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천주교 100년을 살피다가(2)
대구교구를 중심으로 한 남방천주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 보거나 우리 마산교구의 앞선 본당들의 설립 과정을 살펴 보면 외국 선교사들의 피나는 선교 의지를 만나게 된다.
한불수교(1886) 이후 경상도 교구를 설립하기 위해 로베르 김(金保祿) 신부가 대구에 파견되었으나 아직 시골 구석까지 박해의 고삐가 풀리지 않아 대구 성내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왜관 부근 '신나무골' 교우집에 은신 전교하기를 3년이나 했다니까 그 불편과 고생이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던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1888년경 로베르 김신부는 울산, 동래, 김해, 마산, 문산을 차례로 순회하면서 이 지역 교우들의 신심이 두터웠던 것에 감명을 받았다.
부산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조조 신부(趙得夏, Moyse Jozeau)가 영도에 은신해 있으면서 로베르 신부 이후 문산공소 등 경남지역 일대 공소를 관리했다. 조신부는 중세 기사처럼 말을 타고 다니며 교우들을 돌보았기 때문에 인기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서울로 가던 중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충청도에 주둔하고 있던 청병(淸兵)에 의해 희생되었다. 선교의 길이 복음처럼 기쁜 것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둠을 치면서 생기는 희생이기도 한 것임을, 그래서 표양이고 공로이기도 한 것임을 증거해 보여준 것이다.
오늘의 경남지역에 본당을 설립하는 데에 중심이 된 분은 다케 엄신부(Taquet, 嚴宅基)이다. 부산본당의 세 번째 주임으로 부임한 엄신부는 공소 판공을 위해 동으로는 울산, 서으로는 하동까지 다녀야 하는 불편 때문에 진주본당 설립이 시급했다. 엄신부는 1899년 관찰사가 거주하는 진주부의 중심인 진주성 성내에 본당을 세우려 했지만 주민들의 배척으로 성밖에다 건물을 매입하고 성무를 집행했다.(신은근 신부, 진주본당 설립, 마산주보 1661호-1665호) 본당자리가 "술집과 접대부나 아전들만 사는 거리"라는 점이 밝혀져서 당시 역이 있었던 평거동이거나 이현동, 아니면 향교 근처 배나무골 등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다케 신부는 바라실 교우 투옥사건이 생겨 대구 로베르 신부의 도움을 얻어 교우를 풀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아전들에 의한 사제관 침입 난동으로 일단 진주본당을 철수하기로 결심한다.장재실(바라실)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말티고개를 넘나들면서 가슴 아파하고, 주님 도움 청하고, 실의의 눈물 뿌렸으리라 생각하면 지금 필자의 가슴도 아프다. 결국 엄신부는 1900년 5월 31일 신설되는 마산본당으로 자리를 옮겨 갔다.
이어 문산본당은 1905년 부산 경남에서 네번째(사실상 3번째)로 설립되는데 권 쥴리엥(Marius Julier, 權裕良) 신부가 초대 주임이 된다. 본당 승격 2년 후 권신부는 거액을 들여 찰방관서와 아전관서로 쓰던 기와집 10여동과 부지2천 4백여평을 관으로부터 매입한다.문산을 상징하는 찰방관서가 교회 건물로 매입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복마전을 주님의 궁전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다음에 등장하는외국 선교사는 이탈리아 제노아 관구 소속 주 콘스탄시오 신부가 된다.주신부는 1957년 대구교구 에서 분리 신설된 부산교구에 의해 옥봉본당 제7대 및 제9대 주임으로 발령되어 1967년 1월까지 10여년을 사목했다.프란치스꼬회 소속 신부인 그는 이른바 프란치스꼬 진주 관할구(공식 명칭이 아님)를 관장하여 문산, 장재, 하동, 화정, 산청, 삼천포, 사천, 남해, 성심원의 본당이나 공소를 관리했다. 주신부는 1962년 8월 25일에 나환우들을 위한 '성심인애병원'의 완공과 함께 보사부 장관의 보사부령 205호로 성심원 개설을 인가 받았다.
여기 바쳐진 프란치스꼬회의 성심과 전국적인 미라회 조직과 활동, 그리고 이름 없는 봉사자들의 활동 등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넘쳐 났다.주신부의 경우 일찌기 중국에서의 전교 사업에 헌신했었는데 중국이 모택동 손으로 넘어가면서 추방당해 본국으로 잠시 갔다가 거제도로 와서 한국말을 배우고 선교의 기초를 닦던 중에 부산교구의 부름으로 진주로 와 사목하게 된 것이었다.주신부와 프란치스꼬회는 1962년 칠암동 50평 목조건물을 지었고 1965년 3월 1일에는 칠암본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뒤따랐을 때 예수님은 뒤돌아 보고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셨다.그때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말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고 말씀하신다. 우리 교회를 위해 이국만리에 와 목숨을 걸고 인생을 걸고 스스로의 삶을 송두리채 바친 선교사들이야 말로 "와서 보아라"를 그대로 실천한 분들이다.그분들의 봉헌은 오늘 우리 교회의 뿌리이자 에너지이다.모두들 "나도 그 자리에 설 수 있겠는가?고 스스로에게 통절히 물어 보아야 할 연중 제2주일이 되었으면 한다.
강 희근 요셉, 시인. 경상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