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금릉빗내농악이 전승되어 오고 있는 빗내마을은 삼한시대 감문국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옛 감문국의 "나랏제사"와 풍년을 기원하는 "빗신제"가 혼합하여 동제(洞祭) 형태로 전승되었고 동제(음력 정월 6일)때는 풍물놀이와 무당의 굿놀이, 줄다리기 등의 행사가 혼합되어 진굿(진풀이)의 농악놀이로 발전하였다.
빗내농악은 전국 농악놀이의 대부분이 "농삿굿"인데 반해 빗내농악은 "진굿"으로 가락이 강렬하여 타 굿판과는 명확하게 차이가 있으며 모두 12가락(질굿, 문굿, 마당굿, 반죽굿, 도드레기, 영풍굿, 허허굿, 기러기굿, 판굿, 채굿, 진굿, 지신굿)으로 구성되었고 119마치로 세분되어 있다.
빗내농악의 정통성과 맥을 이어가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빗내마을 입구에 2003. 11. 5 빗내농아건수관을 개관하여 체계적인 전수교육과 농악경연대회 등 운영호라성화를 기하고 김천농공고와 개령중학교, 개령초등학교를 전승학교로 지정하고 전수교육생을 육성하여 인재들을 양성하고 우리 고장 문화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고자 한다.
1473년(성종 4년)에 개령 현감 정난원이 지금의 위치보다 남동쪽으로 떨어진 유동산 일명 관학산 밑 감천변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조선 초기에 전국 군.현에 창설한 경위는 미상이다.
1522년(중종 17년)에 현감 태두남이 크게 수축하고 1563년(명종 18년)에 현감 윤희주가 중건했다.
임진왜란에 개령 주민들이 왜병을 영입했기 때문에 병화를 면했던 것이다.
개령향교는 소설로 5성 2현 및 우리나라 18현을 제향 한다.
석전은 공자탄신일에 지내다가 최근에는 춘추 중월 첫 정일로 정했다. 개령향교는 만인소(萬人疏)사건의 영남 중심지였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에 위치한 감문산 계림사는 신라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감주계림사개건기 또는 계림사사적기(1954년 현판 필사) 등의 중요 사적의 기록을 보면 계림사 일대의 지형은 호형이므로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계림사를 건립하였고 근세 계림사의 중건은 순조 4년(1840) 여러 계인이 중심이 되어 대웅전을 비롯하여 요사 즉 방랑과 공루를 확정하고 향연각 등을 건립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향인들이 스스로 절의 산내에서는 묘를 개설치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즉 묘를 쓰면 동리의 우물이 변하므로 동리 사람들이 서로 감시하여 밀장을 금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쌍샘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냈는데 쌍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법이 없다고 한다.
서부동에서 감문으로 넘가는 서쪽길로 가다보면 우측 호두산아래 소릿길 고개너머에 6개의 탑편이 있다.
이 탑에서 북쪽 약 30m 지점이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감문국시대의 장부인능이 있는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변에 일휘문 암막새기와 조각을 비롯한 고려시대의 기와조각, 조선시대 자기조각이 널려있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 조선시대 중기까지 존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 상륜부, 3층부의 각 부재는 없어지고 초층, 중층의 부재만 남아 있다.
초층 옥개석은 위에 2단의 괴임이 있고 낙수면의 반전은 심하지 않으며, 옥개석 두께는 얇고 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어 전형적인 3층석탑이다.
1959년 광덕저수지 확장공사 때 발굴되어 못아래 좌측 산밑에 세웠다.
광덕1리 문수산에 신라 고찰 문수사가 있었다고 전하고 문수사 터에서 일제 때 금동불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화려한 영락으로 장식한 보관을 썼고 너그럽고 원만한 얼굴이 풍만하여 전식에 걸친 법의의 선이 뚜렷하고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조성 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1978년에 보호철책을 설치했다가 1990년에 보호각을 건립하여 관리하고 있다.
남면 오봉리 금오산 아래 위치한 오봉저수지는 김천에서 구미방향으로 가다가 대신 우회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하여 (차량이용시) 약 5분정도 거리에 있다.
147,000평의 넓은 면적에 농경지 700ha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1989년 12월 준공하여 쓰이고 있으며 여름이면 수상스키를 즐기려는 행락객들이 많이 찾고 있으며 잉어, 향어, 붕어 등이 많아 인근 도시의 강태공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다. 작은 하천을 끼고 이어지는 진입도로와 고즈넉한 산책로등이 있어 데이트 코스로 좋으며 갈항사지와 갈항사지 인근에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 등 문화재도 있어 간단한 등산과 견학코스로 이용할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승려 가귀(可歸)가 지은 심원장에 따르면 승전법사가 해골화석 80개를 초석으로 하고 화엄종의 갈항사를 지었다하고 그 화석의 무리를 거느리고 불경을 강론했다고 전한다.
이 갈항사(葛項寺)터에는 국보제99호로 지정된 삼층쌍석탑이 발굴되었다. 이 삼층쌍석탑이 1916년과 1921년에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194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남아 있는 석불은 1978년에 보호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두드러진 눈, 긴코, 작은입, 둥글고 풍요로운 얼굴에 신비스런 미소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파손이 심하여 오른쪽 엉덩이와 팔이 떨어져 나갔고 무릎 밑은 땅에 묻혀 있다.그러나 남아 있는 부분만으로도 이 불상이 우수한 조각품임을 알 수 있다.
백마산(또는 氣水山)에 있는 고방사의 창건에 대해서 절에 전래하는 현판기문에 따르면 아도화상이 직지사와 함께 418년에 창건했다고 하나 다른 기록은 없다.
기문에 의하면 1636년에 옥청산인이 적묵당을 현철상인이 설선당을 그리고 1656년에는 학능선인이 청원루 5간을 창건하였고 지금의 절은 1719년에 계현 수천대사가 중창했다.
유물로는 1.8m 지름의 홍고가 있었으나 파손되고 경판52장이 관음전에 보관되고 있다.
원래 고방사는 지금의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1km떨어진 골짜기에 있었는데, 그 곳에 있는 약수가 유명하여 약수터라고도 불린다.
이 약수는 100일간 기도를 올리고 부정, 육식, 다툼 등 금기사항을 엄수해야만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어기고 약수를 마신 사람은 피를 토하고 급사한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