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서원명 |
주향인 |
건립 |
사액 |
소재 |
|
坡山書院 崧陽書院 牛渚書院 深谷書院 龍淵書院 鷺江書院 德峰書院 四忠書院 忠烈祠 賢節祠 江漢祠 紀功祠 遯巖書院 彰烈祠 表忠祠 魯岡書院 忠烈祠 武城書院 筆巖書院 襃忠祠 西岳書院 紹修書院 三忠祠 金烏書院 |
성혼 정몽주 조헌 조광조 이덕형 박태보 오두인 김창집 김상용 김상헌 송시열 권율 김장생 윤집 이봉상 윤황 임경업 최치원 김인후 고경명 설총 안향 제갈량 길재 |
1568 1573 1648 1650 1691 1695 1695 1725 1642 1688 1785 1841 1643 1717 1731 1675 1697 1615 1590 1601 1561 1543 1603 1570 |
1650 1575 1675 1650 1692 1697 1700 1726 1658 1693 1785 1841 1660 1721 1736 1682 1727 1696 1662 1603 1623 1550 1668 1575 |
파주 개성 김포 용인 포천 의정부 양성 과천 강화 광주 여주 고양 연산 홍산 청주 노성 충주 태인 장성 광주 경주 순흥 영유 선산 |
|
서원명 |
주향인 |
건립 |
사액 |
소재 |
|
武烈祠 道東書院 忠愍祠 灆溪書院 玉山書院 陶山書院 興巖書院 玉洞書院 忠烈祠 屛山書院 彰烈祠 忠烈祠 襃忠祠 彰節書院 忠烈書院 襃忠祠 淸聖祠 太師祠 文會書院 鳳陽書院 老德書院 表節祠 酬忠祠 |
석성 김굉필 남이흥 정여창 이언적 이황 송준길 황희 송상현 유성룡 김천일 이순신 이술원 박팽년 홍명구 김응하 백이 신숭겸 이이 박세채 이항복 정기 휴정 |
1593 1605 1681 1552 1573 1574 1702 1714 1605 1613 선조 1614 1738 1685 1650 1650 1691 고려
1695 1627 순조 |
1593 1607 1682 1556 1574 1575 1705 1789 1624 1863 1607 1723 1738 1699 1652 1652 1701 1796
1696 1687
1784 |
평양 현풍 안주 함양 경주 예안 상주 상주 동래 안동 진주 고성 거창 영월 김화 철원 해주 평산 배천 장연 북청 정주 영변 |
3) 서원의 구성과 배치
서원의 건축은 고려 때부터 성행한 음양오행과 풍수도참사상에 따라 수세(水勢)․산세(山勢)․야세(野勢)를 보아 합당한 위치를 택하여 지었다.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중히 여긴다. 이는 심성의 도야를 위하여 자연의 원리를 객관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탐구하여 체득하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은 크게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講堂), 원생(院生)․진사(進士) 등이 숙식하는 재실(齋室) 등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교육시설은 앞쪽에, 제향시설은 뒤쪽에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재실은 일반적으로 동재 (東齋)와 서재 (西齋)를 대칭으로 두었다. 이 외에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책을 보관하는 서고(書庫), 제사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서원의 관리와 식사준비를 담당하는 고사(庫舍), 시문을 짓고 담소하는 누각(樓閣) 등이 있다.
건물의 배치방법은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여 남북의 축을 따라 동서에 대칭으로 배치하며, 남쪽에서부터 정문과 강당․사당 등을 이 축선에 맞추어 세우고, 사당은 별도로 담장을 두른 다음, 그 앞에 삼문(三門)을 두어 출입을 제한하였다. 이 부근에 제사를 위한 제기고가 놓이고, 강당의 앞쪽 좌우에 동․서재를 두었으며, 강당 근처에는 서고와 장판각 등을 배치하였다. 고사는 강학(講學) 구역 밖에 한 옆으로 배치한 것이 일반적이다.
서원의 건물은 검소한 선비정신에 따라 복잡한 포(包)나 장식을 피하고 익공(翼工)이나 도리집 등의 간소한 양식으로 화려하지 않게 꾸민 것이 보통이다. 단청 또한 사당에만 긋기․얼모로 등을 사용하였다. 또한 지형에 따라 사당과 강당 부속건물 등의 지반(地盤)에 차이를 두어 주된 것과 부속된 것의 공간구성을 적절히 계획(界劃)하였다. 담장으로 외부 공간과의구획을 지어 분별하게 하였지만, 담장의 높이는 높지 않게 하거나 그 일부를 터놓아 자연과의 조화를 깨지 않고 적응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다. 내부에서 밖을 바라볼 때 자연의 산수를 접할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 서원 건축의 특징이다. 경내의 조경 또한 계절 따라 피고 지는 꽃과 낙엽수를 심어 계절에 따른 풍치를 감상하도록 하였다. 경외에는 송(松)․죽(竹) 등의 나무를 심어 푸른 산의 정기와 선비의 기상을 풍기게 하였다. 나무들은 대체로 산수유․느티나무․은행․작약․살구․모과․진달래․개나리․난초․모란․매화․단풍 등율 심었다. 丁
서원의 건축 양식은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하며, 건물의 규모도 크지 않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2칸,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서원의 기능이 달라졌고, 이에 따라 서원의 구성에도 변화가 따랐다. 곧 처음에는 교육시설이 중시되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는 제향 시설이 중시되어 이를 중심으로 건물이 조영되고 있다. 19세기에 와서는 대체로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가 주로 눈에 뛴다.
4) 서원의 재정과 운영
서원의 교육활동을 위한 중요한 재원의 하나는 서원전(書院田)이었다. 『속대전(統大典 』에 의하면 사액서원에는 각각 3결을 지급하였다. 그밖에 서원은 유지들이 기증하는 원입전(願入錢), 면역을 위하여 납상하는 면역전(免役田), 자체에서 사들이는 매득전(賚得田), 관찰사 또는 지방관에 의한 공전(公典)의 급속 등 여러 가지 형식을 통하여 광대한 농장을 소유,
학전(學田)으로 이용하였다. 현물 경제로는 관찰사 또는 지방관에 의하여 어물식염 등이 막대하게 지급되어 교육활동을 위한 필요잡비를 충당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교육은 자체적으로 제정한 원규(院規)를 바탕으로 원장(院長)․강장(講長)․훈장(訓長) 등의 원임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원규에는 서원의 입학 자격과 원임(院任)의 선출 절차, 교육목표 및 벌칙조항이 수록되어 있다. 원장은 산장(山長), 혹은 동주(洞主)로 지칭되며, 서원의 정신적인 지주이면서 유림의 사표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서원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있었으나, 원장은 퇴관한 관료이거나 당대의 명유석학(名儒碩學)이 맡는 것이 관례이었다. 강장은 경학과 예절에 대한 강문을 담당하고, 훈장은 학문 근면과 훈도를 책임졌다. 그밖에 서원 관리를 위하여 재장(齋長)․집강(執綱)․도유사(者侑司)․부유사(副有司)․직월(直月)․직일(直日)․장의(掌議)․색장(色掌) 등의 직책을 두었다. 이러한 재임(齋任)의 선출은 추천 제도에 의하여 선출하였으며, 때로는 관부(官府)의 인준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임기는 2,3년이 통례이나, 원장은 일기(一期)의 향사, 혹은 종신직이었다.
서원의 입학 자격은 시대별․지역별, 혹은 서원별로 다르다. 그러나, 대체로 입원자격은 별로 까다롭지 않았고, 생원․진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일반적이다. 백운동서원․이산서원(伊山書院)․서악서원(西岳書院)의 원규에는 대체로 생원․진사를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초시 입격자를 입학시켰으며, 초시 미입격자라도 향학심과 조행이 있는 자로서 입재를 원하면 유사가 유림들에게 승인을 받아 허락하도록 하였다. 무릉서원(武陂書院)의 경우에는 장유와 귀천을 막론하고 지학자(志學者)는 모두 입학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소수서원과 서악서원 같은 곳에서는 고을 수령의 자제는 서원에 체류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관귄개입을 금하였다.
원생의 정원은 처음에는 별다른 규제가 없었으나, 서원 남설이 문제화된 1710년(숙종 36)에 원생수를 확정하였다. 원생은 사액서원에 20인, 문묘종사유현서원(文廟宗徒儒賢書院)에 30인, 미사액서원에 15인으로 정액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규칙도 신분제가 문란하고 서원이 남설 되자 동시에 와해되었다. 1683에는 이미 서원에서도 향교를 모방하여 서재생(西齋生)을 모집하고 예납(禮納)이라 하여 미포(米布)를 징수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서원의 증가와 더불어 모집원생은 늘고, 드디어는 서원이 양정(良丁)의 도피처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원생 중에는 상민들도 다수 액외원생(額外院生)으로 처신하였다.
5) 서원의 기능
<교육시설로서의 서원>
서원의 설립 목적은 선현봉사와 학문연마에 있다. 서원에서 선현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도 선현의 큰 뜻을 배우고 따르고자 힘에 있었다고 할 때, 결국 서원 설립의 기본 의도는 배웅의 장을 마련함에 있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은 “지금의 서원은 예전에 없었다. 각 고을의 향교가 교육이 잘못되어 괴거에만 집착하고, 명예와 이익만을 다투게 되자 뜻 있는 선비들이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정사(精舍)를 세워 배움을 익히고, 후진을 교육한데서 서원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이는 서원의 본래 설립 동기가 교학적(敎學的) 의미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서원이 교육의 장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16세기의 사화(士禍) 이후이다. 향촌에서 나름대로 공부하던 선비들이 중앙 정계에 진술하여 정치참여를 시도했으나,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과 충돌했고, 되풀이되는 사화 속에서 심한 타격을 입었다. 많은 선비들이 잡혀 죽거나 변방으로 귀양갔다. 이에 선비들은 정치를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뜻이 맞는 동료들과는 빈번히 교류하며 후진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서경덕(徐敬德)․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조식(曺植)․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성혼(成渾)․이이(李珥) 등은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들은 향촌의 유생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 배움을 청하게 되었다. 이에 명망이 높은 학자가 머문 곳은 자연스럽게 교육의 장으로 주목되었다. 서원은 점차 선비들 스스로 학문을 익히기 위한 곳에서 향촌의 유생들을 가르치는 체계적인 교육시설로 자리잡혔다. 아울러 운영방법도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서원의 교육내용온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학에서의 교육이 과거와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것과 비교할 때, 서원 교육은 사학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이 존중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이황이 「이산원규(伊山院規)」에서 제시한 교재의 범위와 학습의 순서가 정형이 되었다. 사서오경(四書五經)으로 본원을 삼고, 『소학(小學)』 『가례(家禮)』를 문호(門戶)로 삼는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청계서원(淸奚書院)외 원규에는 독서의 순서를, 『소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춘추』의 차례로 규정하고 있는바, 이는 서원의 일반적인 교육과정이라고 하겠다. 위의 사서오경 외에도, 여러 가지 경사자집(經史子集) 속에서 서원의 성격에 따라 선별하여 교육하였다. 그리고 도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과거에 응시하는 데 필요한 사장학(詞章學)도 교육과정 속에 포함시키는 서원도 있었다.
원생에 대한 교육은 원규에 의한 규제와 원생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과학습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원규에서는 수학규칙(受學規則)․거재규칙(居齋規則)․교수실천요강․독서법 등 유자로서 지켜야 할 준칙이 실려있다. 예컨대, 독서는 다독(多讀)과 기송(記誦)만을 일삼지 말고, 정독과 사색에 힘쓸 것과 지(智)와 행(行)이 반드시 일치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원생 각자에게 선악양적(善惡兩籍)과 같은 일종의 생활기록부를 만들어, 경우에 따라서 출재(黜齋)를 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원생 스스로 입지(立志)․검신(檢身)․존심(存心)을 위한 존양궁리(存養窮理)를 증요시하였다.
서원의 전통적인 교수방법으로는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講)이 있다. 강은 대개 순강(旬講)․망강(望講)․월강(月講)등으로 나뉜다. 또한 방법에 따라 암송낭독(暗誦朗讀)인 배강(背講)과 임문낭독(臨文朗讀)인 면강(面講)으로 분류된다. 낭독 뒤에 행하는 질의 응답은 단순한 암송위주의 학습법을 극복하는 단계이다. 강을 받는 데는 강의(講義)라고 하는 일정한 절차를 두어, 학습에 대한 진지성과 예의를 갖추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도기제도(到記制度)틀 도입하여 원생의 출석여부를 확인하고, 학령의 준칙에 따라 고과평정(考課評定)과 독서지침을 제시하였다. 강의평가는 대통(大通)․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불(不)의 5단계, 또는 통․약(略)․조(粗)․불의 4단계 평가 척도로 하였다. 이 때 대통(大通)은 구두(句讀)에 밝고 설명에 막힘이 없어서 책의 취지를 두루 알 수 있는 가장 높은 학습수준을 갖춘 자에게 부여하였다. 가장 낮은 단계인 불(不)은 낙제를 의미하였다.
서원 시설 중에서 교육활동을 보조하는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장서제도(藏書制度)이다. 책의 보급과 열람이 어려웠던 시대에 있어서 장서의 기능은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서원에서 서책을 간행하려고 할 때는 당회(堂會)를 거쳐 의정(議定)하고, 곧 간역소(刊役所)를 열었다. 간역소에 딸린 전답에서 여러 해 적립한 간비(刊費)와 향촌내 각 문중의 출연으로 경비를 충당하였다. 그밖에 사액서원에 대해서는 국왕이 서적을 하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국기에서 서적을 간행, 반포할 경우라든가 국가의 장서에 여유가 있을 경우에는 별도로 서적의 하사가 있었다. 이와 함께 관찰사․지방관의 조처에 의하여 서적이 지급되기도 하였다.
<제향(祭享) 시설로서의 기능>
서원의 건립 초기부터 문중이나 향촌 사림의 결속을 위하여 서원에서의 선현봉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것은 선현의 덕망과 학문을 계승한다는 교육적 목표 하에서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결코 선현봉사가 교육의 기능과 분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서원의 교육 기능보다 선현봉사의 기능이 더 강조되었다. 특히 17세기 이후의 서원은 제향 위주외 성향이 현저해졌다. 이에 따라 사우와 그 기능이 동일시되었다. 서원이 공적으로는 교육의 장소로서, 또는 선현봉사의 신성한 공간으로서 기능을 발휘하는 한편, 개별적으로는 서원에 배향된 특정 가문의 권위를 나타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후손이나 문중에서 다투어 사원(祠院)을 건립하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특정 문중에 의해서 사원이 건립되고, 조상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제향되면서, 학덕으로 명망이 있는 인물보다는 충절로 이름 높은 인물들이 배향의 대상이 되었다. 학문 연마나 교육보다는 선현봉사에 치중하여 서원을 운영하였다. 조선 후기에 있어서 사원(祠院)은 단순한 사당[사우]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이해되었다.
서원에서의 제향은 크게 향례(享禮)와 묘사(墓祀)로 나뉜다. 향례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中丁)일에 지낸다. 묘사는 음력 3월 10일과 10월 2일에 행한다. 지금도 때가 되면 전국에서 유림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서원에 모여 향사를 지낸다. ‥
서원의 배향인물은 주로 학덕이 뛰어나거나, 국가에 공적이 크던지, 아니면 충절과 의리로써 모범이 될 만한 경우에 한정되었다. 초기에는 붕당을 초월하여 거국적으로 명망 있는 인물을 모시는 서원이 주로 건립되었다. 소수서원․수양서원․임고서원 등 비교적 초창기의 서원에서 각기 안향․최충․정몽주․김굉필 등을 배향하고 있음이 그 증빙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붕당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자연 붕당의 대표적인 인물이 배향되었다. 서인 계열에서는 이이․성혼․김상헌․김장생․송시열․윤선거․윤증․권상하 등을 배향하였다. 반면, 남인계열에서는 이황․조식․정구․정경세․유성룡․김성일 등을 배향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순절한 인물도 서원에 배향된 경우가 많았다. 조헌․김천일․고경명․곽재우․송상헌․윤집․오달제․홍익한 등이 그들이었다. 세조의 집정에 반대하다 순절한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사육신도 배향 인물로 주목된다. 과천의 민절서원, 충주외 노은서원, 연산의 충고서원, 대구의 낙빈서원에서는 사육신을 배향하고 있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의 빈도수를 살펴보면 이황․송시열․이이․주자․조광조․이언적 등이 여러 서원에서 배향되고 있다. 특히 이황․송시열․이이․주자는 20여 서원에서 배향되고 있다. 향촌 교화와 후진교육을 위해서 명망 있는 유학자가 서원에 배향된다 하여도 실제 서원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은 문중, 또는 종손이었다. 후손이 서원에 배향된 선현을 향사한다는 것은 조선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문중에서는 서원 건립에 적극적이었고, 서원의 격을 올리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이러한 서원에는 문중의 선조가 주로 배향되었다. 파산서원은 창영성씨 문중에서, 고산서원은 행주기씨 문중에서, 구암서원은 달성성씨 문중에서 주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상들 가운데 주목되는 인물이 배향되고 있다. 두 세 가문이 힘을 합하여 서원을 건립하고, 덕망 있는 선조를 배향하는 곳도 있다.
한편, 배향인물이 그 지역과 전혀 관련이 없는 곳도 있다. 중국의 성현인 주자․정자 등을 모신 서원이 곳곳에 있다. 이들 서원은 향촌에서 나름대로 세력을 펴고 있던 토반들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향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세운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