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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평해파 종손으로 살고 있는 안호열(安虎烈)씨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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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명동기자-월간울진 E-mail: uljinnews@empal.com 작성일: 2010.04.14. | ||||||||||||||||||||||||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추이를 쫓아 핵가족을 넘어 나 홀로 가구의 증가세까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이 시대에 종갓집(宗家) 또는 종손(宗孫)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1945년 해방 전후만 하더라도 어느 성씨의 가문이던지 종손의 지위와 그 역할은 실로 대단했다는 것을 우리는 직·간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나 또는 들어서 알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혈연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는 당연하게도 제사 공동사회(祭祀共同社會)이자 씨족공동사회(氏族共同社會)였고, 그런 사회에서 한 문중의 종손이 가지게 되는 힘과 우월감이 어떠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어느 한 집안에서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큰 행운이었던 그 시대에, 더욱이 한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남자로서 최고의 영예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독특한 모태신앙으로 자리 잡은 조상숭배신앙(祖上崇拜信仰)의 본거지인 종갓집의 종손, 그들이 사회 문화적으로 가지게 되는 우월한 지위는 같은 성씨를 공유한 집안사이에서는 물론이고 타 성씨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존경을 받았고, 이에 따르는 종손의 역할 또한 막중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희소가치를 지녔던 종손은 그 문중의 위세가 대단하면 할수록 한 해 동안 조상들께 올리는 제사나 관리해야 하는 묘소도 많았고, 그 모든 제사의 제주(祭主)는 종손이 도맡았다.
규모가 큰 집안은 한 해 동안 적어도 스무번 이상의 제사를 지내야했고, 조상들의 제사에 참여하는 후손들은 정성과 공경으로 제사를 받들어 조상신을 축원하고, 씨족의 일원임을 새삼스레 자각하면서 유대와 화목을 체득했다.
한 집안의 종갓집은 같은 핏줄을 가진 이들이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 신앙의 구심점이었으며, 그만큼 종손과 종부(宗婦)의 역할과 책임은 실로 위대하고 무거운 것이었다.
어느 집안의 종갓집 살림살이가 넉넉하면 다행이었지만, 형세가 넉넉하지 못하여 종가의 품위를 유지하기가 어려울 때는 집안이 나서서 도와주는 것 또한 당연한 책무로 여겨졌다.
종손은 맏집의 맏이로만 이어져 내려왔으므로, 대다수의 집안에서는 항렬(行列)이 가장 낮았다.
그렇지만 어느 집안이든지 가장 낮은 항렬이면서도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종손이었고, 그런 존대의 가풍(家風)과 유풍(儒風)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그래도 세월의 흐름은 대단한 것이어서 종가의 모습도, 종손의 지위도 다양한 형태로 변해버린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대가족제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종갓집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일가친척들과 젊은이들은 벌어먹고 살기 위해 뿔뿔이 객지 땅으로 떠나 버린 마당인데,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문중의 각종 대소사와 조상들의 기제사, 산소를 챙겨야 하는 종갓집과 종손의 무게를 감당하기는 버거워진 것 또한 요즈음이다.
강론과 학문을 견주는 곳으로 순흥안씨 집안의 교육 장소로 활용됐던 화수정(花樹亭). 기성면 척산리 소재
“제가 2살 때 먼저 만주로 들어간 아버지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5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함께 만주로 건너갔어요. 만주의 ‘길림성 화피창 소오가자’라는 곳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1941년 대동아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전쟁 통에 어수선하니까 너희들은 먼저 고향으로 나가거라. 나는 여기서 돈을 더 벌어서 갈 테니까’ 그렇게 얘기해서, 어머니와 저, 남동생 셋이 먼저 나오게 된 거지요. 그런데 해방이 되고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며 길이 막혀서 아버지는 그만 못나오고 말았어요.”
순흥안씨(順興安氏) 32세손이자, 울진 입향조의 19세손인 순흥안씨 평해파(平海派)의 종손으로 살아오고 있는 안호열(安虎烈. 76세)씨는 현재 생활하고 있는 기성면 척산리(尺山里) 자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이집이 아니라 요 옆에 있던 집에서 태어났어요. 이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182번지에서 태어났는데, 현 거주지는 163번지고요. ‘병’자 ‘종’자를 쓰시던 아버지는 1985년 2월 9일에 79세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의 호적 이름은 ‘봉’자 ‘중’자로 되어 있고요. 어머니는 평해 황씨로 ‘위’자 ‘남’자를 썼는데, 1979년 9월 8일에 7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던 해는 박정희대통령이 서거했던 해이기도 하지요.”
5살 때 만주로 이사를 간 안호열씨는 10살까지 만주에서 지내다가 다시 고향 기성면으로 되돌아온다.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기계농장처럼 논에 대는 물도 양수장 같은 곳에서 퍼서 조절할 수 있도록 했고, 우리는 그곳에서 꽤나 부유하게 살았어요. 일꾼을 한 20여명 정도 들여놓고 농사를 지었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조선족 소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1941년 12월에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만주 길림성도 무차별 폭격당하고 그랬어요. 그때 아버지가 ‘전쟁 통에 어수선하니까 너희들은 먼저 고향으로 나가거라. 나는 여기서 돈을 더 벌어서 갈 테니까’ 그렇게 얘기해서, 어머니와 저, 남동생이 먼저 나오게 된 거지요. 아버지는 그때 조강지처인 어머니가 계시는데도 따로 둘째 부인이 있었어요. 그런데 해방이 되고 우리나라가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지면서 길이 막혀 아버지는 그만 못나오고 말았지요.”
“1979년, 아버지의 생존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 대한적십자사를 찾아다니면서 아버지를 고국 땅으로 모셔와야겠다고 요구했습니다.”·····“1981년 12월에 고향 기성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만 3년여를 이집에서 살다가 1985년 2월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와 함께 영구 귀국했던 새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뜨시기 한 달 전에 먼저 세상을 떴습니다. 새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장사를 아주 크게 치러 주었어요. 생전에 호적을 찾아서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혼인신고까지 하고 살았으니까요.”
태평양전쟁 통에 처자식을 먼저 고향 기성면으로 돌려보낸 안호열씨의 아버지는 수십 년간 이국만리 중국 땅에서 살다가 37년만인 1981년 12월에 고향땅 기성면 척산리로 돌아온다.
“대동아 전쟁 때 만주를 떠나온 뒤로도 한참동안은 서로가 편지로라도 연락을 했는데, 6.25전쟁 후에 남과 북으로 갈리고 난 뒤부터는 아버지 소식을 전혀 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1979년 12월 어느 날에 중국 길림성 길림시에 살던 ‘성열’이라는 제 6촌 동생이 편지 한통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 속에 우리 아버지의 주소와 최근 근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어요. 그래서 곧장 아버지에게 편지를 띄웠고, 소식과 사진 등이 수차례 오고 갔습니다. 1978년부터는 공산 국가와의 서신 교환도 가능해져 있던 상태였고요. 아버지의 생존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는 각종 서류를 꾸며서 대한적십자사를 쫓아다니면서 아버지를 고국 땅으로 모셔 와서 여생이라도 편안히 모셔야겠다고 요구도 하고 부탁도 하고 그랬지요. 제가 그때 공무원 생활을 했으니 그나마 적십자사를 찾아다니며 서류도 갖추고 그러기가 쉬었던 거지요.
기다리고 있는데, 1980년 6월쯤에 대한적십자사에서 송환이 가능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더라고요. 참으로 말할 수 없이 기뻤지요. 1981년 12월, 마침내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한 부인인 이향이(李香伊)이라는 분과 함께 구룡 반도(九龍半島, 주룽 반도)를 거친 다음에 홍콩을 경유해서 고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산권 국가에 살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 고국 땅으로 송환된 일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중앙지고 지방지고 할 것 없이 대서특필했어요. 물론 친어머니를 생각할 때의 안타까운 심정도 말할 수 없었지요. 젊은 나이에 남편과 헤어져서 두 아들을 키우면서 고생만 해온 어머니는 아버지가 고향땅으로 돌아오기 2년 전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까요. 좀 더 일찍 돌아오셨다면 참 좋았을 텐데, 참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나이 드신 아버지가 기성면 척산리로 되돌아왔을 때 동네에서는 큰 경사라며 잔치도 성대하게 열고 그랬어요. 순흥안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서, 죽은 줄 알았던 종손이 살아서 되돌아왔으니까요. 젊은 시절에 돈 벌러 중국 땅으로 건너간 종갓집의 종손이 37년 동안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일가친척들의 기쁨이야 두말해서 잔소리였지요. 아버지는 중국에서 재혼한 부인과 함께 귀국했는데,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안계셨으니 우리 두형제는 깎듯이 그 분을 새어머니로 받들어 모셨지요. 적십자사를 통해서 송환교섭을 벌일 초기만 해도 아버지는 혼자서는 결코 나올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친어머니도 돌아가서 안계시고, 아버지 혼자 나오면 쓸쓸하고 외로울 텐데 두 분을 함께 초청할 테니 같이 나오시라고 했지요. 그래서 새어머니와 함께 초청해서 이집에서 모셨어요. 글쎄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새어머니와 함께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했겠지만, 아버지가 영구 귀국하시기 2년 전에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될 건 없었지요.
1981년 11월 28일에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대구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둘째아들인 충열이네 집에서 이틀을 머물고 12월 2일에 고향 기성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만 3년여를 이집에서 살다가 1985년 2월에 돌아가셨지요. 그때 함께 귀국했던 새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뜨시기 한 달 전에 먼저 세상을 떴습니다. 그런 인연도 있더군요. 새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장사를 아주 크게 치렀어요. 생전에 호적을 찾아서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혼인신고까지 하고 살았으니까요. 새어머니는 청송군 오색약수터 인근 마을이 고향이었는데, 경주 이씨로 그곳에서도 아주 잘살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요. 새어머니도 기성으로 돌아온 다음에 친정을 찾아서 친정도 다녀왔고, 호적에도 올랐고, 아마도 별다른 한은 없을 겁니다.”
“대동아전쟁 때 만주에서 두 아들을 데리고 기성 척산리로 돌아온 어머니는 만주로 건너갈 때 당숙에게 위토로 맡겼던 논밭전지를 찾아서 혼자 농사를 지었어요. 그렇게 우리 두형제를 키워 주었어요. 더욱이 종갓집의 종부이기도 했으니, 어머니가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기성소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인근에는 한학을 가리키는 서당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식전에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우고, 소학교에 가서 따로 공부하고, 또 집에 오면 다시 서당에 가서 식전에 배운 한문을 복습하고 그랬습니다.” 안호열씨는 생전에 어머니가 두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느라 큰 고생을 했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일가친척이 많은 고향 척산리라고는 해도 순흥안씨 평해파의 종부로써 종갓집의 대소사는 물론, 가녀린 여자 몸으로 두 자식까지 일일이 챙겨야 하는 안씨 어머니의 고생이야 미루어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중국 만주에서 소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가 10살이 되던 때에 동생과 어머니, 이렇게 셋이서 고향으로 되돌아왔으니 어머니가 겪었을 고초야 새삼 말해서 무엇 하겠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다들 먹고 살기가 빡빡하던 그 시절이야 더욱이 먹고 산다는 게 힘에 부치는 일이었지요. 만주에서 두 아들을 데리고 기성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만주로 건너갈 때 당숙에게 위토로 맡겼던 논밭전지를 찾아서 혼자 농사를 지었지요. 그렇게 우리 두형제를 키워 주었어요. 더욱이 종갓집의 종부이기도 했으니, 어머니가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고생하던 그런 모습이야 늘 눈에 선하지요”
만주에서 고향 기성으로 돌아온 안호열씨는 기성소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계속 하게 된다.
요 옆에 있는 화수정(花樹亭)도 예전에는 훈장이 학동들을 모아놓고 강론을 하거나 서로들 학문을 견주는 장소를 겸하고 있었으니 순흥안씨 집안의 교육 장소 역할을 톡톡히 했던 곳입니다. 특히 이곳 기성은 예로부터 글 잘하는 동네였으니, 다들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열심히 익혔습니다. 화수(花樹-꽃나무)라는 것은 같은 성씨를 지닌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사는 곳의 화목과 번영을 기원한다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요. 예전에 어른들이 힘들게 살면서도 짚신 삼아서 팔아가면서까지 한푼 두푼 모아서 지은 집이 화수정입니다. 기성소학교를 졸업하고는 평해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월송에 있는 평해중학교까지 걸어 다녔는데, 보통 일이 아니었지요. 자갈로 된 먼지 나는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서 평해 월송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평해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어요. 집에 있으면서 일도 거들고 어머니를 도와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9살 아래의 남동생은 평해중학교를 거치고 후포고등학교를 졸업해서 공무원 생활을 했고요.” “6.25 전쟁이 한창일 때는 기성면에도 함포사격이 심했는데, 그것을 피해서 산중으로 솥과 보리쌀을 싸들고 잠깐씩 피난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주로 인근 지역인 방율, 삼산, 이평 같은 산중으로 피해 다녔어요.”·····“산지가 목이 매여서 끌려가듯이 중매로 결혼하게 되었지요. 전에 국회의원을 지냈던 전만중씨가 처삼촌이 됩니다. 전만중 국회의원의 백씨가 전일중씨라고 제 장인이 되는데, 제가 장가를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하당에서 서당을 차려놓고 학동 30여명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안호열씨는 평해중학교에 다니던 16살 무렵에 6.25전쟁을 겪었다.
6.25전쟁 중에는 기성면에서도 보도연맹이라고 인민군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거나 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후포 앞바다에 산채로 수장하거나 이곳에서 남쪽 방면으로 넘어가는 저 어티목재에서 죽이고는 했었어요. 그때 온정면에 살던 사람들을 저 어티목재에서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몰아넣고 총으로 싸서 죽였지요. 아마 대부분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일 겁니다. 그런 것은 이승만 정부가 참 잘못한 일입니다. 하기야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것인지, 아니면 아래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저지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같은 피를 나눈 동족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그런 끔찍한 일은 다시는 이 땅에서 일어나지 말아야지요. 새삼 말해서 무엇 하겠어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는 잊어야지요.”
6.25전쟁을 겪으면서 평해중학교를 졸업한 안호열씨는 한동안 어머니를 도와서 농사를 짓다가, 18살에 중매를 통해서 결혼한다.
중매는 근남면 행곡리에 살던 남씨라는 분이 했는데, 지금은 돌아갔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처가의 외삼촌이 되는 그분이 중매를 한 거지요. 그때는 다들 그랬듯이 양가 어른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신랑이 될 사람과 신부가 될 사람 얼굴도 보고, 가문도 따지고 그렇게 결혼하게 되었어요. 이곳 기성 척산에서 북면 하당까지 멀어서 하루만에는 갈수가 없으니까 정림 2리까지 가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오전에 처가로 들어가서 결혼식을 올렸지요.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3일 만에 저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결혼식 후에 처가를 가끔씩 오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1년 만에 신부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어요. 그것을 ‘우기’한다고 합니다. 가을에 결혼하고 그 다음해 가을에 ‘우기’ 날을 받아서 새색시를 데리고 본가로 들어오게 되는 거지요. 아래로 기섭(50세. 대구시), 기수(45세. 대구시), 기업(42세. 대구시)이라고 아들 셋을 낳았습니다. 다들 대구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막내는 자영업을 하고 있지요.”
6.25전쟁이 종식된 후 중학교를 졸업한 안호열씨는 군에 소집되어 만 4년간의 군대생활을 최전방에서 하게 된다.
“군사혁명 후에 행정조직의 기구를 확장할 때 군청에서 시험을 쳐서 합격하고 1963년도에 기성면 사무소에서 처음 공무원 일을 시작했지요. 기성, 평해, 원남, 온정면까지 고루 다니면서 부면장만 만 8년 정도 했습니다.”·····“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지붕개량사업을 못하겠다는 주민을 만나면 할 수 없이 강제로 초가지붕을 막 걷어내고 그랬어요.”·····“그때는 집집마다 쌀이 없으니 정부에서 혼분식을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혼분식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원군 금화에서 만 4년 동안의 군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안호열씨는 한동안 농사를 짓다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군을 제대하고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서 4~5년 동안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27살인가 되던 해인 1961년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어요. 군사혁명 후에 각급 행정조직의 기구가 확장되고 공무원을 새로 모집할 당시에 지방공무원 시험을 봐서 공무원 생활에 첫발을 내딛었지요. 자유당 때부터 근무하고 있던 늙고 무능한 공무원들을 다 쫓아내고, 1개면에 직원 4~5명씩을 두고 민원을 상대하려니 벅차서 2차에 걸쳐 새로 공무원을 뽑은 거지요. 울진군청에서 시험을 쳐서 합격하고 난 다음인 1963년도에 기성면 사무소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습니다. 기성, 평해, 원남, 온정면까지 고루 다녔지요. 정년 퇴직할 때까지 부면장만 만 8년 정도 했습니다.
지금이야 부면장이 계장급이니까 별다른 끗발도 없지만, 그때는 부면장의 위세와 끗발이 대단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전국적으로 새마을사업이 한창이었는데, 새마을 담당관 역할을 하던 부면장이 각 마을 단위 사업 책정을 일일이 했으니까요. 골짜기마다 흩어져있는 동네 단위로 다리를 놓아 달라, 소하천을 정비해 달라, 길을 넓혀 달라, 그런 숙원사업과 관련된 민원이 참 많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부면장이 그런 끗발도 있었지만 고생도 무지하게 많이 했어요. 정부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던 지붕개량사업을 할 당시에는 주민들과 많이 부딪치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제발 초가집을 헐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를 하자고 사정도 하고 그랬어요. 그도 그럴 것이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하려면 집주인이 부담하는 경비도 만만치 않았는데,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야 지붕 개량 사업을 꺼릴 수밖에요. 공무원이야 정부에서 시키니 또 어쩌겠어요? 지붕개량을 못하거나 안하겠다는 집은 할 수 없이 공무원들을 여러 명 데리고 가서 강제로 초가지붕을 막 걷어내고 그랬지요. 꽤 많은 지붕들이 그런 식으로 개량됐어요.
새마을 사업 초기에는 시멘트 같은 건자재도 무상으로 지원해주었고, 마을마다 시행하는 각종 사업에는 그 동네 사람들 모두 다 부역 일꾼으로 참여하고는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마을길 넓히고, 하천 정비하는데 공짜 부역을 나오라고 하면 다들 난리가 날겁니다. 요새야 돈 안주면 절대 일을 안 하지요. 그러고 보면 세상이 정말 좋아지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각 동네별로 주민들 대부분이 별 불만 없이 그런 부역에 참여했어요. 어떻게 보면 지난 세대가 그런 부역을 군말 없이 한 덕분에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밥 걱정 없이 편리하게 사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예전에 돌아가신 어른들은 정말 고생만 죽어라고 하다가 간 거지요.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늘 배고픔에 허덕이다가 좋은 세상 한번 구경하지 못하고 죽었어요.
우리가 공무원 생활할 때만 해도 모두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정부에서 혼분식을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혼분식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집마다 다들 쌀이 없을 때였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태풍은 또 어찌나 자주 오는지, 해마다 여름철이면 다리가 떠내려가고 농사를 짓기 위해 막아놓은 보가 터지고 그랬어요. 공무원 생활을 끝마치고 나니 새마을 사업할 때 골탕 먹었던 것만 남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공무원들은 다들 신사입니다. 컴퓨터 앞에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하잖아요? 그때는 매일 밤낮이 따로 없었어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할 때였으니까요.”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당시에 순흥안씨 울진 입향조인 ‘오(五)’자, ‘상(常)’자 어른은 황해도관찰사 겸 수군병마절도사로 있었어요. 그런데 대윤과 소윤이 권력을 다투던 을사사화의 여파가 순흥안씨 일가친척들에게 미치게 되면서 그 어른이 이곳 평해군수로 좌천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평해군수를 그만두고 평해군(平海郡) 노동리(魯東里), 지금의 황보리에 정착을 하게 됐지요.”·····“황보리에 터전을 잡으면서 세를 이룬 것이 순흥안씨 평해파(平海派)지요. 이곳 기성리에 자리를 잡은 지도 46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타지에 나가서 사는 사람들이 많고, 집성촌인 이곳 척산에도 순흥안씨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척산 1리와 2리를 합쳐 60여 가구에 한 100여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울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는 ‘오(五)’자, ‘상(常)’자를 쓰시는 어른인데, 맨 처음에 저 안쪽 마을인 황보리에 터전을 잡았지요. 1545년 조선 명종 1년에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갈등이 지속되다가 결국 소윤이 대윤을 축출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잖아요? 중종임금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고,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명종을 낳았는데, 장경왕후의 아우 윤임을 대윤이라 했고,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을 소윤이라고 불렀어요. 대윤과 소윤은 파평 윤씨로 종씨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권력을 잡으려고 반목하고 대립하면서 싸우게 되지요. 중종임금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한동안 윤임이 크게 세도를 부렸는데, 인종임금이 즉위한지 8개월 만에 죽고 다시 명종이 즉위하게 되잖아요? 그러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형세가 뒤바뀌어 소윤으로 불리는 윤원형이 득세를 하게 되었어요. 그러자 권세를 얻게 된 윤원형은 윤임의 일파를 철저하게 제거하게 됩니다. 그렇게 1545년 을사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는 그 후에도 5~6년간 지속되면서 100여명의 무고한 조정 대신들을 유배하거나 죽이게 되었어요.”
안호열씨는 순흥안씨 종갓집의 종손으로서 당연하다는 듯 지나간 선조들의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다.
“순흥안씨로 고려 말의 문신인 근재 안축선생은‘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후포 망사정(望槎亭)을 두고‘망사정상 창파만리 위 구이조 번갑두사라(望槎亭上 滄波萬里 爲 鷗伊鳥 藩甲豆斜羅)’라고 읊었어요. 저는 애초의 망사정이 지금의 후포등대 자리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누구도 알 수 없지요. 다행히 울진군에서 망사정을 새로 건립할 계획이라니 기대가 큽니다.”·····“예전에 등기산 정상의 정자에 망사정 현판을 달 때, 아랫동네인 남호동에서‘남호정’이라는 현판을 함께 붙여달라고 해서 하나의 정자에 두 개의 현판을 동시에 달았던 에피소드가 있어요.”
순흥안씨 평해파 입향조인 안오상의 묘소는 평해읍 오곡2리에 위치해 있는데, 후손들은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그곳에 모여서 제사를 올린다.
이와 함께 후손들은 경모제(景慕齊)를 건립하여 입향조의 덕망과 학식을 기리고 있기도 하다.
“월송정 입구에 있는 안축선생 유적비는 1991년도에 건립했는데, 땅은 이곳 평해파에서 마련했고, 비(碑)는 서울 종회에서 세웠어요. 또 울진군지에 보면 안축 선생의 ‘오월루(梧月樓)’라는 시가 나타나지요. 평해향교 뒤쪽에 보면 수천 년 정도 묵었을 고목나무가 하나 있는데, 아마도 그곳이 오월루 자리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후포 등기산 꼭대기에 망사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정자가 있잖아요? 고려 말의 문신인 안축선생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망사정을 두고 ‘망사정상 창파만리 위 구이조 번갑두사라(望槎亭上 滄波萬里 爲 鷗伊鳥 藩甲豆斜羅-망사정 위에서 창파만리 바다위로, 아, 갈매기가 반갑다고 하는구려.)’라고 읊었어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당시의 망사정이 지금의 후포등대 자리로 보이는데, 정확한 위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요. 그래도 위치를 살펴볼 때, 그 당시에 돈을 들여서 일부러 정자를 세운다면 누구든지 후포등대 자리가 적격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마나 울진군에서 후포 등기산 근린공원 조성 계획의 하나로 3억6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예전의 망사정을 새로 건립할 계획이라니 기대가 큽니다. 예전의 전경이 그림으로라도 남아 있으면 복원이 가능할 텐데, 그런 점이 좀 아쉽지만요.
예전에 등기산 위에 세워져 있는 정자에 망사정이라고 서각된 현판을 걸기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지요. 전에 언젠가 등기산에 올라갔더니 이름 없는 정자 옆에 누워있는 와비가 하나 있는데 후포 노인회에서 세운 안축 선생의 시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남의 조상 시비를 세워주어서 고맙다고 노인 회원들에게 점심도 사주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요. 그때만 해도 덩그러니 정자만 있었지, 현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종회에 연락해서 ‘이왕이면 안축 선생이 읊은 시도 있고 마침 그곳에 정자도 있으니, 망사정이라고 새겨진 현판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달자’고 부탁했지요. 그런데 막상 현판을 달겠다고 갔는데, 노인회에서 달지 못하게 하더라고요. 정자 바로 밑의 동네가 남호동인데, 그 동네에서 해마다 풍어제도 지내고 하는 장소니까 망사정 현판을 달려면 남호정이라는 현판도 하나 만들어서 같이 달아달라고 요구하더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망사정 현판도 붙일 수 없다면서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망사정 현판을 집에 한 2년 정도 보관하고 있다가, 그 후에 남호정이라는 현판도 같이 만들어서 달게 되었지요. 그래서 하나의 정자에 두 개의 현판이 동시에 달리게 된 것입니다. 후포 등기산 정자에는 그런 에피소드가 있어요.”
18대조까지의 묘소를 전부 관리하는데 그나마 부부 합장(合葬)한 조상들이 계시니까 묘소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지만, 몇 년 새 설쳐대는 멧돼지들로 인해 묘소가 훼손될까봐 가장 걱정이라고 말하는 안호열씨다.
‘살아생전에는 부모 속을 안 썩이는 게 효자이고,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산소를 잘 보살피는 게 효자’라며 담담하게 말하는 안호열씨의 외양에서 종갓집 종손의 위치가 힘없는 구시대의 유물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비빌 언덕이 귀한 이 시대에 여전히 고유의 전통과 정신으로 꼿꼿하게 살아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3派31世-목사공파 부(父) |
이름:안병종(安柄宗) 세:31세 부(父):안하원(安夏源)
安柄宗(병종)/尺山
生父 安唐源
初名은 安鳳中이고 字는 海吾이며 號는 那山이고
一九○六年丙午二月二十五日 生이며 一九八五年乙丑二月初九日에 卒하니 壽七十九다
墓는 黃堡里山一番地乾坐이며 表石有하다
配는 平海黃氏이며 一九○六年丙午四月十二日生이고 一九七九年己未九月初八日 卒이며
父는 錠九이며 祖는 致敬이고 曾祖는 璇이며 外祖는 大興白萬運이다
○墓는 梧谷里山一番地子坐이며 表石有하다
后配는 慶州李氏이며 一九一○年庚戌十二月二十六日 生이고
一九八五年乙丑正月初四日 卒하다
○墓는 黃堡里山一番地 申坐이다
3派32世-목사공파
이름:안호렬(安虎烈) 세:32세 부(父):안병종(安柄宗) 관계: 子
安虎烈(호렬)
2-51◁
字는 君弼이며 一九三四年甲戌十月初六日 生이고 內務部長官 孝行賞을받다
配는 潭陽田仲妊이며 一九三一年辛未十二月二十六日 生이고
父는 一重이며 祖는 光瑚이고 曾祖는 哲秀이며 外祖는 英陽南容直이다
32세 안호렬(安虎烈)님의 직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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