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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길 스크랩 우빠까(Upaka)는 인연 없는 중생이었을까?
보타(dsw) 추천 0 조회 53 17.02.08 10: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빠까(Upaka)는 인연 없는 중생이었을까?

 

 

인연 없는 중생은 부처님도 제도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경전전 근거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래삼불능중의 하나로서 무인연도중생(無因緣度衆生)’이라 합니다. 여래삼불능이란 인연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고(無因緣度衆生), 인연 없는 국토에 태어나면 제도할 수 없고(無因緣度國), 자기가 지은 죄업은 멸할 수 없는(不能免定業) 것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여래삼불능은 대승불교권에서 회자 되고 있지만 초기불교경전에도 근거가 있습니다.

 

인연 없는 중생 우빠까(Upaka)

 

언젠가 댓글로 산중에서 수행하는 산중승님의 댓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산중승님은 포교와 관련하여 인연없는 중생[우빠까]도 붓다를 떠났듯이... 인연없는 세속중생들이 불교를 떠나서 [야훼]한테 가려면 그렇게 하랄수 밖에...”라 했습니다. 스님들이 왜 산속에서만 살고 도심포교를 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댓글입니다.

 

산중승님은 인연을 강조하며 만약 불교가 그 인연을 다하여 '말살'을 맞이해야 할 운명이라면 그냥 말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삼보문중에 출가하여 티벳 등 외국에서도 수행한 바 있는 산중승님의 글에서는 인연이 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기독교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에서 불교도 인연을 다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댓글을 접하고 실망했습니다. 포교에 앞장서야할 스님들이 산중에서 신선처럼 지내는 것이 못마땅 했던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인연이라도

 

인연 없는 중생은 부처님도 제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법화경에서는 아주 작은 인연이라도 성불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이가 모래 위에 부처님 상을 그려 놓는다든가, 술취한 자가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하며 횡설수설 해도 그것을 인연으로 해서 언젠가는 성불할 것이라 합니다. 심지어 부처님의 설법을 거부하며 집단으로 퇴장한 증상만들 조차에게도 그것을 인연으로 성불할 것이라 합니다.

 

법화경 방편품에 따르면 아주 작은 인연이지만 그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부처님으로 되돌아 와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연 있는 중생은 반드시 제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시기가 성숙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불교를 접하긴 접했지만 겉?기로 접했을 때 그 강도는 약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불교와의 인연을 떠 올리며 부처님을 찾게 되었을 때 인연이 무르익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신반의한 우빠까

 

대게 우빠까(Upaka)와 관련하여 인연 없는 중생이라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인연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나서 오비구를 찾아 나설 때 가장 먼저 마주친 인물이 우빠까입니다. 그때 당시 우빠까는 사명외도(邪命外道 : aj?vaka) 수행자이었습니다.

 

우빠까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서 범상치 않음을 눈치 챘을 것입니다. 이는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얼굴이 빛나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벗이여, 그대는 누구를 의지하여 출가하였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누구의 가르침을 즐겨 배우는가?”(M26) 라며 연이어 묻습니다. 같은 수행자로서 어느 스승에서 배웠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나에게는 스승이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 스스로 깨쳤기 때문에 부처님 스스로가 스승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참으로 세상에서 거룩한 님, 위 없는 스승이다.”라 합니다. 우빠까는 이를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입니다. 그래서 벗이여, 무한승리자가 될 만하다고 자인하는가?”라며 재차 확인 합니다. 이에 부처님은 번뇌가 부수어지면 그들도 나와 같은 승리자가 되리.”라 합니다.

 

우빠까는 반신반의 했습니다. 정각을 이룬 부처님의 상호는 빛나 보이고 확신이 가득한 사자후이지만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경에서는 “ ‘벗이여,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말하고 머리를 흔들고 샛길로 사라졌다.”(M26) 라고 묘사 되어 있습니다. 사명외도 우빠까가 부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인연이 없었던지 오비구가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왜 머리를 흔들었을까?

 

반신반의한 우빠까의 모습을 경에서는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바로 “ ‘벗이여,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말하고 머리를 흔들고 샛길로 사라졌다.”라는 말입니다. 초불연 번역서에는 “ “도반이여,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머리를 흔들면서 다른 길로 떠났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같은 빠알리어에 대하여 그럴지도 모르지그렇게 되길 바랍니다한 것은 서로 다른 번역입니다. 빅쿠보디는 “‘May it be so, friend.’ Shaking his head, he took a bypath and departed.”라 되어 있습니다. 빅쿠보디는 ‘May it be so’라 하여 그럴지도 모릅니다로 번역했습니다.

 

 

 

 

 

 

세 번역을 보면 공통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라 되어 있습니다. 반신반의의 상태를 표현하는 적절한 말이라 봅니다. 이와 관련된 빠알리구문이 “'huveyyap?vuso'ti vatv? s?sa? okampetv? ummagga? gahetv? pakk?mi.”입니다. 여기서 머리를 흔들다라는 말이 ‘s?sa? okampetv?입니다. 빠알리어 okampetv?‘having shaken’의 뜻입니다. 이 말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기 보다 머리를 위 아래로 흔들기도 하고 또한 좌우로 흔들기도 했다는 뜻으로 보여집니다.

 

우빠까가 머리를 흔든 이유는 반신반의 했기 때문입니다. 빛나는 얼굴과 확신에 찬 사자후로 보아서는 깨달은 자가 분명하지만, 스승 없이 깨달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벗이여, 그럴지도 모르지(huveyyap?vuso)”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빠알리어 ‘huveyya’‘it may be’의 뜻으로 그럴수도 있을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부적절한 번역이라 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자라했고, 그것도 스승이 없이 깨달은 자로서 승리자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빠까가 보기에 깨달은 자인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스승 없이 깨달았다는 것에 대하여 의문한 것입니다. 이렇게 반신반의한 우빠까가 “'huveyyap?vuso”라 한 것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라 한 것은 상황에 맞지 않습니다. 빅쿠보디도 “May it be so”라 하여 그럴지도 모르지요라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라 번역한 것은 상황에 맞지 않습니다.

 

 

우빠까는 인연 없는 중생?

 

우빠까는 인연 없는 중생일 지칭하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초불연 각주에서는 우빠까에 대한 인연담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번역서에는 주석(PPS.II.189)을 인용하여 그 후에 우빠까는 사냥꾼의 딸 짜빠-우빠까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칠일간을 굶었다.-와 하는 수 없이 결혼했다. 그러나 그의 결혼생활이 불행에 빠지자 다시 부처님에게 돌아와서 승단에 들어와서 돌아 오지 않는 경지를 성취했다.”(499번 각주) 라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빅쿠보디도 우빠까의 그 후 행적에 대하여 각주에서 설명해 놓았습니다. 각주에서 “According to MA, Upaka thereafter fell in love with a hunter’s daughter and married her. When his marriage turned out to be an unhappy on e, he returned to the Buddha, entered the Sangha, and became a non-returner. He was reborn in the Aviha heaven, where he attained arahantship”(MDB, 310번 각주)라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우빠까는 다시 부처님에게 돌아 온 것입니다. 우빠까는 결코 인연 없는 중생이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에게 돌아 온 우빠까

 

사부니까야에서 우빠까는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에서 나타납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번역서에서는 아지와까 [유행승]인 우빠까는 본경에만 나타난다.”(859번 각주) 라고 각주 했습니다. 이런 설명은 전재성님과 빅쿠보디의 각주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우빠까가 맛지마니까야에 단 한번만 나타나 머리를 흔들고 사라졌다고 한다면 인연 없는 중생일 것입니다.

 

초불연에서 아지와까 [유행승]인 우빠까는 본경에만 나타난다.”(859번 각주) 라고 한 것은 오류로 판단됩니다. 율장대품에도 우빠까와 관련된 이야기가 병행합니다. 더구나 테리가타에서는 우빠까에 대한 인연담과 게송이 등장합니다. 아마 초불연에서 쿳다까니까야를 번역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라 보여집니다.

 

초불연에서는 사부니까야만 완역했을 뿐 쿳다까니까야 15개 경에 대한 번역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서를 보면 숫따니빠따, 법구경, 우다나, 이띠붓따까, 테라가타가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테리가타가 출간준비중에 있습니다. 한국빠일리 성전협회에서는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쿳다까니까야 15종 중에 6종을 완역해 놓았습니다.

 

테리가타에는 우빠까와 우빠까의 전처 짜라에 대한 인연담과 게송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테리가타 291번 게송에서부터 311번 게송이 그것입니다. 그 중에 우빠까가 짜빠의 속박을 끊고 나는 다시 출가하고 싶다.”라는 게송도 있습니다. 사냥꾼의 딸 짜빠와 결혼 했지만 염증을 느껴 재출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빠알리 사전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An ?jivaka whom the Buddha met on his way between Gay? and the Bodhi Tree, after he set out from Isipatana for the preaching of the First Sermon. Upaka questioned the Buddha on his attainments, and when the Buddha told him what he had accomplished he asked the Buddha if he were ”Anantajina.” When the Buddha acknowledged it, Upaka shook his bead saying, ”It may be so, friend,” and went along by another road (J.i.81; Vin.i.8; M.i.170-1; DhA.iv.71-2). It is said (DA.ii.471) that the Buddha walked all the way from the Bodhi Tree to Isipatana - instead of flying through the air, as is the custom of Buddhas - because he wished to meet Upaka.

 

After this meeting Upaka went to the Vankah?ra country and there, having fallen desperately in love with C?p?, the daughter of a huntsman who looked after him, starved for seven days and in the end persuaded the huntsman to give her to him in marriage. For a living, Upaka hawked about the flesh brought by the huntsman. In due course C?p? bore him a son, Subhadda. When the baby cried, C?p? sang to him saying, ”Upaka’s son, ascetic’s son, game-dealer’s boy, don’t cry,” thus mocking her husband. In exasperation he told her of his friend Anantajina, but she did not stop teasing him. on e day, in spite of her attempts to keep him, he left her and went to the Buddha at S?vatthi. The Buddha, seeing him coming, gave orders that anyone asking for Anantajina should be brought to him. Having learnt from Upaka his story, the Buddha had him admitted to the Order. As a result of his meditation, Upaka became an an?g?m? and was reborn in the Avih? heaven (ThigA.220ff; MA.i.388f. Upaka’s story is also given in SnA.i.258ff, with several variations in detail). The Samyutta Nik?ya (i.35, 60) records a visit paid to the Buddha by Upaka and six other beings born in Avih?. According to the Majjhima Commentary (i.389), Upaka became an arahant as soon as he was born in Avih?.

 

In the Ther?g?th? he is also called K?la (v.309. This may have been a term of affection used because of his dark colour) and his birth-place is given as N?la, a village near the Bodhi Tree, where he is said to have been living with his wife at the time he left her (ThigA.225).

 

Later, C?p?, too, left the world and became an arahant Ther?.

 

The Divy?vadana (p.393) calls Upaka Upagana.

 

The enumeration of the Buddha’s virtues which was made to Upaka is not regarded as a real dhammadesan? because it took place before the preaching of the first sermon. It produced on ly a v?san?-bh?giya result, not sekha- or ribaddha-bh?giya (UdA.54).

 

The words of the Buddha’s speech to Upaka are often quoted (E.g., Kvu.289). (upaka, 빠알리사전,PCED194)

 

 

 

 

 

우빠까는 부처님의 최초 제자가 될 뻔 했습니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던 우빠까는 고개를 때로 위아래로, 때로 죄우로 흔들며 샛길로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정법을 만난 인연을 놓친 것입니다. 초불연에서는 다른 길로 갔다.”고 하여 가던 길을 가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빅쿠보디는 “departed”라 하여 단지 떠났다라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빠알리어로는 “ummagga”로 되어 있습니다. 이말은 ‘a tunnel; devious or wrong way’의 뜻입니다. 빠알리어 ummagga는 문자적으로 ‘off-track’의 의미입니디. ‘길아닌 길로 갔음을 말합니다. ‘a side track, a wrong way, devious way’의 뜻이 있기 때문에 전재성님이 샛길로 사라졌다라고 번역한 것은 적절하다고 봅니다.

 

여기 길이 있음에도 그 길을 알아 보지 못하고 샛길로 빠졌을 때 그 길은 험난한 길이었을 것입니다. 우빠까가 그랬습니다. 사냥꾼의 딸을 유혹하여 사냥꾼의 딸 짜라와 결혼 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사냥꾼의 딸 짜라는 아기가 울 때 마다 “Upaka’s son, ascetic’s son, game-dealer’s boy, don’t cry,(우빠까의 아들아, 금욕주의자의 아들아, 도박꾼의 아들아, 울지마라)”라며 깔보았기 때문입니다. 외도 수행자 우빠까는 분명 길 아닌 길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집을 떠나 다시 출가하고자 합니다. 예전에 보았던 부처님을 떠 올리며 길을 떠납니다. 이것이 부처님과의 인연입니다. 우빠까는 결코 인연없는 중생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스쳐 지나가듯 만난 것만 해도 커다란 인연이 된 것입니다.

 

테리가타 우빠까와 짜빠 장로니 이야기에는 우빠까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테리가타 ‘Thig.299’번부터 ‘Thig.311’번 까지 20개의 게송을 보면, 우빠까와 짜라가 번갈아 이야기하는 것이 게송으로 묘사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 맛지마니까야 각주에서 아지와까 [유행승]인 우빠까는 본경에만 나타난다.”(초불연 맛지마, 859번 각주) 라고 표현한 것은 잘못된 설명이라 보여집니다.

 

불교와 인연맺기

 

여래삼불능이라 하여 무인연도중생(無因緣度衆生), 무인연도국(無因緣度國), 불능면정업(不能免定業)이라 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인연이 있어야 제도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연을 맺어 주어야 합니다.

 

인연 없는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은 불교와 인연맺기 입니다. 그 작은 인연으로 언젠가는 깨달음을 이루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만일 불교와 인연 없는 나라에 태어났다면 역시 열반이라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라면 아프리카나 남미와 같은 불교불모지에 불음을 전파할 수 있는 당위성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목숨을 걸고 포교한 뿐나존자(S35.88)를 떠오르게 합니다. 아라한이 된 뿐나존자는 부처님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외도들이 득실거리는 서부지역으로 포교를 떠납니다. 불교와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맑고 청정한 이미지를

 

한번 불교와 인연 맺어 놓으면 그 인연으로 인하여 언젠가는 불교로 되돌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중학교를 종립학교에서 다녔습니다. 추첨으로 가게 된 학교가 그때 당시 종로5가 부근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입니다. 그때 당시 일주일에 한번 불교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불교선생님이 동국대 교수에서 은퇴한 조용길선생님이었습니다. 불교시간에 부처님의 일생부터 배웠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불교경험은 아주 작은 경험에 지나지 않습니다. 책으로만 접한 불교로서 단지 이런 것이 있다는 것만 안 것입니다. 그럼에도 삶의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었을 불교를 떠 올리게 했습니다. 불교에서 해법을 찾아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학교 다닐 때의 불교인연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불교를 접하지 않고 개신교나 천주교를 먼저 접했다면 아마 그 쪽 종교에서 해법을 찾았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인연하나가 불씨가 되어 커다랗게 타오를 수 있습니다. 우빠까가 비록 반신반의하면서 샛길로 빠졌지만 결국 부처님 곁으로 돌아 왔습니다. 테리가타에서는 이런 과정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쿳다까니까야를 모르는 사람들, 특히 테리가타를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맛지마니까야에 우빠까가 단 한번 등장하기 때문에 불교와 인연이 없는 것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하지만 도중에 부처님을 만났다는 그 인연 하나로 다시 되돌아 왔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아마도 맑고 깨끗한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우빠까가 부처님을 보고서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라 했습니다. 이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포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 같습니다. 불교와 인연 맺게 한다고 길거리 선교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맑고 청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상대방은 어디에 다니는지 스승은 누구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불교와 인연 맺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맑고 청정한 이미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2017-02-0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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