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의사라는 직업으로 평생을 안위하며 살 수 있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난하고 힘든 영화감독의 길을 걸었다. 그는 생애 32편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한 영화감독의 생애로는 다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는 1980년 <육식동물>이라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영화 현장을 떠나 있었다. 그 이후로 10여 년 동안 다음 작품을 만들기 위해 50여 편의 시나리오를 쓰시고 투자자와 제작자를 찾아다니던 중 <악녀>라는 시나리오로 곧 그의 33번째 작품이 촬영에 들어갈 목전의 시기에 있었다. 노익장의 피 끓는 열정으로 33번째 작품의 촬영에 임박해서 그의 운명이 끝났다는 것에 대해 그를 아는 지인들은 그의 죽음을 억울해 하고 안타까워하며 황망히 감독님의 종말을 보아야만 했다.
제 1장_ 24년간의 대화 | 김기영 감독, 영화를 시작하다
김기영은 세브란스의대 시험 낙방하여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대학 의학부를 다니게 된다. 그 때 주로 좌익극을 공연하는 쓰끼지 극장에서 모스크바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일본의 뛰어난 극작가 오사나와 가오루의 연극과 강연 듣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진보적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해방 후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게 되고 일본에서 봤던 연극들을 잊을 수 없어 연극반을 만들게 된다. 입센<유령>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햄릿>등을 발표하고 호평을 받게 된다. 그리고 안톤 체홉의 <악노>공연을 할 당시 여배우가 없어서 고민할 때 연극반 남학생 박암이 치대 여대생을 소개시켜준다. 그 학생이이 후에 감독님의 처가 되는 김유봉이다.
한국전쟁 중 피난한 많은 영화인들은 부산에 집결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김기영은 당시 부산에서 대한공보원에서 만든 대한뉴스를 1회부터 5회까지 만들게 된다. 그는 연극의 경험을 살려 극정 상황을 집어넣어 뉴스를 만들고, USIS(미공보원)에 눈에 띄어 이직하여 리버티뉴스 만들게 된다. USIS는 진해와 마산 사이의 상남에 위치했다. 당시 상남 촬영소는 미국에서 최첨단의 영화기자재가 들어와 있었고, 김기영은 돈 들이지 않고 유학을 간 셈이라 말한다.
그는
아벨강스, 르네 클레르, 쥬리앙 듀비비에에서 많은 교감을 받고 이론적 교훈을 배우게 된다.
<나는 트럭이다>
트럭을 의인화 시킨 문화영화로 단 2일만에 완성시켰다.
트럭의 하루 일과를 다룬 작품으로써 전쟁을 극복하고 경제복구를 하려는 국민의 모습을 담았다.
<수병일기>
한국 해군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만든 영화.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의도를 자진 영화다.
이 두 편의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가진 단편 영화를 완성시키고 USIS의 눈에 띄어 자신이 쓴 시놉시스 50편 중 <주검의 상자>를 연출 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의 병실>
30분 정도의 분량의 단편 영화로 의족을 차면 병원에서 쫓겨나야 하는 소년이 말썽을 부리며 병원에서 기숙 하며 간호사의 인간적 애정을 쌓는 내용이다. 전후 국민들의 정서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평가 되고 있다.
<주검의 상자 1955>
빨갱이 능걸은 민심을 교란할 목적으로 활약한다. 그 사실을 안 동리청년 무룡은 이들의 아지트를 침투하여 주검의 상자를 폭파장치 하는데 성공한다. 그 주검의 상자란 다름 아닌 시한폭탄이다. 그러나 무룡은 그 아지트에서 미처 탈출하기 전에 놈들에게 잡히는 몸이 된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몇 차례 그는 구사일생으로 놈들의 소굴에서 탈출하고 시한폭탄을 폭파하여 놈들을 전멸한다는 내용의 반공영화
<양산도 1955 >
천민계급의 남녀가 사랑하는데 그들의 사랑은 양반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남자 주인공 수동은 자살을 하고 여자 주인공인 옥랑은 양반과 결혼을 한다. 신부인 옥랑이 탄 가마가 수동의 무덤 앞을 지날 때 무덤가에 숨어 있던 수동의 어머니가 뛰어나와 옥랑을 칼로 찔러 죽인다. 죽은 남녀가 하늘로 승천하며 영화가 끝난다.
당시 400만 인명피해를 당한, 6.25로 수복된 서울을 본 김기영 감독은 자신보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인물들을 통해 눈물을 흘리며 그래도 다행이라는 카타르시스를 갖게 하는 영화를 만들 작정을 하게 된다.
경기민요인 양산도의 유래에 대한 학설중 하나는 누이가 강제로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자 오빠가 자살을 하려는데 그의 아버지가 이를 발견하여 말리면서 서로 실갱이 하는 것을 지나가던 취객이 노래로 읊었다는 설이 있다. 김기영 감독은 양산도의 시놉시스를 함경도 지방에 내려온 전설을 어릴 적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구성했다.
<봉선화 1956>
제작-김기영프로덕션
산적두목 안석진은 나강희를 연모한다. 여기에 연적 백송이 뛰어 들어 삼각관계를 이루게 되고 마침내는 처절한 싸움 끝에 세사람이 모두 자결하고 만다.
조도령은 과거에 낙방한 이유를 자신이 당파싸움에 억울한 희생으로 보고 잘못된 세상을 한탄한다. 더욱이 자신을 대신해 급제한 동문수학을 한 친구 박도령이 사랑하는 여자마저 처로 취하자 잠적하여 산적이 되는 아웃사이더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그가 산적으로 득세하여 얻은 결과는 납치한 여인들에게서 얻은 육체적 쾌락이 전부였다.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그의 야심은 땅에 떨어지고 그는 그저 악명 높은 도적으로 이름을 떨친다. 박도령의 딸을 납치하여 동굴에 감금하여 학대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생산된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는 내용이다.
주연배우들을 1인 2역으로 설정. 영랑역의 나강희를 그의 딸로도 함께 출연. 모녀 사이에 한 남자를 사랑하는 설정이었다.
라쇼몽과 비슷한 시기의 영화로 양반과 산적, 그리고 여인과의 삼각관계등의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가졌다. 당시의 한국이나 일본이나 전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탄생한 작품이었고, 내용보다는 상황과 오락적 요소, 애욕에 무게가 많이 실린 작품으로 안일하게 기획한 탓으로 첫 번째 도산을 맞게 된다고 감독은 말한다.
같은 서울대 출신인 안성기씨의 아버지 안화영(안석진)씨가 주연하였다.
<여성전선 1957>
각색-홍성기
어느집 가정부가 주인과 눈이 맞아 임신을 하게 된다. 가정부는 그 사실이 가족들에게 알려질 까 봐서 그 집을 나와 딸을 낳는다. 딸은 호적에도 입적하지 못한 채 사생아로 자란다. 딸은 장성하였다. 아버지가 운명하게 된다. 딸은 아버지의 운명을 지키려 찾아 가지만 끝내 “아버지”소리를 아니하고 그 자리를 떠난다. 딸은 사생아라는 비애를 짓씹으며 직업전선에 나선다.
원작은 ‘정비석’의 영남일보 신문 연재소설로 대립적인 두 여성의 여성관을 나타낸 작품으로 큰 이슈가 되었었다.
제목에서 쓰인 ‘전선’이란 단어는 전투적 용어가 아니라, 여성파워의 시대를 도래하는 여자들의 자유와 연애사상을 그리기 위한 단어였다.
유혹이 많은 사회에 나선 직업여성들이 남성들을 향해 공동전선을 펴서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내용이지만 결국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부여함으로써 행복에 도달한다는 청춘 드라마라고 감득은 말한다. (허허-_-)
김기영 감독의 작품 색과는 사뭇 다른, 정곡법이 아닌 코미디성을 함유한 영화이다.
<황혼열차 1957>
최삼의 딸 지미는 고아원을 경영하는 박암을 사랑한다. 그러나 최삼은 박암을 싫어한다. 까닭은 최삼이 좋아하는 금봉을 박암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최삼과 박암 사이에는 격투가 벌어지고 소송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박암에 대한 지미의 사랑은 변할 줄 모른다. 최삼은 할 수 없이 소송를 취하하고 지미와 박암의 장래를 축복해준다.
김지미와 안성기라는 대 배우들의 데뷔작이다. 김지미는 명동 백조다방에서 캐스팅하였고, 안성기는 아버지 안화영과 이 영화에 함꼐 출연하게 되었다.
김기영 감독이 신인 배우를 많이 쓴 이유는 연기자의 자의적 해석을 막고 연출의도를 충분히 표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철저히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이론에 충실하게 의도했다고 감득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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