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한복판, 수성구 범어동 대구경북흥사단 회관 앞에는 오늘도 묵묵히 시민들을 바라보는 한 인물의 동상이 서 있다. 화려한 무장투쟁의 영웅처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미주 독립운동의 숨은 기둥. 바로 우강(友岡) 송종익 선생이다.
대구지방보훈청은 매달 지역 현충시설 한 곳을 선정해 독립운동과 호국 인물의 발자취를 시민들에게 소개하고 있는데올해 5월 ‘이달의 현충시설’로 지난 6일 우강 송종익 선생 상을 선정했다. 흥사단 창립일인 13일이 있는 달 딱 일주일 전에 선정됐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총 대신 조직과 자금으로 싸웠다"… 송종익 선생의 40년 독립운동 조명
1887년 대구에서 태어난 송종익 선생은 1906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에 자신의 삶 전체를 던졌다. 당시 해외 독립운동은 단순한 의지만으로 유지될 수 없었다. 조직을 유지할 인력과 자금, 그리고 이를 연결할 신뢰가 필요했다. 송종익 선생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기반을 책임졌던 인물이다.
우강 송종익 선생은 흥사단 8도 대표 중 경상도 대표를 맡았었다. 흥사단 출처 : 한국NGO신문(https://www.ngonews.kr)
1908년 미국에서 벌어진 전명운·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스 저격 의거 이후에는 두 의사의 재판을 지원하는 재무 업무를 맡았다. 이후 상해임시정부와 연결된 대한인국민회 재무관리자로 활동하며 미주 동포들이 모은 독립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핵심 통로 역할을 수행했다. 해외에 흩어진 한인들의 애국심을 조직된 힘으로 바꿔낸 것.
무엇보다 송종익 선생의 이름은 안창호와 떼기 힘들다. 191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창호 선생은 송종익에게 훗날 민족운동의 중추가 되는 흥사단 약법 초안을 처음 보여주고 뜻을 나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3년, 두 사람은 함께 흥사단을 창립했다.
안창호 선생이 지역과 파벌을 넘어선 민족운동 조직을 만들기 위해 창립위원을 전국 8도 대표로 구성했을 때 송종익 선생은 경상도 대표를 맡았다. 이후 그는 흥사단 이사장까지 역임하며 평생 흥사단 운동에 헌신했다. 흥사단이 강조했던 인격혁신과 민족개조의 정신은 송종익 선생의 삶 그 자체였다.
▲1906년 공립협회 당시 19세의 우강 송종익 선생 (맨 왼쪽). 가운데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도산은 이 당시 28세였다. 흥사단
1919년 안창호 선생이 임시정부 관련 업무로 중국으로 떠나자 송종익 선생은 흥사단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다. 동시에 임시정부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고 송금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총칼 없는 전쟁터에서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던 셈이다.
대구가 다시 기억한 이름, 송종익… 미주 한인사회 독립운동 이끈 헌신
1936년에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으로 활동했고, 1941년 하와이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에는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설립에 참여했다. 이후 집행부 위원과 재무를 맡으며 미주 한인사회를 하나로 묶는 데 힘썼다. 같은 해 대한인국민회 총회에서는 부의장으로 선출됐고 1944년에는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외교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다.
1945년 광복이 찾아오자 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 일원으로 조국 땅을 밟았다. 미국으로 떠난 지 40여년 만의 귀국이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큰 역할을 펼치지 못한 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대구지방보훈청은 올해(2026년) 5월 ‘이달의 현충시설’로 지난 6일 우강 송종익 선생 상을 선정했다. 대구지방보훈청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 내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 역할을 맡으며 동포 사회를 위해 헌신했다. 또한 국내 흥사단 재건에도 힘을 보탰다.
송종익 선생은 1956년 1월 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대부분의 삶을 타국에서 보냈던 그는 사후인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현재 대구흥사단 2층에는 송종익 선생의 삶과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전시 공간이 마련돼 있다. 회관 앞에 세워진 우강 송종익 선생 상은 1999년 건립됐고 2005년 국가보훈부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독립운동사는 종종 전투와 의거 중심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모으고 자금을 마련하며 해외 동포 사회를 하나로 묶어냈던 이들이 없었다면 독립운동 역시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송종익 선생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