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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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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무렵에 신숙주의 여덟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이곳 청주 상당산의 동쪽으로 이주하여 신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게 되자 산동신씨라는 말이 생겨나게되었다. 현재도 청원군의 낭성면, 가덕면, 등지의 몇 동네에 고령 신씨 집성촌의전통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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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산동신씨는 수백 년 동안 이곳에 살아오면서 조선시대 문과에 급제한 고령 신씨 65명 가운데 32명이 이곳에서 배출되고 진사도 80여 명이나 나왔을 정도로 대표적인 양반 지안으로 번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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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신씨에게도 수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728년 무신난(이인좌와 신천영의 난이라고 함)의 영향으로 30년 정거(停擧) 처분을 받아 입학이 불허되어 고령 신씨 문청3파(고천군파, 소안공파, 영성군파)가 한동안 문의향교의 청금록에서 현격하게 줄어들었고 이후 후손들의 문과 급제와 벼슬길에 오르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에는 산동신씨의 당색이 남인이었던 탓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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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의 직계는 높은 벼슬과는 인연이 멀었다. 그의 16대조부터 12대조까지는종3품에서 종6품에 이르는 벼슬에 있었으나 11대조부터 9대조까지는 족보상에조차 벼슬이 보이지 않고 있다. 단재의 5대조 할아버지 신두모와 고조 신상구는 관직에 나간 적이 없는 한미한 양반이었다. 증조 신명휴의 대에 이르러서야 첨지 중추부사라는 벼슬이 증직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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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휴의 동생 신국휴도 1843년에 문과 급제를 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단재의 할아버지 신성우도 1867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장령의 벼슬을 거쳤다. 신성우의 형 신약우는 사마시에 합격하여 양반 가문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단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청원군 가덕면 청용리(당시 충청도문의현 동면 화산리)로 이곳은 고천군 자손의 집성촌이었다. 할아버지 신성우는 1867년에 과거에 합격했는데, 그 이전에 과거 시험을 준비하려 서울에 올라가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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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의 아버지 신광식은 외갓집 동네에서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단재가 태어난 해에도 신성우는 여전히 관직에 있었으나 단재는 콩죽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 집도 간신히 묘막을 얻어 살아야 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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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식은 단재가 세 살 무렵에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당시 충청도 청주군 산내이상면)로 이사 왔으며, 조부 신성우도 관직을 떠나자 바로 아들 신광식이 살고 있는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낙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단재의 할아버지 신성우(1829∼?)는 고종 4년(1867) 문과에 합격하고 그해에 승정원의 가주서로 임명되었고 1871년에는 정4품관인 사헌부의 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사간원의 정6품관인 정언 벼슬을 거친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관찬 사료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고 있다. 1883년 6월 22일에 장령에 제수되는 기사가 일성록에 보이고 1885년 1월에 다시 장령으로 임명되나 그해 9월 27일 체직된다. 그 후 교체된 직위가 나타나지 않고 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관찬 사서에 그의 활동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낙향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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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우는 청원군 가덕면 청용리에서 신명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경서를 배우고 오랫동안 과거 시험 준비를 하였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정신을 갖고 있었다 한다. 성년이 되어 조선중기 유학자로 유명한 권이진(1667∼1733)의 현손 권찬의 둘째 딸과 혼인을 한다.
산동신씨와 회덕현 산내면의 안동권씨(무수권씨라고 하였음)와는 혼인 관계가 매우 많았는데, 이에는 두 가문이 대과급제를 많이 한 양반집안이라는 점과 당색이 같은 남인이라는 점 등이 작용하였던 것 같다.
신광식은 부인 밀양박씨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 신재호를 낳았고, 서른두 살이되어서 외가인 권씨 집성촌 도리미에서 둘째 아들 신채호(申采浩)를 낳았다. 형인 재호(1872∼1899)는 순흥안씨와 결혼하여 살았다. 단재 나이 19세 때 항상 아버지처럼 동생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던 형 재호는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형님의 혈육으로 향란이라는 딸을 두었는데 단재가 서울에 살 때에도 함께 데리고 있었으며 중국 망명 시기 향란의 결혼문제와 관련하여 국내로 들어왔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여 혈연의 정을 끊기도 하였다.
단재는 16세가 되던 해에 지안에서 정해준 풍양조씨와 결혼을 하였으며 서울로 올라와 삼청동에 살면서 첫아들 관일을 낳았으나 우유에 체해 아들을 잃게 되었다.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나서 얻은 아들이기에 그 슬픔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그 후 부인과 이혼을 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해외 망명을 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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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망명 중이던 1920년 단재는 박자혜와 두 번째 결혼을 하여 그 사이에 수범과 두범 두 아들을 낳았다. 박자혜는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 (현 서울 도봉구 수유리 화계유치원 자리)에서 태어나 1914년 숙명여학교 기예과(2회)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조선총독부 부속병원(현 적십자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소위 ‘간우회사건’을 주동한 인물이었다.
당시 박자혜는 베이징 옌징대학 의예과에 재학중이었는데 단재와의 결혼은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성사되었다. 박자혜는 연경대학에서 여대생 축구팀을 구성하여 주장으로 활약할 만큼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1936년 단재가 뤼순감옥에서 서거한 이후 둘째 아들 두범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하였고, 1944년 박자혜도 병사한다. 장남 수범은 북한에서 월남한 후단재의 업적을 정리하는 작업에 온힘을 기울이다 1991년 5월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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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새둥지 같은 깊은 산 속에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외딴 곳에 떨어진 마을의 전체 형편은 모두 비슷하였다. 가난한 살림 속에 성장한 터라 단재는 몸이 매우 허약하였으며, 병약하여 마음대로 활동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단재 이름은 원래 채호(采浩)라고 하였으나 성균관 입학 무렵부터 채호(寀浩)라고 고쳐서 캘 채(采) 자 대신에 녹봉 채(寀)로 바꾸어 써오다가 1910년경부터는 옛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선생의 아호는 처음에 정몽주의 ‘일편단심가’를 흠모하여 ‘일편단생(一片丹生)이라고 하였다가 ‘단생’ 또는 ‘단재’라고 썼다. 그밖에 무애생(無涯生), 금현산인(錦頰山人), 검심(劍心) 등 여러 가지 아호와 필명이 있다.
단재는 3세 무렵에 원래 고향인 산동신씨들이 많이 모여 사는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 귀래리 고드미)로 돌아 왔다. 이곳에와서도 지안 형편은 여전히 어려웠으나 고향 마을이기에 푸근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형편이 가난하기는 한가지였으나 선비 지안으로 자녀교육에 등한히 하지는 않았다. 형 재호 뿐만 아니라 어린 단재에게도 한문 공부를 시켰다.
서너 살 무렵에 사언고시로 이루어진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이어 계몽편,명심보감, 고문진보 등 여러 한문책을 하나하나 습득해 나갔다. 공부 방법은 전체 문장을 외워 완벽하게 암송하고 쓸 수 있게 하는 방법이었으며 처음에는 아버지 신광식이 직접 가르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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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단재는 6살부터 할아버지 신성우가 낙향하여 새로 문을 연 서당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단재는 어려서부터 한시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이 무렵 할아버지 신성우가 단재에게 연 날리기를 두고 시를 짓되 연이란 글자를 사용하지 않고 지으라고 하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높고 낮게 날림은 바람의 세고 약함에 있고 (高低風强弱)멀고 가까이 날림은 실의 길고 짧음에 있네 (遠近絲長短)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시인으로서의 소질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또
할아버지가 써레와 쟁기를 지고 논밭으로 일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었다.
이른 아침에 써레와 쟁기 지고 들로 나가네 (朝出負而氏)논을 갈아 나가니 흙덩이가 많이도 일어나네 (論去地多起)‘而’자는 써레와 같이 생겼고, ‘氏’자는 쟁기와 같이 생겼으므로 ‘負而氏’라고 하였고 ‘論’자는 ‘畓’의 음역이고 ‘去’자는 ‘耕’의 음역으로 논을 간다는 표현을 이같이 한 것이다. 그가 10세 때에는 조선시대 가장 발달된 한문 시가체로서 가장 박학을 요하는 행시(行詩)를 잘 지었다고 하니 시인으로서의 자질이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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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단재의 시학(詩學)을 말하면서 당시(唐詩) 수천 수를 늘 외고 있어 한시에 대해서 누가 지은 시든지 듣기만 하면 문득 기억하여 언제든지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시가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7세에 통감을 배웠으며 13세 때에는 사서삼경과 같은 경서를 섭렵하여 통달하였다. 불과 13, 4세에 조선시대 과거 시험을 볼 때 쓰던 문장인 공령문과 문장과 시부를 중요시하던 사장학이 매우 뛰어나 당시의 이름난 유학자도 단재의 학문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그 차이는 일보백보가 아니라 초연한 원거리였다고 평가 받고 있었다.
16세가 되던 해에 단재는 주위의 권유에 의하여 풍양조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혼인을 하였다. 17세에는 집안 어른인 진사 신승구의 집에서 시 문답을 하였으며 인근 마을에 사는 용파 신풍구의 회갑을 맞이하여 형 재호와 함께 수연시를 지어 축하해 주기도 하였다. 18세에는 갑오경장 후 학부대신 법무대신 등을 두루 거친 신기선의 목천에 있는 사저를 드나들면서 신구학문의 서적을 폭 넓게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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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가을에 성균관 경학과에 입학하였다.
성균관 경학과는 학생을 유생이라 불렀으며 유학경전에 밝은 기본 소양을 가지면서도 신학문, 시무, 경제에 능통한 인물을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수업연한은 3년이며 입학은 한성 거주자의 보증이 있어야 가능하였다. 교과목은 산술이나 만국지리 같은 신식 과목도 교습하였으나 전통적인 성리학 중심의 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시험은 입학, 임시·정기·졸업 시험 등의 여러 시험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성균관에 입교한 단재는 당시 성균관 관장 이종원의 총애를 받아 그에게서 “나를 아는 자는 오직 군 한 사람뿐이다(知我者 惟君一人)”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재능이 출중하였다. 성균관 재학시 김연성, 유인식, 조용은 등 다수의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유학자로 이름 높던 수당 이남규는 성균관 교수로 만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문하에 출입한 제자로 단재를 비롯하여 이장직, 강기선, 변영만 등이 있었고 특히 변영만은 단재가 언론계에 있을 때 거의 매일 만나 교유하던 친구로꼽히고 있다.
당시 새로운 성균관 박사는 시험을 통하여 선발되어 서임한 후 하루 만에 의원면본관(依願免本官)이라고 하여 면직을 시켰다. 이를 관보에 게재해 주는 일종의 명예직 구실이었다. 단재는 1905년 4월에 성균관 박사 시험에 통과하여 박사로 서임된 점이나, 그 해 겨울에 발행된 공자의 행적과 제사 절차 등을 정리한 궐리지(闕里誌)라는 주자학 색채가 짙은 책을 발간하는데 참여한 것으로 보아이때까지도 주자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국내에서의 활동
단재는 독립협회가 서울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가 절정을 이루던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당시 단재는 내무부 문서부 소속으로 일하였는데,이 부서에는 이상재·신흥우·김규식 등이 함께 있었다. 독립협회의 운동이 힘차게 진행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심해져 결국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단재도 검거되어 투옥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다행히 곧 석방은 되었지만 처음 경험한 독립협회의 운동은 그를 개화자강 사상에 눈뜨게 만들었다. 신구 서적을 취급하는 종로의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그의 특유의 속독법인 한눈에 10줄의 문장을 읽는다는 일목십행(一目十行)의 방법으로 책장을 넘기듯이 읽어서 서점에 쌓인 많은 책을 섭렵할 수 있었다.
성균관 재학 때는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매일신문>등이 일간으로 발행되던 시기로 국내에서 일어나는 뉴스뿐만 아니라 해외의 소식 들도 매일 접할 수 있어 세계 정세의 변화와 국내 개혁의 필요성을 주지시키고 있었다.
특히 일본이나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신간 서적들이 서울의 서점에서도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 가운데 단연 양계초의 저작물이 매우 인기가 높았으며 당시 국내에서는 개화 교과서와 같은 구실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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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는 성균관을 마친 후 서울과 고향을 왕래하면서 애국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1년 단재는 고향 근처 인차리에 신규식·신백우와 함께 문동학교를 세워 젊은 청년들을 교육하는 데 힘썼다. 1904년 경에는 신백우·신규식 등과 함께향리에 가까운 묵정리에 산동학당을 설립하고 신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에서는 1901년 2월에 성균관 생도 30명과 함께 최근의 법규가 예에 어긋나는 것이 많은 데 나라의 제도를 황제국의 법규로 바꿔 황제의 존엄을 보여 줄것을 주장하는 ‘헌의서’를 중추원 의장에게 제출하였다. 1904년에는 이하영 등이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균관으로 다시 올라와 조소앙 등과 항일성토문을 작성하여 외부대신 이하영 등의 매국 음모를 규탄하였다.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된 이후 <황성신문>의 사장이던 장지연의 권유로<황성신문> 논설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단재가 <황성신문>에 관여한 시기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황성신문>을 퇴사한 시점이 1907년 9월 발행인이 바뀌면서 이루어졌다.
<황성신문>에서의 단재 필치는 예리하고 강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한데모았다. 특히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언론계에서는 가장 먼저 신문,논설로 이를 소개하고 국민들이 널리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대한제국이 일본에서 들여온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자는 운동인데 “담배를 끊어 국채를갚자(斷烟報國債)”라는 제목의 논설을 황성신문(1907.2.25.)에 게재함으로 이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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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부터 약 1년 6개월 정도 <황성신문>의 주필로 재직하면서 거의 단독으로 논설을 도맡아 집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양반 관료 등 상류층을 주요 독자로 삼고 있던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문체를 채택하였으며 순한문에 토만 단 형식의 현토문체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단재는 전통적인 성리학의 유학자에서 벗어나 서양의 새로운 문명을 적극 수용하여야 한다는 입장으로 변화하였다.
비밀결사체인 신민회의 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기호흥학회, 경제연구회 등 여러 단체에도 관여하여 이들 기관지에 논설을 기고하고 토론이나 회의에 참여하였다. 항일언론에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는 영국 인 베델(E. T. Bethell)이 발행한 신문이었으나 실무적인 업무는 창간 때부터 양기탁이 맡고 있었다.
▲ 뛰어난 논설로 식자층에게 많은 인기를 끈<황성신문>(皇城新聞)
그는 국채보상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일제 통감부는 근거도 없는 국채보상을 위해 모금한 돈을 횡령하였다고 체포하고 널리 알려 국채보상운동 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영국인 베델(E. T. Bethell)에 대한 탄압으로 영사재판에 제소하는 등 온갖 비열한 언론 탄압을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재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초빙한 사람은 양기탁이었다. 단재는 1907년 11월 6일부터 출근하여 박은식을 대신하여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5월까지 약 2년 6개월 동안 주필을 맡으면 서 격정적이지만 논리 정연한 논설들을 발표하고 사회등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만들어 친일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대한매일신보>에서도 단재의 글들은 사회의 중요한 이야깃거리였다.
그 옛날 나라를 구했던 영웅들을 다시 살려내 현재의 나라를 구하려 하였던 단재는▲ <대한매일신보>에 기고한 단재의 논설 ▲ <대한매일신보> 한글「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 모두는 서두에서부터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운명을 건져보려는 단재의 소망이 한껏들어간 명문들이었다.
역사가로서, 문학가로서 다방면에 걸친 단재의 재능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단재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 「천희당시화」, 「소설가의 추세」 등을 발표하여 여러 분야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단재의 문장에는 힘이 넘치고 리듬이 있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논설에는 산문체의 문장에 시가를 삽입한 경우도 적지 않아 이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고 독자들의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단재는 1910년 5월27일자 신문에 「동국거걸 최도통」이라는 소설 연재를 서둘러 마치고 같은 달 29일 신문에 「중상주의를 창도함」이라는 논설을 마지막으로 하여 국내에서의 활동을 접고 육로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을 한다.
▲ 『을지문덕전』 표지 ▲ 『을지문덕전』 칼라사진 ▲ 『수군제일위인 이충무공전』
국외에서의 활동
1919년 1월(음력 1918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대한의군부와 중광단(重光團)이 중심이 되어 국외의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보통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이 독립선언에 단재도 주요 인물로 참여하였다. 이 선언서는 무력투쟁이 유일한 독립운동임을 선언하여 2·8독립선언이나 3·1독립선언과는 내용적으로 달랐다. 이 무렵 한진산과함께 <진광시보>와 <앞재비>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1919년부터는 국내에서 발생한 3·1운동의 여파로 중국에 망명해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여 통합된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단재는 임시의정원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면서 한성정부의 법통을 주장하였다.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으로 이승만이 거론되자 단재는 그가“없는 나라마저 팔아먹어,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 나쁘다”며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단재의 뜻과는 달리 의정원회의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단재는 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내의 준비론과 외교론에 대한 성토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단재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黨)을 재건하여 그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고, 대한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 부단주로 활발한 활동을 펴는 한편, 프랑스 조계 의영학교(義英學校) 교장이 되어청년교육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와 맞섰던 신대한 사건을 계기로 상하이 임정과 결별한 단재는 1920년에 들어서면서 베이징으로 돌아와 항일운동에 매진한다. 이곳에서 박용만,신숙 등 상하이임시정부 반대세력과 합작하여 군사통일운동을 일으켜 남북만 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군사단체의 통합과 혈전의 독립전쟁을 강조하는 독립운동 방략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보합단(普合團) 조직에 참여하여 내임장(內任長)으로 추대되어 활동하는가 하면 독립운동의 행동대였던 ‘다물단’(多勿團)의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다물단은 우당 이회영의 조카인 이규준이 몇몇 동지들과 만든 무장독립운동단체로, 다물은 조국의 광복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단재는 이 다물단의 조직과 선언문을 작성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1922년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고문으로 가입한 단재는 의열단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다.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폭력투쟁으로 일하는 의열단은 단재의 운동정신에도 부합하는 단체여서 단재는 흔쾌히 6천 4백여 자에 이르는 이 선언서를 작성하게 된다.
1924년 4월에 베이징에서 처음 결성된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에 직접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무정부주의 운동에 관심을 나타냈다. 단재가 관여하였던 통일전선체 신간회 운동이 무산되자 단재는 더욱 무정부주의 운동으로 경도된다. 1927년 남경에서 아시아 9개국 대표가 모여 수립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여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대회 선언문까지 작성하였다,
이 대회의 결의에 의하여 실천운동에도 가담, 무정부주의 운동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하여 공작금 마련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결국 택한 방법은 외국위 조지폐를 만들어 이를 폭탄제조소 설치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단재는 중국인 유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이 위폐를 교환하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대만 기륭 우체국 에서 체포된다. 이른바 ‘외국위체변조사건’으로 2년 동안의 재판을 통하여 단재 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죄수번호 411번을 달고 뤼순감옥에 수감 생활을 하였다.
감옥에서 독방 생활을 하여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독서를 하였다. 노역을 나가면 잠시 쉬는 시간에도 책을 보거나 메모를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면회 오는친지나 동지들을 통하여 감옥에서 단재가 쓴 원고가 세상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재중국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은 <남화통신>을 통하여 민족전선의 필요성과결성 방법 등을 집중적으로 선전하였는데 1936년 11월에 간행된 것에는 단재가 「민족전선을 위하여」와 「혁명동포에게」라는 유작시가 실린 것도 이러한 경로를통한 것이었다.
형기를 3년 정도 앞두고 병이 악화된 단재는 결국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순국한다. 순국 이전에 병보석으로 감옥문을 나설 기회가 있었지만, 보증인의한 사람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단재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가 순국하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여러 국내신문과 잡지들이 언론인, 역사학자, 독립운동가로서 치열한 삶을 살다 간 단재의 지조 높고 고결한 일생을 추모하여 특집으로 크게 보도하여 그를 기렸다.
일제로부터 우리 민족이 압박과 설움을 받던 시기 내내 수많은 애국지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살다 갔다. 그러나 단재 선생처럼 이론과 실천면에서 투철했던 지사는 드물었으며 특히,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평생 지조와 의리를 지키며 몸소 실천하다 끝내 감옥에서 순국한 선열은 더욱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