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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로새서 2장9절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성+인성이라고 말입니다. 골로새 교회 이단들을 언급하면서 당시 예수님의 완전한 인간됨, 완전한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그럴 듯 해 보이지요.
요한일서 4:2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한이서1:7절에는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마치 예수님의 완전한 사람됨과 완전한 하나님됨을 강조하는 것 같아 보일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 예수님의 신성을 분류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보는 관점은 예수님을 신성 인성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예수님을 보는 관점과의 차이입니다. 마귀가 이것을 노리고 있지요. 궁극적으로는 마귀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 동일합니다.
마태복음4장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마귀가 예수님께 신성이냐 인성이냐를 따졌습니까? 아닙니다. 마귀는 이렇게 시험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덩이를 만들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시편91편10절 말씀이 너에게 이루어지는지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는 겁니다.
세 번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문구가 없지요.
그런데 본문을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4장8-9절입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 시험의 내용이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 어떤 시험으로 보입니까?
광야시험이후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과 인간들의 반응을 보게 되면 이 시험의 의미가 밝혀집니다.
실상 산상설교에 근거하면 말씀으로 살 인간 없습니다. 오직 한분 밖에 없지요. 사람의 아들밖에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시험치 않는 분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을 위한 말씀으로 바꿔치기 합니다.
마태복음16:1절 이하를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했습니다. 자신들이 마귀새끼라는 사실은 모른 체 마귀 짓을 하는 겁니다. 보여주면 믿겠다는 겁니다. 지금 자신들 눈앞에 자신들의 심판주가 계셔도 믿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상태임을 알지 못합니다.
결국 이러한 시험의 최종상태가 십자가 사건입니다.
마태복음27:39-44절을 봅시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귀가 시험한 그 능력은 결국 인간들이 예수님을 시험한 시험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 달려 힘없이 죽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도 구원하고 타인도 구원하는 능력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야 관찰자, 구경꾼 입장에서 이 말씀을 보기 때문에 예수님을 동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급한 일이 생기면 예수님을 부러지 않습니까?
건강하게 해 달라고, 부자되게 해 달라고, 사업 성공하게 해 달라고, 자식 잘되게 해달라고, 좋은 아내 좋은 남편 만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요구하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세 번째를 보게 되면 세상권세와 영광입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세 가지 시험이 겹쳐져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말씀이 자신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떡이 자신들을 살린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이 먹고 살기에 아주 좋은 세상을 만드는 중교한 계기가 되는 겁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다윗 왕을 담고 있습니다. 강력한 힘과 부를 소유한 다윗왕, 예수님께서 진짜 유대인의 왕이라면 세상권세와 영광을 다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왕이야 말로 이들은 바라고 소망한 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힘없이 죽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 모습이 아니지요. 누가 이런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겠습니까? 함께 죽는 강도도 비웃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후손들에겐 하나님의 아들의 이미지가 확정적입니다.
바로 마귀가 원했던 하나님 아들 상 말입니다.
신성 인성을 말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분으로 이해하는 자들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서 신성이 필요했고 인성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성경을 읽어보면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신성 인성이 나옵니다. 문제는 신성 인성 나눈다고 해서 그곳에서 죄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들의 종교욕구만 더욱 더 발산 될 뿐입니다.
신성 인성을 나누고 그 내용을 알아 내가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구원된다는 겁니다. 제가 너무 무식하게 이야기 하는가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신성 인성을 나누지 못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가두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두어져 있다는 말은 우리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둠에 속했기에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그들을 어둠이라 단정해 버렸습니다. 죄인이라 확정시켜 버렸 습니다. 뱀의 혈통이라 했습니다. 마귀의 자식들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분노하고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자신들은 자신들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뱀의 후손이 아닙니다. 마귀의 자식이 아닙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겁니다.
이런 자신들을 향해 새파랗게 젊은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을 심판주라 하니 가만히 놓아 둘 수 있겠습니까?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 하나님의 아들, 남은 구원했다는 이들의 비웃음의 의미는 결국 예수라는 인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만하는 허풍쟁이요, 정신병자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을 보세요.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하니 사람들은 온갖 상상을 합니다. 우아 예수님의 육체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는구라라고 말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이런 모습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항상 마귀가 심어준 사고로 성경을 읽습니다.
자신은 이미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으니 이 말씀쯤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육체에 신성이 충만함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예수님의 육체에 신성이 충만함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신성의 능력으로 자신들의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고 믿습니다.
최근 연예계의 뜨거운 감자가 박보검 아닙니까?
이초석 예수 중심교회 목사의 안수를 받고 살아났다는 간증을 읽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체험을 하고 싶잖아요. 물론 댓글에는 이단이라 낙인 찍어서 아주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치고 신성을 마다할 인간 있을까요?
예수중심교회라는 말이 얼마나 좋습니까? 신천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런데 이들 이름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이름이냐는 겁니다. 바로 마귀가 시험한 예수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의 아들 행세 해 보라는 겁니다.
나를 구원해 보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상황이 나옵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출애굽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왕도 그 신적 능력을 맞보았습니다.
문제는 바로의 마음입니다. 분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신적 능력보다 더 중요한 나, 내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바로라면 이런 짓 안할 것 같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놈은 누구나 제거하겠다는 것이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홍해 앞에선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신적 능력은 죽음의 위협 앞에선 아무런 소용 없습니다. 자신을 자존심을 살리고 자기를 살려야만 신적능력입니다.
우리 같으면 기도했겠지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그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사실 지금 그런 외침을 외치는 중입니다.
10-12절입니다.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두려우니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신적 능력을 보여달라고 말입니다.
그 부르짖음 배후에는 바로 뒤에 나오는 말들이 깔려있습니다. 배경음악이지요.
배경음악이 살고 싶다가 흐르고 그 위에 여호와께 부르짖는 소리가 납니다. 이들의 본심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애굽 사람을 섬기더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강도가 예수님을 향해 너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라는 외침이 이런 외침입니다. 한가롭게 비웃는 비웃음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이미 사망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늘 두려움 속에 살지요. 그 두려움을 없애줄 신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면 아들 행세를 해 보라고 조롱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보기에 단순한 조롱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부르짖음입니다. 간절한 기도입니다. 살려 주세요.
이것이 바로 신성을 믿는다고 하는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과 신성의 충만을 중첩하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인간들은 신성의 충만을 십자가에서 찾지 않습니다. 신성의 충만을 십자가를 통과 해서 부활의 능력에서 찾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에 자신들도 함께 죽었고 죽은 자신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 현 상황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워지는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실 예수님, 즉 진짜 아들을 증거하기 위한 가짜 아들 노릇을 하기 위해 출애굽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가짜 아들임을 제대로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진짜 심판주가 되셨습니다. 이분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심판주로 인해 구원받은 자들의 삶은 이 분의 삶을 반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조롱받았습니다. 미움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아는 성도들도 이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겠습니까? 비웃음거리 밖에 안 됩니다.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사람들은 그 피를 증거하는 사람을 무엇으로 평가내립니까?
네가 만일 진짜 주님의 종이라면 성도수가 많아져야 되고, 예배당도 있어야 하고, 사례도 많이 받아야 하고, 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고, 바다 위를 걸어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물론 인간들은 약아빠졌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기에 과하다 싶은 것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들 입장에서 꼭 필요하고 요구할 만하다 한 것은 반드시 요구합니다.
십자가 피만을 전하면 사람들은 십자가 피를 전하는 사람을 예수님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이 말이 참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을 이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모릅니다.
이미 예수님처럼 살고 있는데 저들은 모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처럼 살면 죽습니다. 미움 받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원하는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존경의 대상, 흠모의 대상, 누가 봐도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삶입니다.
그런데 피를 전하는 사도바울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10절 상반절을 보면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고 인간들은 더 발악을 합니다. 그래 우리도 신성충만이 되었으니 골로새서 후반부에 나오는 말씀처럼 살수 있다고 우겨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지금 주님이 공격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이 사람들로부터 미움받고 조롱당했듯이 너희 성도들도 피를 증거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간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성도는 성령받은 자들을 일컫습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님의 것만을 증거하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받은 성도는 그 피만을 증거할 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성도는 반드시 죄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말씀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합작품입니다. 말씀이 역사하게 되면 우리가 간직하고 있던 것들이 드러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자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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