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live/gUhWrFsjI7M?feature=share
창세기 강론 37
창세기 10:1-32
노아 아들들의 족보
- 네 번째 톨레도트 -
노아가 포도주를 마신 사건은 포도원지기가 되어 하늘의 안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나님 왕국의 안식이 덮어줌의 은혜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이 사건을 통해 그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갈라진다. 이 일을 통해 노아의 예언이 주어지는데 하나님은 셈의 장막에 거하시겠다고 하셨다. “셈”이란 ‘이름’이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셨다. 이것은 노아의 하체를 덮어준 것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노아의 사건으로 누구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것인가를 드러내신 것이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1절). 성경은 10장을 통해 노아의 아들들에 대하여 톨레도트로 짧게 처리한다. 여기에 기록된 인물은 정확하게 70명이다. 야벳의 아들에 대해 2-4절에 14명, 함의 아들에 대해 6-18절에 30명, 셈의 아들에 대해 21-29절에 26명으로 전체 70명이 소개된다. 70명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70이라는 수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애굽에 이주한 이스라엘이 70명이었고(창 46:27, 출 1:5), 하나님께서 모세를 대표로 하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 장로 70명과 시내 산에 올랐고(출 24:9), 예수님은 70명을 세워 복음을 드러내셨다(눅 10:1). 이런 말씀을 통해 볼 때 ‘70’이란 그 안에 언약의 의미를 두시고 흩어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완전성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노아의 아들들의 톨레도트를 통해 단순히 인물들을 소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흩어짐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의 완전성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결국 그 흩으심의 원인이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죄라는 바벨탑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언약을 드러내시기 위해 70명을 흩으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본래 집중하고자 한 셈의 톨로도트를 11:10 이하에서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그 족보를 이어 데라의 톨레도트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노아가 홍수 후에 350년을 더 살았고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다고 하지만 이 긴 기간에 대해 더 이상 다른 기록은 없다.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2-5절). 하나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겠다고 하심으로 야벳과 함으로 나누어진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6-12절).
“니므롯”의 히브리어 ‘니므로드’는 ‘반역, 반란’이라는 뜻이다. 우리 성경에 “첫 용사”라고 번역하였는데 “첫”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할랄’인데 ‘꿰뚫다, 피리를 불다, 더럽히다’라는 뜻이다. 즉 처음 용사였다는 말이 아니라 이 땅을 더럽히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용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깁보르’인데 ‘강한 자’라는 뜻이다. “여호와 앞에”라는 말을 우리는 좋은 의미의 표현으로 생각하는데 직역하면 ‘여호와 얼굴 앞에, 여호와 얼굴에 대하여’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얼굴 앞에 대적하는 존재로 표현되었다. “사냥꾼”이란 히브리어로 ‘차이드’인데 ‘추적하다’라는 ‘추드’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런 의미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땅을 더럽히는 강한 자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추적하여 죽이려고 하는 반역자’라는 의미를 지닌 존재가 “니므롯”이다. 결국 홍수 이전에 나타났던 “네피림”과 같은 모습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4)
그래서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라고 하였고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라고 말씀한다. 즉 니므롯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바벨탑이고 성이다. 이 바벨론 나라는 성경에서 계속 애굽과 같은 존재로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심판 받아야 할 나라의 상징으로 표현된다(계 11:8, 14:8, 16:19, 18:2 등).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더라)”(13-14절). “미스라임”이란 우리 성경에 ‘애굽’이라는 명칭이다. 즉 함의 아들에게서 애굽이라는 나라가 나왔다. 이런 점에서 함에게 주어진 저주란 단순히 종으로 비참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애굽처럼 강대국으로 되는 것 자체가 저주와 심판 아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15절 이하에서 가나안에 대해 기록한다.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15-20절).
노아가 함의 아들 가나안에 대해 저주로 예언을 한 것은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출애굽 이스라엘이 들어갈 가나안 땅의 사람들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함의 아들 가나안에 대한 기록을 부각하고 있다. 가나안이 종이 된다는 것은 셈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막에 종이 되는 것으로 야벳과 나누어진다. 다시 말해서 야벳은 창대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창대함에 사로잡혀 사는 것으로 세상적 관점에서 보자면 번성하여 잘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심으로 함과 야벳의 모습은 확연하게 구분되고 갈라진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너희”와 “그들”(마 13:11)로 나누어지듯이 심판과 구원으로 나누어지고 갈라진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7-18)
성경이 이렇게 함의 아들 가나안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데라의 톨레도트에서 보여줄 아브라함에 대한 것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를 통해 나타내실 언약의 자손에 대한 관심 때문에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살게 될 가나안 땅의 족속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21-32절).
셈의 족보는 11:10 이하에서 다시 ‘셈의 톨레도트’로 언급되기에 여기서는 셈의 후손을 다 설명하기 위한 언급이 아니라 바벨탑의 원인이 되는 문제를 알려주기 위해 셈의 후손들을 언급한 것이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라고 하였는데 “에벨”의 히브리어 ‘에베르’는 ‘저쪽 넘어 지역’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우리 말로 ‘히브리’(히, ‘이브리’), 즉 ‘가로지르다, 건너오다’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에게 처음 사용되었다.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창 14:13)
아브라함을 이렇게 지칭한 것은 가나안 본토 땅의 사람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배척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언약의 의미 안에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왕국을 차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22절)이라고 하였다. “아르박삿”에게서 “셀라”, “셀라”에게서 “에벨”로 후손이 이어진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25절)라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세상이 나누어진 것은 11:1 이하에서 소개하는 바벨탑과 성의 사건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결과를 가지고 표현한 것이지 이때 나누어지고 또 바벨탑 사건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바베탑과 성의 사건을 앞서 미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 “벨렉”과 “욕단”으로 나누어졌는데 욕단은 그 아들들과 함께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30절)라고 말씀한다. “동쪽”이란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3:24).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창 4:16)
“산”(히, ‘하르’)이란 노아의 홍수 때 “높은 산이 다 잠겼더라”(7:19)라고 하였을 때 산과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보자면 에벨이 거주하였다는 곳은 단순히 동쪽 산이 있는 곳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이다. 결국 10장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셈의 후손이기에 무조건 하나님을 섬기고 믿었다는 것이 아니라 셈의 후손 중에서도 갈라졌는데 그 갈라진 자들이 니므롯과 연관하여 육의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11:1 이하에서 소개하는 바벨탑과 성의 사건은 노아의 홍수 이후 인간의 죄가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죄의 권세 아래 셈과 야벳과 함의 후손들이 합작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서 보여주는 것이다. 니므롯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의 상태가 된 것이다.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5-7)
이런 점에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5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31절)라는 표현은 단순히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으로 갈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육의 상태에서는 하나의 나라, 하나의 말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202304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