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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유 게시판 스크랩 국호로 본 조선과 한국의 정체성(2)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27 13.05.19 09: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국호로 본 조선과 한국의 정체성(2)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을 무렵,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건의가 빗발쳤다.재야 지식인인 강문형은 “현금 태서(서양)의 여러 나라에 황제, 대군주, 대백리(大伯理·대통령 또는 총통)의 칭호가 있습니다”(일성록)라고 말하면서 고유의 국호와 제호(帝號)를 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서양의 통치제도를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던 고종은 이 건의에 만족했다. 그동안 입헌군주제의 옷을 입힌 내각이라는 이름으로 군주권의 제한을 받아왔다. 그래서 러시아 공관으로 들어온 뒤 내각제를 철폐하고 의정부제를 환원시켰던 것이다.


고종은 “대군주 폐하가 모든 정무를 통령한다”고 선포했다. 유림들의 반대 여론을 누르고 정식으로 칭제건원(稱帝建元)의 여러 조치를 내렸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원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가졌으며 축하의식에는 외교사절을 초대하지 않았다.연호 사용은 외국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국호를 제정했다. 고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나라는 삼한의 땅으로서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나라의 이름을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일찍이 여러 나라의 문헌에 조선이라 하지 않고 한(韓)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지난날에 이미 ‘한’으로 될 징험이 있어서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모두 대한의 국호를 알 것이다.”


 

정식 국호로 ‘한’을 내걸고 대(大)와 제(帝)를 삽입한 것이다. 삼한정통론을 참작한 흔적이 역력하다. 또 대일본제국이나 대영제국이라는 국명에서 시사를 받았을 것이다. 이로써 대한제국이 탄생했다. 하지만 명실이 맞을까? 그 자주독립의 시대정신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근대적 관점에서 평가하면 군주제의 반동적 강화였다고 볼 수 있다.주권재민의 국민국가를 건설치 않고 의회제도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제군주제를 강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무런 국력이 받쳐주지 않고 반식민지 상태에서 겉치레만 번지르르하게 치장한 꼴이었다.아무튼 열강은 대한제국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이를 줄여 ‘한국’이라 했다. 한편 유생들과 인민 대부분은 조선이라는 호칭을 고집스럽게 사용했다. 그러나 재야의 변혁세력인 활빈당은 외국 상인이 시장에 나오지 못하게 할 것 등 시정개혁 13조목을 발표하면서 ‘대한’이라는 국명을 사용했다.항일 논설로 이름을 떨친 대한매일신보, 최초의 민족은행인 대한천일은행 등이 출현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는 조국 독립을 지키겠다는 혈서를 썼는데 거기에 ‘대한 독립’이라 했다. 국명 사용을 두고 일대 혼돈을 겪은 시기였다.

한편 국제조약을 맺으면서 당사국을 표시할 때 ‘한’으로 표시했다. 일본과 강제로 맺은 조약에 조일(朝日)이 아닌 한일(韓日)로 바꾸어 표기한 것이다.1910년 구한국을 병합한 일제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되살렸다. 식민지 경영을 총괄하는 기구를 조선총독부라 명명한 것이다. 한국이라는 국가실체를 부정하려는 의도일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정서가 한국이라는 이름보다 조선이라 부르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 인민의 정서를 모아 능률적으로 지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흔히 조선을 ‘이씨 조선’이라는 일개 왕조로 격하시키려는 의도로 조선을 사용했다는 견해는 잘못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개념이었다.

이후 식민지에는 여러 분야에서 조선이 되살아났다. 조선은행도 탄생했으며 조선은행권이 발행되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은 식민지 사람들을 ‘조센진’이라는 얕보는 말로 사용했다. 아마도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이런 호칭으로 하여 ‘조선’의 명칭에 거부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자칫 조선이란 호칭을 썼다가 조선총독부에 동조하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 영향 탓에 해외 독립운동단체들은 많은 경우 조선을 버리고 한국을 사용했다. 미주에서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발족한 교민독립운동 연합단체의 명칭은 대한인국민회였으며 미주 교포들이 발행한 신문의 제호는 신한민보였다.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의 이름은 한인사회당이었으며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창설한 정당의 이름은 신한청년당이었다. 또 민족사학자 박은식이 우리나라 멸망 과정을 적은 책 이름은 ‘한국통사’였으며 임시정부 태동의 주역이었던 신규식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을 쓰고 한국혼이라 했다. 이처럼 ‘한’은 몇 가지 접두사를 붙여 사용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조선’이라는 이름도 조선귀족령, 조선일보 등에 보이는 것처럼 국내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혁명적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글을 발표하면서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창립취지문)이라 붙였다. 미국에서 사관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은 군부대를 결성하고 대조선국민군단이라 명명했다.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1919년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조선독립선언’이라 붙였다는 것. 독립선언서에 보이는 조선의 의미를 확실하게 언명한 글은 없으나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려 했을 것이다. 생소한 한국보다 익숙한 조선을 드러내려는 뜻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을 사용하는 의미는 대한제국의 실체를 인정치 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게다가 우리의 국호는 여전히 조선이어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아무튼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창설되면서 망명정부의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하였다. 곧 대한제국을 계승한다는 역사적 의미를 담았다. 대한민국의 정체는 비록 민주공화제로, 주권재민의 근대국민국가를 지향하면서도 국체는 대한제국을 계승한다고 표방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이름은 파급효과가 매우 컸다.해방 뒤 분단구조 아래에서 남쪽의 헌법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리하여 새 정부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다. 북쪽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표방했다. 분단구조의 상황에서 한 민족이 이룩한 두 체제는 각기 국호를 달리했다.특히 북쪽은 그 정통성을 고조선-고구려-고려-조선으로 줄기를 대서 내면 논리를 정리하고 있다. 역사의 정체성은 시대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그러므로 현대의 정체성 논쟁은 오히려 분열과 소모를 가져올 뿐이다. 오늘날 국가의 정체성은 중립적 가치의 토대 위에서 국민복리와 인권보장과 민주질서에 두어야 할 것이다. 민족통일이 되면 새 나라의 국호는 어떻게 해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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