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
서대문 형무소 취조실 철창 가
소나무 분재
태극 문양 품고
줄기가 비틀려있다
나이테마저 하나의 뼛골에 두르고
눈부신 고통이 형상이 되어
아름다울 미美자로 서 있다
한 평 독방 속 오랏줄에 묶인 몸
서슬 퍼런 가위로 전지하는 가지에서
하얀 진액으로 사람보다 먼저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렸다
침엽을 틔운 손톱 마디마디
날카로운 바늘
극형의 고통을 물관 속에 사려 물고
단단한 뼈대,
서사를 새겨놓았다
악랄한 고문에도
결기를 굽히지 않고 지켜온 이 나라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노봉방
말벌들의 집
노봉방
한때,
튼튼한 보호막이었던,
비바람 막아 주던 요새要塞가
낙엽 우수수 떨어진 가을 끝자락에
벌들은 떠나고
껍데기만 덩그러니 남아 스산한 찬바람
쓸쓸히 맞고 있네
곱고 하얗던 지붕은 비바람에 얼룩지고
단단했던 몸체는 구멍이 수~웅~숭 났네
한때는 두려워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그러나 지금은 모두 떠나 버린
마른 세월 위에 덩그러니 놓인 노구
이 밤 어디선가
시린 몸 뒤척일 아버지
배로우
캄캄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극야
낮에도 해가 뜨지 않는 극야
어제도 오늘도 계속되는 어둠
어쩌면 벗어나지 못할지도 몰라
top of the world(우리는 이것을 끝이라고 말하지)
아주 어려운 시처럼
당신이 웅크리고 앉아있거나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극야
꽃이 피어 있거나 지는 것이
보이지 않는 극야
며칠, 아니 몇 달 동안
있으나 도무지 필요 없는 눈
눈을 감고 보는 것과 뜨고 보는 것의 차이를
말해주지 않는 극야
내 인생 전반을 엎드려 있다가
겨우 디디고 올라선 시詩
어려운 인생 읽어내고 겨우 써 내는
한 줄 시
밝다
1월 중순에야 저 멀리 비치는 한줄기 빛
눈을 감아도 밝음을 아는 밝음
어둠 뒤라서 더 밝은 밝음
잊지 않을 것이다
당신 가슴 속 어둠을 읽어 냈다는 것.
배로우: 북미대륙 최북단에 위치 "Top of the world"라고 불리는 곳
11월 말부터 1월 중순까지 해가 뜨지 않는 극야로 섭씨 영하 40-50도인 지역
눈사람
화성시 봉담면 마하리 보은의 집
요양원에
백발의 눈발이 휘날린다
한 올 한 오리 뻗은 눈길을 끌고 와
생의 끝자락에 난 문을
들어선다
나란히 곁을 내준 채 앉은 눈사람
구름으로 흘러와 살결을 풀어 내린
눈의 결정에서 고운 뼛가루로 빚은 듯
온점을 찍은 하얀 노구의 몸.
차안 피안의 경계로 입을 꾹 다물고
삶의 잿불에 그을음 낀 눈썹을
허공 속 적멸에 치켜 올린다
이제 가을걷이 마친 후
온몸으로 맞은 겨울
평생 걸어왔던 고된 행로
몸속 지도에 접어 넣고
귀납법 속에 주제문을 엮고 있다
눈사람의 묵언
허울로 꾸민 몸을 허물로 벗어놓고
물로 돌아간다는 무無
그건 다시
은빛 은하수로 흐르는 것이라고
김범수 약력 / 서울 출생
구로문화원 손옥자 시밭가꾸기 회원
2016년 한국문학예술 겨울호 신인상 수상
카페 게시글
등단작과 수상작
2016년 <한국문학예술>겨울호 신인상 당선작 / 김범수
가람
추천 1
조회 119
17.05.03 10:10
댓글 2
다음검색
첫댓글 홍수/김범수
하늘이 닫혔네
땅이 입을 벌리고 헐떡이네
물을 달라고 야단이네
하늘 저수지에 구멍이 났네
홍수가 났네
땅이 패이고 나무 뿌리가 뽑혔네
집이 무너져 조각배처럼 떠내려가네
생명들이 떠내려가네
국회의사당 천정이 뚫렸네
말의 홍수가 났네
국민의 삶이 떠내려가네
법당의 독경 소리가 홍수가 났네
성당에도, 교회에도 말씀의 홍수가 났네
자비가 떠내려가네
사랑이 떠내려가네
실날같이 남아 있는 영혼도 떠내려가려하네
하나님!
입술의 수문을 조절케 하소서
시밭가꾸기 동인지 창간호 49쪽에 실린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