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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떠들어보다 발견한 어느사이트에있는거 퍼왔네요...
제가 어렸을적 시민아파트에 살면서 형님 이라해야하나 아저씨라해야하나...
울집 윗층에살면서....
옆에서 항상 보고느낄수있는 분이였는데......
증 언 자 : 김영철(남)
생년월일 : 1948. 7. 14 (당시나이 32세)
직 업 : YWCA 신협 (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4
개 요
투사회보를 제작하고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기획실장을 맡은 김영철씨는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연행되었다. 그러나 들불야학에서 함께 활동했던 윤상원, 박용준 등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죄책감을 견디다 못해 상무대 영창 안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이때의 부상과 구타, 고문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해 현재까지 국립 나주정신병원에 입원, 치료중이다.
이 조사는 그가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써둔 자서전과 증언, 그리고 부인 김순자 씨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고아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지낸 어린 시절
김영철씨는 1948년 김경묵씨와 박은혜씨 사이의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현순천도립병원의 전신인 안독산병원(일제시대 외국선교사들이 설립)에서 의사, 수간호원으로 일하신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두 분은 절대 정직, 절대 무사, 절대 순결을 강조하였고 박력있고 활달한 사람, 지덕체의 소유자가 되도록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6살 때 아버지가 작고하신 후부터는 어머니가 고아원에서 보모를 하게 됨에 따라 식구들 모두 고아원에서 살았다. 고아원에서 보낸 유년시절은 항시 곤궁하였지만 그는 가난을 증오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형제들과 동고동락하며 사랑의 신심을 키워나갔다.
어린 김영철이 도청 앞에서 겪은 4.19
1955년 목포에 있던 고아원에서 광주로 옮겨옴에 따라 서석국민학교로 전학을 왔다.
광주에서의 그의 성장은 근현대사의 격변과 함께 높은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1960년 그가 국민학교 6학년 때 3.15 부정선거로 전국이 술렁거렸다.
"4.19 의거가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났을 때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수업 도중 귀가시켰어요. 집에 오는데 전남공업고등학교와 광주여자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매우 술렁거리며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더군요. 나는 집에 가방을 두고 이준성이라는 친구와 함께 도청 앞으로 나갔는데 시민들과 학생들이 많이 운집해 있더군요. 그 중 한 대학생이 도청 현관 2층 베란다에 올라가 '부정선거 다시 하고 000 도지사는 책임지고 물러가라'며 포효하자 군중들이 박수와 환호로서 동감을 표시하더군요.
이튿날 군중들과 경찰관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졌으며 경찰관들은 소방차를 동원하여 군중들에게 뿜어대고 페퍼포그인가 최루탄을 쏘아댔어요. 군중들은 금남로 1가 도로에서 광주경찰서를 향하여 돌을 던지더군요. 전남공고생 5, 6명이 광주 YWCA 옆길로 해서 중앙국민학교를 거쳐 금남로 2가 쪽으로 가더니만 소방차를 빼앗아 경찰관들에게 역공습하자 그들은 우리 쪽으로 계속 최루탄을 뿜어댔죠.
나와 이준성은 군중들의 맨 꽁무니에 따라다녔는데 대학생들이 우리를 앞장 세우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경찰관들이 모자의 테를 턱밑에 걸더니만 우리를 향하여 카빈총을 겨냥했어요. 나와 친구는 즉시 광주 YWCA 빈터로 달려가 그 높은 블록 담을 넘는데 총알이 스쳐지나가더군요.
후에 알고 보니 전국 각지에서 '경찰관은 우리 부모, 형, 누나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 말아요'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같은 국민학생들이 데모를 했더군요."
결혼
광주 서중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명문고인 광주제일고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유도와 태권도, 팬싱 등을 수련했기 때문에 몸은 누구 못지 않게 건강했다. 졸업 후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국가지방직 5급 행정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승주군 별량면사무소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면사무소와 농협의 비리에 통탄, 공무원직을 그만두었다.
군복무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므로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제대 후 그는 신문배달, 청과물장사, 목장잡부, 우산팔이 등을 했다. 이때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사랑의 공동체 실현을 위해 소외받은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평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 결혼과 신협생활이었다.
부인 김순자 씨를 만난 것은 군복무중 첫 휴가 때이다. 그가 이모라고 부르며 따르던 분이 김순자 씨의 친고모였다. 우연히 그 이모댁을 방문하였다가 김순자 씨를 보게 된 것이다.
"그때 우리 집 아저씨를 보게 됐어. 군복을 입은 모습이 어찌나 늠름하게 보이는지 내게도 저런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부탁을 했지. '우리 집은 딸만 7공주인데 제가 맏딸이에요. 오빠도 없고 남동생도 없으니 오빠가 되어주시겠어요'라고 했더니 내가 깜찍했는지 승낙해 주더군. 처음에는 오빠, 동생하며 지내다가 결혼까지 하게 된거지."
김영철씨는 광주 영신영아원 원장이신 서경자씨의 권유로 제51차 신용협동조합 지도자 강습회에 등록하여 회의진행법, 토론법, 능력개발 훈련, 여가선용 놀이, 신협부기 등을 배웠다.
광천동 시민아파트에서 소외받은 이웃과 함께
1977년 1월 순천신협 지도자 강습회를 마치고 2월 광주 YMCA에서 조아라 전남협동개발단장, 서경자 부단장, 이형민 총무에게 별령 사회개발 강습회 결과를 보고하고 전남협동개발단 간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첫번째 사업으로 빈민지역인 광천동 시민아파트 개조사업에 착수한다.
"광천동 시민아파트는 6.25 직후의 피난민과 부랑민을 위해 시에서 지어주었다고 하는데, 이름만 아파트지 판자촌과 다를 것이 없었어요. 사방 군데군데가 쓰레기장이었고 아파트 복도는 암굴처럼 어두웠고 내부벽은 매우 더러웠으며 공동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니어서 냄새와 메탄가스로 눈이 따가웠어요. 놀이터가 없어 어린이들은 부서진 리어카 위에서 난폭하게 놀고 있더군요.
우선 나는 시민아파트의 사람들을 종교별, 학교별, 직업별로 나누고 175가구의 각 호마다 수입, 지출, 부채 등의 기초조사표를 만들어 종합개발사업 계획안을 만들었습니다. 내 나이 서른 살 때였지요. 1977년 봄에 주민들과 직접 부딪치기 위해 아파트 A동 216호로 이사했죠. 그때부터 5·18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나는 먼저 기존의 조직을 이용했어요. 유명무실한 '유진청년회'를 부활시켜 내가 총무를 맡고 청년부 산하에 청소년부를 두어 어린이 주말학교 운영과 아파트 대청소를 계획했습니다. 어린이들의 이름을 외워 아침마다 청소하자고 불렀으며 청소가 끝나면 인근 효광여중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했지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어린이 주말학교를 아파트 옥상이나 무등경기장 실내수영장 등에서 개최하여 능력개발 훈련과 각종 놀이를 가르쳐주며 재미있게 진행했어요.
또한 광천삼화신용협동조합을 청년회장으로부터 인수받아 신협의 일을 시작했지요. 그간의 신협이 주민과 조합원으로부터 불신을 받아왔기 때문에 어린이부터 성인조합원을 부활시킬 수밖에 없었지요. 어린이들에게 빈병을 모아오게 해 노란 출자금통장을 발행했더니 차차 성인조합원들의 저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새 조합원이 불어나더군요. 처음에는 A동 반장을 맡다가 나중에는 광천동 11통 합동반상회에서 새마을 지도자로 선출됐어요.
우리집 안방은 지역주민들의 공동방과 회의실, 주민교육의 장소가 되었으며 신협 사무실로 사용했어요. 아내도 짜증내지 않고 내조를 잘해주었습니다. 그때 YWCA의 개발단이 해체되어 YWCA 신용협동조합에 다니게 됐지요.
청년들과 함께 아파트 내부벽 페인트칠을 하고 염산과 하이타이로 공동화장실의 요석을 모두 벗겨내고 변기와 타일을 하얗게 만든 후 주민들과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였어요. 놀라울 정도로 아파트 환경이 개선되고 주민생활의 질서가 잡혀가자 나는 주민총회를 열어 아파트 제값받기 운동(2백만 원 이하 팔지 않기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내가 입주하기 전까지는 1호당 40만 원이었던 아파트값이 3백만 원에서 4백만 원으로 뛰어오르더군요.
주민들의 소득이 높아져 신협자산이 불어나자 현재의 광천삼화신협의 자리로 사무실을 옮겼어요. 정기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이사장에 당선되었어요. 이때 아파트 운동장에서 들불야학팀과 전남대 탈춤반이 주민축제를 벌였지요.
또한 광천신협 임직원과 함께 장기발전 10개년 계획을 세워 유덕동에 농장과 목장, 효광여중과 광주천 사이의 넓은 밭에 협동촌 복지회관, 광천시장을 지하로 한 백화점 등 지역사회 개발사업을 계획했으나 5·18 광주의거로 중단되어 버렸어요."
노동자와 함께 들불야학을
1978년 7월 들불야학이 생기면서 사업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종합개발계획서 안에 야간중학교 건립이 있었는데 뜻밖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서중, 일고 동창인 김상윤씨의 소개로 들불야학의 강학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선생님이 아니라 강의하고 배운다는 뜻으로 강학이라 불렀다.
"강학들은 윤상원, 임낙평, 박기순, 임희숙, 최영철, 최기혁, 나중에 참여한 박관현, 서대석, 신영일 등 주로 전남대 재학생이었습니다.
나는 들불야학 교장격으로 일하면서 토의진행법, 세계사, 레크레이션을 가르쳤고, 윤상원은 일반사회, 박기순은 수학, 박관현은 영어를 가르쳤어요. 중학교 과정을 교육했으며 민주시민 양성을 교육목표로 삼았습니다.
처음에는 광천천주교회 교리실을 야학교실로 사용했는데, 교실이 너무 작아 일일다방을 해 번 돈으로 아파트방을 얻어 야학교실로 사용했지요.
그리고 아파트 실태조사 방법을 기초로 1978년 12월부터 1979년 2월까지 들불야학 강학들과 함께 광천공업단지 실태조사를 했어요." 그때의 즐겁고 보람된 생활을 김영철씨의 부인 김순자 씨도 회상한다.
"천석꾼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식솔이 많으면 좋겠다고 하여 남편이 YWCA 신협에서 데려와 의동생으로 삼은 고아 박용준과 강학들을 먹여살렸어.
들불야학 강학들과 아파트 청년, 야학생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면서 '선구자'나 '저 푸른 들판의 솔잎되어' 등을 자주 불렀지. 상원(1980.5.27, 사망)이 삼촌은 구성진 판소리와 봉산탈춤을 잘해 인기가 대단했고, 노란 삼베 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닌 관현(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삼촌은 각설이타령을, 용준(5.27, 도청에서 사망)이 삼촌은 가곡을 정말 잘 불렀어. 노래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는 훌륭한 청년들이었지. 나는 청실홍실이라는 노래를 자주 불렀는데 특히 상원이 삼촌이 땅바닥을 구르며 좋아했어.
못살고 힘들었지만 너무 재미있고 보람찬 나날이었지. 허나 지금은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남편은 저리 힘들게 살아가고 있으니…….
언젠가 노동자로 일하며 들불야학 강학으로 활동한 박기순이가 과로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었어. 나와 남편은 그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광천동 천주교회 야학교실에서 장례식을 하고 전남대 사범대 앞에서 추도식을 한 후 망월동 공동묘지에 묻어주었지."
1980년 5월 들불야학팀과 투사회보를 발행하다
1980년 5월 김영철씨는 들불야학과 함께 투사회보를 발행하고 시민학생대책위원회의 기획실장으로 활동했다.
"5월 18일 나는 예배를 보고 돌아와 광천동 시민아파트 청년모임인 효우회란 계를 치른 후 라디오 방송에서 비상계엄 확대 선포와 김대중 등 민주인사를 구속했다는 뉴스를 듣고 오후 2시쯤 도청 앞으로 뛰어갔어요." 태평극장 가도에서 7백-8백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태극기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 '김대중 석방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하고 있더군요. 그것을 본 나는 도청을 지나 법원 쪽으로 향했어요. 농장다리 부근에서는 시위대가 전투경찰 버스를 에워싸고 30-40명의 전투경찰대원을 무장해제시키고 있더군요. 전경들은 방패와 몽둥이만 들었을 뿐 총을 들고 있지 않았어요. 시위대는 전경들을 노동청 앞으로 데리고 가 도로에 앉게 한 후 전경대와 협상을 시작했어요.
전경들과 연행자들을 교환하자고 하던중 갑자기 도청 쪽으로 5대의 트럭에 탄 1백여 명의 공수대원이 노동청 앞에서 트럭을 멈추고 모두 뛰어내렸어요. M16 소총을 메고 긴 곤봉을 든 공수부대는 시위군중을 남녀 가리지 않고 구타하기 시작했어요. 자전거를 타고 가던 청년까지도 후려쳤어요.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나는 위험을 느끼고 귀가했습니다.
5월 19일은 신협에 정상출근을 했는데 오전 10시쯤 공수대원이 신협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동료직원인 박용준 군의 소지품을 검사했어요. 박군이 대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공수대원이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가 양서조합 직원으로 있는 황일봉 군을 현관으로 끌어내어 긴 몽둥이로 내리치려고 했어요. 나와 황일봉군의 여동생 황수진 직원이 빨리 나와 동료직원이라며 데려왔습니다.
황일봉 군을 때리려 할 때 옆 건물 무등고시학원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청년들이 "야! 그러지 마라"고 야유를 보내자 공수대원 몇 명이 무등고시학원 맨 위층에 올라가 학생들에게 긴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습니다.
밖에 있던 40여 명의 공수부대원이 무등고시학원의 셔터문을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만 올려놓고 청년들을 기어나오게 하더니만 몽둥이로 머리, 어깨, 허리 등 온몸을 사정없이 두들겨팼어요.
계속해서 군화발로 짓밟고 몽둥이로 무차별 난타하여 청년들은 거의 반죽음 상태였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자비했어요. 신협직원들은 창문으로 내다보며 공수부대의 만행에 치를 떨었어요. 옆에 있던 박용준 군이 "이 개만도 못한 놈들, 총만 있다면 모두 쏘아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쳤어요. 나도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청년들을 군용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가더군요.
또 금남로 1가에서 공수대원들이 다방이나 가게를 뒤져 대학생들처럼 보이는 청년들을 끌어내어 난타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날 저녁 계엄군의 만행을 본 나와 들불야학팀이 논의를 하여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투쟁소식을 알리기 위해 대자보와 투사회보를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21일부터는 광천동 천주교회 야학교실에서 24일부터는 YWCA 신협 사무실에서 제작했어요. 등사기는 야학에 있던 것과 신협의 것을 사용했지요. 윤상원 강학이 투사회보 초안을 작성하여 박용준 군이 대필하고 들불야학생들이 등사기로 밀어 투사회보지를 시민들에게 배포했어요. 대자보도 작성하여 시내 곳곳에 붙였습니 다.
김영철 씨는 5월 20일 금남로 3, 4가에서 시위 도중 계엄군이 던진 돌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 그때부터 왼쪽 몸에 이상이 생겨 지금까지 좌수족불구로 고생하고 있다.
그는 투사회보 작성뿐만 아니라 YWCA에서 활동한 여성들과 함께 여러 가지 일을 했다. 5월 22일에는 YWCA 간사인 정유아, 이행자 씨와 함께 대인시장 포목점에서 검정 천을 많이 사와 녹두서점에서 정현애, 안희옥 씨와 함께 3천여 개의 검정 리본을 만들어 시민, 학생들의 가슴에 달게 하고 남은 천으로는 도청 태극기 위에 조기를 달았다.
당시 도청으로는 시민들의 성금과 쌀, 빵, 담배 등 많은 물품이 들어왔다. 월산동의 한 아파트 부인회에서는 손수 만든 1백여 개의 마스크를 보내오기도 했다. 김영철씨는 시민들의 성금을 직접 접수하여 정해직 민원실장에게 장례준비금으로 줬다.
25일 사태가 긴박해지자 기존의 학생수습위원회를 재편성하여 김종배가 위원장을 맡은 시민학생수습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외무부장에 정상용, 내무부장에 허규정, 상황실장은 박남선 씨가, 조사부장은 김준봉 씨가 맡았다. 윤상원 씨가 대변인을, 김영철 씨는 조직부 업무를 통괄하여 차량과 유류 통제, 도청 출입통제, 무기 및 보급품의 관리 등의 임무를 주로 담당했다.
5월 27일 새벽
27일 새벽 계엄군이 침입해 들어왔다. 도청내의 시민군들은 계엄군이 진주한다면 모두 자폭하자고 결의했었다.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가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모두 나오셔서 계엄군을 저지합시다"라는 가두방송을 했다.
새벽 3시 도청까지 진입한 계엄군은 요란한 총소리를 내며 차츰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도청 2층 회의실에서 윤상원, 이양현 군과 함께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계엄군들이 도청 현관과 창문 앞에서 사과탄을 던지고 M16을 쏘아대며 '나와, 나와'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계엄군의 잔학상에 몸서리가 쳐졌어요. 위기의식을 느낀 윤상원 군이 내게 '형님 나갑시다'라고 말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어요. 갑자기 뒤창문 쪽에서 드르륵 하고 총소리가 들리더니 상원 군이 오른쪽 배를 움켜잡으며 흐느적거렸습니다. 오른쪽 등에서 배로 총알이 관통한 것이었어요. 나는 상원 군의 왼쪽 팔을 잡고 이양현 군은 오른쪽 팔을 부축하였는데 뒤에서 계속 총을 갈기며 사과탄을 던졌어요. 넋이 빠진 우리들은 상원 군이 '형님 틀린 것 같소'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그를 바닥에 눕혔어요.
갑자기 사과탄이 터져 우리 앞의 커튼에 불이 붙었어요. 후에 수사과정에서 파악한 내용이지만 이 불붙은 커튼이 사망한 상원군의 몸을 덮쳐 화상을 입었는데 상원군의 누나에게 수사관들이 상원이가 기름통을 갖다놓고 분신자살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더군요.
나는 그들에게 붙잡히면 죽음 이상의 고통을 받을 것을 직감하고 차라리 자결해 버리자고 마음먹고 옆으로 가 미닫이문에 엎드려 목 부분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어요. 내 뒤에는 이양현 군이 카빈총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때 총소리가 들리더니 화약 냄새가 확 풍겼어요. 동시에 뜨거운 것이 머리 위를 스쳤습니다. 총소리에 놀라 오른쪽 검지에 걸었던 방아쇠가 당겨져 연발로 장진되어 있는 내 총에서 두 발이 나갔어요. 차라리 자살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안 것이지만 계엄군이 쏜 7발의 총알이 머리 위를 스친 후 콘크리트 바닥에 맞아 그 총알 파편이 이양현 군의 오른쪽 등과 어깨에 상처를 냈더군요.
이양현 군이 '형님 항복합시다'라고 말했으나 차라리 죽고 싶어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을 결심하고 계엄군이 만일 내게 총을 쏘면 나도 응사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갑자기 이양현 군이 '항복, 항복'하고 외치자 계엄군이 '총을 내밀고 나와'라고 소리쳤어요.
이양현 군이 총을 내밀고 나와 계엄군에게 총을 건네주었어요. 나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어 내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어둔 탄약 한 클립을 내놓았습니다. 계엄군은 나를 보더니만 '너, 한 발도 안 맞았어?'라며 몹시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그는 저쪽 창문에서 문 뒤에 엎드려 있는 나를 보고 겨우 80센티 정도 앞에서 일곱 발이나 쏜 것이었어요. 슬쩍 올려다보니 이름은 보이지 않고 중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습니다. 윤상원 군을 쏘아죽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너, 두 발 쏘았지?' 라고 했는데, 아마 내가 자살하려고 쏜 카빈총 소리를 들은 것 같았어요 .
그 계엄군 중사는 계속 안쪽으로 총을 쏘아대며 '나와, 나와'라고 외쳤어요. 나는 상황을 직감하고 '모두 나오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윤석루 군과 이재호 군, 그 외 나이 어린 청년들이 총을 내밀고 나왔어요.
계엄군은 우리들을 2층 베란다 복도에 꿇어앉혔어요. 이양현 군이 '형님 20년만 삽시다'고 말했으나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계엄군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습니다. 계엄군 중사가 포승줄로 우리를 묶으려다가 나무를 타고 내려가게 했어요. 그때 한 계엄군이 나의 뒷목을 발로 사정없이 차 앞으로 나뒹굴어져 콘크리트 바닥에 입술을 찧어 피가 났어요. 계엄군들은 도청 입구 오른편에 우리를 엎드리게 한 후 계엄군 상사가 직업을 묻고 등에 '선동, 총기소지자'라고 매직으로 썼어요. 계엄군이 도청을 함락했다는 승리의 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도청 문에서 노란 머리의 외신기자가 TV 카메라를 들이대자 나는 끌려가면서 내 모습을 촬영하라고 얼굴을 들이댔습니다. 그러자 한 계엄군이 나의 뒤목을 M16 소총으로 후려쳤어요. 그러나 공포감 때문인지 조금도 아프지 않더군요. 우리는 군용 버스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어요."
죽음으로써 삶을 쟁취하리
김영철 씨가 끌려간 곳은 상무대였다. 군사정권은 광주시민을 쏘아죽인 당당한 기세로 김영철을 폭도, 빨갱이로 매도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소외받는 기층민중과 아픔을 함께 했고 민중의 지위를 높이는 데 헌신적으로 일했던 그에게 간첩이라는 누명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더구나 의동생 박용준과 많은 동지들의 사망 소식을 접한 그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감을 느끼며 자살을 결심한다.
"그때가 5월 28일 새벽이었어요. 왼손목의 동맥을 끊고자 마룻바닥 한 모서리를 손톱으로 쥐어뜯어 날카롭게 한 후 동맥을 끊으려 했으나 들어가지 않았어요. 다시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벽에 앞머리를 찍어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찍었어요. 말짱하더군요. 다시 한 번을 찍었습니다. 이상하게 아프지도 않았어요. 헌병 한 명이 영창문을 열고 들어오자 내쫓아버리고 또 한 번 힘있게 머리를 찍었습니다. 모두 세 번 머리를 찍었어요.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지까지 흥건히 적셨습니다.
곧바로 헌병들이 들어오더니 군화발로 지근지근 밟고 밖으로 끌어냈어요. 그들은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는 나를 긴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내리쳤어요. 나는 그 심한 고통을 혀를 물며 참았습니다.
한참 동안을 짓뭉개더니 두 손과 두 발을 포승줄로 묶고 지프차에 태워 국군통합병원으로 싣고 갔어요. 그들은 간호장교에게 포승줄을 풀어주지 말라며 가버렸으나 간호원이 포승을 풀어주어 어느 정도 고통이 풀렸어요.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서 웬일인가 싶었는데 나의 동맥에 링겔루를 꽂아 온몸이 뜨거웠던 것이에요.
두 군의관이 이마를 수술한 후 반창고를 붙여주었어요. 수술 후 국군통합병원의 입원실로 옮겨져 살펴보니 많은 부상자가 있었고 폭도대장이라고 한 덩치 큰 두 청년은 머리뼈가 많이 상했는지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어요.
나는 헌병들에게 긴 곡괭이 자루로 수없이 난타당한 등에 통증이 심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사병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을 겨우 가곤 했어요.
이마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로 다시 상무대 영창으로 이송되었어요. 수감자들은 상무대 법정 옆에 있던 천막 안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고 뙤약볕의 나무 옆에서 개미고문을 당했어요. 각본대로 수사를 진행시키기 위해 모진 고문을 가한 것이죠. 나 역시 상무대로 끌려온 후 발바닥을 곤봉으로 두들겨맞는 고문을 당했어요.
그들은 나를 내란수괴로 몰려다가 타당하지 않음을 알고 정동년 씨가 김대중 선생을 통하여 김상현 국회의원으로부터 내란획책비 5백만 원을 받아 내란을 일으켰다고 허위조작하여 정동년 씨를 내란수괴로 몰았어요. 정동년 씨는 내란수괴로 몰리자 상무대 영창내에서 숟가락을 갈아 배를 가로로 긁어 자살을 기도했어요. 놈들은 이를 계기로 그분을 더욱 내란수괴로 몰았어요. 군검사가 사병을 동원하여 정동년 씨를 바닥에 앉힌 후 몽둥이를 발 사이에 넣어 고문을 하면서 허위조작 안에 지장을 찍게 했어요."
남편이 간첩으로 몰리다니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끝난 5월 27일 나는 의협심이 강한 남편이 계엄군과 싸우다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한편으로는 소식을 기다렸는데 누구도 남편의 소식을 전해주지 않더군.
28일 시체라도 찾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아침 일찍 도청으로 가봤어. 도청에는 군인들과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어. 도청 안쪽에는 50여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시체가 많이 있는 곳은 행인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장갑차 두 대로 막아놨더군.
군인에게 시체를 찾으러 왔다니까 상무관으로 옮기니 기다리라 그러대. 잠시 후 상무관 벽에 사망자 명단이 붙어 가슴을 조이며 확인을 하는데 김영철이라는 이름이 있었어. 나는 간이 콩알만해졌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어.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주소를 확인해 보니 학동이라고 적혀 있었어. 조금은 안심이 되더군. 다시 보니 용준이, 상원이 삼촌의 이름도 없었고 아는 사람의 이름은 없었어.
9시가 꽤 넘어서 미화부들이 고무장갑을 끼고 쓰레기차 세 대에 시체를 싣고 상무관으로 옮기더군. 아무리 죽은 사람이지만 쓰레기 취급을 했어. 마지막으로 YWCA에 있는 시체를 오후 3시까지 옮겼으니 얼마나 시체가 많았겠는가.
그런데 학동에 사는 재환이 삼촌에게서 용준이 삼촌이 YWCA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어. 고아로 자란 용준이가 죽으니 너무 불쌍했어. 누군가가 와서 남편이 상무대에 잡혀 있다고 하더군.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집으로 돌아왔어.
아파트로 들어서려는데 입구에서 형사들이 나를 못 들어가게 하더군. 집수색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 뛰어 애간장이 녹아 죽을 것만 같았지. 죽을 상을 짓고 있는데 용준이 삼촌 방을 모두 뒤져 유인물, 책, 야학들의 노래를 녹음시켜 둔 테이프 등을 한보따리 들고 나오더군. 그들은 나오면서 아파트에 있는 사람들에게 "박용준이가 간첩이니 이 사람을 데리고 있는 김영철도 간첩이다"며 헛소문을 퍼트렸어.
광천신협이 한참 번창될 때인데 "이 시람 간첩이다네" 하니 조합원들도 탈퇴해 버리고 저축도 찾아가버렸어. 운영하던 신발가게도 되지 않았어. 간첩 집에 뭘 사러 오것어. 나는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반장일, 조합일, 집안일을 모두 꾸려나갔어. 그래도 신협연합회 회장님과 다른 분들이 많이 도와주어 신협은 그런대로 수습이 됐어.
간첩이라고 소문이 나 주위 사람들이 "결혼식을 했느냐, 결혼사진도 찍었느냐"고 해 직접 결혼사진도 보여주었어. 형사들은 또 얼마나 괴롭혔는지 몰라. 하루에 수십 번씩 와서 이것저것 물었어. 우리 집 아저씨, 박관현, 윤상원, 박용준에 관한 것 외에도 들불야학, YWCA 등 별의별 것을 꼬치꼬치 캐물었어. 다른 사람 같으면 정신이 돌아버렸을 거야. 나도 정신이상 일보 직전까지 갔지.
5월 30일 통합병원에서 엽서가 왔어. 남편이 보낸 것이었는데 몸이 불편한지 글씨체가 너무 엉망이었어. 그것을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간첩이라고 소문이 난 판국에 어디 있는지도 몰라 애를 태우고 있는데 살아 있다는 소식이 왔으니 우선 반가웠지. 그런데 그 다음날 신문에 '도청 수습위원회 기획실장 김영철'이라고 크게 써진 것을 보고 완전히 사형감이라고 생각했어.
6월쯤 정상용 씨 마누라와 함께 상무대 헌병대로 면회를 갔어. 남편은 정상용 씨와 함께 더러운 군복을 입고 맨발로 절둑거리며 나왔어. 어렵게 보게 된 남편이 그 몰골을 하고 있으니 미칠 것만 같더군. 남편은 그간의 일을 얘기해줬어. 상원이, 용준이 죽은 것에 대한 죄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었고 간첩으로 몰리자 자살을 시도했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펑펑 울기만 했어.
자랑스러운 민주시민, 광주시민 만세!
"허위조작 수사를 한 합동수사본부는 5·18 광주항쟁 관련자를 재판하기 위해 상무대내에 재판정을 건립한 후 팡파레를 울리며 준공식을 했어요. 1980년 10월 25일 살벌한 공포 분위기 속에 보통군법회의가 진행되었죠. 김대중씨를 사형 구형한 군검사들이 자기네들 각본대로 재판을 진행시켰고 관선변호사들은 변호를 한답시고 '잘못했제', '다음부터는 안 하겠제'라는 말만 되풀이했어요. 김종배 위원장과 박남선 상황실장이 사형선고를 받고 나는 12년형을 선고 받았어요. 우리는 곧바로 광주교도소로 이송되었으며 나는 4사 9방에 수감되었어요.
나는 나이 어린 청년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에게 회의진행법을 가르쳐주어 돌아가면서 회의를 진행했고 민주주의에 관한 제반 서적을 돌려가면서 읽고 토론했어요. 그들은 대학생 못지 않게 민주주의에 관해 알고 있다고 자부하더군요.
아침마다 박남선 상황실장의 주도 아래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제창했습니다. 교도관들이 저지하면 우리는 쇠문을 식기로 두들기고 발로 차며 항의했어요.
우리는 2심을 받아 김종배씨와 박남선씨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나는 7년으로 감형되었어요. 그 이후 나는 심한 환각과 환청증세가 일어나고 머리가 아파 박철 군 등 어린 청년들이 돌아가며 간호를 해주었어요. 결국에는 장질부사 환자 병사인 9방으로 옮겨졌지요. 나의 앞방 몇 간은 나환자 병사였는데, 나는 이들에게 찐빵을 많이 구입하여 나눠먹게 했어요. 아내는 청과물과 채소장사를 하여 영치금과 약을 자주 넣어주었어요."
군법회의 2심 때 김영철 씨는 7년형을 선고받고 최후진술에서 "광주의거는 하느님과 광주시민 모두가 인정하는 정당방위이고, 광주시민 전체가 협조하여 진행된 의거"라고 당당히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자랑스런 민주시민, 광주시민 만세!!"
"10월 말 교도소로 면회를 갔는데 남편의 건강이 여전히 좋지 않았어. 나는 과일과 채소장사를 하여 애들을 키우면서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어. 남편의 병이 악화되자 좋다는 약은 다 넣어주고 외래진료도 받게 했으나 별 차도가 없었어. 계속해서 남편은 왼쪽 다리와 팔을 쓰지 못한 채 한 말을 되풀이하며 죽은 어머니 얘기를 하고 이상한 종교 얘기를 했어.
그때서야 남편의 정신이 이상해진 줄 알았어. 그 전까지는 이마의 상처와 충격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다고만 생각했지. 몸도 활발히 쓰지 못하는 데다가 정신까지 이상해진 남편을 보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어. 나는 어린 은형이를 업고 면회실 앞에서 나뒹굴었지 '내 남편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저렇게 만들어놓고 내보내 주지도 않느냐'며 정신없이 울부짖었어.
그 후 남편의 석방을 위해 구속자 모임에도 나가고 청와대에 탄원서를 내는 등 별의별 방법을 다썼어."
정신이상이 되어 돌아온 남편
김영철씨는 19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예전의 건강한 모습은 잃은 지 오래였다.
"1981년 12월 크리스마스 무렵 드디어 남편이 석방된다는 소리를 듣고 이제는 내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살겠구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른 새벽 갑작스럽게 셔터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동명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나서 급히 나가 보니 걸인 같은 모습을 한 남편이 서 있었어.
돌아온 남편은 잠을 자지 않고 사방에 머리를 찧고 엉엉 울고, 외출을 한다며 사복을 입다가도 트레이닝으로 갈아입는 등 이상한 행동만 했어.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지. 그때부터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 거야. 3일 동안을 꼬박 잠을 못 잤지. 남편의 출감 소식을 들은 주위의 어른들이 많이 찾아왔으나 그들은 혀만 끌끌 차며 좋은 사람 버렸다고 시국한탄만 하고 가더군.
곧바로 병원을 찾아다녔지. 신경외과, 정형외과 등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어. 그러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1982년 4월에 성요한병원에 입원시켰지. 가끔 병원에서 외출을 나오는데 한번은 집에 와서는 죽어도 병원에 안 간다고 그러더라고. 입원하여 3, 4개월이 지나도 효과가 없으니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마음에서 퇴원을 시켰지.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가만히 있질 않았어. 효광여중 길목에서 대낮에 하늘을 보고 "하느님, 용서해 주세요"라고 울부짖는가 하면 심지어는 알몸으로 일신방직 앞까지 달려가고 …… 남편을 간호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
그해 10월 말쯤 느닷없이 주민들이 숨넘어가게 나를 불러 나가보니 남편이 가게 앞에서 개거품을 물고 또 쓰러져 있었어. 간질증세까지 나타난 거야. 주위의 어른들이 손대지 말라며 뇌에 이상이 생겨 저런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고 해 조아라 회장님에게 연락했어.
전남대병원에는 뇌파검사를 하는 기계가 없어 조아라 회장님과 함께 전주 예수병원으로 가 뇌촬영을 했어. 뇌수종이라더군. 검사결과를 가지고 전남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 하고 1982년 11월 정형외과에서 5-6시간이나 되는 장시간 수술을 하여 뇌에 있는 물을 빼내고 머리에 인공호스를 달았어. 수술 후 정신과로 옮겼는데 영세민 의료보험카드는 6개월밖에 입원할 수 없다고 해 수술한 지 8개월 후에 강제로 퇴원을 했지.
퇴원 후에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여전했어. 1984년 1월부터 나주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지금까지 치료중이야. 담당선생이 치료를 잘해주어 지금은 혼자 걸을 수 있고 옷도 입고 정신상태도 점점 정상인이 되어가. 그러나 날만 궂으면 팔, 다리의 진통으로 고생하고 너무 통증이 심하면 고통을 참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 나가곤 하지."
부인 김순자 씨는 그동안의 세월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정신이상이 된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어요. 포장마차, 과자장사, 한 달에 6만 원 받는 공장생활, 우유배달……지금은 사글세로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지만 그것도 남편의 간호 때문에 잘 안 돼." 김영철씨의 1남 2녀의 자식들은 훌륭하게 자라고 있다. 이들을 키워낸 김순자 씨의 숨은 노고를 그들은 존경하고 있다. 한번은 큰아들 동명이가 국민학교에 다닐 적 어버이날에 편지를 썼다.
"어머니, 아버지, 나는 훌륭한 아버지를 두어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내가 크면 정상용 삼촌과 함께 손을 잡고 꼭 광주문제를 해결하겠어요." (조사.정리 신봉화)
첫댓글 옛날생각이,확밀려오네.
이번에..영철이형님..기념비.광천동에.세우기로결정난듯함....멋져부러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