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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복희 초우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용쟁호투
문복희 시집
첫눈이 오면
좋은 씨앗
문복희
시인, 문학박사,
경원대학 교수이며,
대한 YWCA 실행위원,
한국어문회 편집위원 및
울란바타르대학교 겸임교수로도
활동중이다.몽골어로 함께 번역된 시집
「숲으로 가리」를 펴냈으며 그밖에
「한국 신선시의 이해」, 「한문의 이해」,
「한국 여성과 문학」, 「행복한 시인의 사회」(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을 갈망하며
차례
1부 꽃의 숨결
치자꽃 … 1
연꽃 … 2
안개꽃 … 3
은방울꽃 … 4
해바라기 … 5
백목련 … 6
할미꽃 … 7
벚꽃 … 8
코스모스 … 9
싸리꽃 … 10
2부 사랑의 숲
첫눈이 오면 … 12
비밀의 숲 … 13
사랑의 숲 … 14
잠자는 숲 … 15
안개섬 … 16
숲으로 가리 … 17
밤바다에서 … 18
파도 … 19
반지 … 20
입맞춤 … 21
석류 … 22
낮잠 … 23
3부 계절의 합창
봄의 축제 … 25
청보리 밭에서 … 26
은행나무 숲 … 27
가을 단풍 … 28
단풍 … 29
낙엽 … 30
겨울 나무 … 31
겨울바다에서 … 32
겨울 한강 … 33
눈 내리는 밤 … 34
4부 자연의 빛
아침해 … 36
소망 … 37
새벽기도 … 38
빛을 찾아서 … 39
네잎클로버 … 40
바위 … 41
사과 … 42
매봉산 … 43
망해사 … 44
메타세콰이어 나무 … 45
은행나무 가로수 길 … 46
고추 일광욕 … 47
자유로를 달리며 … 48
황혼에 홀로 서서 … 49
제부도 … 50
5부 마을의 서정
청평에서 … 52
당남리에서 … 53
포도밭에서 … 54
양평 가는 길 … 55
퇴촌 가는 길 … 56
중미산 가는 길 … 57
워커힐 강변에서 … 58
샤모니 마을에서 … 59
강화도에서 … 60
연꽃 군락에서 … 61
양평에 가면 … 62
안면도에서 … 63
문산행 기차를 타고 … 64
비내리는 과천 … 65
비내리는 몽촌토성 … 66
6부 몽골의 꿈
몽골에서 Ⅰ … 68
몽골에서 Ⅱ … 69
몽골에서 Ⅲ … 70
몽골에서 Ⅳ … 71
몽골에서 Ⅴ … 72
홉스골에서 Ⅰ … 73
홉스골에서 Ⅱ … 74
비내리는 홉스골 … 75
몽골 초원 … 76
고비사막에서 … 77
7부 여인의 숲
여인 1 … 79
여인 2 … 80
여인 3 … 81
여인 4 … 82
아내 … 83
아궁이 … 84
배꼽 … 85
배꼽 사랑 … 86
어린 누이 … 87
작은 요강 … 88
꽃 같은 아내 … 89
서평 1 … 90
서평 2 … 95
1부 꽃의 숨결
치자꽃
수줍은 여린 어깨
속살 고운 내 아내여
뼈 속 까지 파고드는
지고至高한 그대 향기
그 속에
내 입술 대니
백학白鶴되어 날아간다
살아도 죽어서도
손에 꼭쥘 하얀 보석
손가락에 맺은 인연
지순至純한 그대 눈썹
단 한번
목숨 건 사랑
별이 되어 승천 한다
1
연꽃
볼수록 그리운 그대
등에 업고 눈물난다
만질수록 외로운 손
호주머니에 품었다가
천년후
아무도 몰래
뜨겁게 사랑 하리
2
안개꽃
눈감고 너를 보면
손댈 수 없는 어린 씨앗
내 살 떼어내어
흩어놓은 시어詩語들아
어디서
빛이 된 생명
찾을 수 없어 무너진다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천년을 마다 하리
눈뜨고 지킨 세월
붓끝마다 얼어붙어
만지면
부서지는 눈雪
피지 못한 푸른 소망
3
은방울 꽃
꽃이 되기 전에
어린 새싹 눈이 트여
아내 같은 몸의 곡선
평생 아낀 씨앗 품고
차라리
거꾸로 매달려
깨지지 않는 종鐘이 되리
하늘도 보지 않고
별을 품은 작은 백자白磁
늘어진 인연의 줄기
풍경風磬처럼 흔들린다
그 안에
담지 못할 사랑
차오르는 원죄原罪여 !
4
해바라기
내 마음 속 빈 자리에
간해 온 둥근 액자
노오란 그리움을
꽃잎마다 물들이고
목이 긴
가로등처럼
낮은 땅을 내려다본다
식지 않을 불볕 사랑
푸른 줄기에 숨겨둔 채
하늘 끝 울타리 없는 동네
주인으로 곧게 서서
안으로
나비의 꿈 접고
비를 맞는 해바라기
5
백목련
그대는
40 대 여인의 잔잔한 눈웃음
차마 말하지 못한
시린 바람 모아서
처절한
가슴 속에서
차갑게 핀 지등紙燈이다.
그대는
물에도 젖지 않는 얼음꽃
뜨락에 내리는
빗방울 마다 하고
하이얀
그리움으로
출렁이는 찻잔이다.
겨우내
몸서리 친 그 바람을 못 잊어
차라리 4월 하늘
꽃이 진 그 자리에
부활은
푸른 아픔으로
돋아나는 침묵이다.
6
할미꽃
푸르른 학鶴의 영혼
두 손으로 보듬어서
물기 적은 산비탈에
욕심 없이 심었더니
바람결
흰 머리카락
신선神仙되어 날아간다.
죽도록 사랑한 죄로
천상天上에서 유배온 별
낮은 땅만 굽어보다
등허리가 굽어졌나
무덤가
울지 않는 종鐘
그 모진 사랑 눈물난다.
겉모습은 늙었어도
속살 고운 슬픈 이름
그대가 고개 들면
산신山神도 눈이 먼다
오늘은
새벽이슬 되어
마음 뿌리 적시련다.
7
벚꽃
그대는
눈물겹도록 텅 빈 흰 종이 꽃
아무도 눈치 못 챈
한겨울 그 고독을
오리고
더 작게 오려
겹겹이 붙인 꽃잎.
가슴에 묻은 아픔
그 영혼이 안쓰러워
꼿꼿한 척 서 있는
야윈 어깨 만져본다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조바심이 수만 개.
그대는
흠 없는 여리디 여린 습자지 꽃
성장盛裝한 여름을
사랑도 해보기 전
돌아올
기약도 없이
날아오른 작은 새.
손끝만 스치어도
상처 나는 어린 살결
그대 곁 서성이다
만져도 못 본 입술인데
비 맞아
떨어져 버린다
땅에서 별이 된다.
8
코스모스
담장 없는 마을에서
날아 온 편지 한 장
못다 한 여름 햇살
등에 업고 속삭인다
넋 잃고
깨우친 기도祈禱
서툴수록 목이 멘다.
인연에 떨고 있는
빗살무늬 토기인가
실같이 여린 줄기
힘주어 핀 어린 주먹
단 한번
수줍은 사랑
무서리로 지는 가을.
하늘과 바람 사이
갈라놓은 예리한 톱
아픈 꽃잎 끌어안고
내 딸처럼 다독이며
여인은
눈을 꼭 감고
핏빛 노을 꿈을 꾼다.
먼 들녘 흔들리는
하양 분홍 발자국들
내 목숨 깊은 곳에
찍어 놓은 얼룩 눈물
가까이
다가가 보면
새가 되어 비상飛翔한다.
9
싸리꽃
그리움이 흐르다 멈추면
싸리꽃이 된다
눈물 고인 어린 눈에
서리처럼 엉긴 사랑
언젠가
떠나야할 별
얼어붙어 꽃이 됐나
하얀 눈이 내리다 멈추면
싸리꽃이 된다
심장 같은 사랑을 위해
설궁雪宮을 버린 공주
못잊을
그대 숨소리
하얗게 질려 꽃이 됐나
10
2부 사랑의 숲
첫눈이 오면
첫눈이 오면
비밀의 숲으로 가자
첫떨림
그 성스러운 눈물의 골짝에서
한 움큼
쏟아져내리는
눈부신 별이 되자
첫눈이 오면
사랑의 숲으로 가자
첫남자
그 가슴저린 은빛의 품속에서
온 몸의
세포를 깨우고
빛으로 성화聖畵되자
12
비밀의 숲
겨울 숲 깊은 계곡
낙엽으로 눕는 아내
누웠다 일어났을 뿐인데
왜 모든 걸 버렸을까
열 아홉 소년같이
새 하늘을 여는 사내
아름다운 패배가
빈 나무에 걸려 있다
다 읽은
책을 덮듯이
비밀의 숲을 덮는 시간
13
사랑의 숲
멀리서 바라보면
산 위에 숲이 있다.
짙은 녹음 시끄러워
겨울 숲에 들어서면
굴러도
울지 않는 낙엽
발 밑에 저려온다
한 열흘 꽁꽁 묶여
불암산에 갇힌다면
진회색 서어나무
등 뒤에 기대어서
눈 덮인
하늘만 보며
사랑의 숲 지키리
14
잠자는 숲
그대를 만나기 위해
다시 태어나고 싶은 시간
초록 향기 잠 재우고
겨울 숲에 들어가면
호수는
먼저 얼어서
봄소식 기다린다
온 몸을 내주고도
떨지 않는 나무처럼
한 점 비밀없이
다가오는 아내여
단숨에 숲이 될 수 없다면
키 작은 나무로 서서
겨울잠에 들어가자.
15
안개섬
눈이 내리지 않아도
우리가 섬에 가면
삼십년 전 어깨에 쌓인 눈처럼
겨울 안개가 내려와
떨리는 물빛으로
사랑의 늪이 된다.
돌아서야 길이 보인다는
아내의 작은 입술
꽃잎보다 부드러운
안개 속을 걸으면
순결한 시시의 숲이
눈물처럼 젖어온다.
하늘과 땅 나눌 수 없는
안개 속에 녹아들면
마지막 손 끝에 남는
그녀의 온 몸 냄새
눈 감아도 사라지지 않을
사랑의 응답이다.
16
숲으로 가리
양평에 해질 무렵 숲으로 가리
눈감고 밤나무에 기대면
내 입 속에 붉은 포도주를 넣어주고
그 품에 안기면
첫사랑보다 더 아련한
당신의 골짜기가
온통 안개로 덮인다
양평에 해질 무렵 숲으로 가리
등에 업혀 계곡물 건너면
내 긴 목에 불타는 노을을 걸어 주고
그 품에 안기면
낙서장보다 더 솔직한
당신의 피가
내 혓바닥에서 녹는다
밤이 깊어도 잠들지 못하는
깊은 숲 속에 안기면
세월이 가도 가도 수줍기만 한 그녀가
하늘의 별처럼 내려와서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앉아 쉬고 간다
17
밤바다에서
너만 눈물인 줄 알았더니
내 안에 눈물은 소나기였다
온 천지 눈물 다 모여
상하上下 없는 세상 되고
몇 천 년
굳어진 사랑
바다에 오면 부서진다.
너만 파도인 줄 알았더니
나도 네 안에서 파도였다
아우성의 사랑 다 모여
하늘과 땅의 파도 되고
칼 같은
위대한 배반
바다에 오면 못 떠난다.
18
파도
파도는 혁명의 길
투명한 눈물의 축제
이승의 무거운 죄
천둥 속에 부서지고
목숨 껏
다짐한 기도
넘나드는 하늘과 땅
파도는 반란의 숲
성난 사자의 포효
번개처럼 스친 인연
어둠 속에 바람 되고
바다에
쏟아진 청춘
일어서는 소나기 사랑
19
반지
나와 한 몸이 될 사람에게
반지를 준다
내가 온 몸을 여는 순간
그대 위에
떠오르는 찬란한 아침
마지막 한 방울 피까지
불로 태울지라도
그대를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지는 말자는 약속
그대의 영혼이
내 살점으로 굳어져도
끝끝내
내 작은 심장의 주변에서
테두리로만 남겠다는
고백의 꽃
20
입맞춤
이 작고 슬픈 꽃잎
오래 참은 고운 입술
부서지게 껴안고
현기증 나는 입맞춤으로
노랗게 쓰러지고 싶다.
눈이 맑은 어린 새를
내 눈 속에 깊이 넣고
거센 물살 출렁이며
혀끝에서 온몸으로
아득히 녹아들고 싶다.
희디 흰 연한 속살
뜨겁게 흐르는 피
내 혈관에 수혈하고
농염한 입맞춤으로
까맣게 감전되고 싶다.
21
석류
메마른 내 혈관에
광택의 씨 심어놓고
산속에서 물속에서
붉은 마음 오갈 때
한 방울
절정으로 핀
야생의 홍보석
빛과 빛이 부딪치는
불같은 입맞춤에
벌어진 동백꽃도
입술이 떨리던 날
얼었다
녹아 흐르다
다시 피는 신비의 꽃
마음을 묶지 않고
허락한 물의 섭리
눈물로 빚은 진주
조각조각 품에 안고
죽어도
놓지 못할 손
견고한 성지聖地여
22
낮잠
한 낮에
네 발 달린 짐승 되어
잠들 수만 있다면
내 비록
천년을 일어나지 못한다 해도
갈비뼈
부서지는 형벌
무릎 꿇고 받으리
벌건 대낮
피 토하는 꽃잎 안고
잠들 수만 있다면
다시는
눈뜨고 만나지 못한다 해도
마비된 나비의 전설
불면으로 채우리
23
3부 계절의 합창
봄의 축제
강물처럼 물결치는
개나리길 열고 가면
계절이 모인 동네
봄의 축제 한창이다.
그 속에
수줍은 바람
귀를 열고 듣고 있다
25
청보리 밭에서
선운사 돌던 바람
동백꽃에 누웠다가
청보리에 맺은 인연
무지개로 번져올 때
긴 눈썹
먼저 쓰러져
파도처럼 울고 있다
무수한 푸른 핏줄
여름을 숨겨두고
그리운 피리소리
속살 아래 흔들릴 때
청춘은
보리밭사이
갈증으로 피어난다
26
은행나무 숲
그대가
나에게 돌아오는 길은
그리움이 뿌옇게 낀
은행나무 숲길이다
가슴에 묻은 굵은 눈물
노랗게 바래어져
은행나무 밑에
무수히 쏟아져 내리면
작은 잎 하나하나가
눈물로 만든 별이 되고
마침내
어머니의 뜰이 된다
그대가
나에게 돌아오는 길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걸 버리는
은행나무 숲길이다
27
가을 단풍
산들바람 불러내어
뿌려놓은 핏빛 언어
양평 가는 산중턱에
올라가서 시詩가 된다
못다 한
주홍글씨만
감나무에 걸어둔다
안개 젖은 무수리 마을
은행잎에 새긴 기도祈禱
햇빛 받아 금빛 되니
눈뜬 장님 놀라 깬다
수줍게
단풍든 여인
보듬어주던 당신의 말씀
28
단풍
단풍은 전과자다
붉은 혀로
여인의 목을 간음姦淫하는 당신
내일이면
주홍글씨의 죄명으로
가을계곡에 갇힌다
거기가
질펀한 감옥인 것을
차라리 모르고 살았더라면
단풍은 바람난 여인이다
초록 잎으로
수줍게 초경初經을 하던 당신
오늘은
붉은 루즈 짙게 칠하고
가을 산에 오른다
거기가
황홀한 꽃이불인 것을
차라리 모르고 살았더라면
29
낙엽
그날의 울음 그리워
이 산 저 산
여위어 간다
바람에 몸 맡기고
흔들리는
작은 의지
하얗게
숲 속에 남아
정밀靜謐로 쌓이련다.
30
겨울 나무
천년을 기다리며
흙 속에 갇힌 뿌리
잔가지에 맺힌 비원悲願
가늘게 떨리는 날
숨었던
노을 자락 하나
산 너머로 잦아든다.
31
겨울바다에서
가슴 한 쪽이
마디마디 아파올 때
잃어버린 나를 찾아
겨울바다에 간다
핏빛 낙조가
파도에 자지러지고
텅 빈 바다에
찬 바람 강하게 불 때
수컷의 거대한 바퀴는
눈부신 모텔을 지나
물 속 깊은 곳에
안개꽃을 피운다
저녁 해가
눈물겹게 넘어 가는 날
잃어버린 장갑이
외로워 보일 때
하얗게 떨고 있는
겨울바다에 서서
들꽃 같은 아내의 이름
눈감고 불러본다
이별은 슬픈 변명이라고
몸을 맡기는 모순의 바다
32
겨울 한강 漢江
흐르면서 울지 않는
한강의 겨울 물결
푸른 불씨 감춰 두고
녹지 않는 얼음 되어
한번도
만나지 못한
갈매기를 꿈꾼다.
알몸을 드러내도
춥지 않은 돌무더기
꼼짝없이 걸려들어
사랑 먼저 하였다가
둔덕에
층층이 박혀
푸른 살결 이룬다.
동강 댐 물 자락을
온기溫氣로 데려와서
꺼멓게 물든 욕망
어지럽게 섞어놓고
나보고
큰 섬이 되어
잊은 여인 사랑하란다.
원고지에 쓰지 못한
수많은 시詩그림자
하얗게 눈이 되어
쌓여 가는 슬픈 겨울
강 아래
두꺼운 아픔
새도록 녹아 흐른다.
33
눈 내리는 밤
지울 수 없는 슬픈 시詩가
눈물로 쏟아지는 밤이면
빈 뜨락엔 보내지 못한
편지처럼 가난이 쌓이고
떨리는
단 하나의 사랑
겨울바람에 얼고 있다.
헌 책방의 먼지처럼
눈이 내리는 밤이면
푸른 시집에 인쇄된 여름이
뿌옇게 기어 나오고
어느 날
늙기 시작한 아내 얼굴이
밤새도록 정답다.
수백 장의 꽃잎이
소리 없이 떨어지는 밤이면
잘 익은 군밤처럼
노란 속살 반만 보듬고
갈수록
낮아지는 사랑으로
거룩한 밤 지키리.
34
4부 자연의 빛
아침해
일출봉 남빛바다
소망으로 길을 열어
한 하늘 받쳐 들고
물에서 솟은 생명
얼마나
사랑해야만
세상의 빛이 될까
어둠이 어두움을
껴안지 못하도록
서귀포 파도처럼
꿈을 몰고 오는 아침
몇 천 번
부서져야만
부활의 빛이 될까
36
소망
가슴속엔 세월처럼
시냇물이 흐르고
손 흔들어 떠나보낸
눈꽃 같은 사람아 !
겨울 끝
송년送年의 기약
홍시처럼 매달려 있다.
강물 같은 소망이
은빛으로 일어서면
푸른 하늘 그림 한 폭
피어나는 사랑아 !
고원高原에
둥그런 태양
신년新年의 창을 연다.
37
새벽기도
하늘은 깊은 강물
그 속에 내 몸 담가
푸른 물 주루룩 흐를 때
온기溫氣로 건져내면
저만치
길이 열리고
아직 남은 새벽 안개
피지 못한 하얀 목숨
천년 이을 어머니 기도祈禱
푸르러 보이지 않는
무수한 별이 되어
언제나
내 등 뒤에서
떨고 있는 거룩한 손
38
빛을 찾아서
우리가
눈부신 사랑처럼
빛이 되어 만난다면
그 빛 안에
심장의 뿌리가 꽂히고
생의 리듬이 흐를 때
비로소
세상 밖의 빛이 된다
눈감아도
보이는 그대
차라리
생명보다 작은 북극성 되어
빛의 섭리로
자유하리라
39
네잎클로버
풀 속에 숨은 사랑
운명처럼 비껴가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리운 누이 얼굴
눈 뜨고
못 보는 네 잎
눈감으면 보이리
40
바위
젊은 꿈 푸른 이끼
발 밑에 벗어놓고
맑다 못해 옥玉이 된 돌
밤하늘에 올려놓고
오히려
울창한 숲 속
낮은 데로 정좌한 당신
멀리서 바라보면
외로운 작은 우주
잎 떨어진 겨울 나목
곁에 두고 달래주듯
때로는
빈 가슴으로
큰 산처럼 다가온다
찬바람 지나간 자리
응결된 그리움이여
그 안에 불같은 숨결
침묵으로 다스리니
천년을
물 속에 있어도
썩지 않을 나의 사랑
41
사과
옛 고향 햇살 아래
사과 한 알 익는 오후
별빛으로 가득 채운
어린 날의 소식인가
꺼내든
결 고운 이름
향내 멀리 풍긴다.
세월자락 깎아낸 듯
아픔으로 길을 여니
만년설雪 즙이 되어
하얀 속살 눈부시다
깊은 속
아껴둔 사랑
까만 생명 섬이 된다.
42
매봉산
오늘도 곁에 눕는
가슴 푸른 내 사람아
돌멩이조차 품에 안는
간곡한 체온일랑
아파온
사계절 뒤에
여백으로 남겨두자.
태산의 기품으로
햇빛 아래 옹골차다
구봉 남쪽 십리 허許에
힘찬 부리 매운 눈매
작아서
더욱 큰 그대
깃털조차 부드럽다.
43
망해사
바다 향한 절벽위에
과묵히 앉은 사내
번개에도 깨지지 않을
청솔 밑에 뼈를 묻고
하늘과
바다가 만나
살을 태운 망해사
44
메타세콰이어 나무
서초구청 산책로에
몸살 앓는 가로수여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야위어가는 그대 얼굴
얼마나
사무쳤으면
뾰족한 몸이 되어
하늘까지 닿았을까
아직 남은 계절을 위해
목숨 걸고 지킨 도시
사랑이 깊어갈수록
가벼워지는 슬픈 성자聖者
얼마나
기도했으면
가난한 마음 되어
깃털로 날아올랐을까
45
은행나무 가로수 길
가을 엽서 한 장 들고
그녀를 찾아간다
은행나무 가로수길
함께 걷던 지인길에
노란 은행잎이 쌓이고
큰 나무들이
병정처럼 서 있어도
나 홀로 길을 가면
바람막이가 아니다
잡을 수 없는 안개처럼
가까이 보이지만
몇 백리 밖
멀리에서 흩어지는 그리움
나무가 마지막 옷을 벗고
낙엽이 비에 젖어 신음할 때
그녀를 찾아가는 길이
나를 찾는 길이다
46
고추 일광욕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햇살 아래
고추가 일광욕을 한다
눅눅했던
여름 장마의 기억을 말리고
구석구석
먼지를 햇빛에 씻으면
태양초 고추가 된다
굽이친 세월
훌훌 벗고
자유의 기차를 타면
고추는 비로소
전성기가 된다
47
자유로를 달리며
두통 같은 삼복더위
자유로에 날리고
철학과 무거운 신발
난지도에 버린다
사랑은
이정표 없는
뜨거운 질주
할머니 시골밥상
넉넉한 손 그리워
뒤틀린 세상 등지고
자유로를 달려오니
된장과
연한 호박잎
만난사람 여기있다.
48
황혼에 홀로 서서
삶의 속도 늦추고
황혼에 홀로 서면
처음 만난 악보처럼
그대 리듬 눈부시다
감춰진
노을빛 날들이
눈 감을수록 아파온다
등 뒤에 남아있는 새
녹지 못한 인연의 끝
젖어드는 황혼 속에
날개 치려 하는가
죽어도
지울 수 없는
아주 작은 슬픔이여
49
제부도
맥없이 눈물이 날 때
제부도를 찾는다
비봉 지나 송산면을 넘으면
알몸의 갯벌 위에
썰물처럼 밀려가는
짭짤한 그리움
운명처럼 슬픈
숫처녀의 엉덩이를
혓바닥 흥건한 물로
핥을 수만 있다면
진실과 싸우겠다는
파도의 반란
조개를 구워 먹지 않아도
달구어지는 제부도여
바닷물 속 깊은 곳에
목숨 같은 산을 품고
착한 아내처럼
침묵하는 불멸의 섬
죽어야 산다는
단 한 번 고백으로
남은 생을 모두 던진 산같은 사람
낡은 배 한 척 끌고
아무도 울지 않는
먼 섬으로 간다
50
5부 송축의 노래
청평에서
복숭아 속살 같은
안개가 흩어지고
청평에 지는 해가
붉은 입술 찍으면
강물에
씻긴 그리움
부서지는 은빛 물결
서종면 가는 길목
첫사랑을 버리고
밤새워 우는 바람
골짝 깊은 그림자여
천년을
껴안고 싶은
아내 같은 강아지풀
52
당남리에서
푸르게 흘러가는
여주 땅 당남리에
소리 없이 쏟아지는
꿈을 담은 꽃잎 꽃잎
메마른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은혜의 집
나눌수록 커져가는
흙 냄새나는 사람아
물 따라 맴도는 그림
팽이 같은 동화 마을
작아서
더 단단한 돌
둥근 우주 이루리라
53
포도밭에서
해바라기 떠나간
과수원 그늘 아래
깨알 같은 세월 안고
밭을 매는 늙은 부부
그 속에
자잘한 포도
익어가는 자식 사랑
아내의 바구니엔
황홀한 땀방울들
누런 들판 끌어다가
남은 얘기 들어 본다
노을 속
탐스런 열매
신방新房보다 더 붉어라
54
양평 가는 길
산들바람 불러내어
뿌려놓은 색채 언어
중미산 중턱에 올라
그림 같은 시詩가 되고
못다 한
붉은 사랑만
감나무에 걸어둔다
안개 젖은 양평 길에
상기된 볼 보듬던 날
햇빛 같은 당신 말씀
산자락에 불길 되고
가슴 속
수줍은 단풍만
지울 수 없어 눈부시다
55
퇴촌 가는 길
퇴촌 가는 초행길에
산불처럼 번진 철쭉
거센 바람 불길 타고
붉은 혀를 내 밀어서
뼈 하나
남기지 않고
산과 물을 태운다
북한강 줄기 따라
퇴촌으로 흐르는 물
산을 태운 철쭉 기행
화려한 피바다 축제
차라리
연두빛 나무
잿더미로 태우거라
56
중미산 가는 길
중미산 가는 길에
떠나야 할 그대를 안고
낙엽 진 길 위에 눕는다
껴안을수록
작아지는 그대
낙엽을 주워 귀에 대어본다
단풍이 감추고 있는 말
차마 하지 못한 말
석양에 젖어
붉게 번져가는데
내 귀에 들리는
고향의 음향音響
57
워커힐 강변에서
워커힐 강변에 해질 무렵
코스모스 떼 지어 흔들리던 날
불어오는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는 사내
칼날 같은 추위에도
쪼개지지 않는 사내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에 놀라
하얀 그리움을 쏟아낸다.
워커힐 강변에 해질 무렵
가을풀 무성하게 떨리던 날
저무는 황혼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내
이제 기차만 지나가도 덜컹대며
어머니 자궁 속 살짜기 헤치고
따스한 리듬을
한 몸 되어 연주한다.
58
샤모니 마을에서
젖빛 구름 눌러쓰고
몽블랑은 하늘 사랑
만년설 전설 아래
그리움을 너울 쓰고
마지막
시詩 한 줄이 겨워
차마 발길 못 돌리네
할아버지 손자가
손잡고 걷는 거리
해바라기 기름에
햇감자 익어가고
하늘도
멈추는 마을
꽃잎마저 옷을 벗네
59
강화도에서
물속의 물 하얀 아픔
배꽃으로 핀 강화도
살갗에 묻어나는
소금보다 더 짠 사랑
빛조차
쪼갤 수 없어
하늘과 바다 사무친다.
산속의 산 내려와 멈춰
바다에 뜬 석모도
갈매기 깃털에 안겨
외포리 돌던 바람
손끝에
기다린 사랑
꽃잎도 눈감는다.
60
연꽃 군락에서
천년전 첫사랑이
영겁의 세월 돌고 돌아
하늘과 땅 만나는 날
연꽃으로 피어나서
목숨껏 사랑한다면
눈물로 용서하리
만년전 태고의 별
구름타고 떠돌다가
연밭에 내려와
서로의 뿌리 휘어감고
청정히 깊어간다면
그 곁에서 침묵하리
수종사 산자락을
수천 광년 돌고 돈 별
아픈 이마 마주대고
진흙 속에 연잎되어
옷 벗고 물이 되어간다면
눈감고 용서하리
61
양평에 가면
양평은 신혼新婚의 강
은하수가 쏟아지고
신랑 각시 초록 신방新房
감미로운 피리소리
못 다한
신라의 천년
깊어가는 산이어라
양평은 신혼新婚의 섬
부서지는 갈비뼈여
보기에도 아까운 이름
눈물 많은 별이 되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산이어라
62
안면도에서
눈물 많은 아내와 함께
안면도에 간다
우리보다
먼저 바다에 내려와
사랑을 기다리는 안개…
다시 안개…
고남리 정류소에도
할미 바위 위에도
삼십년 전 동백섬에 내리던 눈처럼
삼봉에 내리는 안개…
온몸에 젖어오는
안면도의 안개는
시시의 조각이다
잃어버린 옛 그림처럼
어린 시절 어깨에 내리던 가난처럼
그리움 속에
사라지지 않을
안개의 행렬…
안면도의 안개는
첫사랑의 눈물이다
63
문산행 기차를 타고
만나야 할 사람은
내버려두어도
어느 역에서든 만나게 되고
떠나야 할 사람은
갈 곳이 없어도
서울역을 떠난다
눈내리는 간이역 추억과
흔들리는 아내를 껴안고
문산행 경의선을 탄다
겨울 하늘이 차가울수록
지는 해는 아름다운데
뒤로 되돌아갈 수 없는
기차의 운명
하나가 되지 않아도
울지 않는 레일의 바퀴처럼
지친 어깨를 받쳐주는
숭고한 배경
겨울밤은 깊어가는데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고
기차는 달린다
64
비내리는 과천
나보다
내 이름을 더 많이 써 본 사람
그대의 별이 될 수 없을 때
겨울비 내리는 과천에 간다
나보다
내 이름을 더 잘 쓰는 사람
그대의 길이 될 수 없을 때
동물원 지나 미술관에 간다
미술관 뒤
오솔길에 겨울비만 내리고
얼어붙은 호수는
멀어져만 가는데
그대와 꽁꽁 묶여
첫눈을 기다린다
65
비내리는 몽촌토성
덜 익은 은행 열매
비에 젖어 떨어지고
토성에 코고는 소리
가을 문을 두드릴 때
그리운
사투리처럼
가시내야 사랑한다
키 큰 나와 키 작은 너
한 그림자로 포개지고
토성에 잘 익은 사랑
가을이 죄스러울 때
빗소리
깊어갈수록
가시내야 젖지 말자
66
6부 몽골의 꿈
몽골에서 Ⅰ
몽골에는 무덤이 없다.
징기스칸의 고향
핸티아이막 가는 길에도
드넓은 초원은 있건만
찬란한 무덤은 없다.
나의 그리움은 끝이 없고
해지는 쪽으로 가도
내가 숨어야 할 무덤은
어디에도 없다.
아름다운 그대에게 가는 길은
허물어져가는 파멸의 드라마
나를 움직이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차라리 지워버린 첫사랑이다.
68
몽골에서 Ⅱ
잊을 수 없는 것을 잊어야 할 때
자이승 전승탑 위에
비둘기 떼가 우르르 날아와 앉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초원의 파노라마 앞에
오히려
가서는 안 될 우리의 길이
운명처럼 보인다.
첫 여인에게 노란 들꽃으로
경배하던 날
비좁은 문이 열리는 생의 환희
이 몽골 초원의
환한 들꽃이
그냥 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뿌린 사랑이
물처럼 깊이 침전한 까닭이다.
69
몽골에서 Ⅲ
러시아제 지프차를 타고
장정長程에 올라 달려온
테렐지
세월을 담은 초원 위에
아기자기 빚어진 게르 천막촌
멀리 둘러보면
날카로운 절벽과 절벽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끝없는 동굴처럼 이어지는데
발 닿는 곳마다 천혜의 풍광
하루 종일 바위만 보고
하루 종일 초원만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죽어
서러운 테렐지 절벽에 설 수 있다면
손길 닿지 않는 독립된 봉우리 되어
아래만 아래만
내려다보며
왔던 길 되돌아가지 않으리
70
몽골에서 Ⅳ
그대가 없어도
몽골초원에 황혼은 온다
슬픈 나라에 그대를 남겨두고
홀로 찾아온 울란바타르
눈길 닿는 곳마다 끝없는 초원인데
낮게 깔리는 첼로음처럼
내 마음에 밀려오는 푸른 리듬
새는 날지 않아도
톨강江은 저 홀로 흐르고
너무 작아서 아름다운 그대
황혼에 홀로 서 본 사람만이
그 아픔을 안다
71
몽골에서 Ⅴ
몽골초원에 황혼이 오면
먼 능선이 부드러워지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운명처럼 다가온다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는
고비사막의 모래알처럼
아직도 떠나지 못한
노을빛 첫사랑이
손길 닿지 않는 저 초원 위에
붉은 꽃잎으로 번져오면
지워버린 길을 따라
그대에게로 간다
72
홉스골에서 Ⅰ
무릉 땅 뭉게구름
물빛으로 세안하고
홉스골에 얼굴 비춰
세상그림 다 지울 때
물에서 건져낸 사랑
찬란하다 아침풍경
초원의 메뚜기가
발밑에서 몸을 털고
올망졸망 게르촌에
하얀 연기 피기 전에
찬이슬 들꽃에 달려
몽골의 아침 적시운다.
73
홉스골에서 Ⅱ
작아서 떨지 않는
그루터기 야생들꽃
몽골인 태운 말馬이
숲 속 멀리 사라질 때
초원에 맞닿은 호수
황혼보다 고운 사랑
물새가 알을 낳고
수초들 몸을 떨 때
호수 건너 노랑 들꽃
그림자가 아롱아롱
철없이 보채는 물결
차가울수록 맑아진다.
74
비내리는 홉스골
게르 천막 빗소리는
머릉 호르* 음악소리
철난로 타는 장작
번져오는 아내사랑
깊은 밤 별 쏟아지는
홉스골의 전설인가
*머릉 호르 : 몽골 전통악기
75
몽골 초원
작아서 떨지 않는
꺾지 못할 노랑 들꽃
홉스골 청정호수
산그림자 아롱아롱
아파도
울지 않는 물
맑을수록 차가웁다
몽골인 태운 말이
숲길 따라 사라질 때
올망졸망 게르 천막
머릉 호르* 푸른 리듬
초원에
피지 못한 꽃
뿌리만 깊어간다
*머릉 호르 : 몽골 전통악기
76
고비사막에서
낙타의 털 쓰다듬는
푸른 햇빛 고요하고
덩어리 없는 세상
나마저 가루 된다
사막은
경건한 폐허
기도하는 침묵의 땅
77
7부 여인의 숲
여인 1
미끈한 다리 사이
깃털들의 보금자리
사랑의 목소리로
새새들이 모여앉아
깊이를
말할 수 없는
신비한 숲이 된다
안개처럼 뿌연 숲 속
오아시스 물 마시면
내 생애 최고의 축제
부드러운 털의 무희
첫 공연
첫 눈물 앞에
마지막 그림자 된다
79
여인 2
비둘기 깃털들이
평화로운 안개마을
동백꽃 향기가
살 속으로 기어들고
알싸한 샘물이
입안에 쏟아진다
털 하나 남기지 않고
재가 되는 황혼 무렵
숲속 가득 단내 풍기며
다가오는 아내여
여기서 머리칼 부비며
끝끝내 함께 살자
80
여인 3
안개 덮인 숲 속에
옷 벗고 달려 온 별
늙지 않는 머리털이
풀처럼 쓰러진다
첫 살결 분홍향기
싱그럽게 열리는 날
아찔한 꿈 화음和音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81
여인 4
발등만 바라봐도
눈물나는 내 사랑
무위의 몸짓으로
내 뼈를 녹이는데
죽어도
거역할 수 없는
비단같은 폭포여
황홀한 눈물이
등 뒤에서 터지고
동백꽃 긴 애무에
새 눈 트는 버들가지
나 그대를 만나려고
오늘까지 살아왔다
가난한 아내여
우리 사랑해도
전깃줄에 닿지 말자
털끝 하나 다치지 말자
82
아내
화선지 가득가득
당신이름 적어놓고
먹물 묻혀 별 그리니
당신 얼굴 모두 된다
속되게
말할 수 없는
그리운 나의아내
노랑장미 고운아내
내 몸속에 조여들고
눈부시게 하얀 속살
모시한복 도도하다
이 땅에
다시없을 사랑
끌어안고 무너진다.
83
아궁이
꽃사슴 엉덩이같이
작고 작은 아궁이여
밑구멍 활짝 열고
더운 바람 몰아주면
시뻘건 불기둥이
동백꽃을 피운다
내 평생 처음 만난
화력 좋은 아궁이여
짐승의 혓바닥과
힘찬 입김 들이대면
첫사랑 아찔한 숨결
배꽃처럼 토한다
84
배꼽
창세기 이전부터 꽃씨를 묻어 놓고
우주의 무게 중심 점 하나 고요하다
진리를
차단한 구멍
자궁보다 슬픈 고독
눈 뜨고 지킨 한 몸 탯줄 잘라 빛이 되고
살 속에 남긴 도장 그 자리 거룩하다
못 다한
원죄의 뿌리
목숨보다 깊은 침묵
85
배꼽 사랑
태초에 문을 열고
내가 찾은 배꼽 구멍
샤갈의 마을처럼
하얀 꽃이 피어난다
달팽이
소우주 사랑
눈을 감고 기다린다
뿌리 깊은 탄생의 씨
거룩한 평화의 방
볼 수 없는 바닥까지
길도 없이 내려간다
영혼의
거대한 감옥
깊은 울음 채워간다
86
어린 누이
천년 전 어느 오월
꿈에 본 그 얼굴이
나비처럼 날아와
내 곁에 앉았는데
볼수록
어여쁜 눈매
주먹만한 어린누이
어린누이 들쳐 업고
재래시장 달려가서
고운발목 어루만져
파랑신발 신겨보니
못다 한
하늘 큰 사랑
내 안에 꼭 들어온다
87
작은 요강
외로울수록 작아지는
자궁 닮은 꽃사과여
이슬 안개 쏟아지는
생명의 강 소우주宇宙에
마침내
아랫도리 벗고
익어가는 아내의 방
슬플수록 침묵하는
천근 무게 눈물단지
어둠과 빛 그나들며
알몸으로 숨쉬는 밤夜
죽어도
내 곁에 남을
고향 같은 아내의 섬
88
꽃 같은 아내
내 몸속에 살고 있는
들꽃 같은 아내여
아름다운 계곡에
옥류천 부어 놓고
하늘 보고
밤새우면
꿀이 솟는 우물가
꿀 방귀에 취하여
꽃 속에 들어서면
그대 몸 한 조각이
내 몸의 전체 되고
무념으로
꿀범벅 되어
젖어드는 눈물 사랑
89
서평 1
유성규柳聖圭(시인, 시조생활사 대표)
문복희 시인이 <첫눈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집을 세상에 펴낸다. 이 시집은 2005년 몽골 울란바타르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숲으로 가리>란 제일 시집에다 그 후 창작된 수십 편의 시를 합편한 작품집이다. 학문 세계에서 나름대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한데다 시인으로서의 문명文名 또한 날로 뚜렷해지는 문교수의 문학관은 주객主客을 어우른 듬직한 바가 있다. 바지런하고 야무지며 착실한 사람이어서 그는 매사에 허술한 구석을 보이지 않는다.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 말고도 대한 YWCA 실행위원, 한국어문회 편집위원, 울란바타르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는 대활동가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학문세계와 문화세계를 섭렵하는 가운데 축적된 역량은 <한국 신선시의 이해>, <생활국어의 이해>, <표현과 창조>를 비롯한 그 밖의 여러 저작물을 간행하기에 이른다.
이런 든든한 식견과 남다른 심미안으로 창출된 그의 시는 대단한 중량감을 지니며 태어난다. 그의 시는 대체로 자연예찬에 뿌리한 작품이 주조를 이룬다. 그의 시는 맑고 밝으며 신선한 것이 특색이라 하겠는데 여기에 섬세한 맛이 보태어진다.
그의 문학적 재질은 <時調生活>지를 통해 등단할 때부터 이목을 끌었거니와 다음의 작품을 통해 문복희 시인의 진면목眞面目을 엿보게 되리라.
꽃이 되기 전에
어린 새싹 눈이 트여
아내 같은 몸의 곡선
평생 아낀 씨앗 품고
차라리
거꾸로 매달려
깨지지 않는 종鐘이 되리
90
하늘도 보지 않고
별을 품은 작은 백자白磁
늘어진 인연의 줄기
풍경風磬처럼 흔들린다
그 안에
담지 못할 사랑
차오르는 원죄原罪여 !
('은방울 꽃' 전문)
은방울꽃을 두고 깨지지 않는 종이 되어 거꾸로 매달리라고, 곧 구원久遠을 노래하며 사랑으로 남으란다. 줄기 끝에 풍경風磬처럼 내달려 별을 따먹고 안으로 순수를 간직한 채 백자의 질박質朴을 겸비하란다.
이렇게 시적 화자는 은방울꽃 같이 살고 싶은 것이다. 윗글에서 알맞은 메타포는 이 시를 격조 있게 다스렸다.
그대는
40 대 여인의 잔잔한 눈웃음
차마 말하지 못한
시린 바람 모아서
처절한
가슴 속에서
차갑게 핀 지등紙燈이다.
그대는
물에도 젖지 않는 얼음꽃
뜨락에 내리는
빗방울 마다 하고
하이얀
그리움으로
출렁이는 찻잔이다.
91
겨우내
몸서리 친 그 바람을 못 잊어
차라리 4 월 하늘
꽃이 진 그 자리에
부활은
푸른 아픔으로
돋아나는 침묵이다.
('백목련' 전문)
백목련의 내면세계를 도출해 내는 솜씨가 능란하다. ❬40대 여인의 잔잔한 눈웃음❭같은 백목련, 그 웃음 뒤의 바람을 함께한 나날들의 아픔을 상기한다. ❬차라리 4월 하늘 꽃이 진 그 자리에 부활은 푸른 아픔으로 돋아나는 침묵이다.❭ 이렇게 개화開花와 낙화洛花 사이의 눈물겨운 의미를 침묵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시에 동원된 수사학이나 미학미학은 매우 주목할 만한 대목이었다.
그날의 울음 그리워
이 산 저 산
여위어 간다
바람에 몸 맡기고
흔들리는
작은 의지
하얗게
숲 속에 남아
정밀靜謐로 쌓이련다.
('낙엽' 전문)
92
한 마디로 깔끔한 맛을 주는 단수의 시조였다. ―이 산 저 산 여위어 가는 낙엽― 이렇게 가볍게 스쳐 나간 한 줄 글이 짙은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여위어 떨어져 버린 그 자리는 작은 의지가 놓일 자리요, 작지만 아주 큰 하얀 정밀靜謐로 번질 자리라는 것이다.
한 낮에
네발달린 짐승 되어
잠들 수만 있다면
내 비록
천년을 일어나지 못한다 해도
갈비뼈
부서지는 형벌
무릎 꿇고 받으리
벌건 대낮
피 토하는 꽃잎 안고
잠들 수만 있다면
다시는
눈뜨고 만나지 못한다 해도
마비된 나비의 전설
불면으로 채우리
('낮잠' 전문)
네 발 달린 짐승의 그런 꾸밈없는 상태로 쓸데없는 근심을 털어버릴 수 있는 낮잠 같은 시간이 현대인에게 얼마나 그리운 시간인가. 그런 낮잠 속에 피 토하는 꽃 같은 정열의 사람을 가슴 깊이 묻어둔 채 피로를 풀고 싶다고 노래했다. 현대인의 오뇌를 절묘하게 그려낸 가작이었다.
젊은 꿈 푸른 이끼
발 밑에 벗어놓고
맑다 못해 옥玉이 된 돌
밤하늘에 올려놓고
93
오히려
울창한 숲 속
낮은 데로 정좌한 당신
멀리서 바라보면
외로운 작은 우주
잎 떨어진 겨울 나목
곁에 두고 달래주듯
때로는
빈 가슴으로
큰 산처럼 다가온다
찬바람 지나간 자리
응결된 그리움이여
그 안에 불같은 숨결
침묵으로 다스리니
천년을
물 속에 있어도
썩지 않을 나의 사랑
('바위' 전문)
외로운 작은 우주 같은 사람, 때로는 빈 가슴으로 큰 산처럼 다가오는 사람, 멀어질수록 돋보이는 운명 같은 사랑을, 다스리기 힘든 이 그리움을 망부석望夫石 같은 것이라고 노래한다. 깊디깊은 속내와 간절한 사연이 알맞게 결이 삭은 리듬을 타고 잘 표출되었다. 매우 볼륨있는 시였다.
문 시인의 시세계를 대충 더듬어 보았다. 앞으로 더욱 빛나는 시를 선보여 문운文運이 남다르기를 빌어 둔다.
94
서평 2
이석규(시인, 경원대학교 대학원장)
Ⅰ
현대 경영학에서 인간관계(humen-relation)를 '갈등의 관계'로 보는 경향이 갈수록 탄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사실상 최근의 신문을 비롯한 매스컴이 전해주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투쟁과 쟁취가 사회질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인간본래의 모습은 간 곳 없고 이른바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의 자리에 양두구육羊頭狗肉의 거짓과 기회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게다가 기본적인 체면조차 무시하고 그야말로 막가는 막가파식 언행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조차 무너뜨릴 만큼 심각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온 인간정신과 사회의 운행원리는 여전히 질서秩序와 조화調和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다가오는 미래 세계에서도 역시 그 원리에는 결코 변함이 없을 터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포함한 자연과 우주의 섭리가 그렇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다면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리다. 매스컴이 전하는 엽기적 사건들이 아무리 많은 것 같아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보다 수천, 수만 배 많은 인간 삶의 형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질서와 조화의 인간관계란 단지 에티켓이나 예절을 지키는 데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를 이해함이며 인정함이며 알아주는 관계이다. 상대를 허락하고 배려하고 포용하며 관용과 용서로 맺어지는 관계이다. 그것은 또한 돌봄의 관계요 보살핌의 관계이며 나아가 끝없는 관심과 그리움의 관계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관계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본원적 속성이다. 그러면서도 상황에 따라 아주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인간관계를 한마디로 사랑이 지배하는 관계,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꿈꾸는 인간관계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될 것이다.
사랑의 토양이 넓을수록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폭은 넓어지고 삶의 내용은 풍성해질 것이며 삶의 질은 높고 아름다울 것이다. 이런 관계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고상함이나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다움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 이미 무한한 축복의 영역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것이 설혹 어렵고 그런 속성을 생활화한 사람이 정말로 드물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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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복희 시인은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하여 경건함을 지니고 사는 보기 드문 신앙인에 속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겸손으로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정성으로 사람을 보살피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스승이나 선배나 동료 또는 후배나 제자들에 대하여 두루 그러하다. 보나마나 가족이나 친척 친지들을 대함에도 마찬가지일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문 시인은 전술한 바,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관계를 언제나 아름답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그의 시에 일관되게 흐르는 화두話頭는 한마디로 '사랑'이다. 아니, 너무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 마치 사랑의 늪에 빠져드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그가 추구하는 사랑의 진면목은 신앙적 자기 다스림에서 연원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일출봉에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볼 때는, "한 하늘 받쳐 들고/ 물에서 솟은 생명/ 얼마나/ 사랑해야만/ 세상의 빛이 될까"(아침해 1연)라고 노래하는가 하면, 교회에서 운영하는 '은혜의 집'을 찾았을 때는 "나눌수록 커져가는/ 흙 냄새나는…"('당남리에서') 질박한 사랑을 노래한다. 그야말로 나누고 베풀고 그렇게 사랑을 되풀이함으로써 세상의 빛을 이루고자 하는 염원을 토로한다. 이처럼 두터운 신앙적 토대 위에서 그의 '사랑'이 출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적 감수성은 내면적으로 잘 정돈된 모습을 보여준다. "계미년癸未年 둥근 해가/ 복정의 새벽 창을 열면// 강물 같은 은빛 소망/ 비늘처럼 일어서고// 저만치/ 눈부신 사랑/ 가슴 가득 번저온다."('신년의 아침' 1연)
참으로 밝고 건강하지 않은가. 뿐만 아니다. 설혹 아웃사이더의 입장에 서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긍정하고 수긍하며 기뻐할 줄 아는 너그러움을 지니고 있다.
강물처럼 물결치는
개나리길 열고 가면
계절이 모인 동네
봄의 축제 한창이다
그 속에
수줍은 바람
귀를 열고 듣고 있다.('봄의 축제' 전문)
이런 식이다. 이처럼 부드럽고 훈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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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그러나 그의 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랑의 모습은 아무래도 관능적이다. 언뜻 기독교적 품성이나 가치관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아무튼 그렇다. 아니, 외면적으로 나타난 그의 사랑은 차라리 타오르는 정념情念의 화신이라 할 만큼,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며 우리에게 다가선다.
"단풍은 전과자다/ 붉은 혀로/ 여인의 목을 간음하는 당신…"('단풍' 일부)
보라. 관능적인 정념의 불길이 도저히 절제할 수 없는 기세로 활활 타오르고 있지 않은가? 그의 시조 이곳저곳에서 이 정도 강렬함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작고 슬픈 꽃잎
오래 참은 고운 입술
부서지게 껴안고
현기증 나는 입맞춤으로
노랗게 쓰러지고 싶다('입맞춤' 1연)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념은 활활 타오르기만 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이승에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의 대상은 언제나 현실부재이다. 볼 수 없는 먼 거리, 아니면 천년 뒤의 다른 세상에서나 해후가 가능한 그런 사랑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혼자서만 타오르고 혼자서만 아파한다. 그렇게 모질고 모진 사랑이다.
죽도록 사랑한 죄로
천상天上에서 유배 온 별
낮은 땅만 굽어보다
등허리가 굽어 졌나
무덤가
울지 않는 종鐘
그 모진 사랑 눈물난다.('할미꽃' 2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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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꽃만 보면 못다 이룬 사랑의 불길이 시인의 가슴을 태운다. '할미꽃'이 그러하고, '싸리꽃'이 그러하며 '연꽃'이 또한 그러하다. 원래부터 꽃과 같은 아름다운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임의 전생이 꽃이었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온통 꽃만 보면 슬픔과 사랑의 정념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의 대상이 매양 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바위를 보면 "불같은 숨결/ 침묵으로…// 천년을/ 물 속에 있어도/ 썩지 않을"('바위' 3연) 사랑의 불변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짐한다. 나아가 서로의 운명 때문에 다른 세상을 낙엽처럼 떠돌지라도 천년보다 먼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다시 만나서 목숨 다해 사랑하기를 갈구하는 사랑 지상주의적 집념을 안쓰럽게 고집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처절한 사랑 노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천년 전 첫사랑이
영겁의 세월 돌고 돌아
하늘과 땅 만나는 날
연꽃으로 피어나서
목숨 껏 사랑한다면
눈물로 용서하리('연꽃의 군락' 1연)
요컨대 그의 시에 나타난 사랑은 한 마디로 정념적인 관능의 표출이다. 그러면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적 한계 앞에서 좌절한다. 그러나 그 어떤 좌절도 그의 무서운 사랑에의 집착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언제나 마지막 단계에서는 대상의 부재로 인한 무너지는 아픔 앞에서 끝내 먼 훗날을 기약할지언정 결코 놓지 않는 애절함, 안타까움이 그의 관능적 사랑의 속성이요 질료이다. 그리하여 멈출 수 없는 그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그리움의 세계로 전도된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목마름으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의 처절함을 내포한다. 그것은 그의 운명이요, 삶의 의미이다.
그의 사랑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천년이 지나도 결코 변치 않는다는 불변적 숙명성을 지닌다. 도저히 변할 수 없는, 열병보다 심한 사랑이다. 웬만한 독자는 그만 질려버리고 말 정도로 그렇게 심한 사랑의 소만을, 아니 갈증을 추스리지 못한 채 문 시인은 마냥 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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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바, 그렇게도 탄탄한 기독교적 신앙과 밝고 건강한 심성 위에 궁극적으로 겸손과 경건을 추구하는 그의 내면세계가 어떻게 이처럼 대책 없는 불덩어리의 정열과 공존할 수 있을까? 이 이율배반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눈이 맑은 어린 새를/ 내 눈 속에 깊이 넣고
거센 물살 출렁이며/ 혀끝에서 온몸으로
아득히 녹아들고 싶다.('입맞춤' 2연)
볼수록 그리운 그대/…만질수록 외로운 손/ 호주머니에 품었다가//
천년 후/ 아무도 몰래/ 뜨겁게 사랑하리('연꽃' 전문)
그러나 위의 '입맞춤'이나 '연꽃'에서 보듯이, 관능적 정념으로 표출된 그의 시세계는 단지 피상적 모습에 불과하다. 문복희 시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안다. 그것은 몇 해 전에 다섯 살 어린 영혼을 보낸 모성의 애절한 신음이요, 한 서린 통증의 인간적 몸부림이라는 것을. 외면상으로 편안해 보이지만 그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통증이요, 매 순간 가슴이 무너지는 모성애의 처절한 외침인 것이다.
Ⅲ
그러나 문 시인은 결국 자신을 추스린다. 툭툭 털고 일어나 자애로운 신의 품에 안겨 모든 것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다음 세상, 천년 후의 세상을 기약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에서 일어나는 냉철한 극기와 절제로 자신을 채찍질함으로써 신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성숙한 인간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날의 울음 그리워
이 산 저 산
여위어 간다
바람에 몸 맡기고
흔들리는
작은 의지
하얗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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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 남아
정밀靜謐로 쌓이련다.('낙엽' 전문)
아직도 남아 있는 아픔을 육신이 여위어 사그러질 때까지 모든 것을 섭리에 맡겨버리는 성숙함을 보여준다. 이와 유사한 작품을 하나 더 보자.
천년을 기다리며
흙 속에 갇힌 뿌리
잔가지에 맺힌 비원悲願
가늘게 떨리는 날
숨었던
노을 자락 하나
산 너머로 잦아든다.('겨울 나무' 전문)
이 역시 심미적 감수성을 드러내되 내적으로 절제하는 가운데 서정성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온전히 비우고 운명을 수용하는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갖는다. 이를테면 인간의 의지가 상당히 균형이 잡혀있으면서도 개성 있는 이미지로 형상화된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두 편과 정서적으로 맥락을 같이하는 시조들은 내면적으로 잘 정돈된 성품과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대한 비원悲願 끝에, 현실을 직시한 한 성숙한 여성의 품위 있는 자기 다스림의 과정이 형상화 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냉철한 절제미를 통하여 마침내 조화를 이루는 경지를 지향한다.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그의 시조 중에는 아날로그적 감각을 넘어선 현대적 시각에서의 비유적, 상징적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는 것들이 눈에 띈다. 이러한 작품들은 종래의 시조가 추구하는 시조형식의 한계를 넓혀주는 노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점을 주시하고자 한다.
특히 등단 경력으로는 이제 신인 티를 벗어나고 중견시인의 범주에 들어섰다고 하겠지만, 이미 고전문학을 전공하고 상당한 세월 동안 대학 강단에 선 분으로서 튼튼한 기초와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기를 당부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리듬감각의 시험이나 개성 있는 이미지 창출 등으로 현대시조의 언어사용의 아름다움을 계발하고 마침내 우리 시조단의 발전을 위하여 커다란 업적을 이룰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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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처절한 자기응시와 극기를 통한 차원 높은 절제미와 이미지 창출에 성공한 작품을 소개 하면서 이 글을 줄일까 한다.
그대는
40 대 여인의 잔잔한 눈웃음
차마 말하지 못한
시린 바람 모아서
처절한
가슴 속에서
차갑게 핀 지등紙燈이다.
그대는
물에도 젖지 않는 얼음꽃
뜨락에 내리는
빗방울 마다 하고
하이얀
그리움으로
출렁이는 찻잔이다.
겨우내
몸서리 친 그 바람을 못 잊어
차라리 4월 하늘
꽃이 진 그 자리에
부활은
푸른 아픔으로
돋아나는 침묵이다.('백목련'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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