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포에서
경북 영일군 흥해읍 칠포리 197 번지.
포항에서 차를 몰고 올라가면 샛강 곡강천을 지나 칠포해수욕장에 들어서면 곤륜산(176.9m)아래 낮으막한 5층건물 파인비치호텔이 있고 그 외 건물이라고는 칠포여름파출소 너머 망망대해가 보일 뿐이다.
20대 청년시절 어느 여름 처음 칠포에 왔을 때의 느낌은 경주 반월성과 유사했다. 볼 것 없는 휑한 공간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때부터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틈만 나면 경주를 거쳐 칠포로 향했다.
칠포해수욕장부근 바닷가에 작은 집을 짓고 상쾌한 바다바람을 쐬며 마루청에 앉아 책을 읽으며 지내고 싶다. 책은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도 좋고 사리모리노우따(防人歌)도 좋고 헤로도토스가 쓴 히스토리(HISTORIE)도 좋다. 책은 어려운 책이 좋다. 처음 연인의 손잡아 보기가 어렵고 가슴 설레이듯 좀처럼 이해의 문으로 다가서기를 거부하는 까탈스럽고 난해한 책이 좋다. 쉽게 알아지는 책은 나도 쉽게 그 책을 깔보게 된다. 칠포 민가집 대청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노라면 별의별 소리가 귓전을 맴돌며 추억처럼 스쳐간다. 밥 먹어라고 골목어귀에서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 자장가처럼 은은하게 들리는 바리톤 목소리의 금붕어 파는 아저씨. 잃어버린 딸 이름 부르듯이 "강냉이 사이소 강냉이~" 처량하게 들리는 강냉이 파는 아주머니의 지친 목소리. 책을 읽고 있노라면 벼라별 것이 다 들리고 벼라별 것이 다 보인다. 산도 지나가고 들도 보이고 바람도 지나간다.
책보기가 지치면 이제 나는 바닷가로 나가려 한다.
그 바닷가에 20년전 백사장엔 두 무리로 나누어져 사람들은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줄다라기의 끝은 어선의 그물이었다. 그들은 영차영차 소리를 내며 웃고 떠들며 줄다리기를 했다. 아버지 어머니 또 그의 자식들이 모두 뒤섞인 몇 십명의 두 무리는 양편으로 나누어져 줄을 당기고 있었다. 그 백사장에서의 광경은 나에게 몇 되지 않은 가장 평화스런모습 중의 하나 이었다. 공연히 관계도 없는 구경꾼들도 연인들도 그 흥에 못 이겨 은근슬쩍 그들의 뒤끝에 붙어 줄다리기에 가세했다. 마침내 바다 속에서 끌려온 그물 속엔 고기가 가득 잡혀있었고 서로 자기편 그물의 고기가 더 많다고 우기며 떠들고 웃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아마도 잡힌 고기가 적은 편이 어선 임대료를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칠포는 바다가 아름답고 월포는 어촌이라 동네가 정겹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수욕은 칠포에서 하고 숙박은 월포에다 정했다. 월포의 밤은 고요하기만 해서 옆집 사람이야기도 들릴 듯하고 그 사이 사이에 밀려오는 파도는 바위를 치면서 정적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어촌에 숨어서 과연 나는 며칠을 지루해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도시로 돌아와 있으면 불현듯 칠포의 파도와 해안선과 그 골목어귀의 정겨운 모습과 바닷가에서 환호성을 지르던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줄당기기를 하던 그 사람들은 나에게 「또 오세요. 칠포로 다시 한번 와 보세요」라고 외치며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환호한다.
포항시를 통과해 외각 길목 쯤의 고가도로를 넘어 칠포로 들어가는 국도의 길은 한적하여 대형화물차만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를 한참, 칠포해수욕장이라는 낡은 간판을 끼고 오른쪽으로 곡강천을 지나면 돌연 한적한 산을 끼고 백사장이 나타난다. 그 어귀에 늘어선 몇 그루 소나무는 늘 정겹다. 그러면 나는 정해 놓은 듯이 속으로 외쳐본다. 아- 내가 또 칠포에 왔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