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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또는 이오섬
한자어로는 유황도….
이오지마 전투하면 바로 이사진이 유명하죠??
1944년 10월 레이테만 해전 이후
사실상 사라져버린 일본의 기동함대.
이제 미해군의 함대에 대한 공격은 이제 가미가제 애덜들이 담당합니다.
그리고 45년 1월 초 미군이 필리핀 맨위에 있는 수도 마날리가 있는 섬인 루손섬에 상륙합니다.
뭐 필리핀 함락또한 시간읽기에 들어가지요.
자 이제 미국의 목표는 일본 본토 아래쪽에 있는 남방제도의 오카니와와 이오지마가 됩니다.
남방제도라 함은~~
도쿄만 입구에서부터 시작해서리, 마리아나 제도까지 걸친 550k에 걸친 지역으로
일본 어선들이 물고기 잡아 올리던 지역입니다. 일본애들 지금도 포경선으로 고래 잡아서 욕먹잔아요. 바로 고래 잡으로 다니던 동네가 이 남방 제도인데,
이제 여기까지 미군이 들이 닥친거지요.
자 그 남방군도에 위치한 이오지마섬…
* 1945년 2월 의 전황도 아직 군대군대 일본군 점령지가 보이지만, 보급이고 뭐고 다 끊여서 고립된 곳이 대부분입니다
빨간 박스안에 섬이 이오지마
*닭다리 또는 스테이크 닮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요기닭다리 끝에 산이 하나 있습니다.
* 끝에 산이 하나 보이시죠.. 요게 수리바치산이라는데 요 산땜에 이오지마가 처절한 전쟁터가 되는 겁니다.
이섬의 위치가 미군이 점령한 싸이판과 도쿄와 딱 중간 지점이었습니다.
따라서 미군은 이오지마 점령해서 B-29 날리면 이제 2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에 도쿄가 있는 거지요.
반대로 B-29가 안전하게 도쿄까지 날라가기 위해서는 이 이오지마를 점령해서
B-29를 요격하려는 이오미자의 일본군 항공대를 괴멸 시켜야만 했던 전략적 요충지 였으니
그 희생을 치뤄가며 양쪽이 붙었겠지요.
자 일본 놈들도 꼴통은 아닌지라, 진작부터 이 이오지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09사단이란 사단 하나와 패전한 주변 섬들의 병력을 끌어모아 오가사와라 병단 이라는 이름으로 2만명 정도의 방어 병력을
이오지마와 주변 섬 여기저기에 배치를 합니다.
그리고 구라비야시라는 장군 하나를 방어 책임자로 44년 8월에 파견 하는데,
문제는 구라비야시 장군이 다른 일본 장군들처럼 멍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리비야시 다다미치 중장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로 유명한 장군이죠.
*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는 배우 와타나베 칸 이 구리비야시 장군역으로 나오지요
미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며 미국 하바드대에서 공부한 , 현실을 직관하는 냉철한 현실 주의자라, 애초부터 전쟁을
반대했던 인물이었는데, 전쟁이 이리 돌아 가니 어쩔 수 없이 이오지마의 방어 사령관으로 온겁니다.
이오지마 도착 날부터 미군 항공기의 공습을 받고 ‘아~~ 이거 장난 아니구나’를 경험했다지요.
일본군도44년 여름부터 이오지마에 비행기 모아두고 공습하러 날라오는 미군기들 요격을 나서는데,
헬켓과 조종사들의 기량 차이가 어느정도였냐 하면,
미군 헬켓비행대들은 폭탄을 달고 이오지마로 날라오는데, 폭탄달고 오면 무거우니까,
요격나가는 제로기가 유리하잔아요? 그런데 폭탄 달고 오는 헬켓한테도 당하는 지경인겁니다.
평균 5대 1의 항공전력 손실이 벌어집니다.
일본군의 공군 에이스로서 나중에 ‘대공의 사무라이’를 쓴 사카이 사부로도 이 아오지마섬
공중전에 참전 했는데, 한번의 출격에 너무많은 제로기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헬켓의 능력에 충격을 받았다고
할 정도 였으니까요..
만약 미군이 이 이오지마를 6개월만 먼저 선제 공격해서 상륙작전 했다면 , 괴멸된 공군력에 지하 벙커 시설도 없던지라 아주 손쉽게 점령했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워낙 여기저기 다니기 바쁜 미군인지라 그때 이오지마 상륙을 신경쓸 겨룰이 없었지요
암튼 구라비야시 중장의 생각은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거 그냥 시간이나 벌어서 대본영에서 무언가를 할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자~~’
라는 현실적인 생각을 합니다.
방어시설 열라 강화하고 미로 같은 지하 벙커 건설하고 진짜 난공불략의 요새를 만드는데
주력합니다.
자 어느 정도의 지하 요새 였느냐 하면 일본에서 지하 갱도 건설 전문가들까지 불러
지하 암반에 2층 3층의 지하 갱도를 팠는데, 환기문제, 폭탄 피폭시 배기 문제까지
세심하게 고려하여 요새를 건설합니다.
섬 여기저기 방어 구역도 촘촘하게 잘 만들고
만주에 있는 26전차부대라는 나름 기계화부대까지 불러서 부산항에서 배로 요코하마 거처 이오지마까지 불러 오는 철저한 준비를 하지요.
*당시 비교적 신형인 치하 충전차까지 이오시마에 배치합니다.
자 거기다 마리아나 제도가 생각보다 일찍 함락되는 바람에 여기저기 있던 수송선이며 수송물들이
이왕 갈 때 없어진거 그냥 이오지마에라도 던저주자 하는 바람에, 손실도 컸지만 도착하는 물자들도 엄청나게 이로지마로 들어 옵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 또한
“야 ! 씨바 니네 절대 칼 빼들고 반자이 어택 그런거 하지마, 하나도 폼안나,
그리고 내아래로 지휘관들 잘들어! 각자 지키던 방어선 뚤리면 할복하네 뭐합네 함서 부하들 앞에서 생쑈하지 말고 다음 방어선까지 부하들 한명이라도 더 살려서 잽싸게 토껴와~~
우리는 어케든 끝까지 살아남아서 미군애들한테 총 한방이라도 더 쏴야 한다~~
미군애들 10명 죽이기 전에는 죽지마라”
* 반자이 돌격도 무조건 하는게 아니라 위와 같이 대열을 맞춰서 지휘관이 칼들고 뒷놈이 깃발 들고
이러고 돌격헸다고 합니다.
구라비야시 중장 이전에 띨빵한 일본군지휘관들에 비교하면 이인간 너무나 탁월한 지휘관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미군은 그까이 이오지마 일주일! 그래 딱 7일이면 끝장낸다!
라는 야무진 생각을 합니다.
자 그래도 상륙부대별로 상륙지점 나누고, 상륙장비와 Duck과 같은 신형 장비들
줄줄이 준비 시키고,
어느정도 이오지마가 요새화 됐다는 정보도 알고 있던 터라, 엄폐 은폐 와 지뢰지대 통과등의
나름 만반에 준비와 함께. 티니안 섬등에서 모의 상륙작전등을 훈련합니다.
*미국의 상륙 마스타 플렌 섬의 끝에 수라바치산에 엄청난 요새가 있다는걸 몰랐다는... 그리고 서쪽 빨간 지역은
비교적 경사가 심해 상륙부대는 동쪽 해안을 주요 상륙지점으로 잡습니다.
그리고 소규모 병력이 남아 최후의 발악을 하는 섬 몇군대에 상륙작전을 펼치면서
나름 신병들에 대한 실전 경험까지 쌓아주게 합니다.
거기다 44년 연말에 미군의 함선 건조 능력또한 최고 정점을 찍습니다.
수만명을 동시에 상륙하는거는 일도 아닌 함정 숫자를 미군이 가지게 되죠.
자 이런 모든 준비가 끝나자
1945년 2월15일 16일 2틀에 걸쳐 홀랜드 스미드 중장이 지휘하는 3,4,5 해병사단 상륙병력 7만에 상륙작전을 지원할 지원 병력 4만등 총 11만의 병력이 미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이오시마 상륙을 위해 사이판을 출발합니다.
1945년 2월 13일 이미 구리바야시 중장은 사이판 북쪽에 160척이 넘는 배들이 출항을 준비중이라는 정보를 입수를 하지요…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이상황을 받아 들입니다.
이미 그동안의 최선의 준비를 끝낸 구리바야시 중장 이하 이오지마 수비대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후준비를 합니다.
1945년 2월 19일 이오지마의 화창한 아침
미해군의 터너 제독이 한마디 했다고 하지요 ‘참 상륙하기 좋은 날이다~~’라고
이오지마 섬 앞바다에 450척의 함선들이 그 모습을 들어냅니다.
한마디로 물 반 배 반 이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6시반부터 상륙작전 예비 사격이 시작됩니다.
전함에 이은 원거리 사격이 끝나자 로켓포를 장착한 구축함들이 해안 가까이 다가와
근거리 포격을 가합니다.
그리고 멀리서 상륙을 기다리던 미 해병대들이 상륙주정에 탑승하고 하나둘씩 출발하지요~
*이오지마로 향하는 해병 제 4사단의 LVT들
그리고 포격이 끝나자 2파로 함재기 들이 날아올라 이오시마 섬 구석구석에 폭탄을 떨굽니다.
특히 이날 항모 에섹스에서 날라오른 코르세어 전투기 부대들은 놀랍도록 낮게 날으면서,
정확한 위치에 공격을 가함으로서 보고있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듦니다.
*이오지마 일본군 거점에 미사일 공격을 하고 있는 콜세어
거기다 뒤이어 마리아나 비행장에서 날아온 b-24 레베레이터기의 폭격까지
한마디로 이전에는 볼수 없었던 초 스펙타클한 공격을 이오지마에서 행하지요.
*이오지마 상공의 B-24 레버레이터 폭격기
그리고 잠시후 드디어 9시 첫 상륙부대가 이오지마 섬에 내립니다.
이번만큼은 미군도 탄막사격을 펼처, 혹시라도 덥칠 일본군의 상륙부대 공격을 대비해서
상륙부대가 첫발을 내딛는 순간까지 쏘아댑니다.
*상륙 직전의 모습~우측으로 수라바치 산이 있습니다.
자 그러나 어마무시하게 많은 일본군 병력들이 땅속에 숨어 미군이 들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때까지 아는 미군은 없었습니다.
차례대로 미해병대들은 주어진 상륙지점으로 상륙을 시작합니다.
LVT(4)들이 먼저 상륙해서 엄폐와 화력 지원을 해주는 방식으로 차례차례 상륙을 했고,
상륙부대는 별 다른 저항 없이 상륙에 상공합니다.
자 그러나 거기까지,
일본군은 상륙해안에 모든 화력을 집중해 두고 있었습니다.
상륙전에 공격하면 상륙부대들이 흩어트리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흩어진 미군을 공격하기보다
해안에 상륙해서 바글바글한 상태에서의 공격을 준비한것이었습니다.
거기다 아오지마 해안이 구조가 골때리는데, 해안에 상륙하면 바로 모래 언덕들이 주욱 펼쳐저 있는데, 일단 이모래 언덕을 넘어야 평평한 땅이 나온다는 겁니다.
*해안에서 이렇게 모래 언덕을 넘어야 합니다.
9시 20분 구리바야시 “전부대 포격하라!!!!!!!!”
그순간부터 해안으로 쏟아진 폭탄은 미해병대가 이전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공격이었던 거지요.
특히 양쪽의 수리바치 산과 모토야마 고원에서 떨어지는 해안포의 공격은 엄청난것이었습니다.
뭔가 숨기위해 참호를 파려고 해도 이오지마 섬의 모래는 부드러운 화산재인지라 삽으로 흙을 파면
다시 모래들이 흘러 내려 구멍을 매꿔버리는 최악의 환경이었습니다.
맷집이 되어야야할 LVT들이 이 모래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너무흙이 부드러우니까 헛바퀴도는겁니다.
* 이오지마 해안에서 부서진 미군 전차들
뒤이에 도착한 셔먼 전차들도 이 해안에서 별 도움을 못줍니다.
가까스로 해안 지대를 탈출해서 내륙으로 들어가자 마자 나오는건 바로 지뢰지대와 일본군의
기관총 진지들이었습니다.
특히 신병으로 이루어진 해병 5사단은 그나마 고참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가까스로 해안지대를 벗어나는데 성공합니다.
암튼 이렇게 저렇게 상륙한 상륙부대, 해안 지대를 벗어나자 섬의 중간 지점까진 큰 저항없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자 여기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오마하가 더 잔혹했냐? 아니면 이 이오지마가 더 잔혹한 상륙작전이었냐를 묻는다면 당연 이오지마 입니다.
오마하는 해안의 해안벙커 지역만 통과하면 됐지만, 이오지마는 해안지대를 빠져나와서도
산 꼭대기에 쏟아지는 대구경 포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했고,
산꼭대기에 있던 관계로 2파 3파로 상륙하는 상륙부대들도 이포격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는 것이죠. 어디 오마하와 비교를… 비교 불가입니다. ~~~
* 나중에 수라비치산을 점령한 이후에 화염이 사라진 뒤의 사진
우리가 본 미니 시리즈 영화 퍼시픽의 주인공인 ‘존바실론 중사의 기관총팀도 4파로 상륙한 부대 였습니다. 2파로 상륙한 부대가 진격을 못하고 있자 해안에서 병사들을 수습해 해안 벙커들을
재압해 나가다 전사하지요… 그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실화입니다.
화산재로 된 이오지마의 지형 때문에, 전차 기동이 상당히 제약이 많았던 것 또한
당초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진격하기로 했던 미군 보병들이 전차지원없이 작전을
펼쳐야 했던것도 많은 인명피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미해병대가 어찌됐던 앞으로 진격할수 있었던건, 그래도 해군의 계속된 함포사격과
비행대들의 활약으로 그나마 엉금엉금 앞으로 진격할수 있었습니다.
* 몇대 안되지만 상륙당일 가져온 이 로케트포탄 발사 차량이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미군의 105m 포병진지
첫날 요만큼 진격하고 비행기 활주로까지 도착하자.
해안 교두보 확보 했으니 미군은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합니다.
* 상륙첫날 해안쯕으로 겨우겨우 교두보를 확보 하지요..
이떄 상륙군 사령관 홀랜드 스미스 중장~
*훌랜드 중장
“오늘밤에 저 놈들 분명 덴노 반자이 ~~ 하고 달려들거니 전부 긴장타고 있어~~”
전대원들이 전방만 주시하고 있을 때,
구리바야시 중장
“저 시키들 우리가 다 토끼고 숨어있다 반자이 어텍할줄 알거다~~~ 죄다 지금 맨앞줄에서 우리 나타나길 기다릴거다. 우린 헛점을 노린다~~~’”
해가 완전 떨어진 어둠속에 구리바야시 중장 해안으로 집중 포격을 시작합니다.
일본놈들 산속으로 완전 토낀줄 알고 해안에 널널하게 물자 쌓아두고 상륙부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시간 우박 같은 포격이 해안에 미군을 강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반자이 돌격이 아닌 3~4명씩 조를 이룬 소규모 특공대가 미군 진지 사이를 누비면서~~
어리버리 있던 미군들을 요단강 넘어로 보내버립니다.
이날밤 공격의 미국의 보급 물자들이 개판되고, 날이 밝으면 후방으로의 수송을 기다리던 부상병들이 그자리에서 치료도 못받고 죽는등 흡사 지옥도를 연상시키는 엄청난 피해를 상륙 하룻동안 격게됩니다.
상륙당일 상륙한 3만명의 병력중 10%인 3000 가까운 숫자가 전사, 실종, 부상등올 전선을 이탈하게 됩니다.
하룻밤만에 미군들도 이오지마의 전투가 일주일만에 끝날거라는 생각을 가지는 병사는 아무도 없게 됩니다.
*부상당한 미해병대원들
-후송중인 부상자및 전사자들
*이오지마 내륙지대로 들어간 LVT
상륙 다음날
미군의 목표는 바로 상륙부대로 맹포격을 가하고있는 ’스리바치산’
이게 해발고도 170미터의 산인데, 동네 앞산 수준뿐이 안되는 산인데,
함포와 항공기의 폭탄 세례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있는 겁니다.
*토치카를 공격중인 셔먼
결국 화염방사기와 폭약을 들고 공병부대가 진격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하나 하나 일본군 토치카와 동굴을 파괴 하면서 진격 하는데,
일본군 토치카 하나 하나 부술때마다 미군 피해자 또한 엄청나게 발생합니다.
21일 저녁 스리바치산 공격에 나선 미 해병 28연대 병력중 생존자는 겨우 25%에
불과한 수준으로 남게 됩니다.
*화염방사중인 셔먼
악전고투 끝에 23일 오전 10시 반경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가 계양됩니다.
*이순간을 찍은 종군기자 제임스 로젠탈의 사진이 퓰리처 사진을 받게 되지요.
스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가 펄럭인 이후에도 섬의 북쪽을 차지하기 위해
31일간 전투는 계속되었고, 이오지마를 완전 점령한건 3월26일 이었습니다.
자 다시 23일 스리바치산을 점령한 다음날인 24일
섬 중앙부에 있던 모토야마 비행장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들어 갑니다.
또 한번의 피나는 전투끝에,26일 비행장을 점령하는데는 성공하나,
모토야마 비행장 전면에 버티고 있던 일본군 역시
센다 소장이라는 용장이 지휘하는 혼성2여단 이었는데,
신병부대를 센다소장의 혹독한 지휘아래 몇차례의 실전을 겪으면서 일본군 최정예 부대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어느정도 센다 소장의 2여단의이 강했느냐하면 미군도 고기파쇄기란 별명을 붙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미군의 물량 공세에 전선이 돌파 당합니다.
이 돌파로 동쪽과 북쪽으로 일본군이 나뉘어 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북부에 있던 일본군들이 식수 공급이 중단됩니다.
이제 최후를 직감한 쿠라바야시 중장~
3월 16일 일본 대본영에 마지막 전보를 띄웁니다…
‘물량적 우세를 가진 육해공군의 공격에 대해 건투를 하곤 있지만 소규모 전력이 자꾸 소진된다..불타더라도 요새를
적의 손에 넘길 순 없지만 적은 전력인 탓에 병사들은 겁을 먹고 있다. 장비와 탄약도 이제 더 이상......’
이 전보를 접한 일본 대본영은 쿠라바야시를 대장으로 진급 시킵니다.
(잘싸워서 대장 시켜준건지, 폼나게 죽으라고 독일 6군의 파울로스 처럼 진급 시켜준건지는 모르겠으나, 일본 최연소 사성 장군에 등극합니다. 뭐 파울로스 처럼 항복은 안했지요.)
17일 섬의 북단 키타노바나까지 미군이 점령하자.
‘쿠라바야시 사령관 마지막 명령을 내립니다.
“전군이 최후까지 다다른 직면에서 병단은 본 17일 밤, 총공격을 결행해 적을 물리친다, 내가 선두에 선다”
그러나 이최후의 공격은 시작 하자 마자 바로 가로 막힙니다.
26일, 일본군 최후의 반격이 이루어져 쿠리바야시 대장, 이치마루 해군소장 이하 수 백명의 잔존부대가
미군진지로 공격을 개시합니다.
일본군의 최후공격은 반자이 돌격이 아닌 야습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격받은 미육군 항공대의 야영지는 정비병 등 훈련이 이뤄지지 않은 병사들이 많아 혼란상태에 빠졌고
이 공격으로 미군은 53명이 전사하고 119명이 중상을 입습니다.
한편 쿠리바야시 대장의 최후모습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돌격중에 중상을 입고 권총으로 자결하려 했는데 정확하게
맞지 않아 출혈과다로 사망했다고 일컬어지는데,
미 해병대는 쿠리바야시 대장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유해를 찾으려 했지만
계급장을 떼어 낸 후여서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쿠라바야시 장군..
이오지마 체류당시 차녀인 다카코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강한
내용이 있는데 그게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 모티브게 되지요.
잠시 편지의 한구절을 소개 한다면
'아빠는 집에 돌아가서 엄마와 다코짱(그는 다카코를 다코라고 불렀다)을 데리고 마을을 거니는 꿈을 매일 꾸지만
그러지 못하는구나.
다코짱, 아빠는 다코짱이 커서 어머니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될 것만을 생각한단다.
몸조심하고 공부 열심히하고 엄마 말 잘 듣고 아빠를 안심시켜주길 바란다. - 전쟁터의 아빠로부터 -'
이로서 일본군의 조직적인 전투는 종결되었고, 3월 15일 전투 종료를 선언합니다.
한편 벙커에 남아 항복을 거부하는 일본군들이 있자, 미군 역시 더 이상의 작전은 무의미하다 생각하고,
그냥 벙커입구를 폐쇄 시켰으나, 항복한 일본군들이 벙커 안으로 들어가 설득 작업을 통해 일본군 병사들을 대리고 나왔다고 합니다.
*일본군 포로
한편 도쿄의 대본영은 이오지마의 옥쇄를 3월 21일에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공식발표합니다..
"전투의 막바지에 서서 17일 밤에 최고사령관을 선두로 황국의 필승과 안전을 기원하며
전원이 장렬한 총공격을 감행한다고 타전했다.
이후 통신두절로 이오지마 수비대는 옥쇄했는데
이들은 일억 국민의 모범이라 하겠다"
2월 19일날 상륙하면서 당초 길어야 일주일 이라는 미군의 계산을 완전 넘어섰던 거지요.
전사자 6천명에 부상자 2만천명 해병대 대대장 24명중 19명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니
미군이 공세로 전환한 이후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승기를 다잡았다는 안일한 낙관론에 경종을 울렸고,
이 작전의 실수를 통해 미군은 육해공을 이용한 유기적인 입체 작전에 대한 전쟁 교본을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반대로 일본군은 2만2천명의 병력중 항복한 200명과 여기 저기 숨어 있다 나중에
나온 천명등 1200명을 뺀 나머지 인원이 죽습니다.
이 이오지마애서 쓸데없는 반자이 돌격보다 최후의 한명이라도 총쏘다 죽는게 효과적인 것이라는 걸 알게된 일본군,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미군에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미국이 원자탄 사용을 결심하게 만들지요…
암튼 이로서 도쿄 공습의 중간 기지를 얻게된 미군
종전까지 총 2200번의 B-29 폭격기의 이륙이 이루어 집니다…
현재 이오지마는 일본항공자위대의 기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1985년 미.일 참전용사들이 모인 가운데위령비가 설립되었습니다.
그 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우리들 동지는 생사를 넘어 용기와 명예를 걸고 싸웠던 일을 기록함과 동시에
우리들은 이오지마에서의 희생을 늘 마음 속에 새겨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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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용도 슬프고 태평양 전쟁의 기고가 종착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도 슬프고...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안 보신 분은 꼭 보세요. 스케일은 작지만 생각할 게 많은 영화 입니다.
그러네요, 이제 오키나와 전투한편쓰면 태평양 전선이 마무리 되는데, 다음번에 뭘쓸지 생각도 못하고 있네요.
일본에 구리비야시 장군같은 지휘관이 많았다면 태평양전쟁도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지 생각하게 해주네요..비롯 일방적인 공격과 방어였다지만 전쟁은 미국, 일본 모두를 슬프게 해주네요..
85년 위령비 제막식에 미,일 생존자들이 만나 서로 얼싸 안고 울었다네요... 구리야바시 장군이 많았다면, 어쩌면 태평양 전쟁은 발발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승기를 잡은 기세에서 안일한 자세를 취했을때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르는지를 알게해주는 교훈이 되는것 같습니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때도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암튼 미군의 병법 혁신에 일본이 기여한 바가 크다는건 오늘 처음 알게됩니다.
미국, 영국등이 선진국이 될수 있는 이유중에 하나가 비싼 댓가를 치루고 시행착오를 한번 거치면 거기에 대해 철저한 반성과 연구를 한다는데 있지요. 예전 영국의중학교 역사수업 장면이 TV에 나왔는데 우리나라처럼 암기 위주의 역사 수업이 아니라, 자기나라의 실패한 역사를 이야기하며 그사람은 거기서 왜? 그런 판단을 하였을까를 가지고 토론을 벌이더군요
이오지마에서온 편지 봐야겠군요. 미군에 피해가 많았군요. 태평양 전쟁이 수월하게 진행된게 아니군요. 잘 모르던 내용을 알게되는군요.
꼭 보도록해라 생각보다 대규모 스케일은 아닌데, 그래고 충분히 볼만한 영화야.... 저~~위에 로켓탄을 쏘는 콜세어 폼나지 않냐??? 저사진 보고 콜세어에 꼿혔음
다시 역사를 돌아보게끔 해주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네. 확실히 깨어있는 지휘관은 다르다.
저 사진 속의 병사 중 4명은 그 후의 전투에서 전사했다지.
미 해병대의 상징이자 애국심과 자부심을 나타내는데 이 사진만큼 큰게 없다더라.
이오지마도 점령했으니 이젠 4월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를 기다려야겠다.
저사진에 대한 일화가 있더라구요, 처음에는 조그마한 성조기를 꼿았는데, 나중에 산에 종군기자들이 올라가서 사진을 찍으려니 성조기가 너무 작은 겁니다.그래서 좀더 큰놈으로 골리서 다시 꼿는걸 찍은 사진이라고 하더라구요... 다음은 오키나와와 텐고 작전인데.. 이걸로 마무리 해야 할지, 원폭투하의 도쿄공습과 그후 일본의 항목발표까지의 상화을 한편더 써야 할지 고민고민입니다.
재미있습니다..이 전투는 유일하게 미군의 사상자가 일본군보다 더 많이 발생한 전투로도 유명하지요..뭐...일본군은 대부분 전사이고..
미군은 부상병 숫자가 많기는 합니다만...재밌게 잘봤습니다...
미군을 겁에 떨게 했을 정도로 인적 물적 심리적 충격을 엄청나게 받았던 전투였지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군의 치를 떨게 했던 전투에 대해 상세하게, 재미 있게 작성 해 줘 너무 고맙네요. 화력이 아무리 우세 해도 결국 땅개들이 가서 깃대를 꽂아야 점령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 주는 듯합니다. 얼핏 읽은 세바스토풀 전투와 비교가 될까요? 하여간 결국 점령 하기는 했지만,,,, 작은 섬에서 서로 엄청난 피를 봤군요. 생각 해 보면, 유황도의 환경, 그리고 많은 피.... 지옥의 모습이 흡사 이와 비슷했을 것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역시나 재미있게 봤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오지마는 상세하게 나온 전사들이 많더라구요... 워낙 내용이 방대해서 그걸 다쓰기 보다, 핵심이 되는 상륙당일과 수라비치산 탈환까지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썼습니다. 저도 신기한게 저 쪼매마한 섬에 사진으로 딱봐도 집앞에 있는 좀 높은 산 수준뿐이 안되는산에서 저런 엄청난 전투가 있었다는게, 양쪽모두 참 대단했네요.
음, 적장이지만 쿠라바야시 장군은 존경받을만 하군요. 현실을 직시하고 그 상황에 맞는 작전과 부대운용을 한 것은 감명받을 일입니다. 그런 사람이 적장으로 있으니 미군은 당연히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숨겨진 편지 이야기도 슬프고 아련하군요. 그나저나 저 유명한 사진의 병사들이 다음 전투에서 4명이나 죽다니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