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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소시집 해설>
영원한 여행자에게
장석원
여전하다. 건강하다. 고통을 물리치는 고혹이 우리를 이끈다. 마법이라는 말밖에. 음악이라는 말밖에. 해독解讀할 수 없지만, 영원히 해독解毒되지 않을 운명이라 해도, 다시, 우리는, 읽을 수밖에. 밖으로 나가는 모든 것들을 불러 모아, 한 사람이 지닌 구멍 전부에 하나씩의 음표를 넣어 두고, 몸이 부서진 후에, 가루가 된 자들의 화음을, 불 타 회灰로 귀의한 자들의 육성을, 가만히 허공에 기재할 수밖에. 이것은 나의 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것은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저 머나먼 ‘나’가 부르는 노래, 아마도, 환청일 것이다. 개가 짖는다. 물어뜯어라. 육신을 찢어라. 분해되는 육신에게도 노래는 있을 것이다. 해후도 이별도 없는 축축한 구멍의 심연 속에서 ‘나’는 잠시 잠이 들었다. “털투성이 허공이 떠 있”(「우애」)다. 꿈이 침략한다. 노략질 당한 몸통. 파열된 기관, 기관총. 오늘 ‘나’는 ‘나’를 가두고 면상과 가슴을 뭉개고 그 위에 두껍게 분칠을 하고, ‘나’는 ‘나’를 지우고, 마침내, 변신할 것이다. 벌레여, ‘나’를 파먹어라. 하나에서 둘이 되던 엄마의 몸에 순식간에 구멍이…… 우리 엄마, 구멍 뚫린 엄마의 구멍에서 ‘나’는 추락했다. 수치와 자랑을 한 몸에 지닌 채, ‘나’는 오욕과 육욕의 구덩이에서, 떡잎 같은 혀를 내밀고 해를 받았다. ‘나’는 기록적인 파괴자이다. 어느 날, 우리가 그를 그늘 없이 포옹하게 될 때, 그날 나는 나를 제모할 것이다. 구멍으로 잠입할 것이다.
조연호의 신작시, 나의 암연.
절망할 수밖에.
*
묻은 그림자는 균처럼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의 남은 기념품은 아주 약간
나도 그것을 뉘었을 것이다, 작은 반지에 먹힌 동물 은유를
엉터리 물건에서 지평선이 늘어난다 그것은 짧게 도는 팽이 같고
성에 대한 죄악으로 툇마루가 잘린 사람이 두드리며 운다
아 도와다오 끈끈이에 붙은 아이에게 보조개를 쥐어주던 물주전자 은유를
이불 쓴 서커스의 나무 위에, 슬퍼할 게 못되어 오래 맞잡은 손아귀에
안일향安逸鄕 - 잘 씻긴 곳으로 입에 거품을 내고 있는 친구를 데려간다
—「사구유蛇口喩」 전문
조연호의 시를 잘 안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평가? 비평, 가! 글쎄? 그는 동료 시인에게도 자신의 빗장을 열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화가 난다고? 아니, 아니. 절대로. 시가 K2가 아닌 다음에, 분해는 조립의 역순 같은 말이 가당한 말인가. 그의 시를 읽으면서, 아니, 읽어내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의 시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가 몸부림치며 전달하고자 하는 고통에 감응하지 못한다면, 읽는 그는, 그가 비평가라면 더욱, 시인이라면 더더욱, 미욱한 독자라고 판명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우선, 시를 느낀다.
목적어 세 개가 눈에 띈다. “동물 은유를”, “물주전자 은유를”, “친구를”. 이들은 각각 “뉘었을 것이다”와 “끈끈이에 붙은 아이”와 “데려간다”와 연결되려고 한다. 우리는 분명 ‘~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연호의 통사는 의미의 확정을 지연시킨다. 아니, 거부한다.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서로를 간섭한다. 일반 언어학의 통사론을 가뿐히 무시하면서, 그의 문장이 허공에 새기려고 하는 의미의 파동은 각각의 통사 단위가 지니는 의미의 총량을 마모시킨다. 조연호의 문장은 의미의 차이를 생성하기 위해, 조용히, 진동한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세 목적어가 소속된 문장의 통사적 연결 고리를 느슨하게 하거나, 아예 해체하거나 무시하기를. 그렇다면, 이것이 시냐고? ‘그렇다, 시이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분노하거나 분개하거나. 아니면, 몇몇 평자들과 연로한 시인들의 입에 거품을 고이게 했던, 한국시를 망치는 원흉을 다시 확인하거나.
뱀의 입으로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기술/비유’할 것인가. 뱀의 독을 입에 물고, 오로지 자신을 망치기 위해 발화를 절단내는 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가. “성에 대한 죄악” 때문에 자신을 “끈끈이에 붙은 아이”로 규정하는 시인이 채택하여 저 세계의 국소를 향해 내뱉는 “동물 은유”와 “물주전자 은유”의 불가해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조연호는 “안일향”으로 “친구를 데려”가고 있다. 우리는 그의 친구를 ‘그 자신’이라고 느낀다. 그는 자신에게 “묻은 그림자”이고, 그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기생충처럼 그 자신을 양육했고, 동거했고, 공생했고, “균처럼 살아”온 존재이다. 그는 “서커스의 나무”이다. 그는 “이불 쓴” 채 서커스하는 나무이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둠 속에서 자신을 갈아 없애기 위해 동물과 물주전자로 변신한다. 모든 은유가 논리를 뛰어넘듯, 모든 은유가 언어(langue)의 체계(system) 밖에서 의미를 조정하듯, 조연호의 시 전체는 불협의 은유로 조직된다. 문장이 축적되면서 비유의 복잡도가 혼돈으로 들끓는다.
1령齡 - 엄지와 집게를 구부려 만든 전해 여름을 그해 여름에도 결정하지 못했다. 녹는점을 찾는 날에도 누군가의 첫 입술은 계속 증발하고 있었다. 나는 눈초리가 찢어진 나이, 피리를 불면 억세지는 물체였다. 아버지의 무성한 창틀을 그때그때 알맞게 고쳐주고 알뜰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찌 된 형편인지 다시 고쳐서 쓸 수 없는 것에 대해서만은 손바닥 찍힌 요판凹版이 늘어나 있었다.
2령 - 동물이 그 땅에서 이어 살 수 없었기에 나는 사람이자 목동으로 전락했다. 태양에겐 당사자라는 뜻 이외의 것은 없었다. 채에 잡혀 곤충망 속으로 들어간 눈송이가 너무 많아 여름날로 혼자 멍청히 떠날 준비를 했었다. ‘당신의 푸념처럼 그곳엔 정말 돌볼 가루가 의지할 가루보다 더 많은가요?’라 반문한 것은 너무한 것이다. 한동안은 4대 6이나 5대 5 정도로 발목이 고치 같은 것 속에 들어있었다.
3령 - 손가락을 움직여 처녀비행을 그려보곤 한다. 그걸 삼켜 되새기면 허공도 살아있을 뿐 역시 죽는다.
입모양을 입모양으로 바꾸는 사랑을 하던 것은 오른편이었다. 백과사전에는 뻗은 넝쿨보다 길이가 더 짧은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 산화미酸化美가 미美에게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핥아 굽게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오른손과 왼손은 함께 원뿔에 감겨 올라간다, 함께 밤을 생각하기 위해. 고치막을 뜯으면 새잎에서 새잎으로 수레가 굴러 떨어진다.
넉잠 - 팔베개마다 포플러가 흔들린다. 한 사람의 생일로만 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연고를 발라 나의 성표性標를 지켜줄 생각은 없었다. 내게도 반쯤 탄식하는 액세서리는 있었던 것이다. 깨끗하고 바르게 뜰의 주인은 파수 보는 일을 끝내고 아마도 영원히 나무들은 사냥개에 쫓기는 공포로 미친 것이라고 말한다. 나를 낳은 사람에겐 얼굴 터진 헝겊인형 하나가 잡종의 털을 달고 가만히 날아 들어와 있었다.
5령 - ‘깃이 포개지는 곳에서 낙담하고 맙니다. 실을 풀고 집을 매달 곳으로 기어간 조용한 웅성거림은 세 배, 네 배씩이나 낙담하고 맙니다’ 노소蘆蘇의 사람들은 버드나무를 피워 지저분한 불꽃놀이를 하고 고향의 신들을 휘저으며 자신들의 수난을 한탄한다. ‘물에 뜬 얼굴에 머리를 부딪치면 물들은 편을 갈라 뺨을 맞대고 웁니다’ 던져진 부케처럼 그들은 내 주머니 안쪽으로 골고루 산회散會했다. 손을 펼치면 풍향은 다섯 가닥. 우린 가난하므로 비와 바람을 또한 그처럼 다뤘다. 노소 사람의 불은 ‘사람은 타는데 베옷은 타지 않네’ 여러해살이 노래를 부른다.
—「손바닥의 령齡」 전문
손바닥의 나이를 읽는다. 손바닥의 어지러운 손금을 따라간다. 누에고치 같은 주먹(die Faust)을 펴면, 손바닥이 보이고, 그 손바닥에는 치아에 새겨진 시간의 빗금 같은, ‘나이테’ 같은 비정형의 줄이, 움직이고 있다. 고치 속의 “나는 눈초리가 찢어진 나이, 피리를 불면 억세지는 물체”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는 “아버지의 무성한 창틀을 그때그때 알맞게 고쳐주고 알뜰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아버지를 고칠 수는 있었으나, ‘나’를 고칠 수 없는 시간이 쌓여 간다. ‘나’는 손바닥에 실금을 긋는 세월의 송곳니를 바라본다. 당신이 가루가 된 이후, ‘나’는 “돌볼 가루가 의지할 가루보다 더 많”아진 이유를 궁금해 한다. ‘나’와 ‘나’의 손금 같은 가족들은 모두 가루이다. 인간은 가루가 된다. 인간이라는 가루를 회의한다. 고치 속에 들어 있는 ‘나’는 변태하기 위해 시간과 쟁투한다. ‘나’는 고치 속에 스스로 ‘나’를 가두었다. 가루가 되는 것들, 살아 있는 자들을 가루로 만드는 시간, 그리고 산화. 산소와 결합하여 부식되는 자들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산화미酸化美가 미美”가 되면 안 된다. 누에가 네 번째 잠을 잔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는다. 조연호는 왜 ‘넉잠’이라고 표현했을까. ‘4령’은 왜 사라졌는가. ‘사령死靈’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인가. ‘넉잠’에 들어 누에는 자신의 “성표性標”를 지우려고 한다. ‘나’는 ‘나’라는 남자를, 혹은 ‘나’라는 여자를 제거해야 한다. 조연호는 왜 자신을 영원한 ‘나무’로 지칭하는가. 나무는 왜 “사냥개에 쫓기는 공포로 미”칠 수밖에 없는가.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지우기 위해, 전력을 다해 변태하려는 자가 여기에 있다. 그는 무슨 이유 때문에 이토록 처절하게 자신을 부정하는가. ‘나’를 바꾸지 않으면, ‘나’라는 죄악을 소거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나’. 조연호는 기원을 부정한다. 그는 아파할 수가 없다. 그는 죄의 종자이며 싹이다. 그는 장차 나무가 될 것이다. 그는 죄의 고치이며 누에이다. 그는 장차 나비가 될 것이다. ‘나’를 낳은 자, ‘나’라는 죄의 실과實果를 열리게 한 자, 누에고치에 ‘나’를 가둔 자,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세상의 벌레가 되게 한 자, “나를 낳은 사람”에게 조연호는 말한다. “얼굴 터진 헝겊인형 하나가 잡종의 털을 달고 가만히 날아 들어와 있”다고. 고치 안의 벌레가 여기에 있다고. 조연호의 주먹 속에는 주름이 있고, 그 주름은 자궁 같고, ‘주먹-고치’ 속에 잠을 자는 누에가 있다. 손을 편다. 바람이 누에를 가루로 만든다. 재가 날아가자 손바닥의 실금에서 피가 돋는다. 손바닥을 떠나 바람의 겨드랑이를 스쳐 지나간 손금의 파동이 너울거린다. “손을 펼치면 풍향은 다섯 가닥”으로 뻗어 나간다. 다섯 손가락의 방위마다로 떠나가는 ‘나’의 과거. 흔적도 없이 ‘나’를 산화酸化시켰다. ‘나’의 부모들은 “던져진 부케처럼 내 주머니 안쪽으로 골고루 산회散會”되었다. 재가 되어, 먼지가 되어 ‘나’와 ‘나’의 근원인 그들 모두 사라진다. 이것이 행복이다. 아름다운 죽음이다. “‘사람은 타는데 베옷은 타지 않네’”라고 조연호가 노래한다. 여기서, 고치는 비단이 아니라 삼베로 변화한다. ‘나-사람’은 ‘나-누에’가 되지만, 죽은 ‘나’와 ‘그들’의 육체는 꽃잎처럼 부스러지고, 불꽃처럼 흩날리고, 죽은 자의 옷은, 고치는, 성근 주름으로 자은 자궁은 불연不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손바닥에 남겨진 운명의 자력선이다. ‘손바닥의 령’이 처절한 이유이다. 조연호는 왜 모든 것을 부정하는가. 우리가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가 아직 남아 있다.
*
조연호는 왜 싸우는가. 무엇과 싸우는가. 조연호의 문장을 바라본다. “나는 아직도 나를 팔아넘긴 포유동물의 촛대를 굵게 섬기고 있다”(「기생벌이 날아온다」)는 문장이 보인다. “포유동물의 촛대”는 무엇일까. 동물은 촛대를 몸에 지니고 있지 않다. 포유동물의 기관 중에서 ‘촛대’라는 명칭을 지닌 것은 없다. 촛대와 비슷한 것이 있다. 짐작하겠지만, 그것을 남성 성기의 다른 이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굵은’ 촛대는 있다. 그런데 화자는 그 촛대를 ‘굵게’ 섬긴다고 말한다. 어떻게 섬기는 것이 ‘굵게’ 섬기는 것인가. 조연호의 이러한 전도는 무엇을 기획하는가. 알 수 없는, 알기 힘든 조연호의 문장은 연합과 파괴로 구성되는 듯하다. ① ‘나는 알고 있다.’ ② ‘촛대를 지닌 포유동물이 나를 팔아넘겼다.’ ③ ‘나는 그 동물의 굵은 촛대를 기억한다.’ ④ ‘나는 아직도 굵은 촛대를 지닌 포유동물을 섬기고 있다.’ 우리는 조연호의 문장을 분해한다. 조연호가 조립한, 건축한 문장의 성분을 중심으로 사라진 나머지 부분들을 복원시켜보았다. 물론 이 문장들이 조연호가 쓴 최초의 문장이라고 믿을 근거는 전혀 없다. 시인이 네 개의 문장을 해체한 후, 중요 통사 성분을 한 문장으로 결합시켜서 새로운 문장을 구성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통사 규칙으로는 문제가 없는 문장의 의미 요소들이 충돌하여 문장 전체의 의미 구성을 방해한다. 의미의 완성과 전달을 거부한다.
“이제 난 그 우애에 대해 개미를 택한 작은 동료를 손끝으로 눌러 차례차례 삭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우애」)는 문장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 문장에서 우리의 통사적 의미 구성을 방해하는 구절은 “그 우애에 대해”이다. 이 구절은 삽입구로 보인다. 삽입구임을 시각적으로 지시하는 어떤 장치도 사용하지 않는 조연호. 그는 무슨 이유로 “그 우애에 대해”를 ‘삽입’했을까. 조연호는 “개미를 택한 작은 동료”를 ‘개미’로 변신시켜버린다. 그리고 개미를 눌러 죽이듯, 그 동료를, 그간의 우애를, “손끝으로 눌러” 죽인다. 우애의 삭제를 완성한다. ‘우애’라는 “물질은 밤을 쪼갤 수 없을 때까지 쪼개고 났을 때 남는 것”이다. 남겨진 우애를 깡그리 지워버리기 위해 조연호는 선택한다. 여러 가지 우애가 있었다. “올해의 우애”를 고른다. 내일의 우애가 되지 않게끔, 오늘의 우애를 말살한다. 우애는 변질되는 것, 우애는 소멸하는 것. 진정한 우애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것이 실현되기 전에, 조연호는 우애의 말살을 취한다. 조연호는 ‘그 우애’, 바로 “올해의 우애”라는 중요 단어를 ‘삭제’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시의 마지막 문장에 찔러 넣는다. 시를 구성하는 전체 문장 중에서 핵심 요소를 시 전체에 산개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의미라는 한 줄기 광선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스펙트럼으로 만들어, 조연호는 산란되는 의미의 문양을 시에 새겨 넣는다. 조연호의 가시광선은 절대로 빛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의 시 바깥에는 적외선과 자외선이 파동친다.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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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호의 음악을 듣는다. “미망인과 귀를 나눠 파고 우린 물결에 물린 척하기. 우는 벌레를 엮어 우린 오줌 밖으로 새어나오기”를 우리는 노래로 여긴다. 조연호의 시에서 음악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다. 그는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가이다. 시에 스며들 수밖에 없는 음악의 실체를 우리는 감지하고 있으나, 그것의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 시의 음악이 음성이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음악은 리듬이다. 혹자는 ‘음성/음향’의 일정한 반복을 시의 음악성이라 여기고, 조작한 박자에다가 의미의 악센트를 억지로 연결시키는 실수를 범한다. (기타의 한 음을 듣고, 소리가 예쁘군, 그러니 이 음향이 반복되는 음악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하는 바보 같은 짓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음악일 뿐이다. 시는 음악이 아니다. 시의 음악은 오로지 리듬뿐이다. 리듬은 음성과 음향으로 구성될 수 없다. 분명 있는데, 그것을 분리할 수도 없고, 그것을 음악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이상한 것, 리듬이 우리를 진통에 빠뜨린다. 조연호는 앞의 문장에서 우리를 동음이의어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것은 혼란이다. ‘귀를 파다’가 일상생활에서 귀지를 꺼내는 행위를 지시하는 말인가. 그럴 수 있다. “사랑은 결국 망한 듯 싶”기 때문에 “한 부인”이 “미망인”이 된 것일까. 그 부인과 이룩한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의 귓속에 들어 있는 귀지를 다정하게 파주었단 말인가. 그럴 수 있다. 다른 시각. 정말로 귀를 ‘파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왜? 조연호니까! “바람은 우리의 의뢰에 따라 부딪치면 귀머거리가 되는 소리를 완성한다”는 구절이 보인다. 귀지를 파낸다고 귀머거리가 될까.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귀를 파다’와 ‘귀머거리’가 의미상 연동되려면, 정말로, 귀를 파내는 행위가 필요할 것이다. 조연호는 자연의 소리도, (곡괭이로) 귀를 파내는 “남자 아이”의 비명도 듣지 않는다. 시에 들어 있는 소리를 거세한다. 소리의 기원을 소거한다. 조연호는 ‘나’를 낳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한 부인-미망인’과 자신을 ‘우리’로 묶는다. 일차적으로 시어 ‘우린’은 ‘우리는’의 준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시각. ‘우린’을 ‘우리다’(어떤 것을 액체에 담가 맛이나 빛깔 따위의 성질을 액체 속으로 빠져나오게 하다) 동사의 활용형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우린’의 피수식어가 ‘물결’과 ‘오줌’이라는 것도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다. ‘나’는 무엇을 우려낸 ‘물결’과 ‘오줌’ 속에 있는 존재이다. 이제, 그 액체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수장되었다가 부활하기 또는 탄생 후 세례하기. 앞의 문장에서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는 모음 ‘ㅜ’를 본다. ‘우린’ ‘물결’ ‘물린’ ‘우는’ ‘우린’으로 이어지는 모음 ‘ㅜ’의 연쇄. 당연히, 문장의 의미는 ‘물려서 울다’로 집결된다. 지금 ‘나’는 ‘물려 있는’ 존재이고, ‘울고 있는’ 처지이다. 우리는 「기생벌이 온다」에서 해결되지 않는 이미지 하나를 목전에 두고 있다. “파우스트-흔들리는 배”이다. ‘주먹-흔들리는 배’로 번역된다. 주먹이라는 덩어리, 잎을 떼어낸 동물, 사지가 사라진 토르소, 덩어리, 배. 시의 배면에서 의미의 방향을 지시하는 모음 ‘ㅜ’. 조연호가 시에 숨겨놓은 주먹이 보인다. 조연호는 자신을 팔아넘긴 포유동물에게, 망해버린 한 부인에게 그리고 “자기라는 가장 깊은 의문의 세계”에게 주먹을 내민다. 이 주먹은 결단코 펴지지 않을 것이다. ‘주먹→배―범선―범하다―밤’으로 이어지는 다른 기표 연쇄의 무의식이 빚어내는 또 다른 리듬을 우리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조연호의 리듬은 풀어낼 수 없는 덩어리(주먹)이다. 그것이 꿈틀거린다, 변태한다. 변박의 심장(주먹)이 맥동한다. 조연호의 리듬은 가시적이지 않다. 아직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난해하다. 우리의 이해 정도와는 무관하게, 그의 시는, 아름다운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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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호의 시에 들끓는 무의식, 자기파괴 또는 괴멸의 의지를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왜 자신을 모멸하는가. 단 하나뿐인 ‘나’를 제거/거세한 후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신화의 성채에 자신을 유폐시키는 시인이 있다. 그가 ‘나’를 희생시켜 자신을 ‘탄생-죽음’의 근원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그가 소멸시킨 기원은 무엇인가. 그는 왜 기원을 지우려 하는가. 그의 두 번째 시집이 “저녁의 기원”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이유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의 출발점이 정녕 거기인가. 불가해와 불가산不可算의 세계에서 불가사의한 언어를 탄주하는 조연호의 시를 읽으면서 아득한 절망의 기운을 느끼는 것은, 오늘이라는 종말의 저녁을 기다리는 심정에 빠지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오늘은 “무늬를 흔드는 새도 즐겁지만 목을 따이고 허적이는 새도 즐”거울 것이다. 조연호는 광대이고 악사이고 여행자이다. 「Stationary Traveller」를 듣는 “저녁은 너무 적어서 실망했던 보물”(「옷 속의 보물」)은 아닐 것이다.
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등단. 시집 아나키스트 태양의 연대기 역진화의 시작. 현재 광운대학교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