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신손(安信孫)
1派15世-양공공파
蔭主簿 壬辰義兵 아진장겸지군향사(亞鎭將兼知軍餉事)
증 이조참의(吏曹參議)
정묘년(1567)2월16일 출생~무신년(1608) 별세
자(字) 후원(厚源), 호(號) 풍와(楓窩)
한자 安信孫
영어음역 An Sinson
이칭/별칭 후원,풍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중기
집필자 최윤진
[상세정보]
성격 의병
출신지 전라북도 남원시
성별 남
본관 순흥
대표관직 주부|아진장겸지군향사((亞鎭將兼知軍餉事)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후원(厚源), 호는 풍와(楓窩).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충순위(忠順衛) 안벽(安璧)이다.
[활동사항]
안신손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주부(注簿)를 역임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원부에서 군사와 군량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兵使: 병마절도사의 이칭) 이복남에게 달려갔으나 아군의 상당수가 이미 전몰한 뒤였다.
전라도관찰사는 안신손이 담력이 있음을 알고 조정에 천거하여 아진장겸지군향사(亞鎭將兼知軍餉事)에 임명하였다. 안신손은 영남과 호남을 돌아다니며 약탈하고 있는 적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고 곧바로 부임하였다.
부임 후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고 성을 손질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을 불러 모아서 성을 지킬 계책을 세웠다. 또한 성묘(聖廟)를 수호하고 초하루와 그믐에는 분향하며 경내의 민심을 어루만졌다.
[참고문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安信孫
順興人號楓窩贈大諫貴行玄孫蔭主簿壬辰本府城階公鎭撫境內守護聖廟贈吏議享羅州忠莊祠錦山大捷壇
龍城誌n1-7책 節義補遺
증(贈)이조참의(吏曹參議)풍와공(楓窩公)안공(安公)신손(信孫)묘지명(墓碣銘)
목릉(穆陵) 때에 섬 오랑캐가 창궐하여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니, 국운이 위급한 상황에 빠졌다. 이에 충의(忠義)의 선비들이 서로 이어 일어나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을 광복(匡復) 하는 대업(大業)을 터닦았다. 이때 주부(主簿) 안공신손(安公信孫)은 발분하고 격앙되어, 묵최(墨 )를 입고는 나무를 베어 창을 만들고 대나무를 잘라 깃대를 만든 다음, 재종질(再從姪)인 판관(判官) 사제(嗣弟)와 의사(義士)인 정사달 박언량 등과 함께 조경남(趙慶南)과 만나 운봉의 팔량치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때마침 조정에서 의병을 파(罷) 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부득이 군대를 철수하였다가 정유년(丁酉年) 왜적이 다시 사나움을 부려 남원이 포위되자(정유재란), 공은 집안의 종들을 거느리고 군자(軍資)를 수송하여 곧바로 성 밑에 도착하니,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 공은 마침내 동지들을 불러모아 죽기로 싸울 것을 맹세하고, 돌아다니며 싸워 첫 번째는 하동에서 승리를 거두고 두 번째는 두류산에서 승리하고 세 번째는 남원부의 불우치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후에 적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공은 원수(元帥) 권율(權慄) 장군의 막하(幕下)로 달려가서 방략(方略)을 도와 계획하였다. 이에 도백(道伯)인 홍세공(洪世恭)이 조정에 아뢰어 남원부에 남아 진무(鎭撫) 하게 하였다. 공은 밤낮으로 경계하고 조심하여 마음과 힘을 다해서,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장비를 수선하여 영남과 호남의 적을 막았으며, 주민들을 어루만지고 문묘(文廟)를 보호하니, 한 고을이 힘입어 편안하였다. 도백이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아뢰고자 하였으나 공은 강력히 만류하여 거절하였는 바 , 이 사실이 호남창의록(湖南倡義錄)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오래도록 포상하는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였는데, 공론이 마침내 수백 년 뒤에 나왔다. 그리하여 금상(今上: 현재 임금) 계사년에 도내의 유림들이 상소함으로 인하여 특별히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의 자(字)는 후원(厚源)이요, 호(號)는 풍와(楓窩)이니, 안씨는 계통이 순흥에서 나왔다. 선대에 문성공 (文成公) 휘(諱:이름) 향(珦)은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백산공(白山公) 휘 귀행(貴行)은 단종이 선위(禪位)하던 때를 당하여 양성현감(陽城縣監)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스스로 절의를 지키고 대사간(大司諫)에 추증되니, 고조(高祖)가 되신다.
공은 융경(隆慶) 정묘년(1567) 2월 16일에 출생하였는데, 도량(道量)이 크고 후중(後重)하였으며, 성품이 충후(忠厚) 하였다. 어려서부터 강개(慷慨)하여 뛰어난 뜻이 있었으며, 글방에서 학업을 익히자 경사(經史)에 힘을 다하였다. 부모를 효도로 봉양(奉養)하고 친척들과 화목하였으며,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년)에 왜적이 침범하여 팔도가 놀라 진동하자, 공은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노모(老母)가 집안에 계시므로 차마 떠나가지 못하였다. 다음해인 계사년에 모친상을 당하고 겨우 장례를 모셨다. 상복을 입고 군대에 종군(從軍)함은 비록 임금의 명령이 없었으나 공은 충분(忠憤)에 감격되어 예제(禮制)에 구애하지 않고 출전하여 이 기특한 공로를 세웠으며, 뒤에는 산림(山林)에 돌아와 한가롭게 수양하고 유유자적하였다.
공은 나이 42세로 만력 무신년(1608)에 별세하니, 남원 목거리 찬시암골에 장례하였다. 배위(配位)인 선산유씨를 부장(附葬)하였는 바 , 유씨는 참봉 유뢰의 따님이다. 4남2녀를 두었으니, 장남인 홍(鴻)은 동중추(同中樞)이며, 다음은 곡(鵠), 봉(鳳), 언(鶠) 이다. 딸은 오윤립과 참봉 양형에게 출가하였다.
아! 당시에 여러 의사들은 비록 사생(死生)과 존망(存亡)의 다름이 있으나 뛰어난 충의(忠義)는 본래 다름이 없었다. 인륜(人倫)을 붙들어 임금의 감회(感懷)를 일으켰으니, 이는 족히 신하들의 권면(勸勉)이 될만하다.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惟孝惟忠 효도와 충성은 .
出自彛哀 본성에서 나왔네
倡義南服 남쪽 지방에서 창의하니
有赫安公 훌륭한 안공이라오
不厭金革 창과 갑옷을 싫어하지 않고
樹厥奇功 이 기특한 공을 세웠도다.
斂跡遵晦 자취를 거두어 은둔하였으니
何用不藏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聖朝恩褒 성조에서 은전을 내려 표창하니
曠世榮光 천고의 영광이네
我銘貞珉 내 큰 비석에 명문을 써서
用詔無疆 무궁한 후세에 알리노라
문충공(文忠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贈吏議安信孫墓碣銘 文忠公 宋秉璿 撰
穆陵之世島夷猖獗秉輿西遷國步蒼黃忠義之士
相繼而起用基宗社匡復之業于斯時也主簿安
公信孫憤發數慨以墨纕斬木爲戈揭竿爲 旗 與再
從姪刻官嗣悌及義士丁士達朴彦良等會趙公慶
男敗賊於雲峯八良峙適有朝廷罷義兵之命不
得已還軍丁酉倭酋再(王+制)南原被圍公率家僮輸軍
資直抵城下城已陷矣遂召慕同志矢死轉戰一捷
於河東地再捷於頭流山三健於本府佛隅峙前後
斬獲甚多仍赴元帥權公慄之幕下贊畫方略道伯
洪公世恭啓于朝留鎭本府公夙夜警惕殫竭心
力修城池繕器械防遏嶺湖之賊撫綏居民守護
聖廟一境賴而稍安道伯慾啓聞爲公力輓而止
之事載湖南倡義錄而久未藪褒嘉之與公議乃發
於數百年之後今
上癸曰以道儒言特贈吏曹參議先是我伯父守宗
齋先生嘗書其表文今復竪碣將以侈聖恩徵銘於
不佞義不敢辭按狀而敍之曰公字厚源號楓窩安氏
系出順興上世交成公諱裕從祀文廟八我廟有諱
貴行當
端廟遜位以陽城縣監棄歸自靖贈大司諫於公爲高
祖也曾祖諱撝主簿祖諱克諶參奉考諱璧忠順衛
妣全州崔氏校理濡之女公以隆慶丁卯二月十
六日生器宇宏重性質忠厚自少慷慨自倜儻之志
肄業塾學着力經史孝養父母敦睦宗黨以蔭除繕
工監主簿而無意進取建萬曆壬辰八域■
(氵+惖)公
慾擧義旅而以老母在堂不忍離捨癸巳丁憂纔經
襄禮起復從戎雖無上命忠憤所激不拘禮制立此
奇勳歸臥林泉養閒自適年四十二而卒於萬曆
戊申葬于南原木巨里冷泉艮坐原其配善山柳
氏附焉柳氏參奉雷女擧四男二女男鴻同中樞
次鵠鳳鶠女適吳允立樑梈參奉長房子壻曰國
俊國藎鄭樞黃斗暠仲房子曰夢禛叔房子壻曰國老
國賢房明赫季房子曰國蓍國耉曾玄不盡錄而謁
余文者時洛英鎭嗚呼當時諸義士雖有死生存亡
之殊而忠義之炳炳本無二致則扶植人紀至有
聖朝之曠感此足爲爲臣子勸豈不休哉遂爲之銘
曰惟孝惟忠自出彝里倡義南服有赫安公不厭金
革樹厥奇功歛跡遵晦何用不臧聖朝恩褒曠世
榮光我銘
珉用詔無彊
용성지[龍城誌v5] 文忠公 宋秉璿 撰 문충공(文忠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楓窩安公 信孫 墓碣銘 幷序
穆陵之世。島夷猖獗。乘輿西遷。國步蒼黃。忠義之士。相繼而起。用基宗社匡復之業。于斯時也。主簿安公信孫。憤發激慨。以墨縗。斬木爲戈。揭竿爲旗。與再從姪判官嗣悌及義士丁士達,朴彥良等。會趙公慶男。敗賊於雲峯八良峙。適有朝廷罷義兵之命。不得已還軍。丁酉。倭酋再猘。南原被圍。公率家僮。輸軍資。直抵城下。城已陷矣。遂召募同志。矢死轉戰。一捷於河東地。再捷於頭流山。三捷於本府佛隅峙。前後斬獲甚多。仍赴元帥權公慄幕下。贊畫方略。道伯洪公世恭。啓于朝。留鎭本府。公夙夜警惕。殫竭心力。修城池。繕器械。防遏嶺湖遊掠之賊。撫綏居民。守護聖廟。一境賴而稍安。道伯欲啓聞。爲公力挽而止之。事載湖南倡義錄。而久未蒙襃嘉之典。公議乃發於數百年之後。今上癸巳。以道儒言。特贈吏曹參議。先是。我伯父守宗齋先生。嘗書其表文。今復竪碣。將以侈聖恩。徵銘於不佞。義不敢辭。按狀而敍之曰。公字厚源。號楓窩。安氏系出順興。上世文成公諱裕。從祀文廟。入我朝有諱貴行。當端廟遜位。以陽城縣監。棄歸自靖。贈大司諫。於公爲高祖也。曾祖諱撝。主簿。祖諱克諶。參奉。考諱璧。忠順衛。妣全州崔氏。校理濡之女。公以隆慶丁卯二月十六日生。器宇宏重。性質忠厚。自少慷慨。有倜儻之志。肄業塾學。著力經史。孝養父母。敦睦宗黨。以蔭除繕工監主簿。而無意進取。逮萬曆壬辰。八域駭盪。公欲擧義旅。而以老母在堂。不忍離捨。癸巳。丁憂。纔經襄禮。起復從戎。雖無上命。而忠憤所激。不拘禮制。立此奇勳。歸臥林泉。養閒自適。年四十二。而卒於戊申。葬于南原木巨里泠泉坐艮原。其配善山柳氏。祔焉。柳氏參奉䨓女。擧四男二女。男鴻。同中樞。次鵠,鳳,鶠。女適吳允立,梁椁參奉。長房子婿曰國俊,國藎,鄭斗樞,黃暠。仲房子曰夢禎。叔房子婿曰國老,國賢,房明赫。季房子曰國蓍,國耉。曾玄不盡錄。而謁余文者。時洛,英鎭。嗚呼。當時諸義士。雖有死生存亡之殊。而忠義之炳炳。本無二致。則扶植人紀。至有聖朝之曠感。此足爲爲臣子勸。豈不休哉。遂爲之銘曰。
惟孝惟忠。出自彝衷。倡義南服。有赫安公。不厭金革。樹厥奇功。斂跡遵晦。何用不臧。聖朝恩襃。曠世榮光。我銘貞珉。用詔無疆
淵齋先生文集卷之三十四 墓碣銘 송병선(宋秉璿)
追遠堂記
帶方城東數十里。谿山環抱。其中廓而有容。可居可葬也。名曰莘谷。順興安氏聚族而歌哭於斯者。自白山公諱貴行始。楓窩公信孫。其玄孫也。往在龍蛇之變。起義討賊。事在邑誌。如公忠義。照人耳目。永樹風聲。則其功可不盛哉。公亦從葬於谷之南冷泉上。守護之節。薦享之禮。後昆咸以誠罔缺焉。建立齋舍。以寓永慕。以貽遠謨。其於報本之義。可謂至矣。以余叔父。筆書揭堂額。俾余記之曰。盍爲一言以警之乎。余曰。遠者。人所易忘而能追之。則此豈非曾氏所訓歸厚之道耶。然而夙興夜寐。陟降在玆。履霜露而心愴。聞風樹而懷悲者。尤不能自已也。後之人。以今日之心爲心。祭而盡其誠。齊而盡其敬。推之宗族。施于子孫。使登此堂者。永久勿替。則所以篤嗣慶於方來者。亦無竆也。奚待余言而加勉哉。遂書此。以爲追遠堂記。
연재집(淵齋集) > 淵齋先生文集卷之二十五 > 記 송병선(宋秉璿)



4남2녀를 두었으니, 장남인 홍(鴻)은 동중추(同中樞)이며, 다음은 곡(鵠), 봉(鳳), 언(鶠) 이다. 딸은 오윤립과 참봉 양형에게 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