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광복 30년이 경과하는 동안에 우리의 철학은 이 시대를, 이 시대의 문제를 어떤 점으로 안아왔는가?
우리의 철학이 서양철학의 해설에 그쳤던 것은 아닌가? 우리의 철학이 동양사상의 훈고적 풀이에만 그쳤던 것은 아닌가? 또는 우리의 철학적 논문이 자료적 각주의 다과에 의하여 평가되었던 것은 아닌가?
만약에 서양철학의 기초적 해설만을 능사로 우리의 철학이 여겨왔다면, 그것은 서양철학의 아류 신세를 면하지 못하리라. 서양철학이 변하면 나의 생각도 따라서 변하여 자기 신원의 확보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 동양 전통사상의 개념적 뜻풀이가 우리의 철학이었다면, 그런 철학은 이 시대의 자연.사회.인간의 문제의식에 대응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철학논문이 각주의 양을 자랑삼아 내보이는 정도에 머문다면, 그것은 공부하는 과정의 습작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되리라. 더구나 그런 발상이 더 위험하게 여겨짐은 논문이 각주 붙이기로 평가됨으로써 한 편의 논문이 지녀야 할 창조적 상상력이 시들어버리고 만다는 데 있다. (중략)
철학인이 자기의 인식지평을 넓히고 사유의 가능성을 더 풍부히 갖는 것보다 더 필요하고 긴요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무릇 철학하는 이에게 자기의 사상적.이론적 신원을 찾고 확보하려는 노동보다 더 긴급한 과제는 없으리라. 바로 이런 과제의 추구야말로 앞에서 제기된 질문들에서 벗어나는 첩경이 아닌가 여겨진다..."
- 1976년 4월 서강대학교 연구실에서 저자 씀 - (김형효,《한국철학산고》머리말 중에서)
김형효선생의 이 말이 쓰여지고 난 뒤 40년이나 지났건만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우리의" 철학개론 수업은 이런 물음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찾기"(자기의 사상적.이론적 신원을 확보하려는 노동)라는 정의가 가슴에 와닿는다. 김형효는 철학의 정의에서조차도 해설이나 훈고가 아닌 자기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보다 더 폭넓은 정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혜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인들이 자기를 "지혜(=앎)" 그 자체에서 찾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철학자들에게는 앎을 추구하는 활동 그 자체가 자기다움인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철학자들에게는 대중을 "교화"하는 활동이야말로 자기다움이었을 것이다. 즉 자기수양을 통한 타자구제에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찾은 것이다(가령 "수기치인"과 같이).
그렇다면 한국의 철학자들의 자기다움은 어디에 있었을까? 또는 어디에 있는가? 지혜인가? 교화인가? 아니면 둘다인가? 그것도 아니면 제삼의 어떤 것인가? 아니 과연 자기를 찾고나 하고 있는 것인가? 37세의 "철학인" 김형효는 이에 대한 대답이 아직 우리에게는 없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