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제주4‧3의 역사피해실태
피해실태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4·3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 5,000∼3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으며,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건물이 불탔으며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1954년 4·3이 종료되면서 폐허가 된 마을의 복구와 정착사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4·3이 제주공동체에 남긴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얽어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 콤플렉스 등 정신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4·3으로 인해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공안기관의 감시에 시달렸다.
인명 피해 실태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 : 4·3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 수는 2020년 현재 14,532명이다. 이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수치일 뿐, 진상조사보고서는 4·3 당시 인명피해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한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4·3희생자·유족 결정현황
성별 희생자 현황
연령별 희생자 현황
4·3희생자·유족 결정현황
4·3희생자·유족 결정현황 정보표로 희생자, 유족 정보제공
구분 희생자(명) 유족(명)
계 사망자 행방불명자 후유장애 수형자
소계 15,830 11,094 4,108 286 342 82,616
인정 14,532 10,422 3,631 195 284 80,451
불인정 100 14 5 79 2 722
철회 1,172 641 463 12 56 1,431
성별 희생자 현황
성별 희생자 현황 정보표로 남여별 사망자, 행방불명자, 후유장애, 수형자 정보제공
구분 계 사망자 행방불명자 후유장애 수형자
소계 14,532 10,422 3,631 195 284
남 11,478 7,848 3,266 108 256
여 3,054 2,574 365 87 28
연령별 희생자 현황
연령별 희생자 현황 정보표로 나이별 사망자, 행방불명자, 후유장애가, 수형자 정보제공
구분 계 사망자 행방불명자 후유장애 수형자
계 14,532 10,422 3,631 195 284
10세이하 818 708 73 37 -
11~20세 2,534 1,712 619 103 100
21~30세 5,536 3,316 2,048 46 126
31~40세 2,332 1,682 606 9 35
41~50세 1,421 1,217 185 - 19
51~60세 972 898 70 - 4
61~69세 568 551 17 - -
70세이상 348 336 12 - -
연령미상 3 2 1 - -
‘4·3위원회’에서 심사하여 확정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84.3%(12,000명), 무장대 12.3%(1,756명)이다. 특히 10대 이하 어린이 5.4%(770명)와 61세 이상 노인 6.3%(901명)이 전체 희생자의 11.7%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1%, 2,990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물적 피해와 ‘잃어버린 마을’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이루어진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으로 인한 물적 피해는 크게 마을공동체의 파괴 및 소실, 공공시설의 소각 피해, 산업부문의 피해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적 피해 정보표로 마을공동체, 공공시설, 산업부문 정보제공
마을공동체 공공시설 산업부문
300여 마을(자연촌, 洞), 2만여 호(戶), 4만여채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와의 잦은 무력 충돌로 학교, 관공서, 경찰지서 등 공공시설의 소각·파괴 농업·목축업·어업·나잠업·교역 등 각종 산업부문 정체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후 중산간마을 주민들 상당수는 원주지를 찾아 돌아갔으나, ‘공비출몰 지역’이라 하여 자주 소개 대상이 된 지역과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흔적이 남아 있는 일부 마을은 복귀를 원하지 않는 주민들도 많았다. 이로 인해 제주도내 각지에는 4·3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들이 남아있는데, 이는 4·3으로 인해 소실된 마을, 곧 ‘잃어버린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마을’은 4·3 때 집중적인 피해를 입은 마을 가운데 일부로서, 주민들이 돌아와 마을을 이전처럼 복원하지 못해 버려지거나 단순 농경지로 바뀌면서 더 이상 마을로 형성되지 않고 사라진 경우를 말한다.
연좌제의 족쇄
4·3의 또 다른 아픔은 당시 사망·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 유가족들에게 대물림되었다는 것이다. 사건 과정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 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 심한 제약을 받아왔다. 1980년 8월에 이르러서야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는 연좌제를 폐지할 것을 발표했고, 1981년 3월 내무부는 후속 조치로 연좌제 폐지 지침을 발표했다.
1980년에 제정된 제5공화국 헌법(제12조 3항)과 제6공화국 헌법(제13조3항)에도 연좌제 금지를 명문화 했다.
제주도민 대다수는 4·3으로 인한 연좌제 피해 경험을 갖고 있다. 2000년 8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4·3 유가족 7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의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다.
연좌제의 족쇄 정보표로 피해사례 비율 정보제공
피해사례 공무원임용시험 사관학교등 각종 입학시험 국·공기업이나 사기업 취직 또는 승진 군·경찰의 승진 국내외 여행 및 출입국 과정 일상생활 감시 각종 신원조회
비율(%) 26 23 18 16 8 30 60
4·3사건 피해와 족쇄 자세히보기
제주4·3
재단기관지4·3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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