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일대기 요약=== -생애 : 1912년 2월 19일~ 1993년 11월 4일 1912년 음력 2월 19일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난 성철은 25세 되던 1936년 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 -결혼하고 20대 중반에 출가한 성철스님에게는 어느 고승과 달리 승속(僧俗)의 별난 인연이 있다. 두고온 아내와 두딸 가운데 열 넷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큰딸외에 아내와(일휴스님) 작은 딸 “불필” 모두 출가해 스님이 된 것은 특이하다. -속세의 아내 일휴스님은 비록 늦게였지만 57세에 스님이 되어 정진하다가 돌아가다 -작은딸 불필스님 그 따님이 바로 속세의 나이로 올해 82세인 '불필不必스님'.... 불교계에서는 유명하지만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진주사범학교 졸업후 10대 후반에 출가한 불필스님은 1961년 3월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정식 비구니계를 받은 뒤 경북 문경 대승사 묘적암, 경남 합천 해인사 국일암,지리산 도솔암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행했으며 현재 해인사 금강굴에 머물고 있다. -성철스님은 임종 하기 전 불필스님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때가 되어서야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성철 스님의 삶은 화제의 연속이었으나 속세와 모든 관계를 끊고 오로지 구도에만 몰입한 승려였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서 시골부자의 7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나 세속의 오욕 즉 식욕, 물욕, 수면욕, 명예욕, 색욕을 던져 버리고 16년간 날것만 먹는 생식을 하고 8년 동안 한 번도 드러눕지 않고 잠도 앉은 채 자는 장좌불와로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성철 큰 스님께서는 어느 누구라도 부처님께 삼천배의 절을 하여야만 친견하였다.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절해라, 삼천배 절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심중에 무엇인가 변화가 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남을 위해 절이 잘 안돼도, 나중에는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며, 그렇게 행동하게 된답니다. 3000배를 하는 시간은 대략 7시간 이상 걸린다. -겁외사 :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성철스님이 출생하여 24년간 사셨던 곳으로 부친은 대지주였는데 7남매 가운데 장남이었던 성철스님이 출가하자 심한 충격을 받고 인근지역으로 이주해버리고 이후허물어진 생가는 복원되기 이전까지 논밭으로 있었다고 한다. 생가였던 자리엔 한옥형태의 집들이 들어서 있으며, 생가는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 것이 아니라 기념관, 유품전시관 등의 용도로 건립되었고, 생가 앞쪽엔 '시간 밖에 있는 절', '시간을 초원한 절'이라는 의미의 겁외사가 자리하고 있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하라’는 마지막 한 말씀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성철스님이 남긴 유언(열반송)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유언은 다음과 같다. 일생 동안 미친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수미산을 덮은 죄업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송이 꽃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스님의 유언 ➡딸 불필 스님에게 남긴 유언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이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시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 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성철스님의 열.반.송. 근거 (조선일보 1993.11.15 15면, 동아일보 1993.11.5 31면. 경향신문 1993.11.5 9면, 중앙일보 1993.11.5 23면), 도서출판[삶과 꿈]류범상 生平基 俇 男女群 (생평기광 남녀군) 한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彌天罪業 過須彌 (미천죄업 과수미)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 하다 活陷阿鼻 恨萬端 (활함아비 한만단) 산채로 무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이니 一輪吐紅 掛碧山 (일윤토홍 괘벽산)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 있다.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성철스님 성철스님은 일찍이 불교가 최상의 진리라고 믿고 큰 깨달음을 얻어 해탈성불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부처가 됨) 하고자 1934년 23세 때에 부모, 형제, 처자 다 버리고 출가, 입산하여 1993년 81세로 타계하기까지 오직 참선과 학문으로 일관한 최고의 선승이요, 학승이다. 그는 한때 8년간을 드러눕지 않고 장좌불와의 초인적인 극기수행을 하기도 하고, 또 한때는 10년간을 사람의 근접을 막기 위해 암자 주위에 철망을 쳐놓고 오직 홀로 용맹정진을 하기도 했다. 이는 참으로 세계 불교사에서도 보기 힘든,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극기수행과 용맹정진이다. 그리하여 그는 큰 깨우침을 얻어 견성성불(자기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가 됨)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8백년간이나 이어져 오는 조계종의 선법의 법통인 "깨우침은 점진적으로 된다." 는『돈오점수론』을 비판하고 "깨우침은 단번에 된다."고『돈오돈수론』을 주장했다. 이는 그의 깨달음의 경지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철스님은 불교사상 보기 힘든 학승중의 학승이다. 그는 불교의 교의학을 거의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현대학문인 서양철학이나 심리학이나 종교학이나 문리학 등도 널리 섭렵하였으며, 또한 영어, 독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도 효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성철스님은 불교사에 보기 힘든 최고의 선승이요, 학승이다. 그러므로 성철스님은 한국불교계의 큰 보배요, 위대한 지도자이다. 그래서 그는 온 불자들의 존경과 선망을 한몸에 받았었다. 그러므로 지금도 불자들은 그를 "우리 곁에 왔던 부처" 라고 추앙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성철스님은 말년에 와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내심 말못하는 갈등으로 괴로워하며 방황하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회한으로 몸부림치며 천추의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 그가 말년에 무엇을 깨달았는지 , 왜 천추의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는지, 그의 말을 들어 보자. ☞ 퇴옹당 성철 큰 스님 "내 말에 속지 마라" (성철스님의 말) 1993년 11월 4일 처음 출가한 그방 퇴설당에서 열반에 들다 그러나 큰 스님은 삼십 년 남짓 한결같이 다니던 가야산 포행길을 언제부터인지 힘겨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야산 호랑이도 한 자락 가사 밑에 어느덧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스님, 한 말씀만 여쭈겠습니다." " 뭐를?" "일천 삼백만 불자가 있는데 그 불자들에게 한 말씀만." "한 말씀만?" "내말에 속지 마라." "자신의 말에 속지 마라." "내 말 . . . . ? " "내 말 말이여. 내 말한테 속지 말어. 나는 늘 거짓말만 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그 말이여." 1993년 9월에 당신의 저서인 '성철스님 법어집'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되는 것을 보고나서 두 달만인 그 해 11월 4일 아침에 성철 큰 스님은 열반하였습니다. "내말에 속지마라" 는 말을 던져주고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난 것입니다. 그날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큰 스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참선 잘하라 !" 그 한 말씀이 마지막 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제자 어깨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처음 출가한 그 방에서 마지막 열반에 드니, 행운유수(行雲遊水)의 사문의 길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랍 59년, 세수 82세로 큰 스님은 열반 게송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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