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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기 회장, 진주땅에 묻히다
-- 추모 산필
강 희 근
1.
홍종기(洪鐘基) 진주문인협회 회장이 2019년 8월 10일 진주문인협회 회장으로서 예술회관 행사에 참석하고 귀가하던 밤 10시경 시내버스 안에서 숨졌다. 그는 회장 역할을 열심히 하다가 돌아갔다. 고인은 고인이 믿었던 천주교 장례미사를 거쳐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홍씨 선영에 평장으로 묻혔다.
필자에게 11일 오전 부산 성베네딕도 올리베따노 수녀원의 이해인 수녀님은 홍종기 아오스딩 형제의 장례일과 장지 등에 대해 알려달라는 문자를 주셨다. “내가 힘들게 아파할 때 묵주기도를 정성들여 해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도 형제에게 기도 바치고자 합니다. 해인글방”
홍시인이 생전에 쓴 신앙시 중 인상 깊은 적품은 <버린다>였다
나는 주님이 종이오니
십자가에 못박아 주소서
갖은 온갖 욕심 다 버리게 하소서
물욕도 금욕도 남기지 않게 하소서
빗자루 들고 싹싹 쓸어내게 하소서
깨끗이 빤 걸레로 맑고 밝게 닦게 하소서
2.
홍종기 시인은 ROTC 8기로 임관하여 승승장구 수송장교 소령으로 임관되었다. 그는 혈압 등의 신병으로 예편되어 초대 옥봉동 예비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제대 전에 받은 표창 등을 감안하면 그는 훌륭한 대한민국 영관급 장교였다.
1975년 동해안 경비사령관 소장 전성각 표창
1976년 관리개선 우수상 동해안 경비사령관 준장 김종구
1978년 육군본부 수송감 준장 표창
1982년 공로표창 진주경찰서장 김상곤
1982년 공로표창 잔주시장 성호덕
그는 대한민국 ROTC중앙회 부회장 역임, 현 자문위원이다.
홍종기 소령은 수송장교로 GP에 연료 수송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 이때를 기억한 시를 읽을 수 있다. 제목은 <겨울 투쟁>이었다.
최전방 GP에 월동 연료 수송 명령을 받고
눈이 첩첩이 쌓인 산길을 간신히 돌고 돌아
추위에 떨고 있는 사시나무를 만났다
영하 30도라는데 나는 추운 줄 모르고 있었다
작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얼음에 차가 미끄러지는 죽음을 안은 투쟁이었다
앞차 뒤에 뒤차 앞 범퍼를 붙이고 1단 기어를 넣고
춘향이 걸음보다 느리게 사뿐히 내디디는 타이어는
부하의 목숨을 담보하는 투쟁이었다
홍종기 소령은 복무중에 군대 작전 경로에 관해 참신한 방안을 제시하여 관계관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는 한강대교를 복수로 설치할 때 그 엄중한 사업에 참여하여 담당한 일을 잘 마무리하기도 했다.
3.
홍시인은 대학 과정을 고학하다시피 하면서 법학을 전공하며 거기다 ROTC 훈련까지 겸하면서 이수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진주시내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대학과정에서는 그 아르바이트가 혹독한 것으로 그중에서 찬바람 부는 서울역 구두닦이로 2년 정도를 지냈다. 서울역에서 하는 구두닦이는 아무에게나 구두통을 갖다 놓고 그냥 구두를 닦는다고 닦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한 번은 구역을 맡고 있는 깡패에게 된통 맞아 얼굴이 한 쪽으로 일그러지고 입이 터지고 코도 한 부분이 내리앉는 불상사를 만나기도 했다. “이 자식아, 너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 신고도 없이 함부로 통을 앉히고 구두코를 미는 거야!” 마침 이때 진주 봉래초등학교 출신 선배가 나타나, “너 종기 아이가? 여긴 웬일이고!”하고 물었다. “아 민형! 보다시피 내가 고학으로 나서서 구두를 닦아 보려는 참인데 구역이 따로 있는지 된통 얻어 맞았어요.”
“아이고 종기야. 앞으로는 걱정하지 말아, 내가 이 구역 짱이야. 네가 통 갖다 놓고 싶은 곳이 네 구역이니 그렇게 알아.”그러면서 홍시인을 때린 그 아이를 보고는 “야 임마. 이 사람은 내 고향 동네 후배다! 잘 모셔라! 어려움이 없도록 챙겨 주어라. 알것재!
이후 홍시인은 대학 2학년까지는 안정적으로 장소 도움을 받아 고학살이가 평화로울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해 쓴 시 <구두닦이>는 다음과 같다.
서울역 앞 모자를 눌러 쓴
고개를 들지 않는
모자챙 밑으로 반들거리는
구두를 닦는 검정 염색한 얇은 군복 입고
손놀림이 더디지만, 빛이 더디지만, 난다
학생이었기에 더욱더
던져주는 돈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고개 숙인 채 “고맙습니다”
그리곤 바삐 다음 손님 맞는다
의지에 앉자마자 솔질하고
헝겊에 약을 묻히고 문질린 다음
물을 묻혀 뱅뱅 돌린다
광이 난다
세상이 밝아온다
등록금이 주머니로 들어간다
광이 난다
세상이 밝아온다
등록금이 주머니로 들어간다
4.
홍종기 시인의 생애는 유년- 대학- 장교생활- 고등학교 교사- 문인생활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장교생활에 악센트를 줄 수 있지만 고등학교교사로서의 직분을 놓고 보면 결코 만만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홍 시인은 제대후에 진주 옥봉동예비군 중대 중대장으로 1년간 근무하다가 거제 장승포에 있는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해성고등학교 사회과 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영관급 장교생활을 거친 경력이 있는 만큼 통솔력이나 지도력 면에 있어 다른 교사들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해성고등학교가 대학입시 전략으로 고3반을 우열반 2등급으로 나워 편성하고는 야간학습을 담임 임석하에 집중 실시하는 비상체제에 들어갔는데 홍시인은 그중 후진반을 맡아 매일 밤 12시에 퇴근하고 오전 7시에 출근하는 별보기운동을 감수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한다” “하면 된다”는 구호를 외치게 하고 담임이 영수국 전략과 기타 암기과목 전략을 따로 세워서 특히 후진반인 자기반 학생들에게는 악센트를 암기과목에 치중하는 지도를 펴어나갔다. 1년간 집중도를 높이며 암기과목의 암기 목록을 담임이 편성하여 매일 매일 진도를 맞춰 암기하도록 밀어부쳤다.
3년 담임 후진반 1차년도 대입에서 자기반 합격생이 60명 정원에서 35명을 배출하여 거제 대입반의 쾌거를 이루었다. 이때 천주교 마산교구장은 홍시인에게 표창장을 주고 격려했다. 다음해는 3학년 우수반 담임을 맡아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전에너지를 학급에다 투자했다. 그 결과는 거제 역사상 처음으로 홍시인 반에서 서울대 공대 합격생을 내었을 뿐 아니라 고대 연대 서강대 등 세칭 일류대학에 다수 합격시킴으로써 홍시인 특유의 ‘하면 된다’는 슬로건이 지역 전체의 스로건이 되었고 이때를 기해 해성중고등학교 총동창회가 자발 구성되었다. 이때 홍종기 시인에게는 표창장에다 금메달까지 받는 거제 최대의 영광의 시간이 허락되었다. 이 무렵에 홍종기 명교사에게는 시인의 자리까지 넘어서는 감동의 항목들이 추가되었다.
홍종기 시인은 인생의 전반부는 그야말로 체험의 시기를 지나고 이제 후반에는 그 체험이 알찬 내용을 이루는 이른바 <후문학파>의 시인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진주의 이경순 시인은 초기 인생은 아나키즘운동에 정열을 바치고 후반에는 시인으로서의 영광을 획득하는 후문학파로서의 전범을 이루웠다. 동기 이경순이 후문학파이고 어쩌면 이병주도 후문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인생의 역정에 이병주는 학병체험에다 감옥체험을 보태었고 45세에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데뷔한 것이 후문학의 전후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시인은 그 역정을 거쳐 <봄이 돌아왔다>고 노래한 것일까?
구름이 머물고 있는 골짜기 따라 내려온
산촌 골짜기에 노란 개나리 인사하고
이름 모를 산새 춤추며 노래한다
안개비 흩어지는 들녘 한 자락에
새색시처럼 뽀얀 얼굴 내민 목련꽃 밝아
나풀나풀 나비 한 쌍이 봄을 안고 있다
마을 어귀에 짐승처럼 그 자리 지켜준
노송 가지에 쭈빗쭈빗한 솔잎을 타고
매달린 방울, 방울이 봄 햇살을 안았다
긴 여행을 다녀온 소년의 밝은 얼굴처럼
5.
홍시인은 이력에 비해 문단 할동은 활발한 편이었다. 그가 가담했던 단체에서 그는 늘 간부직에 있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 한국본부 이사, 국제펜 경남지부 회장, 송수권시인기념사업회 이사 등 손꼽히는 것이 대강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문인협회가 시상하는 배기정문학상(2016)을 받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갖게 된 홍시인의 면모가 많지만 사적인 체험을 떠나 공적인 그의 면모를 두 개의 풍경으로 요약해 보고자 한다.
1)어떤 문학상 개막삭장에서 개막을 30여분 앞두고 행사 주제 프래카드에 글자가 틀리는 일이 생겼다. 이때 나이 70이 넘은 자신의 건강상태도 헤아리지 않고 책상과 책상을 포개고 그 위를 올라서서 혈압 160의 비틀거리는 자세를 겨우 고치고는 프래카드를 올려 거는데 땀을 흘리며 해내었다. 필자는 그때 그 아무도 못하는 저 일을 홍시인은 하는구나! “군인이닷!”하고 속으로 읽었다.
2)형평문학상 백일장때였다.늘 하는 것이지만 백일장의 행사구역을 정하고 이 밖을 넘어가면 부정행위로 간주하고 단속하는 것을 미리 공시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구역을 넘어나와 인근 커피숍에서 학부형과 동석하여 작품을 쓰고 있는 2,3명의 초등학생을 발견하고 즉석에서 회장(홍시인)이 그들을 단속하며 작품을 회수하여 갔다. 이 일은 평범한 다반사의 일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정주의로 그냥 봐주기 일쑤인 것을 “아니다!”하고 원칙을 지키고 실천했다. 문학적 엄정주의가 회장에게는 살아 있었다.
3)경조사에 헌신적으로 충실했다. 진주문협기를 말아들고 자가용도 없이 걸어서 또는 버스 타고 일일이 상가를 방문하여 회장으로서 조문하는 일을 놓치지 않았다. 경조사는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굴러내리는 돌과 같이 우리곁에 다가오는 것, 그러나 때로는 축하하고 기뻐하는 일도 더러는 있는 것,축하 행사장에 단체장의 축화 하나가 행사의 격이나 무늬를 새기는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6.
홍종기 시인은 소령 제대후 고혈압으로 시작된 신병이 붙잡은 일이라면 반드시 매듭을 짓고 끝내고야 마는 필수종결형 끈기로 이어졌다. 때문에 병은 고비마다 하나씩 부가되어 갔다. 그,래서 홍시인의 몸은 신병백화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생을 마감하기 몇 달 전에 쓴 <육신을 위한 육신의 노래>는 진정성 있는 시로 읽힌다고들 한다.
허리 살이 계속 오래된 풍선처럼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말랑 말랑
허리끈을 자르고 또 잘라도 넘쳐나는 허리끈이여
허리는 미녀처럼 날씬하지만 바지는 자꾸만 흘러내리고
엉덩이는 살이 빠져 뼈만 남았으니 앉아 있기 두렵다
종합병원의 나는 서 있다가 앉았다가
누웠다가 세월이 한스럽다
꿈이 저승길이요, 인사는 ‘아직 안죽었소?’이다
잡치지 마라, 내 할 일 다하고 갈란다
그리움도 꾸어보고 물에 빠져 한 번 더 허우적거리다가
가스 중독도 다시 맛보고 붉은 노을이 쳐다볼 때 사르르
두 손 마주 잡고 눈믈 잘잘 흘리면서 갈란다.
-<육신을 위한 육신의 노래> 후반
육신이 거의 소멸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지만 홍시인은 그 가운데서도 진주문협이라는 공동체의 수장으로 내적으로는 활발한 생명 유지를 하고 있었다. 시는 희망보다는 절망의 서정을 노래하고 있으면서 종결선언을 하지 않고 있다. “않고 있다‘가 어쩌면 인간 생애의 중대한 분수령이거나 대단원의 붉은 빛 물들이기의 가운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든 우리는 육신의 예기치 않은 종말 상태를 통과하면서도 절대 종결을 선언하지 않는 것이 생애의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온다. 홍종기 시인은 일찍이 옥봉동천주교회애서 영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사람이다.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하고 <참회록‘을 쓴 것처럼 그는 여러편의 시에서 죽음 임박의 시간을 예고하고 있다. <손자>라는 시를 보자.
욕심이 많은가 손녀는 하나 없고 손자만 일곱
다섯째 손자가 아비에게 유배를 당해
멀리 충주에서 진주로 유배를 왔다
넷째와의 잦은 다툼도 죄목이고
며느리의 취업도 죄목이고
아들이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것도,
걸핏하면 병아리처럼 짹짹 울어젖히는 통에
마음이 상하고 나 자신이 얄미워진다
자식에게 상속할 그 무엇도 없기에
장기도 시신도 기증하였으니,
내 죽거들랑 한 톨의 흙도 덮지 마라
내 죽거들랑 한 뼘의 잔디도 얹지 마라
내 죽거들랑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마라
-<손자> 전반부
내 가진 것이 없고 상속할 그 무엇도 다 기증했으니 내 죽은 뒤 아무것도 얹지 말고 덮지도 말아라, 그리고 눈물도 흘리지 말아라. 시인은 사람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뜻을 잘 안다. 흙 이외의 것들은 사치라는 것이다. 허망한 것이 죽음처럼 보이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의 세계가 있기에 시인의 덮지 않아도 얹지 않아도 족하리라는 선언인 셈이다.
홍종기 아우스딩 회장, 그는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홍씨 일족묘원에 45센티 가로 세로 좁은 공간, 평장 무덤에 납골로 들어가 묻혔다.그는 영혼으로서 저 세상 천국을 이룰 것이다. 그는 거기서 아프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갚아야 할 무슨 원망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준비하던 중산리 여름 글얘술 사랑방에서도 자유로을 것이다. 그는 평소에 기도하며 살면서 누를 끼쳤던 사람들에게 그날 그날 기도하며 용서를 청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를 빌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살아서 <자유시>동인을 결성했었다. 이제 그 동인의 주제시를 쓰지 않을까 싶다.
첫댓글 엎드려 두 손 모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가끔은 별로 내려와
아파하는자 등 토닥거려주고 갈 것입니다.
평소에 강희근 박사님과 동고 동락 하셨지요
남달리 많이 슬프고 슬플것입니다
명복 비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