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여인들은 은장도를 한복 속에 간직하며 정조에 대한 의미를 되새겼다. 장도장인 이면규 장인이 은장도의 마무리
작업인 칼날을 지켜보고 있다. 엄창현 기자 taejueum@idaegu.com
(사진왼쪽위)영풍 장도장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 동부2리의 김일갑옹이 보유한 공예기술로 장도제작 기능을 전수받은
기능보유자 이면규씨가 운영하고 있다. 장도는 남녀가 몸에 지니는 노리개 또는 호신용 칼이다. 장식용으로 차기도
하고 남을 공격하거나 때로는 자결을 위한 것이다. 은장도는 차는 위치에 따라 각각 명칭이 다르다. 부녀자들이
노리개로 옷고름에 찬 것은 패도, 주머니 속에 지닌 것은 낭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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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이긴 해도 남을 헤치는 데 사용하지 않은 장도. 자신의 몸을 지키는 호신부요, 자기 스스로 양심을 판가름하는 결단의
칼이요, 날카롭고도 한없이 부드러우면서 무디어가는 가슴을 벼리게 하는 칼이다.
이런 상징성이 없었다면 그저 그런 하나의 칼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도는 물질적 가치나 사용가치보다 정신적
가치가 더 소중하다.
특히 여인네들이 장식으로 차는 은장도 노리개는 정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로새겨져 있다. “난리 때 수치스런 욕이라도
당하면 자신이 차고 있던 은장도로 자결 한다”는 화제(話題)가 덧씌워져 흔히 정절의 표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부녀자들이 은장도로 자결한 예도 거의 없었다거나 고려 말 유목민인 몽고군에게 요긴한 장도가 말발굽과 함께
억지로 유입되었다는 설(최남선의 주장)이 있으나 그 역사는 오래전 부터다.
◆ 특성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경북 영주시 안정면 신정리. 안정농협 맞은 편에 장도장 이면규씨의 작은 공방이 있다.
그의 공방엔 간판 대신 황토 염색을 한 천에 먹으로 그린 을(乙)자형 장도(粧刀)가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자택 일부를
개조해 작업공간 겸 전시장이 소박하게 펼쳐진다.
장도(粧刀)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말하는데, 남자들은 허리띠나 옷고름, 혹은 포의 술띠 등에 차고 다녔고, 여자들은 치마
허리에 걸거나 옷고름(겉고름과 안고름)에 차거나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장도를 허리춤에 찬 것을 패도(佩刀)라고 하고, 주머니 속에 지닌 것을 낭도(囊刀)라 하였다. 장도 끈은 작은 요대와 같은
끈목이나 비단으로 접어서 만들기도 하였다.
장도는 작아서 허리춤에 차고 다니기에 편하고 멋을 내기에도 충분하고 집을 떠날 때도 가장 요긴하게 사용하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재료에 따라, 금ㆍ은ㆍ동ㆍ칠보 등으로 만들어지는 금속도, 소뼈ㆍ상아ㆍ물소뿔ㆍ대모ㆍ산호 등으로 만들어지는 골각도,
먹감나무ㆍ대추나무ㆍ흑단ㆍ화류 등으로 만들어지는 목도로 나뉘어지며, 그 형태도 다양하다.
대개 풍기장도는 칼자루와 칼집의 머리를 바로 마무리하는 평맞배기, 대칭으로 꼬부리는 乙자맞배기, 칼집에 첨사(젓가락)를
끼우는 첨사도 등 세 종류가 있다.
첨사의 역할은 칼집에 칼을 넣고 난 뒤 첨사를 꽂아두면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칼을 물어주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음식에 독이 있는지를 판별한다거나 젓가락처럼 사용할 수도 있다.
칼집에도 십장생의 문양을 조각하고, 나비ㆍ국화 모양의 장식을 붙인다. 전체적으로 담백하고 강직한 느낌을 주는 것은
남성용이며, 은이나 칠보에 꾸밈이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을 넣은 여성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영주 풍기 지역이 장도와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풍기에는 중석광과 금은광이 네 군데나 있었다. 광산이 있으면 금속을 다루는 기술자들이 많이 몰려드는 법. 기술자도 분업화
되어 칼집과 칼자루를 만드는 분야. 그러니까 뼈나 나무나 불을 다루는 기술자가 따로 있었고, 그 칼집과 칼자루를 보호하면서
멋을 내기 위해서 장식을 만드는 금속기술자가 따로 있었고, 쇠(칼날)를 다루는 기술자가 따로 있었다.
세 공정이 분업화되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다. 지금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지만, 불과 15년 전만해도 기술자들이 가득했다.
풍기 일대에서 만든 장도는 풍기와 가까운 충청도와 강원도, 경상도로 팔려나갔다. 장도뿐만 아니라 은가락지, 팔찌 같은
패물류도 풍기에 와야만 구입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문헌에는 이곳 영주를 비롯 전라도 광양, 경남 진주, 울산 병영이 장도로 이름이 드높았다.
광양은 장도가 길고 나무 소재를 많이 사용하며, 진주나 울산은 작으면서 역시 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영주지방은 짧고 작으
면서 은이나 소뼈를 사용을 많이 사용하면서 아름답게 꾸밈을 더했다.
◆ 옛날 방식 고집해선 안돼
그는 주로 노루나 산양, 사슴, 물소의 뿔, 산돼지이빨 등을 이용한 장도들과 펜던트와 여러 가지 장신구를 만들고 있다.
방송에서 촬영한다거나 무형문화재 전수자에게 요구하는 옛 방식, 이를테면 풀무나 화덕 같은 도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옛날 거 고집하라는데 옛날에 쓰던 철 없습니다. 옛날에 쓰던 장비 없어요. 없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옛날 걸 고집한다. 그러면 그건 나한테 사기를 치라는 거거든요.” 라며 감정을 억누른다.
“우리 장도의 칼날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칼은 칼로 보라는 거죠. 모양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은장도라하면 옛날에는 칼로 본 게 아니고 그냥 노리개로 본 거죠. 단장할 장(粧) 자를 쓰거든요. 그러나 저는 좀 현대적
으로 바뀝니다. 천 년이든 만년이든 세월이 지나 다시 봤을 때 아, 풍기 장도의 칼날이 칼은 칼이구나 하는 말을 듣고 싶은 거죠.”
그는 “장도가 외국인이든 누구든지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선물할 수 있는 것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며 “외국 어디를 가도 우리
장도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 것은 칼집과 칼자루를 동일하게 만들어서 모양을 예쁘게 만들어 내지만, 외국엔 칼집과 칼자루가 다르면서 칼은 거의
나무피나 가죽피에 끼워져 있다.
지금은 장도가 대부분 딸 시집 보낼 때나 며느리 맞이할 때 함에 넣어주거나 혹은 퇴직하는 분들의 선물용이나 소장용으로
더러 주문을 한다. 예물함에 은장도를 넣는 문화가 살아 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정절이란 공자 시대 얘기 쭘으로
치부하는 시대에 말이다.
그는 이 정신을 살려서 창의적인 증표장도를 선보였다. 남(양) 여(음) 2개의 장도 고리에 각각 달린 작은 조각(곡옥모양)을
합치면 사람 얼굴 모습이 되고, 다시 반으로 나뉘면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모습이 된다. 자기 짝이 아니면 문양이 맞지
않도록 해 신표를 삼도록 꾸몄다. 나름 반응은 좋았으나 아직 세상에는 널리 빛을 보지 못한 장도라고 했다.
◆ 대를 이은 장인 정신으로
그는 열여섯 나이에 ‘작은 월급’을 받고 금은방에서 반지, 팔찌와 같은 패물을 만들면서 19살 때 스승인 김일갑 옹을 만나게
된다.
당시 스승은 금방을 하고 계셨다. 그는 김옹을 아버지라 부를 만큼 한 식구로 생각했다. 정이 많으시고, 언제나 자상하게
가르침을 주었던 스승이었다.
김옹은 1990년에 경북 무형문화재 제15호 장도장 기능보유자로 지정 받았고, 2002년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보유자
후보로 지정받았다.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늘 들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들긴 합니다만. 저는 그게 우선이 아니고 제 작품이
우선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길을 간다 이거죠. 아직 기술이 부족한 거 같아요. 사는 문제요? 욕심이 없잖아요. 안 굶으면
되고. 그 대신 남들이 하는 술이나 담배를 안 합니다. 취미로 경기민요를 부른다는가 영주아리랑도 제가 만들었고요. 돈 욕심
생각하면 못 가지만 제 작품으로 욕심을 부리려고 하니까 갑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려
고 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을 갈고 닦으려고 하는 거지. 저는 늘 재미있습니다”
대개 장인이 되면 판매나 홍보에 집착하는 예를 자주 보게 되는데 “이런 유유자적함과 허욕이 사라진 호방함은 어디에서 오는
건가”하고 물었더니 “아마 선천적으로 조금은 우직하고 유유자적함이 바탕이 되어서 변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일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6개월이나 1년을 버티지 못하자 후계자로 아들 종현씨(25)를 지목했다. 얼마 전 아들의
졸업작품전을 보고 난 뒤 매우 흡족해했다.
고려청자 이미지를 살려 만든 장도와 침통을 보고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래서 우물안에 갇혀 있어선 안 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들에게 이르는 말도 자기 자신만 학생이고 나머지 모든 게 스승이라고. 학생은 스승이 많아야 한다고.
어느 곳이든 세상 밖으로 나가서 공부를 많이 하고 난 뒤 최후에 여기에 와서 작업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풍부한 자기발전을 위해 세상이 모든 스승이 되는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은 바다로 향하는 강물 같은 마음
이다. 이면규 장도장은 숯 돌에 갈아 장도 날을 벼르듯 가만히 마음의 장도를 어루만지고 있다.
손영학 대구가톨릭대대학원 공예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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