넓이나 국민 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역동적인 속도에 의해 좌우된다.
이것은 경영 전략측면에서 기업의 경영운영 속도와 관련된다. 생각의 속도는 물론이고 회의와 결의의 속도, 정보교류의 속도, 구매절차의 속도, 판매절차와 서비스절차의 속도, 상품생산의 속도 등등, 기업활동의 과정에서 지체되고 속도를 가로막는 모든 요소를 찾아내어서 없애거나 단축시켜야 한다. 결재 라인을 간소화시켜 업무 기획과 처리의 속도를 높이는 방식,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를 단순화하는 방법은 필수적이다. 필요 이상으로 큰 사장실, 한 문장으로 해결되는 것을 몇 장씩 작성해 올리는 보고서, 서서 하거나 이메일로 할 수 있는 회의를 언제나 한 자리에 모여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발상 등은 기업의 기동성을 떨어뜨리는 악성종양들이다. 벤처가 땅을 사면 망하는 법이다.
그들의 세 번째 성공비결은 정보전에 있다. 대평원에서 사는 유목민들에게 주변을 살피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다. 당연히 그들에게는 정보가 중요했고, 그것은 전쟁을 기획하고 수행할 때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수집된 정보를 통해 심리전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 대한 정착민과 유목민의 차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보부상들이다. 외지의 소식을 전달해주던 보부상들은 우리 사회는 천시했고 홀대했다. 결국 그들은 일제시대에 황국협회로 변질되었고 적의 첩자가 되었다.
정보에 대한 이런 차이는 개미와 거미를 통해 극명하게 대비된다. 정착사회는 근면성실하고 협동심이 강한 개미적 인간형을 선호한다. 그러나 거대한 조직으로 구성된 개미 사회는 단 15%만 일을 하고 나머지 85%는 대열을 따라만 다니거나 남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을 하면서 보낸다. 무릇 조직은 그런 것이다.
반면 거미의 삶은 어떤가. 거미는 공중에 커다란 네트워크 망을 걸어 두고 스스로 사냥하고 스스로 생존한다. 위성안테나 같은 거미줄은 거미가 가진 정보화마인드의 총체이다. 유목민들의 정보화 마인드도 어쩌면 생존의 가치였을 것이다. 오늘날 기업이 성공하기 위한 핵심 조건 또한 정보마인드라고 할 것이다. 지식 경영과 정보화로 무장하지 않는 기업이 지난 세기와 같이 건재하리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칭기스칸이 승리할 수 있었던 네 번째 비결은 테크노 헤게모니이다. 영화에서 보면 중세 유럽 기사들은 철갑통 갑옷을 입고 긴 창을 들고 돌진하며 전쟁을 했다. 옷의 무게와 불편함 때문에 병사는 말 위에서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반면에 유목민들은 말 안장 아래에 등자(발 받침대)를 만들어 달았다. 이 발받침대 덕택에 마상쇼를 연상시키듯 말을 잘 부릴 수 있었고, 전후좌우로 몸을 돌려 활을 쏠 수 있었다.
유목민들이 개발한 전투 무기는 등자 뿐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콰레즘 제국을 점령한 후 6만 명에 이르는 기술자를 포로로 잡아갔다고 한다. 그들은 수도 카라코롬에서 연구를 했는데, 요즘 우리로 치자면 대덕연구단지에 해당될 것이다. 기술자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오늘날 벤처기업들은 테크노 헤게모니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기업문화에서 기술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는 기업 운명과 직결된다. 특히 독자적인 원천기술 개발은 기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유목민의 승리 비결 다섯 번째는 레고(Lego)식 사고이다. 레고는 신기한 장난감이다. 자동차가 되었다가 다시 조립하면 집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레고 블록의 정체성. 순간적 필요에 따라 전체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변화하는 가변성. 이런 특성들이 레고 블록을 최고의 장난감으로 만들었다.
레고의 핵심은 호환성이다. 호환성이 없으면 레고블록으로 집은 만들 수는 있지만 자동차는 만들 수 없다. 이제 한가지 일만 잘하면 되는 세상은 지나갔다. 운동 선수도 멀티 플레이어, 연예인도 만능 엔터테이너여야 살아 남는다. 호환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낙오의 운명으로 다가가게 될 것이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다기능공 시대가 되었다. 과거에는 '한 우물만 파라'는 격언이 유용했지만 유목이동문명시대에는 어떤 일이든 다 모두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이 호환성이다. 이러한 호환성을 위해서는 다양한 인재에 대한 정보를 가져야 한다. 이는 '인재풀'의 원형이 되는데, 칭기스칸의 인재풀 형성은 전쟁에서 이긴 뒤 그 포로들을 자기 군사로 충원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칭기스칸은 피아의 개념이 아니라 실용성의 측면에서 인재를 충원하였던 것이다.
유목민들의 아웃소싱 정신은 포로를 아군으로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동물까지 동지로 여겼다. 전쟁에서 말까지 동지가 된다면 그 전쟁은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 없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정착민 세계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유목민에게는 남존여비란 말이 없다. 여성은 남성의 파트너이자 동지이며 따라서 상하관계가 아니라 역할 분담의 관계만 있을 뿐이다. 이들이 바로 여성 유목민, 우마드(Womad, Woman+Nomad)들이다.
젊고 살아있는 조직을 만들고 싶으면 조직의 호환성을 높여야 한다.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레고처럼 유연한 사고만이 호환성과 표준화를 이룰 수 있다. 경영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철저한 아웃소싱(outsourcing)이다. 호환성을 갖추어 주변 업무를 아웃소싱 한다면, 지금처럼 경제 상황이 불투명하고 투자 리스크가 커가는 기업 현실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총력전과 프로페셔널화도 중요한 승리 비결이었다. 칭기스칸의 장수 중에 제베와 수베에테이가 있는데, 이들은 도주한 콰레즘의 왕을 추격하기 위해 지구의 1/4인 1만Km 쫓아간다. 저승사자 군단이라 불리던 몽골군의 진가는 그들 스스로 최고의 프로였다는 것이고, 총력전을 펼친 데 있다.
프로는 아마추어와 다르다. 프로는 상대가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미션(Misson)을 가장 강하고 가장 빠르고 가장 완벽하게 처리한 후 성공에 대한 가장 많은 댓가를 가장 오랫동안 요구한다. 반면 아마추어에게 일은 취미활동이다. 그들은 상대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듣기 위해, 인정을 받기 위해 일을 한다. 아마추어에게는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싸움, 생존을 위한 싸움은 없다. 이런 차이로 인해 외견은 비슷할 수 있지만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개인의 삶은 아마추어가 가능할지 모른다. 열정과 행복이란 말도 아마추어의 세계에 존재하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비즈니스 조직은 달라야 한다. 군대든 소매치기든 조폭이든 조직은 프로페셔널화 될 때만 살아남을 수 있다.
요즘 기업들에서 자주 보여지는 팀제 또한 사원 각자를 프로페셔널로 만드는 방법이다. 팀제는 부서체계보다 개인의 능력을 최대화 할 수 있는 제도이고, 개인의 총력전을 불러 올 수 있다. 기업이 프로페셔널화를 위해 얼마만큼 변화하느냐에 따라 그 기업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될 것이다.
이상이 유목민 칭기스칸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하지만 이 모든 비결보다 더 중요한 이유, 마지막 성공 비결은 유목민의 인간 관계이다. 몽골 유목민들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기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과 결속력의 중요시했다. 그렇게 맺은 관계를 그들은 '안다'와 '너커르'라고 하는데, 너커르는 우리말로 평생 동지, 안다는 평생 친구라는 뜻이다. 동지란 태어난 곳은 달라도 죽는 곳은 같은 사람들이다. 칭기스칸은 특히 동지들이 많았다. 오갈 데 없는 사람, 어려운 사람, 꿈은 갖고 있지만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들이 차별 없는 칭기스칸에게 와 동지가 되었고, 그들이 제국건설의 주역이었다.
눈앞의 이익에 매이지 않는 유목민들의 인간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칭기스칸과 마지막까지 몽골고원의 통일을 놓고 다투었던 장군 중에 자모카라는 인물이 있다. 자모카는 칭기스칸의 안다였으며 당시 고원의 강력한 실력자였다. 칭기스칸군에게 쫓기던 자모카의 부하들이 자모카를 잡아다 칭기스칸 앞에 끌고 왔다. 우리 생각에는 자신의 적을 잡아왔으니 칭찬해 줄텐데 칭기스칸은 반대였다. 그는 리더를 배신하는 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면서 그 자리에서 참수를 한다.
이 일화는 우리 사회에서 종종 문제가 되기도 하는 산업 스파이를 생각할 때 매우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배신은 결국 인간 신뢰의 문제이다. 이를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면 투명한 경영 구조를 갖추는 것이 필수적임을 말한다. 공정한 인사와 분배 구조, 윤리 경영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 인사의 공정성이 무너진 조직의 미래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유목제국에서 배우는 기업의 경영전략
칭기스칸과 그의 동지들이 만든 제국은 인류 최초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몽골제국은 어찌보면 너무나 상식적이기까지 하다. 인종·언어·종교·문화의 차이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았던 사회, 정권과의 연고가 아닌 실력으로 등용이 되는, 능력주의·실력주의의 인물 선발이 당연시 된 사회, 농민과 서민 등 일반 대중에게 출세와 성공의 기회가 열려 있는 사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칭기스칸의 제국 경영술은 오늘날의 CEO들에게 전쟁에서의 승리 비결만큼이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칭기스칸의 첫 번째 경영전략은 법치주의였다. 유목민의 특성이 반중앙집중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리더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칭기스칸이 제왕이 아닌 리더였다는 사실이며, 리더의 의지대로가 아닌 정확한 법치주의를 실현했다는 사실이다. 칭기스칸은 특히 인치가 아닌 법치의 원리를 <대자사크(현재 알려진 몽골 최고(最古)의 성문법전)>라는 법으로 명문화한다. 법치경영은 기업의 측면에서 윤리경영과 맞닿아 있다. 어느 사회나 기업이든 법에 따른 통치와 경영은 핵심적인 사안이다. 이는 미래의 경영에서 더욱 중요하게 제기될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법치 경영은 합의제 사회를 구현하는 길이다. 몽골 제국은 국가의 중대사를 정할 때는 칸의 독단이 아닌 합의와 절차에 따라 결정했다. 그 회의는 코릴타라는 것으로 일종의 제국의회이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신라의 화백제도, 고구려의 합좌제, 백제의 정사암 등과 유사한 것인데, 코릴타에서 통과가 되어야만 정책이 수행되었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 특히 지도자를 뽑는 것과 전쟁의 결정들은 몇 달이고 모여서 회의를 한다. 지도자라고 해서 함부로 지명하거나 박수부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원체나 조직원들 모두가 자신에게 미래를 가져다 줄 사람이냐, 지도자로서 능력이 있는 사람이냐를 설득해서 동의할 때까지 기다렸다 선출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목사회가 절차나 성원체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몽골 제국은 시스템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칭기스칸은 사회 행정 조직을 천호제(千戶制)로 바꾼다. 당시까지는 씨족단위로 사회가 편제되어 있었는데, 봉건 씨족사회여서 김씨는 김씨끼리, 이씨는 이씨끼리 살던 사회를 10진법에 따라 새로운 편제로 바꾸게 된다. 씨족과 관계없이 가까운 열 가구가 모여 살고, 다시 100가구, 1000 가구, 10000 가구가 모여 살도록 하여 지연과 혈연, 학연을 따지지 말고 살도록 했으며 조직의 리더는 그들 스스로 뽑도록 정해두었다.
그리고 그 리더가 부족하면 해고를 하도록 했다. 이 천호장들이 사회의 기둥이 되는데 이중에는 노예 출신에서 천호장까지 올라간 사람도 있다. 모두가 능력을 발휘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점은 오늘의 CEO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천 억엔 대의 적자를 면치 못하던 일본의 어느 유명 기업은 새로운 개혁을 추진한 결과 다시 수천 억엔 대의 흑자경영으로 돌아섰는데, 그 개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러 단계의 직위를 2단계로 단순화시켜 능력과 성취에 따라 빠르게 승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크게 주효했다고 한다. 이것이 13세기의 방식으로 구현된 것이 곧 천호제이다.
이러한 시스템화는 인력풀을 갖추게 함과 동시에 기업의 재투자에 대해서도 제시하는 바가 있다. 칭기스칸은 제도 정비에 착수한 후에 케식텐을 만들었다. 천호제가 하드웨어의 개혁이라면 케식텐은 소프트웨어의 개혁이었다. 나라의 미래는 소년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으로 엘리트들을 모아 사회 각 분야에 걸친 전문교육을 시켰고, 교육도 성과급제로 하여 차등적인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게 하여 경쟁력을 키워 나가게 하였다. 교육 대상은 주로 칭기스칸의 사위들, 능력있는 십호장·백호장·천호장, 그리고 정복지 유력자들의 아들로 구성됐다. 조직 내에서는 구성원마다 최고 지휘관에서 의사·취사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으나, 전장에 파견되면 모두 지휘관이 되었다.
세 번째 경영 전략은 역참제를 통한 세계 제국의 구현이다. 칭기스칸은 정보마인드에 입각, 반중앙집중적 경영체제를 만든다. 이것이 '13세기의 인터넷'이라는 '역참제'이다. 20세기의 정보전달 방식의 대표격인 전화는 정보 전달이 중앙에 집중되어 대단히 부하가 편중되고, 이 중심이 파괴되면 정보의 흐름이 막히고 만다. 이에 반해 역참제는 인터넷과 같은 '패킷 단위'의 전달방식으로, 정보는 지름길을 통해 끊김 없이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다. 20세기의 중앙집중적 기업경영에서라면 모든 사내 정보가 중앙의 최고 경영자에게만 집중, 처리되므로 능동적이지 못하고 경직된다. 반면에, 역참제 같은 방식의 기업 경영에서는 기업 내부의 정보가 다양한 전달 루트로 전달되고 어느 지점에서나 다른 뱡향의 수신자를 지정, 문제를 역동적으로 풀어 나갈 수 있다. 한마디로, 모든 구성원이 스스로 정보의 중간전달자이자 동시에 정보생산자이면서 또한 정보이용자가 된다는 것이다. 정보의 생산·전달·수용에서의 칸막이가 무너지는 체제인 것이다.
역참제를 통해 세계는 실핏줄처럼 연결될 수 있었다. 그 속으로 상인과 외교관, 여행가들이 오갔다. 정보가 오갔고 물류가 오고 갔다. 또한 그 속으로 돈이 흘러다녔다. 칭기스칸이 정복한 지역과 나라는 인종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며 언어, 문화, 생활 모든 것이 각양각색이었다. 이들 피정복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몽골제국은 단일 지폐를 유통시켰다. 유럽보다 무려 4백년이나 앞서 만든 지폐였다. 단일지폐경제권의 위력은 대단했다. 돈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물건이든 살 수 있고, 또 팔 수 있었다. 원나라의 지폐는 오늘날의 '달러'처럼 세계의 기축통화(基軸通貨)였던 것이다.
칭기스칸의 제국경영에서 특히 빛나는 대목은 당시 몽골제국이 혼혈 잡종 사회, 완벽하게 열린 사회였다는 점이다. 열린 마음은 이질적인 사람이나 사회를 수용하는 태도이다. 칭기스칸은 이슬람교도, 그리스도교도, 불교도 등 수많은 이질적 민족과 종교,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의 사람들을 하나의 '팍스 몽골리카' 내부로 수용하면서 아무도 차별하지 않았다. 또한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쳐 일종의 연방국가를 구성했다. 각 나라들은 자치권을 갖고 움직였지만, 각 국에는 관리가 파견되어 관리하고 조정했다.
다양성의 수용과 통제의 균형. 이것이 '개방성'으로 표현되는 칭기스칸의 수용정책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 적의 장군을 수용하여 동지로 삼거나 전사한 적장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고 적장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자신의 보호 아래 두기도 했다. 심지어는 적에게 빼앗겨 적장의 아들을 임신한 자신의 아내와 그 아들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또한 칭기스칸과 몽골인들은 대체로 샤머니즘계였으나 칭기스칸의 며느리는 기독교계였다. 마치 지금의 미국을 연상케 하는 이 혼혈성 사회가 바로 유목 문명의 특성이었다.
13세기 초원의 유목세계에서는, 생존을 향한 끊임없는 '적과의 동침'이 비일비재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부족들 간에 벌이는 합종연횡이 숨막힐 정도로 빈번하였다. 그래서 패배한 적에 대해서도 용서하고 수용하며 화해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런 데에서는 '영원한 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오로지 나일 뿐 다른 무엇일 수 없다'는 생각 즉, 자기의 고정된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요즘은 이것을 칸막이 가로지르기(cross-over)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몽골제국은 오늘의 CEO들에게 계승과 재창조의 모범을 보여준다. 바다를 경영한 유목민 쿠빌라이칸이다. 쿠빌라이는 칭기스칸의 손자이자 원제국을 창업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쿠빌라이를 유목을 정착화시킨 인물, 심지어 배신자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칭기스칸보다 더 뛰어난 유목이동마인드의 소유자라고 여겨진다. 칭기스칸이 유목이동마인드의 종합적 구현자라면 쿠빌라이는 이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제2의 창업자나 관리자가 아니라 새로운 유목 모델의 창업자로 평가받을 만하다.
쿠빌라이에 이르러 유목이동마인드는 명실상부하게 전세계적 구현을 이룩한다. 그는 세계 정치 행정의 중심지인 북경을 건설(사실은 재건, 북경 바로 옆에 신도시를 개발한 것임)하고, 지금의 경제특구라 할 수 있는 항주와 천진을 개척한다. 이 행정 수도와 자유무역지대에는 전세계인, 마르코 폴로 등으로 우리는 알고 있는 사람들, 이 운집하게 된다. 또한 당시까지는 전혀 눈을 돌리지 못했던 동남아, 일본에 대한 원정전쟁을 함으로써 유목제국을 지도 끝까지 넓혀 놓는다.
쿠빌라이는 '세계화 시대의 경영자'였다. 원나라는 '세계화 시대의 중심 국가 체제'를 이룩했다. 오늘날의 경영과 경제, 소위 말하는 세계화 시대의 기업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들은 이 쿠빌라이에게서 배울 수 있다. 세계화 시대의 경영을 위해서는 본사와 현지 지사, 모든 기업 간부와 말단 사원까지를 모두 통괄할 수 있는 일사분란한 체계와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팽창주의나 전투주의, 교조주의보다는 현실화되고 세련된 실용주의가 필요한 때인 것이다. 지금 세계 시장을 봐도 그렇다. 세계화의 화두는 이미 구체화와 실제화라는 것으로 옮겨졌다.
또한 그는 가장 유목적인 경영을 수행했다. 북경으로의 천도를 유목의 정착화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경영 시대를 준비한 것이다. 그의 유목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역시 '현지에 법인을 세우는 것이 아닌 본사를 현지에 옮겼다'는 점에서 극치를 이룬다.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뉴욕 맨하탄에 본사가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과 같다.
쿠빌라이가 가진 계승자로서의 덕목과 새로운 창조성, 안주하지 않는 정신은 후계자가 갖추어야 하는 최고의 덕목일 것이다. 기업도 항상 새로운 창업 정신을 가질 때에만 그 운명을 지속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상이 칭기스칸과 몽골유목민들이 8세기의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유목이동마인드의 핵심이다. 손정의가 그랬고 빌 게이츠가 그랬듯이, 유목이동마인드를 새로운 경영전략으로 가진 기업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 보다 빠르고, 보다 열린 마음으로, 보다 높게 비상하는 것, 이것이 새로운 세기의 가능성이며 모든 기업의 경영전략이다.
인간이 꿈을 가지고, 그 꿈을 공유하고, 열린 사고를 통해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면 경영의 성공도 보장받을 수 있다.
21세기 경영 기법을 굳이 미국이나 유럽 모델에서 배워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심장으로 느끼는 역사가 있다. 혈통적으로나 문명사적으로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눈앞에 와 있는 무한경쟁의 시대를 헤쳐가는 지혜는 800년 전의 유목민의 사고를 벤치마킹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