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99
전주교구 소속 본당. 전북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99소재. 1893년에 설립된 되재 본당[升峙본당]의 후신으로 주보는 성모 영보. 되재 본당은 이후 1940년대의 수청 본당(水淸本堂) 시기를 거쳐 일시 폐지되었다가 1958년 4월 25일 고산 본당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른다. 관할 구역은 완주군 고산면 일부와 동상면 · 봉동읍 · 운주면 · 화산면 · 비봉면 지역이며, 소속 공소로는 백석 · 되재 · 수청 · 봉동 · 천호 · 비봉 등 15개소가 있다.
되재 본당시기(1893~1944)
고산 본당의 전신인 되재 본당의 역사는 1893년 4월 비에모(Villelnot. 禹一模) 신부가 차돌배기(현 백석,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거처를 정하고 전교를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비에모 신부는 다음해 초 거처를 되재(화산면 승치리)로 옮기고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으로 전라도 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일시 서울로 피신하게 되었다.
1895년 초 다시 되재에 부임하여 성당 공사를 재개한 비에모 신부는 같은 해 성신 강림 축일에 주보를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로 정하고 첫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이때 완성된 성당은 전통 한옥 형태의 팔작 기와에 단층 5칸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자재는 충남 논산의 쌍계사란 절을 헐면서 나온 목재를 이용하였다. 이후 비에모 신부는 전라도 북부의 산간 지대를 순방하며 교세를 확장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1897년 본당을 2대 미알롱(A. Mialon, 孟錫浩) 신부에게 인계하고 서울로 전임되었다.
처음 비에모 신부가 이 산곡에 본당을 정한 이유는 아직 박해의 여파가 남아 있었고, 이로 인해 신자들이 주로 전라도 북부 산간 지대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되재 본당이 설립된 뒤 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성당 주변에는 큰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나, 그 후 신자들의 이주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한편 본당 주임 신부는 제7대부터 한국인 신부로 바뀌어 이성만(李成萬) 이냐시오(1930~1936) 신부, 제8대 박문규(朴文圭) 미카엘(1936~1940) 신부, 제9대 임인교(任仁敎) 바오로(1940~1943) 신부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던 중 제10대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신부기 1944년 신병으로 본당을 비우게 되면서 다시 공소로 전락하였다. [편집자 주 : 현재는 본당임]
수청 본당시기(1942~1950)
이곳은 본래 되재 본당에 소속된 공소였다. 그러다가 1942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주임으로 김영태(金永泰, 도미니코)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김 신부는 이때 기존의 공소 건물을 성당으로 삼아 사목에 임하였으며, 1944년 주임 신부의 공석으로 폐지된 되재 본당 지역까지를 관할하였다. 그 결과 되재 본당은 수청 본당의 공소로 남게 되었다. 이후 수청 본당은 제2대 서정수(徐廷壽, 알렉스) 신부가 재임하던 증 6 · 25 동란이 일어나 성당이 파괴됨은 물론 교우촌이 모두 불타 버렸고, 이로 인해 본당이 폐쇄됨과 동시에 삼례(參禮) 본당의 공소로 되었다가 1958년 고산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고산 본당 시기(1958~현재)
1951년 삼례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활동하던 김영구(金榮九, 베드로) 신부는 일찍부터 관내의 폐쇄된 본당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 현재의 고산 본당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을 신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즉시 본당이 신설되지는 않았다. 이 신축 성당을 중심으로 고산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58년 4월 25일이었으며, 이로써 기존의 되재 본당과 수청 본당의 공소들은 모두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는 이후 5년여를 본당에 재임하면서 본당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전임되었다. 그 뒤를 이어 여러 신부들이 사목에 임하다가 1992년 1월부터 박종충(박종충, 레오) 신부가 부임하여 활동하고 있다. 1993년 현재 본당의 신자수는 1,803명이며, 거룩한 말씀의 회 수녀들이 사목을 돕고 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권]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 전주교구 완주 고산 성당
(사진설명)
1.'하늘과 땅의 만남'을 주제로 그려진 제대벽화. 박해시대 순교로 신앙을 지켜온 고산 신자들의 희생적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2.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대담한 색 배열과 빛의 연출이 인상적이다.
3.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만 옛 되재 성당 모습.
4. 한옥과 교회 전통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가미한 현 고산 성당 전경.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이기도 하다. 정 붙이기 힘든 삭막한 도시보다 할아버지가 살던 시골 마을 풍정(風情)이 더 살가운 것도 그곳이 고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북 완주군 고산 지방은 한국 천주교 창립과 더불어 형성된 교우촌들이 산재해 있어 우리 믿음의 고향과 같은 정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고산은 전주시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동북쪽으로 약 18km 떨어져 있다. 갈대가 널브러진 만경강을 지나 읍내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고산 성당(주임 이태주 신부)이 있다. 성당 부지인 동쪽 대나무 숲을 경계로 해 고산 초등학교가 있고, 북동쪽 고산천변에는 향교가 있다.
고산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58년이지만, 그 모태는 1893년에 설립된 되재 본당이다. 고산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이다.
고산 지역은 대둔산과 천호산 일대 깊은 골짜기가 많아 박해를 피해 각처에서 신자들이 몰려들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 일대에 저구리ㆍ넓은바위ㆍ다리실(천호)ㆍ차돌박이(백석)ㆍ석장리ㆍ되재 등 교우촌이 무려 56곳이나 됐다고 전해진다.
교우촌이 많았던 만큼 이 지역 박해도 심했고 순교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현재 천호 성지에 안장돼 있는 이명서(베드로)ㆍ손선지(베드로)ㆍ정문호(바르톨로메오)ㆍ한재권(요셉) 등 순교성인 4위와 김영오(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순교자 110여명이 고산 지역 출신이다. 또 한국전쟁 당시 대둔산과 천호산 일대 창궐한 빨치산에 의해 순교한 신자들도 상당수 있다.
고산출신 성직자로는 이약슬ㆍ이종필ㆍ허일옥ㆍ김종택ㆍ김순태ㆍ경규봉ㆍ강명구ㆍ장상원ㆍ김광태 신부 등 9명이 있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고산 지역에서는 성당이 세워지는데 1895년에 완공된 '되재 성당'이다. 되재 성당은 단층 5칸짜리 한옥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현 중림동) 성당에 이어 두번째로 세워진 성당일 뿐 아니라 한옥 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첫 성당이다. 성당을 지을 때 화엄사와 쌍계사에서 나온 목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되재 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됐다. 그러나 되재 성당터는 지난해 7월 30일자로 전라북도 문화재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돼 올해부터 국가와 도 지원을 받아 되재 성당 복원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현 고산 성당은 본당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지난 1994년에 완공했다. 성당 외관은 한옥과 교회의 전통 건축양식인 바실리카 형식을 절충한 건물로 장방형에 종탑이 있는 독특한 구조로 돼 있다.
고산 성당을 설계한 김승배(단국대 종교건축연구실)씨는 "옛 되재 성당이 보여주었던 교회 건축의 토착화 의지를 계승해 설계했으나 복고적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건축뿐 아니라 성미술ㆍ조명ㆍ설비 등 모두가 복음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설계했다"고 말했다.
고산 성당은 우선 해발 55m 언덕에 자리한 지리적 공간미를 잘 살리고 있다. 사방에서 보이는 위치에 종탑을 배치해 놓았고, 성당 전면에 넓은 광장을 두어 남서쪽 원경과 북동쪽 수려한 근경을 그대로 살려 주변 자연환경과 성당 건물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제대 벽면에 '하늘과 땅의 만남'을 주제로 한 벽화가 있다. 조광호(인천가톨릭대 교수) 신부 작품이다. 벽화는 무명 순교자 피와 땀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앙고백을 보여주는데 하늘과 땅, 그리고 둘 사이를 이어주는 19개 계단(지상의 12계단과 천상의 7계단)이 있고, 계단 양편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다. 천상의 붉은 빛 십자가는 한국 순교자를 상징하고, 조선시대 형구에 나 있는 7개 구멍은 7성사를 상징한다. 또 좌우 생명의 나무는 고산지방의 특산물이요 우리 농촌을 상징하는 감나무로 땅과 농촌이 우리 삶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당 네 면의 유리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 유리화는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왼쪽 유리화는'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과 기적의 빵과 물고기로 나타내고 있다. 제대 정면 2층 성가대석 뒷편에 있는 7개 유리화 창은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데 청색 주조에 붉은 색을 대담하게 배열해 강렬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제대 앞 면에는 성부의 '손'과 성자의 '십자가', 그리고 성령의 '비둘기'와 함께 삼위일체의 상징인 삼각형이 양각돼 있으며 제대 좌우로 'A'(알파)와 'Ω'(오메가)가 부조돼 있다.
이태주 신부는 "지난 2년 동안 54명의 장례미사를 거행할 만큼 본당 신자들이 고령화돼 유구한 신앙의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해 안타깝다"며 "올해 되재 성당터 복원공사를 본격화해 옛 교우촌 전통을 이어가는 신앙공동체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