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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원이야기
 
 
 
카페 게시글
경상북도(이야기) 스크랩 소천서원 이야기
관보 추천 0 조회 103 11.12.15 19: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소천서원(蘇川書院)
소 재 지 :  용궁면 무이리 582-1
(원소재지 :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582-1)
건 축 주 :  용궁전씨 문중
건축시기 :  1701년
중건시기 :  1918년
훼철시기 :  1871년

건축 이야기
고려 말기에 국사가 날로 잘못되는 것을 보고, 일찍이 기미를 알아 시를 하찮게 여기고 뜻을 세웠다. 마침내 낙동강가 성화천 동쪽 기슭에 정자를 쌓고, 못을 파고 연을 심어 그 향의 맑고도 고원함을 아꼈으므로 ‘청원’이라 편액하여 말년을 휴양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러하니 그 공로와 업적을 받들고 명예와 절조도 완벽하게 갖추었다. 이것이 퇴도 노선생께서 ‘연당’ 이라는 시 두 절구를 부쳐와 그 백세의 고풍을 기린 까닭이다. 덧붙여 “이 어른은 왕조가 바뀌어도 명현이니, 사당을 세워 은덕을 갚음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건축 배경
소천서원(蘇川書院)은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을 봉향하기 위하여 1701년(숙종 27)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가 1918년 중건되었다.

건축 구성
서원의 배치는 외삼문?강당? 내삼문?사당을 동일선상에 배치하였으며, 서원의 전면에는 소천재가 자리 잡고 있다. 강당인 전교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인데, 평면은 중당협실형이고, 가구는 오량가의 이익공집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 기와집인데, 평면은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개방하고, 내부는 통간을 이루게 하였다.

내력과 기능

관련이야기
- 소천서원
소천서원(蘇川書院)은 예천군 용궁면 무이 2리에 있다. 용궁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의 하나로 군의 서쪽 끝에 위치하면서 문경시 영순면과 내성천의 지류인 금천을 경계로 마주한다.

‘용궁’이란 이름은 내성천변의 풍경이 바닷속의 용궁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용궁면 지역은 신라 때는 축산 또는 원산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용주라 하여 자사를 파견하다 1017년 용궁으로 고쳐 상주에 소속시켰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용궁현, 1895년 용궁군이라 하다 1914년 예천군에 통합되었다. 무이리는 용궁군 구읍면 지역으로 과거에는 무송부곡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서문리와 진포리, 무림리, 교촌리, 원당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무이리’라 해서 예천군 용궁면에 편입되었다.

무이리는 ‘무리실’, ‘갯마’, ‘누문골’, ‘소천마’로 불리는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리실은 여주이씨의 세거지로 백운봉을 중심으로 바깥쪽에 있는 마을을 바깥마 또는 외무라 하고, 골 안에 있는 마을을 안마 또는 내무라고 한다. 갯마는 안마 동쪽 개울가에 있는 마을로 포촌이라고도 한다. 누문골은 안마 동쪽 능선 너머 구읍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누문골은 누문동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에 누문이 있었다 하여 붙은 것이다. 소천마는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병부상서를 지낸 국파 전원발이 살던 마을이다. 무이서당(유형문화재 제231호)과 청원정이 있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전원발
전원발(全元發)은 용궁면 무이리 소천(蘇川) 마을 출신으로, 호는 국파(菊坡), 본관은 용궁(竺山), 아버지는 전진(全璡)이다. 1315년(충숙왕 2)에 원나라에 가서 고려의 인재를 뽑는 문과에 장원하여 원나라에서 병부상서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집현전 태학사를 겸직하였다.

전원발은 황제를 자주 찾아가 고려는 바다 건너의 작은 나라로 원나라에 바치는 세공이 너무 많아 폐단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귀국할 때도 원나라 황제 순제를 하직하면서, “고려로부터 거두는 세공을 대폭 줄여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순제는 전원발의 애국심에 감탄하여 허락하고, 옷 한 벌을 내려주었다. 그 후 귀국한 뒤 1354년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선이 건국된 후 명 나라에서도 세공을 적게 받았는데, 태조 이성계는 전원발의 이 같은 공을 치하하여 다시 축산부원군에 봉하였다. 전원발은 조선에서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 성화천(省火川)의 맑은 물이 굽이치는 강 동쪽 언덕에 청원정을 세우고, 이곳에서 김득배(金得培), 이제현(李齊賢), 김구용(金九容) 등과 사귀었다. 특히 김득배가 시를 보내왔기에 그 시에 이어서 짓기를 “강물이 넓으니 물고기가 자유롭고, 숲이 깊으니 지친 새가 돌아온다. 고향에 돌아옴은 나의 뜻이요. 부귀의 위태로운 기미를 일찍 안 건 아니어라”고 하였다.

전원발은 글씨에도 뛰어나서 필적이 남아 있는데, 보은 법주사에 있는 ‘자정국존보명탑비(慈淨國尊普明塔碑)’의 비문이 그것이다. 무덤은 문경군 영순면 오룡리 사현 분퇴동(沙峴分退洞)에 있고, 소천에 ‘국파 전 선생 유허(菊坡全先生遺虛)’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1698년(숙종 24)에 임금이 이르기를, “전원발은 중국에 들어가서 여러 번 우리나라 세공의 폐됨을 아뢰어 지금 편안하게 되었음을 잊지 못하겠으니, 그가 쉬던 성화천을 소천으로 고치라”고 하였다. 1701년 소천서원에 제향되었다.
- 왕래 인물
김득배(金得培), 이제현(李齊賢), 김구용(金九容)
- 배출 인물, 제사 인물
전원발

마을이야기

예천 > 내성천북부권 > 무이리
- 무이리.
무이리는 내성천, 금천, 기천이 3면을 둘러서 흐르므로 무레실로도 부른다고 한다. 이 마을은 옛날 백씨들이 살던 마을인데 황해 관찰사를 지낸 백운양이 이곳에 은거하다가 임진왜란을 만나자 우연히 일어나 출전하면서 “내가 이 싸움에서 왜놈을 무찔러 이기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으면 이 나무도 말라 버린 것이다”라고 가족들에게 이르고 나간 뒤로 그가 상처를 입은 채 돌아오다가 마을 앞에서 죽었으므로 그 자리에 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1967년 경지정리를 하느라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하며, 또 백운양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래 돌아오지 아니하매 의관과 유품으로 마을 앞산에 묘를 만들고부터 그 산을 백장군산이라 부르고 마주목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마을 뒤쪽에 무이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도 무이라고 하였다 하기도 하고, 또 선조 때 이곳으로 옮겨 온 이연수라는 이가 마을에 오얏나무가 무성하므로 성씨에 맞추어 마을 이름을 무이라고도 부르면서 무이서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산수를 즐겼다고도 한다. 또 지금은 백운봉을 중심으로 바깥쪽에 있는 마을을 밭마 또는 외무라고 하고, 골 안에 있는 마을을 안마 또는 내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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