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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36강
출애굽기 17:1-7
반석의 물
홍해를 건넌 후 모세는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을 향해 가는 것을 거룩한 처소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라 하였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처소로 삼는 주께서 세우신 성소라 노래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도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성소로 만드시는 것에 방향성이 잡혀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상은 먹고 마시는 것, 육의 것으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심으로 하늘에서 주시는 말씀이 그들을 살리는 것임을 나타내셨다.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해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보여주신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불평과 원망 가운데 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도 말이다. 이스라엘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언약의 말씀으로 이끌어 가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을 이끌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17장은 두 다툼에 대한 사건을 다룬다. 1-7절은 모세와 다투는 내적 다툼이고, 8-16절은 아말렉과 전쟁하는 외적 다툼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1절). “여호와의 명령대로”라고 하였는데 말씀대로 이끌려 갔고 “그 노정대로 행하여” 갔지만 마실 물이 없는 곳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원하는 길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물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다. 오늘날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만사형통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인데 왜 나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길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이 해결되는 것이 구원의 여정이 아니다.
출애굽기 본문에는 다 나오지 않지만 민수기에 보면 ‘신 광야 – 돕가 – 알루스 – 르비딤’으로 여정이 이어졌다고 밝힌다(민 33:12-14). “르비딤”의 ‘레피딤’은 ‘평지, 평원’이라는 뜻으로 아마도 이스라엘이 야영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장소였던 것 같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2절). “다투어”의 ‘리브’는 ‘룬’(불평하다, 원망하다)에서 온 단어로 ‘싸우다, 다투다, 경쟁하다’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물을 마시게 하라”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있지만 여전히 진리의 말씀을 먹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먹었던 유월절 어린 양의 고기와 일주일간 먹었던 무교절 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지 못하고 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9)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이스라엘이 언약을 제대로 알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성취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한 길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죽는다는 것은 물과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서 죽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기 때문이다(암 8:11).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음으로 인한 불평과 원망이 모세와 다투는 것이 되며 그것이 어떻게 야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되는가? 7절에 보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라고 하였는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여호와께서 계시는가? 아마도 여호와는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필요를 채워주는 하나님이라면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으로 믿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함께 하지 않는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모세와 다투는 것이고 곧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기적을 행하여서라도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돌을 떡으로 만드는 하나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그 발을 받쳐 주는 하나님, 십자가 없이도 세상의 모든 영광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마귀의 시험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마 4:1-11). 곧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요일 2:16).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모든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해결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고, 반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함께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특히 자신의 암이나 질병을 고치시고,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도로 끌어 당겨와서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3절).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라고 하였는데 사실 홍해를 경험하였을 때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아만)”(출 14:31)라고 말씀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그 믿음을 알지 못하기에 나오는 원망이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출애굽이라는 구원을 원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환언하자면 하나님의 구원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구원이 좋다는 뜻이다. 비록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할지언정 거기서 나오지 않는 구원이 좋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편안하게 잘 먹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의 생존만을 향한 나를 내버려두시지 않고 생명을 향해 가도록 내가 원치 않는 영으로 임한 은혜이다.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라고 하였는데 사실 광야에서 목말라 죽더라도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이 복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목숨 부지, 육의 생존을 생명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치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옮겨졌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악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광야는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실상을 폭로하고 육을 죽이고 말씀으로 살려내는 현장이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4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신 언약의 말씀은 모세라는 인물을 예표로 세워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 언약 성취이다(신 18:15). 결국 돌 던짐의 궁극적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5절). “백성 앞을 지나서”라고 번역하였는데 ‘아바르’는 ‘지나가다, 통과하다, 건너가다, 사라지다, 넘겨주다, 소멸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백성들 앞에 넘겨주라’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의 해결책을 모세오경으로 주시듯 5가지로 제시하신다. ① 백성 앞에 넘겨주라. ② 장로들을 데리고 가라. ③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④ 야훼 하나님이 그 반석 위에 서리라(6절). ⑤ 그 반석을 치라(6절).
“이스라엘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물을 먹이시면 그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다.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라고 하였는데 “지팡이”의 ‘맛테’는 지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애굽에 내려진 심판이 이스라엘에게도 내려진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한다면 애굽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심판의 근거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보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6절). “호렙 산”은 출애굽기 3:1에서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경학자들 사이에서는 오늘 본문의 호렙 산이 다른 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시내 산과 혼동되어 잘못 기록하였다고 보기도 하는데 전체 많은 산을 넓은 범위에서 호렙 산이라 하고 그중의 한 봉우리의 산을 ‘시내 산’이라고 표현하였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내가 …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라고 번역하였는데 번역상 ‘헨’(보라!)을 빠뜨렸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반석 위에 서신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을 반석과 동일시하신 계시이다. “서리니”의 ‘아마드’는 ‘(확고히, 옆에, 잠잠히) 서다, 확실히 하다, 확립하다, 정하다, ~위에 두다’라는 뜻으로 신약의 헬라어 ‘히스테미’(똑바로 세우다)로 번역된다. “그 반석”은 히브리어로 ‘하쭈르’라고 하여 앞에 관사를 붙였다. “치라”의 ‘나카’는 ‘치다, 때리다, 죽이다, 심판하다’라는 뜻으로 ‘모세가 애굽인을 쳐죽인 것’(출 2:12), ‘모세가 지팡이로 나일을 친 것’(출 7:17)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나카’의 주체는 하나님으로 나타낸다(출 3:20, 7:17, 8:12-13, 9:25, 31-32, 12:12-13, 29, 20:15 등). 그런데 아무 반석이나 치는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그 반석을 쳐야 하는데 그 주체가 하나님이시다.
구약에서 반석은 야훼 하나님을 상징한다(창 49:24, 신 32:4, 15, 삼하 22:3, 32, 시 18:2, 95:1 등). 그렇다면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치는 것이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결국 ‘나카’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면 모세가 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죽음을 이루실 것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
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사 44:2-4)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7절). “맛사”는 ‘시험’이라는 뜻이고, “므리바”의 ‘메리바’는 ‘리브’에서 유래한 단어로 ‘다툼의 장소’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해 하나님을 대적하여 다투고 시험하였지만 하나님은 반석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물과 피를 다 쏟아 생명을 주실 것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하여 반석을 터뜨려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근거하여 진리의 영을 넘겨주심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확인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2026011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