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
<콜롬비아>
공식명칭 : 콜롬비아공화국(Republic of Colombia)
인구 : 43,593,000 면적 : 1,141,568 수도 : 보고타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10. 7. 20 화폐단위 : 페소(peso/Col$) 국가(國歌) : O! Gloria inmarcesible("Oh Glory unfading!") 수도는 보고타이다. 대체로 남위 4°와 북위 13°에 걸쳐 있으며 남북길이는 약 1,780km이다. 콜롬비아의 북쪽 해안 1,600㎞는 카리브 해와 접해 있고, 콜롬비아 해안 서쪽 1,300㎞는 태평양과 접해 있다. 이 나라의 북서쪽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나누고 있는 파나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나라의 동쪽은 베네수엘라 및 브라질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페루·에콰도르와 접한다.
국토 크기는 프랑스의 2배가 넘고, 산안드레스이프로비덴시아 군도를 포함한다. 이 군도는 카리브 해에 있는 니카라과 해안에서 180㎞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콜롬비아 본토에서는 북서쪽으로 650㎞ 떨어져 있다. 인구의 대부분은 산악 내륙에 집중되어 있고, 그곳에 수도 보고타가 있다. 보고타는 안데스 산맥 북쪽의 고원 분지에 위치해 있다. 면적 1,141,568㎢, 인구 44,972,000(2009 추계).
신대륙 '발견자'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름을 딴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이다. 콜롬비아는 지리와 사회 두 측면에서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내륙 산계에 있는 눈 덮인 높은 봉우리들은 적도 삼림과 사바나 지역 위로 드높이 솟아 있다. 이 삼림과 사바나에는 인디언 부족들이 여전히 조상들의 삶의 방식과 전통을 따르며 살고 있다.
서늘한 산악지대의 중간에 위치한 현대적 도시들은 전통적 농촌 풍경과 공존한다. 전통적 농촌에서는 메스티소 농부들이 커피와 옥수수 및 기타 작물들을 경작한다. 대규모로 가축을 사육하는 목장들과 세 인종이 장악하고 있는 좀 더 접근성이 좋은 대서양 저지대는 뚜렷하게 다른 특징을 갖는다.
콜롬비아는 스페인 식민지로서의 역사를 강하게 나타낸다. 그것은 주로 남아메리카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한 로마 가톨릭교 문화로 나타난다. 국민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스페인어의 상대적 순수성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국민은 다수의 메스티소(유럽인과 인디언 후손의 통혼에 의한 후손)와 소수의 유럽계와 아프리카계로 구성된다.
경제는 전통적으로 농업에 기반하고 있는데, 특히 커피와 과일 생산이 중심이다. 산업과 서비스업도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콜롬비아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남아메리카 국가들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주민들 가운데 1/3 이상이 6개의 큰 대도시권에 산다. 이중 가장 큰 도시는 보고타이다.
국가의 정치적 불안정은 역사적으로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코카인 등의 마약 불법 거래는 콜롬비아 사람들의 삶에서 주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남아메리카 북서부에 있는 나라.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대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스페인인들의 도착 당시에는 서부 산간지역에 치브차어족 인디언이 확고한 정치제도를 이루지 못한 채 모여살고 있었다(→ 색인 : 치브차족).
스페인의 콜롬비아 정복은 사실상 1525년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가 산타마리아 시를 건설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533년 페드로 데 에레디아가 세운 카르타헤나는 신대륙 내 스페인 왕국의 주요 해군·상선 기지가 되었다. 1550년경 페루 부왕령의 일부인 산타페데보고타 아우디엔시아가 세워지면서 식민지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지역 인구는 스페인 정복 이후 번진 질병과 인디언에 대한 경제적 수요 때문에 감소했다. 현존하는 인디언들의 독특한 문화 특징들은 문화 변용과 통혼으로 파괴되었다.
1740년 아우디엔시아는 새롭게 창설된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지금의 콜롬비아·베네수엘라·에콰도르로 구성)으로 이전했다. 몇몇 집단, 특히 새롭게 부상한 크리올 중산층은 행정 개선과 무역 증진으로 번영을 누렸다.
1819년 보야카에서 스페인이 패배한 후 누에바그라나다가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이 된 1821년 콜롬비아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프란시스코 데 산탄데르의 지도하에 질서가 잡힌 정부가 세워졌으나 1840년 내란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자유당과 보수당이라는 2개의 주요정당이 조직되었다. 끊임없는 폭력사태 속에 양당간의 정권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지자 드디어 천일전쟁(1899∼1903)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후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이 이어졌으나 1948년 자유당과 보수당 사이의 적개심이 다시 폭발되었다. 1958년 양당은 서로 교대로 집권한다는 계획에 동의했다. 1968년에 통과된 개정 헌법에 따라 1974년 대통령과 국가 수준의 모든 입법단체들이 형평성과 관계없이 선출되었다. 1990년대까지 기존의 정당들이 주도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지만 내란과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게릴라전이 전국에서 계속되었다.
<에콰도로>
공식명칭 : 에콰도르공화국(Republic of Ecuador)
인구 : 13,419,000 면적 : 272,045 수도 : 키토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22. 5. 24 화폐단위 : 미국달러(U. S. dollar/U.S.$) 국가(國歌) : Oh Patria, mil veces, Oh Patria("Hail Oh Fatherland, a thousand times, Oh Fatherland") 공식 이름은 에콰도르 공화국(Republic of Ecuador/Rep?blica del Ecuador).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4번째로 작은 국가. 적도에 걸쳐 있고 서쪽으로 태평양에 접한다. 수도는 키토이다. 남북길이 약 725km, 동서길이 640km이고, 북쪽으로 콜롬비아, 남동쪽으로 페루와 경계를 이룬다. 면적 272,045㎢(갈라파고스 제도 포함), 인구 13,003,000(2003 추계, 갈라파고스 제도 약 2만 명)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4번째로 작은 국가. 스페인인들이 에콰도르를 점령하기 이전에는 여러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다. 카라족이 키토를 수도로 하여 세운 왕국은 1450년 이후 잉카 제국의 손에 넘어갔다. 왕국을 정복한 잉카 제국의 황제가 죽자 제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두 아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1526년 스페인군들이 도착한 당시 잉카 제국은 이 전쟁으로 극히 쇠약해진 상태였다. 세바스티안 데 벨랄카사르가 이끌었던 스페인군은 1532년 에콰도르에서 출발하여 잉카 치하에 있던 페루로 진군했고, 1534년에는 잉카의 중심지 키토에 입성하여 에콰도르 정복에 나섰다. 인디언들은 키토 시를 파괴하고 후퇴했다. 1534년말 벨랄카사르는 그 폐허에 비야데산프란시스코데키토를 세웠으며, 이곳은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스페인인들은 인디언 노동력을 이용해 광대한 부지에 식민지를 세웠다.
농경을 주로 한 당시의 사회는 계층 구분이 뚜렷했으며 변화가 느린 편이었다. 스페인 통치를 받던 잠시 동안을 제외한다면 에콰도르는 줄곧 페루 부왕령에 속해 있다가 1740년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의 일부가 되었다.
중류층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크리올은 스페인의 식민지 차별정책에 저항하며 변화를 선동하고 1809년 독립을 선포했다.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 이 운동은 심하게 탄압받았고 지도자들은 처형당했다. 그러나 에콰도르는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지휘하에 키토 시 부근에서 벌어졌던 피친차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치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830년에 독자적으로 헌법을 공포,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후 수십 년 동안 내륙지방 키토 시의 보수주의자와 귀족들, 해안지역 과야킬 시의 자유주의자, 부르주아들 사이의 경쟁과 적대관계로 혼란스러운 상태가 계속되었다. 빈번한 정권교체와 개헌이 잇따랐고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었다. 1860∼75년 귀족 및 성직자가 지배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의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경제와 교육 분야의 발전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자유주의자들의 불만이 컸다. 이후에 여러 정권이 들어섰으나 역시 20세기 초반까지 독재정치가 계속되었다. 경제적 곤궁과 사회적 불안이 심해지자 군부가 정치에 심하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1941년 페루가 에콰도르를 침입하여 남서해안의 엘오로 주를 황폐화시켰고, 분쟁지였던 아마존 강 지역의 상당 부분을 압류했다. 전쟁 후 상당기간 에콰도르에는 합법정부가 들어서 유지되었고, 비교적 자유 선거도 이루어졌다. 1944년 선거에서 호세 마리아 벨라스코 이바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72년까지 5회에 걸쳐 재임되었다. 그러나 그중 임기를 채운 것은 단 한번뿐이다. 극도의 불안과 예측불허의 정치상황 속에서 사회경제적인 진보는 거의 불가능했으며 비로소 새 헌법이 1979년에 인준되었다. 1970년대에 석유로 경제가 발전하긴 했지만 인플레이션 역시 상당히 심각한 상태였다.
1981년에는 페루와의 오랜 국경분쟁이 재개되었다.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에콰도르의 경제는 기름값의 하락세, 높은 인플레이션, 지진과 폭풍 재해에 따른 혼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페루>
공식명칭 : 페루공화국(Republic of Peru)
인구 : 27,515,000 면적 : 1,285,216 수도 : 리마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케추아어·아이마라어 독립년월일 : 1821. 7. 28 화폐단위 : 누에보솔(nuevo sol/S/.) 국가(國歌) : Somos libres, seamoslo siempre("We are free, let us always be so") 공식 이름은 페루 공화국(Republic of Peru/Rep?blica del Per?.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3번째로 큰 국가. 수도는 리마이다. 남위 0∼19˚(북서에서 남동방향으로 2,132km), 서경 68∼82˚(917km)에 걸쳐 있다. 북서쪽으로 에콰도르, 북동쪽으로 콜롬비아, 동쪽으로는 브라질·볼리비아, 남쪽으로는 칠레,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인접해 있다. 면적 1,285,216㎢, 인구 27,148,000(2003 추계).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3번째로 큰 국가.
페루에는 적어도 BC 8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중반부터 발달된 다양한 문화가 페루 각지에서 꽃피었다. 1438년경 잉카 제국이 50년에 걸친 정복사업을 시작했으며, 결국은 지금의 페루, 볼리비아, 칠레,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을 장악했다.
1524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처음 페루를 탐험했다(→ 스페인사). 그는 1531년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다시 와서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잉카의 왕인 아타우아이파를 죽였다. 스페인은 페루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했고, 약 300년간 페루는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었다.
19세기초 독립운동 당시도 페루는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지키고 있었다. 페루의 독립운동은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이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것에 힘입어 일어났다. 아르헨티나의 해방자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이 1821년 리마를 점령한 후 페루는 독립을 선포했다.
1836년 안드레스 산타 크루스는 페루-볼리비아 연방을 만들기 위해 페루와 볼리비아를 합병시켰으나 이 합병은 1839년 페루군이 칠레에 패하자 깨어졌다. 1844∼62년 라몬 카스티야 장군의 페루 통치기간 동안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다. 카스티야는 공공교육을 발전시켰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군대를 강화시켰다. 1870년대에 시민당이 형성되면서 국가의 통제권이 군(軍)에서 민간정부로 돌아왔으나 심각한 경제침체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경제적 혼란은 칠레와의 전쟁(1879∼84)에서 패함으로써 더욱 심각해졌다.
공공부채가 늘어남에 따라 경제회복을 돕기 위해 채권자들이 1889년 페루회사를 설립했다. 1895년에 민주당이 성립되고 니콜라스 데 피에롤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질서정연한 발전을 이룬 후에 시민당의 아우구스토 레기아 이 살세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4년간(1908∼12) 통치했다. 레기아는 1919년 재선되어 미국 출자공공사업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재선되었지만 인기가 하락했고, 1930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쿠데타군의 지도자인 루이스 산체스 세로 대령은 1931년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1933년 암살되었다. 그의 후임자인 오스카르 베나비데스 장군은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1939년 마누엘 프라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전쟁이 끝나자 마누엘 오드리아가 정권을 장악했다(1948). 1956년 오드리아의 뒤를 이어 프라도가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1963년에는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가 대통령이 되어 효율적인 농경지 이용, 조직적인 지역사회 개발을 시작하고 문맹퇴치에 힘썼다. 1969년 군사평의회가 정권을 잡고 난 뒤 많은 외국상사 재산을 국유화했고, 대지주가 소유했던 토지를 소작농이 수용하도록 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1975년 8월 또다른 쿠데타가 일어나 기존의 군사평의회를 대체했고, 문민정부를 회복하는 기반을 닦았다. 새 군사평의회는 1978년 새헌법 초안을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했다. 1980년 벨라운데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85년에는 APRA의 알란 가르시아 페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들 두 정부는 모두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엄청난 외채, 테러리스트 전술을 사용하는 신(新)마오주의 단체인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 등 게릴라들의 폭력에 시달렸다. 마약 거래와 만연해진 코카나무 재배로 경제개혁도 난관에 부딪혔다.
1990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일본계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당선되었다. 1992년 대통령에 의한 헌정중단조치, 의회와의 대결 및 대통령 암살과 정부 전복 쿠데타 기도 등으로 정국이 혼미했으나 같은 해 11월 총선거에서 후지모리가 승리함으로써 현재는 진정되어가는 추세이다.
<브라질> : 포르투갈 식민지
공식명칭 : 브라질연방공화국(Federative Republic of Brazil)
인구 : 186,771,000 면적 : 8,514,877 수도 : 브라질리아 정체·의회형태 : 연방공화제, 다당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포르투갈어 독립년월일 : 1822. 9. 7 화폐단위 : 레알(real/R$, 복수형 reais) 국가(國歌) : Ouviram do Iparanga("They hear the river Iparanga") 공식 이름은 브라질 연방 공화국(Rep?blica Federativa do Brasil/Federative Republic of Brazil).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 수도는 브라질리아이다. 에콰도르와 칠레를 제외한 남아메리카의 모든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남쪽으로 우루과이, 남서쪽으로 아르헨티나·파라과이·볼리비아, 서쪽으로 페루, 북서쪽으로 콜롬비아, 북쪽으로는 베네수엘라·가이아나·수리남과 프랑스령 기아나에 면해 있다. 동쪽 경계선은 남아메리카의 대서양 쪽 해안선 7,400km 이상을 차지한다. 면적 8,514,047㎢, 인구 178,470,000(2003 추계).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
포르투갈 점령 이전의 브라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원주민은 거의 투피과라니 인디언이었다. 각각 서부와 북서부에 제국을 세웠던 잉카인이나 아스텍인과 달리 이들은 제국을 형성하지 않았으며 곳곳에 흩어져 유목생활을 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 해군 사령관이었던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에게 발견되면서 처음으로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 1500년 카브랄이 인도로 가는 길에 서쪽으로 항해하여 발견된 이 땅은 처음에는 포르투갈인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
그러나 브라질(brasil)이라고 알려진 값진 붉은 염료를 함유한 수종이 발견되는 한편, 해안을 탐사하고 있던 프랑스와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적극적으로 식민지화에 나서게 되었다. 브라질이란 국명은 염료를 함유한 나무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식민사업은 1530년 마르팀 아폰수 데 소사의 지휘 아래 처음 시작되었다. 그는 1532년 상비센테를 세웠다. 거주지 기부제가 실시되어 봉건적 특색이 강한 대토지소유를 낳았다. 인디언들은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후에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인디언을 대신해서 농장노동에 투입되었다.
당시 예수회선교단은 인디언을 교화·교육시키고, 인디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등 적지 않은 자취를 남겼다.
내륙을 향한 팽창은 상파울루 시민인 반데이란테가 노예로 쓸 인디언을 납치하고 금을 비롯한 진귀한 귀금속을 찾아내려고 대규모 탐험대를 조직하여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이루어졌다.
포르투갈 통치에 반항한 봉기는 1789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립은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808년 포르투갈 섭정궁(攝政宮) 돔 주앙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브라질로 피해온 후 혁신적인 개혁들을 단행했다. 그후 1815년에는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베스로 이루어진 통일왕국을 새로 설립하면서 수도를 리우데자네이루에 두고 브라질을 포르투갈과 동등한 왕국의 범주로 승격시켰다·(→ 색인 :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베스 통일왕국).
그러나 주앙(나중에 주앙 6세)은 본국에서의 혁명운동 때문에 포르투갈로 귀환해야 했다. 포르투갈 의회는 브라질을 식민지 상태로 되돌리려 했으나 브라질인들이 격노하는 바람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머물러 있던 섭정 황태자 돔 페드루는 1822년 9월 7일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했다.
처음 20년간은 많은 소요를 겪다가 페드루 2세가 오랫동안(1840∼89) 통치를 하면서 브라질 왕국은 성장·번영했고 안정을 이루었다. 1889년 군부 지도자가 혁명을 일으켜 페드루 2세는 왕위에서 물러났고 공화국이 시작되었다.
20세기에 들어 이민이 증가하면서 제조업도 성장했다. 그러나 군부 쿠데타가 자주 일어났고 인권이 억압되는 경우도 많았다. 1960년대 내륙지역을 발달시키기 위해 수도를 브라질리아로 새로 옮겼으나, 새 수도를 건설하는 동안 공채가 증가하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졌다. 1979년 이후 주앙 바티스타 데 올리베이라 피게이레두 대통령이 이끄는 군사정부는 민주화 정책을 단계적으로 실시했다. 1989년 29년 만에 처음으로 대통령 직접선거가 실시되어 페르난두 콜로르 데 멜루가 집권했으나, 1992년 부패혐의가 드러나 같은 해 12월 탄핵 절차가 시작되자 곧 사임했다. 부통령 이타마르 프랑쿠가 그를 이어 남은 임기를 채우다 그후 1994년 10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수가 5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아마존 우림 [Amazon Rain Forest, ― 雨林]700만 ㎢의 면적을 차지하는 아마존 강과 그 지류들의 유역에 나타나는 대규모 열대우림.
브라질 전국토의 40%를 차지하는 이 우림지역은 북쪽으로 기아나 고지, 서쪽으로 안데스 산맥, 남쪽으로 브라질 고원, 동쪽으로 대서양 등과 경계를 이룬다(→ 색인 : 생태학).
우림은 대서양 부근의 동부 소택지인 홍수림에서 안데스 산맥의 교목(喬木) 한계선(treeline)까지 뻗어 있다. 안데스 지역의 높은 곳에는 크고 작은 초지와 거대한 선인장이 가끔 나타나고, 낮은 곳에는 천남성과(天南星科 Araceae)가 서식하고 있는 소택지가 대부분이다.
안데스의 삼림은 동쪽으로 가면서 점차 열대우림으로 변한다.
브라질 중앙고원의 삼림은 줄기가 비틀리고 껍질이 두꺼우며, 가죽 같은 잎을 가진 중간 이하의 층위를 나타내는 나무와 관목, 풀 등으로 구성된 식물상을 보여 마치 공원을 연상시킨다. 하천 부근은 나무가 더 크며, 대초원(pampa)이 갑자기 나타날 때도 있다.
아마존 강 유역은 하구의 폭이 240㎞ 이상 되며, 대서양으로 열린 방대한 협곡과 같다. 1,000개 이상의 지류가 있고 유역면적이 세계에서 가장 넓다. 풍부한 식생이 특징인 아마존 우림에는 도금양·아카시아·자단(紫檀)·브라질넛·고무나무·야자수 등 여러 가지 수종을 볼 수 있다. 마호가니와 아마존에 있는 침엽수는 훌륭한 목재가 되고 있다.
주요야생동물로는 재규어·맥(?)류·붉은사슴·캐피바라와 몇 종의 원숭이가 있다. 우림의 조류는 앵무새·왕부리새·가마우지·주홍색따오기 등을 포함해 매우 다양하다. 마나우스 남쪽에 주요유전이 있으며, 주석광산도 이 지역의 경제에서 중요하다.
<베네수엘라>
공식명칭 : 베네수엘라공화국(Bolivarian Republic of Venezuela)
인구 : 27,216,000 면적 : 916,445 수도 : 카라카스 정체·의회형태 : 연방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11. 7. 5 화폐단위 : 볼리바르(bol?var/B, 복수형은 Bs) 국가(國歌) : Gloria al bravo pueblo("Glory to the brave people") 공식 이름은 베네수엘라 공화국(Rep?blica de Venezuela/Republic of Venezuela).
남아메리카 북부 끝에 있는 국가. 카라카스를 수도로 한다. 최대 범위는 남북길이 약 1,050km, 동서길이 약 1,285km이다. 동쪽으로 가이아나, 남쪽으로 브라질, 서쪽으로 콜롬비아를 경계로 하며 북쪽과 북동쪽은 카리브 해와 대서양을 마주하고 있다. 면적 916,445㎢, 인구 25,699,000(2003 추계).
남아메리카 북부 끝에 있는 국가.
베네수엘라에서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 시대의 인디언 문화는 흔히 알고 있는 안데스 산맥 및 중앙 아메리카 문명에 속하지 않는다.
베네수엘라의 초기역사는, 이른바 안데스 산맥 주변지대의 문화가 카리브 해 및 아마존 강 유역의 문화와 결합된 변이지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16세기에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오기 전까지 적어도 BC 2000년부터 고립된 종족들이 해안지역 및 야노스 평원지역에 널리 거주했다.
1498년 콜럼버스가 3번째 항해중에 베네수엘라의 해안을 발견했고 다음해에 스페인의 탐험가들이 늪이 많은 마라카이보 호 연안을 따라 지주(支柱) 위에 자리잡은 인디언 원주민 부락을 보고 베네수엘라('작은 베네치아')라고 이름지었다.
300년 동안 베네수엘라는 스페인 식민지로 있으면서 스페인에서 온 성직자와 관료들의 지배를 받았다.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난 백인인 크리올이 이곳 식민지의 부유계층으로 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다른 민족들을 예속시켰다. 1810∼25년 이들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와 시몬 볼리바르를 주축으로 해서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821년 스페인이 패하고 나서 베네수엘라는 콜롬비아·에콰도르와 함께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1830년 탈퇴해 독립공화국이 되었다. 1830∼1958년에 안토니오 구스만 블랑코(1870∼88), 시프리아노 카스트로(1899∼1908), 후안 비센테 고메스(1909∼35) 장군 등을 비롯한 독재자에게 잇달아 통치를 받았다.
베네수엘라는 1844년부터 이전에 영국령 기아나였던 가이아나와 가이아나 영토의 약 2/3 지역을 두고 영토분쟁을 계속해왔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옛날에 스페인 영토였다는 것을 근거로 남북으로 흐르는 가이아나 중부의 에세퀴보 강을 동부 국경이라고 주장했다.
1899년 판정이 내려진 이후 대체로 영국과 가이아나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대부분 열대우림에 속하는 이 지역이 베네수엘라 지도에는 아직도 되찾아야 할 영토로서 표시되어 있다.
고메스가 지배한 전제적인 독재정권시대는 도로·학교건물 건설 등을 포함한 이권이 손쉽게 외세에 넘어갈 수 있는 여건이 조장된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영국·네덜란드·미국 같은 나라들이 석유 이권에 큰 관심을 갖고 접근해왔으며, 1920년대말 베네수엘라는 생산량에서 미국 다음가는 세계적인 석유수출국이 되었다. 1940, 1950년대의 석유 붐으로 정부는 막대한 광구 사용료를 받아냈다.
독재자의 지배가 간헐적으로 계속되는 동안 이 자금 가운데 일부는 공공사업에 쓰이기도 했는데, 농촌지역 개발을 방치한 채 카라카스를 현대화하는 사업에 특히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1958년 군사독재자인 페레스 히메네스가 전복되고 민주선거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주로 좌파 정권이 통치했다. 로물로 베탄쿠르는 베네수엘라 최초로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임기(1959∼64)를 만료했다. 그는 사회경제 발전을 이끌었고 마침내 정치적·경제적 안정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베탄쿠르 이후 20년 동안 민주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이 5번 바뀌었다. 1980년대초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경제불황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확고히 다져졌다. 경제가 석유수출에 의존하기 때문에 1970년대말과 1980년대에 뚜렷했던 석유수요의 급속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이아나> : 17세기 네덜란드 ->19세기영국령
공식명칭 : 가이아나공동공화국(Co-operative Republic of Guyana)
인구 : 736,000 면적 : 215,083 수도 : 조지타운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영어 독립년월일 : 1966. 5. 26 화폐단위 : 가이아나달러(Guyana dollar/G$) 국가(國歌) : Dear land of Guyana 공식 이름은 가이아나 공동 공화국(Co-operative Republic of Guyana).
남아메리카 북동부에 있는 공화국.
1966년까지 영국령 기아나가 공식이름이었다. 수도는 조지타운이다. 남북으로 최고 길이가 약 800km이고, 동서로 최대 너비가 460km이다. 북쪽은 대서양, 동쪽은 수리남과 각각 면해 있고, 남쪽 및 남서쪽은 브라질, 서쪽은 베네수엘라와 각각 경계를 이룬다. 베네수엘라·수리남과의 사이에 종결되지 않은 국경분쟁이 20세기말에도 계속되었다. 면적 215,083㎢, 인구 778,000(2003 추계).
남아메리카 북동부에 있는 공화국.
아메리카 인디언은 유럽인이 정착하기 전에 가이아나에 살았지만 이들 원주민에 대해서는 가이아나라는 현재 국명이 유래한 기아나('물의 나라')라는 원주민어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17세기초까지는 네덜란드 식민지가 세력을 떨쳤으나 나폴레옹 전쟁 동안 영국이 이곳을 점령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한 후 영국은 데메라라·버비스·에세퀴보를 구입했다. 노예무역은 1807년에 폐지되었으나 당시 가이아나에는 이미 약 10만 명에 달하는 노예가 있었다. 노예해방은 1838년에야 이루어졌다. 1831년에 3군데 식민지는 영국령 기아나로 통합되었다(→ 색인 : 대영제국).
184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해방된 노예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를 거부하여 동인도인과 중국인을 연기(年期)계약고용의 노동자로 수입해 오기 시작했다. 1917년까지 약 24만 명의 동인도인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영국령 기아나는 1928년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고 1953년에 내각자치제,성인의 보통참정권, 민선 입법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이 채택되었다. 정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동인도인이 주축을 이루는 인민진보당(PPP)과 흑인이 주축이 된 인민민족의회파(PNC)로 발전했다. PNC는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1966년 가이아나라는 이름으로 독립하는 데 앞장섰다. 1970년 가이아나는 영연방공화국이 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레이먼드 아서 청이 뽑혔고 총리로 포브스 버넘이 선출되었다. 1970년대에 걸쳐 가이아나의 정치와 행정은 버넘과 PNC가 지배했다. 버넘 정부에 대한 주요저항운동은 체디 제이건이 지도하는 PPP가 이끌었다. PNC의 일당독재가 격화되고 PPP가 이에 맞서 3년 동안 의회의 등원을 거부하자 버남은 1980년 새 헌법을 공포했다. 이어서 선거를 실시했으나 대부분 정당들이 참여하지 않았다. PNC가 승리했지만 국제감시단들로부터 확증을 얻은 제이건 등의 반대파들은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된 버넘을 고발했다. 버넘은 1985년에 사망했고 휴 데스먼드 호이테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1980년대말 호이테는 1980년대 동안 크게 악화된 경제를 살릴 방책으로 대규모 외국인투자 허용책을 실시했다.
<수리남> 네덜란드 식민지
공식명칭 : 수리남공화국(Republic of Suriname)
인구 : 502,000 면적 : 163,820 수도 : 파라마리보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네덜란드어 독립년월일 : 1975. 11. 25 화폐단위 : 수리남달러(Suriname dollar/SRD) 국가(國歌) : God zij met ons Suriname("God be with our Suriname") 공식 이름은 수리남 공화국(Republiek Suriname/Republic of Suriname).
남아메리카 중북부 해안에 위치한 공화국. 수도는 파라마리보이다. 북쪽으로 대서양, 동쪽으로 프랑스령 기아나, 남쪽으로 브라질, 서쪽으로 가이아나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가이아나, 프랑스령 기아나와 국경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면적 163,820㎢, 인구 435,000(2003 추계).
남아메리카 중북부 해안에 위치한 공화국. 수리남이라는 이름은 최초의 원주민이라고 알려진 수리넨족(族)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16세기 전에 다른 아메리카 인디언들에 의해 쫓겨났다.
1593년에 스페인 탐험가들이 수리남의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1602년 네덜란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1651년에는 당시 바베이도스의 총독이던 프랜시스 윌로비가 영국인 정착민들을 보냈으나, 1667년 '브레다 조약'에 따라 니웨암스테르담(뉴욕)과의 교환조건으로 수리남은 네덜란드에게 넘어갔다.
168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커피와 사탕수수 농장을 세우고, 아프리카 노예들을 인부로 들여왔다. 야만적인 착취로 많은 노예들이 내륙으로 달아났다. 결국 네덜란드인들은 이들을 인정하고 땅을 나눠주었으며 그후 흑인들은 추장을 뽑아 아프리카 서부의 문화와 정치를 재현했다. 이들이 네덜란드인들에게 부시니그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종족이다. 1799∼1802년, 1804∼15년의 짧은 영국 통치 기간을 제외하면 수리남은 줄곧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1863년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그대신 중국·자바·인도 등으로부터 대농장에서 일할 계약고용인들이 도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대농장 농업은 침체되었고, 1915년 처음 발견되었던 보크사이트가 주요수출품으로서 대농장 생산을 대신하게 되었다.
수리남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추축국(독일·일본·이탈리아)에 점령당하지 않은 2곳의 네덜란드령 가운데 하나였다. 헌법상의 개혁(1948∼51)에 따라 자치권을 얻고 1954년에 결국 자치정부가 구성되었다.
1975년 독립을 맞이했고, 헨크 아론이 입헌의 의원내각제 국가로 성립한 수리남 최초의 총리로 취임했다. 1979년 자바인 내각이 사임하면서 1980년초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6개월 후 특무상사 데시 보우테르세가 또 쿠데타를 일으켜 1982년 12월부터 통치권을 행사했다. 1982년 시민저항운동이 일어나서 군부가 그 지도자들을 처형하자 네덜란드와 미국은 경제적 원조를 중단했다. 그후 경제가 쇠퇴하고 부시니그로 게릴라들의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정부의 권위와 법집행의 유효성 등이 상실되기 시작했다. 1987년에 유권자의 압도적인 지지로 새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988년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바인, 크리올, 아메리카 인디언으로 이루어진 3당연합의 일치된 노력으로 민간인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러나 군부는 계속 직접적·간접적으로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아나 프랑스령>
프) Guyane Fran?aise. 공식 이름은 Department of French Guiana(D?partement de la Guyane Fran?aise). 남아메리카의 북동 해안에 있는 프랑스의 해외주(州). 개요남쪽과 동쪽으로는 브라질과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수리남, 북동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해 있다. 수도는 카옌이다. 면적 83,534㎢, 인구 178,000(2003). 자연환경지질학적으로 기반암은 기아나 고지 가운데 결정암 산괴의 일부를 이룬다. 대체로 북동쪽으로 바다로 흘러나가는 강들이 이 산괴를 크게 침식했으며, 대부분 지역이 저지대이다. 마로니 강은 서쪽 수리남과의 국경을 이루고, 오야포크 강은 동쪽 브라질과의 국경을 이루며 흐른다. 남부의 투무쿠마케 산맥은 해발 700m에 달한다. 카옌 남동쪽에 있는 소택성의 해안평야는 최근의 충적세 퇴적물들로 이루어져 있어 홍수림과 풀이 자라는 데 알맞다. 더 오래된 충적층은 카옌 서쪽에서 사바나를 이룬다. 단단한 재목이 대부분인 울창한 열대 밀림이 해안평야 외곽에 무성하며, 영토의 4/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2∼7월에 폭우가 내리며, 연강우량은 카옌 주변에서 3,800㎜에 달하고 북동쪽으로 갈수록 감소한다. 기온은 전반적으로 높으며 월평균기온은 카옌에서 25∼27℃를 기록한다.
야생동물로는 맥·카이만·오셀롯고양이·나무늘보·큰개미핥기·아르마딜로 등이 있다. 광물자원은 고령토·금·보크사이트로 한정되어 있다. 국민주민은 크리올(물라토)이 다수를 이루며, 소수 인종으로 흑인, 아메리카인디언, 프랑스 본국인, 레바논인, 중국인, 동인도인, 라오스인, 아이티인, 브라질인, 베트남인이 있다. 언어는 공용어인 프랑스어를 비롯해서 크리올어, 흑인들이 쓰는 타키타키(스라난)어, 아메리카인디언들의 방언, 그리고 이민사회의 여러 언어가 쓰인다. 주요종교는 인구의 약 90%가 신봉하는 로마 가톨릭교이다.
불교와 이슬람교는 동인도제도와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신봉하고 있다. 주민은 주로 최대 도시인 카옌과 그 주변 및 여러 해안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내륙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다. 인구통계율은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의 양상을 띠고 있다. 1970년대말과 1980년대에 동남아시아, 아이티, 카리브 해의 프랑스령으로부터 이민해왔다. 경제프랑스령 기아나는 개발도상의 시장경제 체제로서 프랑스 본국을 모델로 삼고 프랑스로부터 원조를 받고 있다. 서비스업과 농림수산물의 생산·가공·수출이 경제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농업은 GNP에서 큰 몫을 차지하며, 등록된 노동인구의 1/8이 종사하고 영세한 자작농과 시간제로 농사일을 하는 사람도 많다. 주로 영세 농업이 행해지며 카사바·타로감자·고구마·쌀·옥수수·바나나·플랜틴이 주로 재배된다. 가족 단위로 소유하고 경작되는 소규모 농지가 대부분이지만, 주로 프랑스로 수출하는 사탕수수, 라임 열매, 바나나, 열대과일 등의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도 약간 있다.
삼림은 상업적 가치가 있는 수종이 분포해 있다. 전체 임야 가운데 일부는 국가가 보존지구로 지정했지만 대부분은 개발이 허용되어 있다. 벌채되는 목재는 대부분 공업용으로 쓰이며, 이 가운데 2/5가 수출된다.
목초지는 전체 육지의 1%도 안 되며 주로 소·돼지·가금의 사육에 이용된다. 고기와 우유의 생산은 미미하여 대량으로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다.
새우가 연간 어획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광업은 극히 미약하여 광물성 연료와 금속 광물의 수입이 불가피하다. 채취되는 광물은 금·자갈·모래가 고작이다. 얼마 안 되는 제조업은 어류·육류·농작물의 가공과 럼주의 양조, 제재목 생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자재와 소비재는 대부분 수입해야 한다. 전력 생산은 전적으로 수입하는 광물성 연료에 의존한다. 노동력의 대부분이 행정과 공익사업 및 농업에 종사한다. 임금과 각종 수당이 프랑스에서 통용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입법화되어 있다. 실업과 인플레이션이 심한 편이다.
도로의 2/5가 포장되어 있지만, 내륙에서는 도로망이 심각할 정도로 낙후되어 있다. 데그라데칸·르라리보·생로랑뒤마로니·쿠루가 주요항구들이다. 내륙의 수로 가운데는 소형의 외양항행 선박이 항행할 수 있는 수로가 몇 개 있지만, 대부분은 흘수가 얕은 배들만이 항행할 수 있다. 카옌에 국제공항이 있고 쿠루에는 유럽 우주국이 이용하는 로켓 발사기지가 있다. 무역수지는 수출이 수입의 1/10밖에 되지 않아 적자를 면치 못한다. 식품·기계류·소비재·정유가 주로 수입된다. 수출품은 새우·임산물·금이 주종을 이룬다. 무역 상대국은 프랑스와 미국이다. 프랑스로부터 상당한 원조와 기술 지원을 받는다. 정치·사회프랑스령 기아나는 프랑스 헌법의 규정에 따라 프랑스의 해외주로 통치되며, 따라서 프랑스 공화국의 일부를 이룬다. 하원에 2명의 민선대표와 상원에 1명을 파견한다. 지방 정부는 지사 1명과 19명의 총회와 31명의 지역위원회가 이끌며, 두 위원회 모두 보통선거로 선출된다. 지방상소법원이 하나 있다. 최대의 정당은 기아나 사회당이다.
그밖에 공화집회당(드골파 정당), 프랑스 민주연합당, 독립을 지지하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기아나 통일당 등이 있으며 활동이 자유롭다. 그러나 폭력을 기본 노선으로 하는 기아나 해방국민전선당은 불법화되었다. 프랑스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사회보장제도는 산업재해·실업·출산·가족 수당을 지급하며 노령·무능력·유족 연금도 있다. 사망의 주원인은 동맥계통의 병, 사고, 암이다.
카옌에 있는 파스퇴르 연구소는 열대 풍토병에 관한 연구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명하다. 평균수명은 남자 63세, 여자 70세이다.
교육은 6∼16세의 어린이에게 무상·의무제로 실시된다. 학령기 아동의 거의 전부가 취학하고 있다. 사립대학과 여러 개의 교육대학이 있으며, 종합대학교육은 프랑스나 프랑스령 앤틸리스 제도에서 받을 수 있다. 뉴스 매체는 정부의 직접통제는 받지 않지만 보조금과 관허 문제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자체적으로 상당한 규제를 한다. 주요일간지는 카옌에서 발행되는 〈기아나 신문 La Presse de Guyane〉이다. 문화문화생활은 상주 인종집단들의 다양한 배경을 잘 보여준다. 이 고장과 아프리카 전래의 수공예·풍습·미술이 아메리카 인디언과 흑인들 사이에 널리 유행한다. 대도시지역에서는 혼성 크리올 문화가 두드러진다. 이 문화에서 볼 만한 것은 화려한 색깔과 독특한 무늬의 의상, 아프리카와 동인도 제도와 18세기 프랑스의 영향을 반영한 춤, 많은 주민이 의상 디자인과 작곡과 무용 경연에 열을 올리는 사순절 전의 카니발을 중심으로 한 축제 등이다. 프랑스령 기아나의 시인 레옹 다마는 1920년대에 카리브 제도에서 유행한 '모데르니스모' 문학 운동의 지도자였다. 역사1500년에 스페인인들이 기아나의 해안을 탐험하고, 1503년에 카옌 주변 지역에 정착했다. 프랑스 루앙 출신의 상인들이 1624년 신나마리에 교역 센터를 개설했고, 이어 루앙이나 파리 출신의 다른 상인들이 들어와 1643년에 카옌을 건설했다(→ 색인 : 프랑스사).
브레다 조약에 따라 1667년 이 영토는 프랑스에 넘어갔고, 네덜란드인들이 1664년 카옌을 점령했다가 1676년에 축출되었다. 1877년 이후 이 영토의 주민들은 프랑스 시민이 되어 프랑스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52년 프랑스는 이곳을 유형지로 이용하기 시작했으며, 강제 이송된 기결수들은 악명 높은 디아블 섬(악마의 섬)이 예시하는 것처럼 끔찍한 상태에서 징역살이를 했다. 1852∼1939년 7만 명이 넘는 프랑스의 기결수들이 강제 이송되었으며, 악마의 섬에 있던 유형지는 알베르 롱드레(1884∼1932)의 놀라운 폭로가 있은 후에야 철폐되었다.
하지만 클뤼니의 생조제프 수녀원의 수녀원장 안 마리 자부에가 건설한 개척촌 마나(1827∼46)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또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자부에는 리베르만 신부와 함께 이곳에 프랑스의 진보적 가톨릭교의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해방 흑인노예와 여자들을 위해 최초의 교육제도를 수립했다. 프랑스령 기아나는 1946년에 프랑스의 한 주가 되었다. 전후의 전반적인 경기침체는, 1968년 쿠루에 유럽 우주국의 로켓 발사기지와 신도시가 건설되고, 1970년대말에 농산물과 임산물의 증산을 촉진하는 녹색계획(Plan Vert)이 채택됨으로써 다소 완화되었다.
<볼리비아> 스페인 식민지
공식명칭 : 볼리비아공화국(Republic of Bolivia)
인구 : 9,354,000 면적 : 1,098,581 수도 : 행정수도 라파스, 사법수도 수크레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아이마라어 ·케추아어 독립년월일 : 1825. 8. 6 화폐단위 : 볼리비아노(boliviano/Bs) 국가(國歌) : Bolivianos, el hado propicio("Bolivians, the propitious fate") 공식 이름은 Rep?blica de Bolivia(Republic of Bolivia).
남아메리카 중서부에 있는 내륙 국가. 행정수도는 라파스이며, 헌법 또는 사법상의 수도는 대법원 소재지이며 유서 깊은 수크레이다. 볼리비아는 열대지방에 위치하며 남북 길이가 약 1.500㎞, 동서 길이는 약 1,300㎞이다. 북쪽과 동쪽으로 브라질, 남동쪽으로 파라과이, 남쪽으로 아르헨티나, 남서쪽과 서쪽으로 칠레, 북서쪽으로 페루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대 호수 마라카이보 호(湖)를 잇는 2번째 큰 호수 티티카카 호가 볼리비아와 페루에 속해 있다.
볼리비아는 태평양 전쟁(1879~84)에서 칠레에게 태평양 해안 영토를 빼앗긴 후 내륙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인접 국가들과의 협정으로 태평양과 대서양에의 우회 접근은 가능하게 되었다. 면적 1,098,581㎢, 인구 9,775,000(2009 추계).
볼리비아는 전통적으로 고지대 국가로 여겨졌다. 국토의 1/3 정도가 안데스 산맥에 자리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대도시들이 그 지역에 발달되었다. 수백 년 동안 고지대 도시들은 광업·상업·사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지만 20세기 후반에 산타크루스를 비롯한 동부의 저지대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인구와 경제면에서의 변화가 일었다.
볼리비아는 화려한 역사를 가졌다. 한때는 고대 티아우아나코 제국의 중심지였고,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는 잉카 제국의 일부였다. 신대륙 정복자들의 상륙 이후, 볼리비아는 남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을 포괄하는 페루 부왕령에 편입되었다. 이 식민통치로 많은 양의 은을 스페인에 제공했으며 스페인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데 기여했다.
남아메리카 중서부에 있는 내륙 국가. 볼리비아의 초기 역사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데스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2만 1,000년 전부터이지만 지역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 문화가 발달한 것은 1000년 이후부터였다. 감자 및 라마가 전래된 것도 이무렵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600년 이후 한때 티티카카 호에서 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의식(儀式) 중심지 티아우아나코를 중심으로 상당한 수준의 문화가 번창했다. 이 문화는 500년 동안 발달하면서 외부세계에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의 문화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구조물들을 남겼다.
1200년 이후에 아이마라어를 사용하는 많은 소왕국들이 티아우아나코 문화를 계승했고,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접어들 때까지 볼리비아 전역을 지배했다. 15세기말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서북의 잉카인이 아이마라족을 그들 제국에 합병하고 합병지역을 코야수요라고 불렀다. 토착어 및 문화는 비교적 원래대로 남겨두었지만 이 지역은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잉카의 식민지가 되었다.
1532년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침입했다. 16세기말 스페인은 지금의 수크레인 차르카스를 비롯해서 라파스·산타크루스·비야데오로페사(코차밤바) 같은 도시를 건설하고 포토시의 은을 채광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당시 페루 부왕령에 속한 차르카스의 아우디엔시아라고 일컬어졌던 지역으로 17세기에 큰 번영을 누렸다.
포토시는 한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여러 학술단체와 대학이 있었던 차르카스는 '아메리카의 아테네'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말에 이르러 광물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1800년대초 독립전쟁 후 심각한 경제침체가 뒤따랐다. 국가로 성립되었을 때 볼리비아의 경제는 상당히 낙후된 상태였다. 독립에 대한 요구는 1809년 무렵부터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립전쟁에 대한 지지가 전폭적인 차원으로 확대된 것은 시몬 볼리바르의 부관이었던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가 1824년 아야쿠초에서 스페인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이후부터였다. 1825년 마침내 수크레가 스페인 군대를 물리쳤다.
독립 이후 볼리비아의 정치사는 폭동과 불안정으로 얼룩졌다. 1839년 짧았던 페루와의 연합이 깨어졌고 1884년 태평양 연안의 아타가마 주를 칠레에게 빼앗겼다. 1880년 민간통치 시대가 시작되어 1936년까지 계속되었다.
1932∼35년에는 파라과이와 차코보레알의 지배권을 둘러싼 국경분쟁인 차코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40년대 정당들이 잇따라 생기면서 정치안정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1952년 4월 광산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여러 집단이 동맹하여 당시의 군부정권을 전복시키고 볼리비아 국가혁명을 시작했다. 이 사회혁명으로 1950년대초 주석광산이 국유화되고 처음으로 보통선거가 승인되었으며 인디언의 상당수가 토지를 분배받고 부분적으로나마 노예신분에서 자유로워졌다.
1950년대 후반 침체된 경제의 바탕을 바로 세우기 위해 1952년 혁명과 함께 시작된 몇몇 사회계획을 중지했다. 뒤이어 1980년대까지 수십 년 간 불안정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쿠데타 때문에 1980년 실시된 민주선거가 무효가 되고 군부지배가 계속되다가 1982년 민중반란으로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1985년 선거를 새로 실시하자는 요구가 일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파라과이> 스페인 식민지 공식명칭 : 파라과이공화국(Republic of Paraguay)
인구 : 5,993,000 면적 : 406,752 수도 : 아순시온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과라니어 독립년월일 : 1811. 5. 14 화폐단위 : 파라과이과라니(Paraguayan Guaran?) 국가(國歌) : Paraguayos, republica o muerte!("Paraguayans, republic or death!") 공식 이름은 파라과이 공화국(Republic of Paraguay/Rep?blica del Paraguay).
남아메리카 중남부의 내륙 국가. 수도는 아순시온이다. 남위 19∼28°에 걸쳐 있으며 북서에서 남동으로 길이가 약 992km이다. 서경 54∼63°에 해당하며 너비는 동서로 680km가량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 브라질과 접하며, 남동쪽·남쪽·남서쪽으로 아르헨티나, 북쪽·북서쪽으로 볼리비아와 경계를 이룬다. 면적 406,752㎢, 인구 5,642,000(2003 추계).
남아메리카 중남부의 내륙 국가. 유럽인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과라니어를 쓰는 인디언 부족이 파라과이 강과 파라나 강 사이의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땅에서 농업·수렵·어업 등을 하며 살던 반유목민족이었다(→ 색인:과라니족).
1524년 브라질 해안에서 출항한 알레호 가르시아와 1526년 파라나를 항해한 세바스티안 캐벗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지역을 탐험했다.
1537년 도밍고 마르티네스 데 이랄라가 아순시온에 최초의 식민지를 세웠다. 이때부터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세워질 때까지 아순시온은 남아메리카 남동부에서 스페인 세력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776년 이전까지만 해도 아순시온은 30개 이상의 레두시온(인디언 선교단)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예수회 주거지였다. 그러나 1721∼35년 많은 지주들이 인디언과의 무역을 독점하는 예수회에 맞서 투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예수회는 1767년 결국 쫓겨나게 되었다.
지방 대도시였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가 되었다. 1810년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게 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자치 부왕령을 재건하고자 했다. 파라과이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통치를 거부하고 포르투갈인에게 도움을 청해 부에노스아이레스 군사혁명위원회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후 파라과이인들은 스페인 총독을 퇴위시키고 1811년 독립을 선언했다.
무정부 상태를 잠시 겪은 후 인디언들이 '엘수프레모'라고 불렀던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프란시아가 1840년까지 독재정치를 했다. 프란시아는 파라과이의 동질성을 보존하고 국가의 자존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고립주의 정책을 폈다. 프란시아의 후임으로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가 1840∼62년에 통치했으며, 그의 아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가 1862∼70년에 통치했다. 이 2명의 독재자는 프란시아의 고립주의 정책을 버리고 교육을 확대했으며, 개방주의 정책으로 무역과 산업발전을 꾀했다.
파라과이인들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야망을 두려워했다. 우루과이에 대한 브라질의 지배가 강화되자 1865년 전쟁이 일어났다. 파라과이는 브라질을 공격했고 그러던 중에 아르헨티나 영토를 침범했다.
아르헨티나·브라질·우루과이 3국동맹이 파라과이를 공격했고 파라과이군과 시민은 끈질긴 방어전을 폈으나 1870년 굴복하고 말았다. 파라과이는 황폐화되었으며 외국 군대에게 6년 동안이나 점령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부터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정치충돌·쿠데타·내란 등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파라과이는 중립적 입장을 취했으며 경제발전도 다소 이룩했다. 그러나 20세기초 볼리비아와 경계를 이루는 서부 국경지방에서 긴장이 급격히 증가했다. 두 나라는 국경을 따라 요새를 건설했으며, 여러 해에 걸쳐 산발적으로 접전을 벌인 결과 마침내 차코 전쟁(1932∼35)이 일어났다. 1938년의 평화조약으로 파라과이는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영토 대부분을 얻었으며 볼리비아는 파라나 강으로 진출하는 출구를 얻었다.
1936년 페브리스타스의 지도자 라파엘 프랑코 대령이 집권했으나 라파엘 정부는 곧 무너졌고, 차코 전쟁의 영웅인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이 1939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에스티가리비아가 갑자기 죽었고 여러 차례 독재정권의 부침이 있은 후 1954년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집권하여 1980년대말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그는 1989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으나 8회에 걸친 그의 대통령 연임은 20세기 라틴아메리카에서 한 개인이 가장 오래 연임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파라과이는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인플레이션율이 낮게 유지되었으며 보건·교육·도로망 등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스트로에스네르의 정권은 야당을 조직적으로 억압했다. 1989년 2월 3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고, 로드리게스는 5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콜로라도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아르헨티나> 스페인 식민지 공식명칭 : 아르헨티나공화국(Argentine Republic)
인구 : 38,971,000 면적 : 2,780,403 수도 : 부에노스아이레스 정체·의회형태 : 연방공화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16. 7. 9 화폐단위 : 페소(peso/Arg$) 국가(國歌) : Oid, mortales, el grito sagrado Libertad("Hear, mortals, the sacred cry of Liberty") 공식 이름은 아르헨티나 공화국(Rep?blica Argentina/Argentine Republic).
남아메리카 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삼각형 모양의 거대한 국가. 수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이다. 남위 22∼52°(남북으로 3,800km), 서경 54∼74°(동서로 1,423km)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있다. 남쪽과 서쪽은 칠레, 북쪽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북동쪽과 동쪽은 브라질과 우루과이에 접한다. 남동쪽에는 4,725km에 이르는 대서양 해안이, 서쪽과 남서쪽에는 안데스 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 끝에서 북동쪽으로 약 5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포클랜드 제도(말비나스 제도)는 아르헨티나가 주권을 주장하고 1982년 잠시 점령했으나 현재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다. 면적 2,780,092㎢, 인구 36,846,000(2003 추계).
남아메리카 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삼각형 모양의 거대한 국가.
식민지 시대 이전의 역사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남부 지방의 토착원주민들은 대부분 유목생활을 하는 사냥꾼과 어부였다. 반면 일찍이 잉카 제국의 세력이 미쳤던 북부 지방에 사는 원주민들은 농경생활을 했다. 잉카인들은 남쪽으로 지금의 멘도사 시까지 도로를 건설했다.
처음으로 도착한 유럽인은 스페인인이었지만 이들의 정착은 서서히 이루어졌다. 1536년 세워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인디언들의 습격이 잦고 담수가 부족하여 1년 후에 버려졌다. 뒤이어 칠레·페루·파라과이(아순시온) 같은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로부터 온 스페인인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원주민과의 결혼도 널리 이루어졌다. 이러한 공동체는 인디언 노동력과 스페인인들이 들여온 말·소·양과 옥수수·감자 같은 토산품을 기반으로 해서 단순하지만 활기찬 사회로 발전했다.
1776년까지 아르헨티나는 페루 부왕령의 일부였으나,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한 신생(新生)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수도로 승격되고 유럽의 지식과 사상이 유입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1816년 투쿠만에서 열린 의회는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고 선언했다.
1829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기반을 확실히 다졌고, 이어서 1835년에는 나머지 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그의 독재는 1852년에 끝났다. 1853년 제헌회의가 산타페에서 열렸고,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처음에는 다른 주와의 통합을 거부했으나, 1860년 다른 주들의 무력사용에 패하여 통합을 받아들였다.
외국 자본과 기술의 원조로 철도가 잇달아 건설되었다. 철조망, 개량종인 소와 양, 냉동기술 등도 도입되었고, 유럽에 낙농제품을 대규모로 수출하게 되었다. 무역이 성장함에 따라 늘어난 정부수입은 이주민의 유입을 육성하고 공교육제도를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880년에 들어와서 에스탄시에로로 불리는 대농장주들이 핵심을 이룬 보수적인 과두정치시대가 열렸다(→ 색인 : 에스탄시아). 이 체제는 1916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온건 정부로 계승되었으나 1930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한동안 유지되던 민정은 사실상 끝이 났다.
불안한 정국은 10년간 계속되다 1940년대 초 후안 페론이 카리스마적인 민중지도자로 떠오르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1946년 대통령이 된 페론은 급속한 산업 확대 및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개입 정책을 펴고 노동자의 사회적 이익증진에 목표를 둔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책은 경제적·사회적 문제들을 남기고 실패로 끝났으며, 1955년 그는 군부에 의해 축출되어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20년 동안에도 악성 인플레이션, 파업, 높은 실업률, 잦은 정권교체 등이 계속되었다.
1973년 페론은 망명지에서 돌아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74년 그가 죽자 3번째 부인이던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계승했으나, 1976년 군장교들에 의해 실각했다. 계속되는 경제침체와 정치불안정, 극단주의적 정치파벌에 의한 테러의 증가 속에 1983년까지 군부 통치가 계속됐다. 아르헨티나를 장악한 군부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군정전복혐의로 최소한 1만 명의 사람들을 처형했다.
1982년 4월 아르헨티나군은 100년 이상 소유권을 주장해왔던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같은 해 6월 영국군이 제도를 탈환함에 따라 군부는 치욕 속에 영유권을 포기했다.
1983년 총선이 실시되었다. 대통령이 된 라울 알폰신은 군정이 저질러온 악습을 퇴치하려는 정책을 단행했다. 또한 높은 연평균 물가인상률과 막대한 외채를 줄이고자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로 인해 1989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페론당의 카를로스 사울 메넴에게 패했다. 페론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페론주의 지지층인 빈민과 노동계급에 호소함으로써 선거에 승리할 수 있었던 메넴은 노동자·기업·정부 사이의 임금-가격 협정에 기초하여 낮은 관세와 비효율적인 공기업의 민영화 등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계획했다. 메넴은 경제위기를 맞자 군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인권침해로 기소된 자들을 사면하여 후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포클랜드 전쟁에서 비롯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영국과의 외교관계를 재정립했다. 메넴이 성공적으로 인플레이션율을 낮출 수 있었던 데는 도밍고 카바요 경제장관의 도움이 컸다. 1994년 알폰신 전대통령과의 합의를 통해 대통령 연임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이루어 낸 메넴은 1995년 재선에 성공했다.
<우루과이> 스페인 식민지
공식명칭 : 우루과이공화국(Oriental Republic of Uruguay)
인구 : 3,399,000 면적 : 177,879 수도 : 몬테비데오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28. 8. 25 화폐단위 : 페소우루과요(peso uruguayo/$U) 국가(國歌) : Orientales, la patria o la tumba("Easterners, the fatherland or the tomb") 공식 이름은 우루과이 공화국(Oriental Republic of Uruguay/Rep?blica Oriental del Uruguay).
남아메리카에서 수리남 다음으로 작은 나라.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다. 수도는 몬테비데오이다. 이 나라는 남북으로 약 500km, 동서로 약 470km 펼쳐져 있다. 북쪽과 북동쪽으로 브라질, 남쪽으로 라플라타 강 어귀, 남동쪽으로 대서양과 접하고 있다. 서쪽 경계선 전체는 우루과이 강이 아르헨티나와의 국경을 이루며 흐른다. 면적 177,879㎢, 인구 3,361,000(2009 추계).
아메리카 대륙에서 2번째로 작은 나라인 우루과이는 인접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정치·경제적 그늘 속에 오랫동안 놓여 있었다. 이로 인해 우루과이는 이 두 나라와 많은 문화·역사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우루과이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지도상 커다란 이웃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는 우루과이는 매우 작아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덴마크보다 5배나 큰 국토를 가지고 있고 인구는 1/5 정도이다. 우리는 일본보다 더 넓은 경작지를 가졌고, 인구는 1/40 정도이다"라고 언급했다.
상대적으로 개방된 정책과 낮은 인구밀도는 우루과이의 경제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828년 독립국가가 된 이래 영국·프랑스·이탈리아와 강한 유대를 형성했던 우루과이는 20세기 내내 라틴 아메리카 내 진보국가로 발전했다.
특히 정치적 안정, 선진화된 복지정책, 상대적으로 두터운 중간계층 등이 주목할 만하다. 억압적 군부통치(1973~85) 기간은 국민들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우루과이도 시민민주정치가 회복된 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경제적 쇠퇴와 파벌 싸움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역경들은 많은 우루과이인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로 이민을 떠나는 원인이 되었다. 갈레아노는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수출한다."라고 지적했다.
인구의 거의 반 정도가 수도인 몬테비데오 대도시권에 거주한다. 제2의 도시인 살토와 제3의 도시 파이산두는 수도에 비해 규모가 작다. 리오데라플라타 입구의 깊숙한 만에 면해 있는 몬테비데오는 역사적인 지역 안에 높은 업무용 빌딩과 세련된 쇼핑센터가 잘 어우러져 있다. 많은 박물관과 옥외시장 및 고급 식당을 갖춘 몬테비데오에는 매년 각국에서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전형적인 식민도시로 건설된 콜로니아델사크라멘토 역사지구 및 피리아폴리스와 푼타델에스테 같은 해변 휴양지들도 관광명소로 유명하다.
남아메리카에서 수리남 다음으로 작은 나라.
유럽인이 정착하기 전 우루과이에는 차루아스라고 알려진 인디언 종족이 살고 있었다. 1516년 스페인 항해사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가 라플라타 강으로 배를 타고 들어왔다. 1680년에는 브라질에서 온 포르투갈인들이 라플라타 강변에 콜로니아델사크라멘투를 세웠다. 이어서 1726년 스페인인은 포르투갈 사람들을 몰아내고, 몬테비데오를 세웠다(→ 색인 : 스페인사).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후 우루과이는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에 속하게 되었고, 원주민들은 스페인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몰살당했다.
1811년 우루과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일어난 독립투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혁명은 점점 활기를 띠었으나 5년 후, 스페인인들이 혁명 지도자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를 물리치면서 일단락되었다. 포르투갈과 브라질에게 차례로 점령되어 있다가, 1825년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우루과이의 독립투쟁을 재개하는 데 성공했으며, 1828년 독립이 승인되었다. 주요정당은 1830, 1840년대에 등장한 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이다. 1839년에 일어난 내란이 1851년에 실패로 끝나자,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우루과이의 내정에 끼어들었다. 이때문에 1865∼70년 동안 계속된 파라과이와의 전쟁이 일어났고, 그결과 군부통치가 실시되었다. 1903년 콜로라도 당원이자 개혁주의자인 호세 바트예 이 오르도녜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29년 죽을 때까지 우루과이를 통치했다. 오르도녜스가 진보된 사회법을 제정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이룩함으로써 20세기초 우루과이는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대공황 동안의 독재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중립상태를 거친 후, 우루과이는 1951년 새로운 헌법(1966 개정)을 채택했다. 민족주의 정당인 블랑코당이 93년간 열세에 있다가 1958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잇따라 일어난 물가상승과 경제위기로 좌익 테러리스트들이 널리 활동했고, 곧 1973년 우익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인권유린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군부정권시대는 1985년 민간정부의 출범으로 막을 내렸으며, 많은 정치범들이 풀려나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완전히 되찾게 되었다.
<칠레> 스페인의 식민지
공식명칭 : 칠레공화국(Republic of Chile)
인구 : 16,436,000 면적 : 756,096 수도 : 산티아고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10. 9. 18 화폐단위 : 페소(peso/Ch$) 국가(國歌) : Dulce patria, recibe los votos("Sweet Fatherland, receive the vows") 공식 이름은 칠레 공화국(Republic of Chile/Rep? lica de Chile).
남아메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나라.
수도는 산티아고이다. 파타고니아의 남단에서 북쪽으로 4,350km에 걸쳐 있다. 남위 17°30′~56°30′, 서경 66°15′~76°45′에 위치한다. 동서의 평균너비는 약 177km이다. 5,337km의 태평양 해안선이 서쪽 경계선을 이룬다. 북쪽으로 페루, 북동쪽으로 볼리비아, 동쪽으로 아르헨티나에 접한다. 면적 756,096㎢, 인구 16,602,000명(2009 추계).
인구의 3/4이 메스티소이며, 나머지는 유럽계이거나 아라우칸인(마푸체족)의 후손들이다. 스페인 정복 이전의 토착민들로는 디아기타, 피쿤체, 우이이체, 페훈체, 쿵코 등의 인디언 종족이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16, 17세기에 도착했으며, 18세기에는 바스크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비교적 단일 혈통의 메스티소들이 퍼져 살았다. 공용어로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그리스도교 가운데 로마 가톨릭교가 지배적이며 개신교 및 다른 그리스도교 유파도 믿는다. 화폐단위는 칠레페소(Chile Peso/Ch$)이다.
칠레는 독특한 지형, 즉 안데스 산맥과 태평양 사이에 놓인 길고 좁은 지형으로 유명하다. 북에서 남까지 길이가 약 4,300km이고, 폭은 어느 곳도 349km를 넘지 않는다.
북쪽에는 건조한 고원인 아타카마 사막이 있으며, 4,900m 이상의 봉우리들이 여러 개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들은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의 경계에 있다. 비오비오 강을 비롯한 강들은 규모가 크지 않다. 리안키에 호수를 비롯해 호수들이 많다.
최남단의 해안에는 많은 만과 섬, 군도들이 나타난다. 혼 곶이 있는 오르노스 섬이 속한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의 서쪽 후안페르난데스 군도와 이스터 섬 등은 칠레 영토에 속한다.
칠레는 광업과 제조업에 주요 기반을 두고 부분적으로나마 선진 자유시장 경제를 이루고 있다. 정치제제는 양원제를 토대로 한 공화국으로,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은 대통령이다.
1536년 스페인은 마푸체를 비롯해 원주민들이 살던 이 지역에 침략했다. 1541년 시작된 산티아고의 이주지는 페루의 부왕령으로 통치되었으나, 1778년에 독립된 도독령이 되었다. 1810년에 주민들이 스페인 지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817년 차카부코에서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지휘하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군대의 승리로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이 지역은 1823년까지 칠레 장군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가 통치했다.
페루와 볼리비아에 대항해 싸웠던 태평양 전투(1879~83)에서, 칠레는 볼리비아 해안의 질산 처리된 비옥한 평야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볼리비아가 해안가로 접근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
칠레는 제1차 세계대전(1914~18) 당시 중립을 지켰으며 제2차 세계대전(1939~45)에도 거의 중립을 유지했으나, 1942년에 추축국 편에서 전쟁을 선언한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에 동참했다.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남아메리카에서 국가원수에 당선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경제대란 이후 그는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끈 쿠데타로 전복되고, 피노체트의 군사정권은 내부 저항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1988년 국민투표와 1989년의 선거에서 피노체트는 실각하고 민주국가 체제로 돌아갔다. 칠레의 경제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했고, 21세기 초반에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남아메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나라.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파블로 네루다와 같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 클라우디오 아라우 같은 음악가, 로베르토 마타 에차우렌 같은 화가들이 있다. 역사스페인 식민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색인 : 스페인사). 16세기 스페인인들이 발견했을 당시 아라우카니아 인디언은 주로 비오비오 강 남쪽에 살면서 다른 부족을 지배하던 유목민이었다(→ 색인 : 아라우칸인).
스페인인들은 19세기 내내 아라우카니아 인디언과 싸웠으나 끝내 그들을 정복할 수 없었다. 스페인은 1536년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지휘 아래 세력을 뻗어가기 시작했으며, 1541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산티아고를 세웠다. 대토지에 기반을 둔 농업이 주요경제활동이었고, 이로 인해 부유한 지주계급이 생겼다. 1808년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으로 인해 독립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1810년 산티아고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814년에 스페인이 통치권을 재천명했지만 애국 지도자 베르나르도 오이긴스가 아르헨티나로 피신했다가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이끄는 군대와 함께 돌아와 1817년 차카부코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쳤다. 오이긴스는 국가원수로 선포되었으며, 이듬해 2월 12일 공식적으로 독립이 발표되었다. 1861년까지는 헌법으로 보장된 지주들의 과두정치가 행해졌고, 그후 정권은 자유당으로 넘어갔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축소되었으며, 유럽의 정치적·지적 흐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79~83년에 있었던 볼리비아와 페루와의 전쟁으로 두 나라로부터 옛 영토를 되찾아 영토가 확장되었다.
19세기에 토지를 소유한 이전의 소수 독재자들이 국내 정치계에서 계속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20세기초,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도시중산계급이 출현했다. 그후 10년 동안 급진당·사회당·기독교민주당 등과 같은 새 정당이 창설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초 약간의 정치적 불안과 혼란이 있었지만 평화적인 정치발전이 계속되어 민주적 정권교체가 가능했다. 1938~52년에 급진당에 속한 대통령들이 줄곧 통치했으나, 1964년에는 중도파인 기독교민주당이 집권당이 되었다. 이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치행정에 채용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1969년 사회당과 공산당은 급진당과 기독교민주당에 소속된 몇몇 좌파들과 연합해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과반수를 득표했다. 그들의 후보였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옌데는 미국 소유의 구리광산을 몰수하고 여러 가지 사회주의정책을 실시했다.
그후 2년도 안 되어 미국이 자본투자 거부를 주도하여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많은 중산층 사람들이 아옌데 정부에 등을 돌렸으며,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육군사령관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 정부는 전복되고 군사혁명위원회가 들어섰다. 군사평의회의 수반인 피노체트는 엄격한 자유시장정책을 제도화했으며, 군부통치에 반대하는 국내 저항세력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1980년 새 헌법이 승인되었고, 피노체트가 대통령으로 뽑혔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1988년 10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 투표는 군사정부의 후보인 피노체트의 8년간 재임 추진을 위해 실시된 것이었지만,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피노체트를 거부했다. 결국 피노체트는 물러났고, 1989년에 실시된 선거로 다시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기독교민주당(Christian Democrts/PDC) 출신의 아일윈 대통령은 군부정권에 살해·실종된 정치범들에 대한 증거를 조사하기 위해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했다. 10개월 후인 1991년 2월 위원회는 1973~90년 군부독재 기간 동안의 인권 침해 사례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279명이 사망했고, 그중 1,068명이 고문·총살·처형당했다. 보고서는 1973~77년 군보안경찰인 디나(DINA)가 '체계적인 학살 정책'을 수행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가해자의 이름이 빠져있었으며, 아일윈 대통령은 희생자들 일부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겠지만 인권재판은 열지 않기로 한 결정을 재확인했다.
1993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PDC에 에두아르도 프레이가 당선되었다. 1980년 자신에 의해 제정된 신헌법에 힘입어 피노체트는 여전히 군총사령관의 자리에 남아 있으면서 상원의원 9명을 지명하는 권한을 유지함으로서 우익에 힘을 실었다. 프레이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인 1994년 2? 칠레 의회는 대통령 임기를 8년에서 6년으로 단축했다. 프레이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군부가 지명하는 상원 의석 8석을 폐지할 것을 국회에 제안했다. 또한 내각에 사회주의 계열 인사 4명을 임명하므로써 군부가 고위관직에 대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 임명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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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마음의 보석상자 원문보기 글쓴이: 대륙철도횡단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