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일 장충동에 자리잡은 국립극장에서는 뜻 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시상식, 이 자리에는 박정희 시인을 비롯해 연극인, 국악인 등 예술가들의 어머니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들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 눈길을 끌었다.
'네박자'의 가수 송대관, 축하공연을 하러 왔냐? 하지만 의구심은 곧 풀렸다. 그의 어머니도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포목장사를 하면서 송대관을 국민적인 가수로 키운 것이 선정 이유였다.
"엄니요? 고생 많이 하셨제. 5일장 알지요. 엄니는 매일 여기저기서 열리는 5일장만 쫒아다니셨는지라, 새벽에 눈만 뜨시면 그 무거운 포목을 바리바리 싸들고 방을 나가시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허네. 그렇게 나가셔서 조그만 덤프 트럭 뒤에 집을 내려놓고 그 짐 위에 앉아 떠나시던 우리 엄니, 고생만 하셨제. 그때야 다른 엄니인들 우리 엄니만큼 고생안하셨겠어? 그때는 다 그랬제."
어머니 얘기를 꺼내자 복잡한 분장실 안에서도 잡시 회한에 잡기는 송대관, 전라북도 정읍이 고향인 그의 집은 친가나 외가나 모두 그 부근에서는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갈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떵떵거리는 지주 집안이었다. 그러다가 토지개혁이 단행되면서 그 많은 재산을 잃고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버지마저 그가 여섯살 무렵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는 그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비슷한 고생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해 포목장사를 사직했다. 버젓한 가게라도 갖고 포목상을 한다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장사였지만 그의 어머니가 한 포목장사는 그렇지 않았다.
"같은 포목상이라도 다르제. 우리 엄니야 가게에 앉아 있는 게 아니고 그 무거운 포목을 들고 장터를 돌며 빈터에 앉아 풀어놓고 파는 거여. 근데 그때야 다 돈을 내고 사나, 돈 대신 고구마도 받고 감자도 받고, 다른 곡식같은 것을 받으니 나중에 포목 다 팔고 돌아오려면 을매나 무거워, 그걸 다 들고 다녔으니 오죽 힘들었겠어. 그때 엄니가 아주 골병이 들어버렸지"
먹고 살기 바쁘다보니 자식교육에는 당연히 소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해준 일은 새벽에 집을 나서기 전, 자식들이 하루종일 먹을 수 있는 밥을 해좋고 나가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뼈대 있는 가문에서 자라 한학을 공부한 그의 어머니는 살아가기 힘든 와중에도 늘 도덕적인 면을 강조하곤 했다. 이런 교육 덕분에 자식을은 삐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자랄 수 있었다.
첫댓글 지금들어도 가슴벅찬 ... 장하신 어머니가 계셨기에 오늘의 대관아찌가 계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