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높이고 외국(동이족)은 깍아 내린다/ 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사는 상세히 외국사는 간단히/ 상내약외(詳內略外)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숨긴다/ 위국휘치(爲國諱恥)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사필원칙(史筆原則)이다
중국의 정치가이며 학자였던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그의 저서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에 썼다
이 악습은 공자의 수법에서 나와
2천년 동안 중국역사가 그 악습을 탈피 하지 못하고 있다.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높이기 위해
공자가 서경에 기록한 이래 사마천 사기를 거쳐
한민족과 관련된 역사는 상당부분을 날조했다.
정치적 야망을 위해 동이족이면서
환부역조의 길을 걸었던 공자의 생애는 어떠했는가
공자의 부친인 숙량흘(叔梁紇)과 공자의 아들인 백어(伯魚)와
백어의 아들인 자사(子思)가 모두 자기 아내를 쫓아낸
이른바 ‘공씨삼세출처(孔氏三世出妻)’의 고사가
공자가어(孔子家語) 후서(後序)에 나온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기록으로 보면
공자는 아내 기관씨(기官氏)가 노나라 소공 때 난리가 나서
제나라의 이계 땅으로 피난 갈 때,
남편을 따라가지 않고 송나라로 가버렸다는 것은
부부 사이가 화목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유교는 유난히 가족 간의,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 존중하라는 예법을 강조한다.
부모는 자애로워야 하고,
아들은 효성스러워야 한다든가,
형은 친하게 대하고 아우는 공손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
‘삼강오륜’, ‘가화만사성’,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강조한
공자의 유교 윤리에서 허구와 괴리감을 보게 된다.
야합(野合)이란 말은 들에서
남녀가 그 짓거리를 한다는 뜻이다.
그의 부친인 숙량홀이 어린 무당과 야합하여
그가 태어났다 했다.
동북공정의 논리가 이에서 나오고 있으니,
환부역조한 동족으로 인해 가슴이 아파 온다.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첫댓글 3세에 걸쳐 마누라를 쫓아낸 집안이 성인의 집안이라니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막막합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신완순 선생님 안녕하세요, 단군정신 선양회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다름이 아니오라 아버지께서 살아계실적 단군정신선양회 회원이셨습니다.
당시 회원증도 제가 가지고 있구요...
선양회에 한번 찾아 뵙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시간적 여유가 쉽게 나지 않네요.
역사에 대해서 여쭙고 싶은 것도 많은데 올 안에 시간 만들어 찾아뵈도 될런지요...
맑은무인 님 안녕하세요?
선양회와 관련이 있으시다는 말씀은 전에 한 번 들은 것 같습니다
편한 시간에 한 번 오시지요...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고맙습니다^^
공자는 자칭 동이족귀족인 은나라귀족의 후손이 부친이라고 했지만 한족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얼굴은 거의 한족에 가깝습니다. 동이족이라 하기에는 너무 무리가 많은 듯 혹 마곡의 반점이 몸에 있다는 기록이라는 있으면 모를까
제 집안의 희망사항을
그리 읊어 기록한 것들을 경經이라니...
차라리 당대에 행해진 모든 일을 기록한 경鏡을 보고 배우는 것이 나을 것이라...!!
화폐에 나타낸 그림들은
그 나라의 미래를 위한 당대의 희망과 함께 영원히 기념하고픈 것들을 담았을 것인 바
공자를 성인으로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쳤던 이조조정과 그 부용들이
우리나라 화폐의 면면들이라...
이 나라의 미래는 어찌
유독 그 못된 조정과 그 주변 인물들로 사표를 삼아야 할 바이겠는가?
사임당이 5만원이고 최고로 치고, 여상상위시대네요, 통탄,
마고할미를 5만원으로 한다면 수긍하지요
잘 보았습니다.
춘추필법 하나만 알아도 저들의 역사기록이 어떤 의도와 방향으로 왜곡 편집되었는지 충분히 짐작할수 있거늘..
문제는 지금도 많은 분들이 저들이 의도한 춘추필법의 진정한 내면세계를 완전히 꿰둟어 보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춘추필법이 궁극적으로 저들의 이민족에 대한 정신개조 술책으로 쓰였음이 분명하게 들여다 보이는데도 왕왕 그들이 의도하였던 방향대로 충실히 따르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세월이 약이라고들 합니다만, 답답한 심정은 내내 지을수가 없습니다.
항상 건승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