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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기까지의 과정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행정의 보좌가 보임 하나님의 행정의 내용은 일곱 인으로 구성되었고 인을 떼실 이는 사자 - 어린양으로 정해짐
<첫째인>~<네째인까지> - 세상의 모양과 본질이 보임 <다섯째인> -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혼들의 신원하는 기도 <여섯째인> - 땅의 임금들과 왕족, 장군, 부자, 강한 자, 종자주자에게 하나님의 진노 <삽경(1)> - 하나님의 인 맞은 144,000과 흰 옷을 입은 큰 무리 <일곱째인> - 또 다른 천사가 성도들의 기도에 향을 더함으로 땅에 쏟음 - 일곱 나팔이 예비됨 <첫째 ~ 넷째 나팔> - 자연계(수목, 바다, 강, 천체)의 재앙 <다섯째 나팔> - 무저갱의 사자가 나옴(황충의 모양으로) <여섯째 나팔> -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음성이 남 - 유브라데에 결박된 네 천사가 놓임(사람 3/1을 죽이기로 예비 됨) <삽경(2)> - 힘센 다른 천사가 작은 두루마리와 금 갈대를 줌 - 두 증인에게 권세를 줌 - 짐승이 그를 죽이나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감 <일곱째 나팔> - 하늘에 큰 음성이 나서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를 선포함 -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경배함 - 하늘에 잇는 하나님의 전이 열림 <삽경(3)> - 여자와 사내아이의 휴거 - 여자와 용의 전쟁 - 두 짐승의 활동 <삽경(4)> - 어린양이 144000인과 함께 시온산에 섬(첫 열매) - 세 천사의 경고 - 익은 곡식을 거둠(수확물) - 진노의 포도를 짓밟음
하늘에 크게 이상한 다른 이적이 보임 짐승과 그 형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긴 자들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위에 서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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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림
증거 장막의 성전이 지금 열렸다. 지성소이니까 법궤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지성소이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다. 성전 속에서 가장 깊은 곳이니까 지성소이다.
4. 보좌 - 하나님의 행정의 중심
맨 처음 4장에서 보좌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하늘에 왕좌가 있었다는 말이다. 중앙청이 있는 곳에 왕좌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행정의 중심이다. 통치의 중심이다. 이것은 교회나 교회 아닌 곳에나 온 우주에 대한 통치의 중심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원칙적으로 온 우주의 행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그런데 그분의 행정을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 자기 자신의 표현을 위해 있는 것이다. 가령 임금들이 통치를 한다는 것이 자기 권세를 부리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목적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왜 표현하는가? 자기를 표현하면 사람들이 살게 된다. 은혜를 입게 된다. 그분 자신은 형상이 없는 분이니까 어떻게 하든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갈망이다.
그래서 4장에 있던 행정의 보좌는 11장에 오면 표현의 보좌로 옮겨지게 된다. 성전으로 옮겨진다. 우리가 이런 일도 할 수 있고 저런 일도 할 수 있고, 능력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을 가지고 세상에서 잘났느니 못났느니 하고 있는데, 우리의 궁극적인 소원은 그것보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아주 아름답게 아주 완전하게 살고 표현될 수 없는가가 우리의 소원이다. 이것만 표현되면 능력이 없어도 문제가 안 된다. 이것만 온전하게 표현되면 좀 잘못 살아도 부끄럽지 않다. 자존심 상하거나 열등감도 없어진다. 이것이 안 되니까 세상에서 내가 잘났느니 네가 잘났느니 하고, 잘난 사람을 만나면 또 열등감 생기게 된다. 내가 돈이 좀 있는 줄 알았는데 더 많은 사람을 보니 자존심이 상한다. 내가 잘난 줄 알았는데 더 잘난 사람이 있으니 자존심이 상한다.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은 끝이 없다. 이런 사람은 왜 그런가? 표현이 없어서이다. 참된 자기 자신의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도 표현의 중심을 옮겨와야 된다. 하나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표현의 중심인 표현의 보좌로 옮겨와야 된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표현의 보좌가 되어야 한다. 표현의 보좌가 되려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행정의 보좌 가운데 있을 때는 나는 감추어져도 된다. 나는 가려지고 일만 잘하면 된다. 능력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표현의 보좌로 오게 되면 자기 자신이니까 자기 자신이 어떻게 안 되면 안 되는 일이다. 금은 금으로 밖에 안 되고, 은은 은으로 밖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금을 아무리 나쁘게 하려 해도 나빠질 수가 없고, 은을 아무리 좋게 하려 해도 은 이상으로 좋게 될 수가 없다. 그것은 존재에 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은 마지막에 여기서 열매가 거두어지게 된다.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렸다는 것은 표현의 중심의 중심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증거가 되고, 증거는 그리스도가 된다. 그리스도 자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능력과 업적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그분의 존재와 그분의 인격에 관심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런 능력과 업적의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바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분의 인격 안으로, 그 인격을 잡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여기서 여러 가지 표현들이 나오게 된다. 이런 표현 저런 표현이 나오게 되는데 그런 표현을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 잘못됐다거나 이단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업적의 세계에만 있으면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홍해바다를 갈랐다고 하면 누구든지 아멘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아멘 할 것이다. 모르지만 아멘 한다. 그리고 성경대로 한 것이므로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의 인격과 내가 접촉해서 그분의 인격을 통해서 내 인격이 표현될 때는 이것은 주관적이다. 주관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 표현한 것을 다른 사람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홍해바다가 갈라진 것을 꼭 200만이 다 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길 수가 있는데 오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도 어떤 이적을 행할 때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다. 그런데 그분 자신에 대해 말한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자신을 표현하는 문제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든가 하나님께로 왔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참람하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오늘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행한 일을 제기하면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면 아무도 오해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때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행정의 보좌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표현의 보좌로 옮겨와야 된다. 그래도 그 세계에서 하다보면 온전해질 것이다. 행정의 보좌에서는 아무리 가도 행정이다. 끝까지 가도 행정뿐이다. 그런데 표현의 보좌로 중심이 옮겨지면 비록 그것이 서툴고, 또 사람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한 것이 표현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거기서는 희망이 있다.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희망이 있다. 우리 교회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보다 일반 기독교인들 보다 다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못한 사람들일 수가 있다. 그런데 무엇이 희망이 있는가? 이 성전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표현의 중심으로 표현의 보좌로 옮겨왔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장차는 달라진다.
30년 전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젊은 사람들을 저렇게 풀어 놓고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데 뭐가 되겠냐고 했다. 분명 행정의 보좌 가운데서 했으면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그런데 표현의 보좌, 성전의 행정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비록 그때는 망아지처럼 뛰어 놀았지만 놀기를 어디에서 놀았는가? 성전 안에서 놀았다. 성전 안에서 놀다보면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밖에서 놀면 아무리 놀아도 제사장이 될 수 없다. 레위인이 아니면 제사장이 될 수 없다. 아론의 후손이 아니면 제사장이 될 수 없다. 그 안에 있어야 되는 것이다. 옛날에 벼슬을 다 같이 했는데, 전라남도 땅 끝에서 사는 사람이 급제하고 종로 1번지에 사는 사람이 급제를 했으면 다음에 어떻게 되는 줄 아는가? 처음엔 다 급제이고 장원이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보면 한 사람은 정승판서가 되어있고, 한 사람은 땅 끝 군수가 되어있다. 놀기를 그렇게 놀아서 그렇게 밖에 안 된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말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놀아야 되는가? 하나님의 표현의 중심인 이 보좌에서 놀아야 된다. 죽이 되던 욕을 얻어먹더라도 여기서 놀아야 된다. 지금 하나님이라고 하고 주님이라고 한다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잘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한다. 사람이 어떻게 신이 되겠는가? 신이라 한다 하여 신이 되겠는가? 하나님이라 한다 하여 하나님이 되겠는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상한 사람이다. 어떤 표현이다. 자기표현을 하는데 서툴러서 그런 것뿐이다. 서툴러도 한국말을 하면서 서툴면 결국 한국말을 하게 된다. 처음에 아이들이 말 배울 때 보면 한국말을 서툴게 한다. 그래도 결국 한국말을 하게 된다. 처음엔 내가 하나님 말을 서툴게 해도 차차 온전해져서 온전한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모세를 바로 앞에 하나님 되게 하겠다”는 얼른 듣기에 감당하기에 힘든 말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되겠는가? 시편에도 “내가 너희들을 신이라 하였거늘”하고 말한다. 하나님이라는 말과 뉘앙스를 구분하려고 우리말로 신이라고 번역했는데 사실상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내가 너희들을 하나님이라 하였거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도 그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행정의 보좌에만 있는 사람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 성전 안으로 들어와야 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예수를 참람하다 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나도 지금 시대가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그렇지 옛날 중세시대만 태어났다 하더라도 벌써 화형식을 당했든가 어떻게 됐을 것이다.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라 하고 주님이라 했는데 누가 살려두었겠는가. 정말 좋은 세상이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되겠는가? 주님이 되겠는가? 될 일도 아니고 될 필요도 없다.
1장부터 11장까지의 계시의 중심은 무지개가 있는, 언약이 있는 보좌, 즉 행정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12장으로부터 22장까지의 계시의 중심은 증거궤(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인 성전, 즉 표현의 보좌로 옮겨온다. 우리 인생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만날 때 행정의 보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차차 알다보니 표현의 중심에서 나오는 표현의 보좌에서 나오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아들의 음성을 들은 자는 살아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아들의 음성이라는 말은 표현의 보좌에서 나온 말이다. 아들의 음성이기 때문에 통치의 보좌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표현의 보좌에서 나온 말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한 집에 살 것이다. 아버지가 만약 그 성전에 계신다면 아들도 그 성전에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행정의 보좌, 행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결국 표현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증거궤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다시 성막이 되고, 그리스도는 다시 교회가 되고 백성이 된다. 성전은 표현이다. 성전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에 대한 표현이다. 성전은 어떤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성품에 대한 표현이다. 오늘 우리 교회는 행정(통치)적인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큰 사건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든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성전 건축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표현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 자체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바로 이 표현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굳게 잡아야 된다. 잘못 놓쳐버리면 아무것도 안 된다.
계시록을 보면 맨 처음 4장에 행정(통치)의 보좌가 나온다. 12장에 가면 성전이 나온다. 그 다음 마지막에 가면 새 예루살렘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면 다시 보좌가 나온다. 그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이다. 그 말은 통치의 보좌와 표현의 보좌가 하나가 됐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통치의 보좌이고, 어린양의 보좌는 표현의 보좌이다. 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하나님과 어린양으로부터 생명수가 흐르더라고 했다(16:17,22:1). 이 두 보좌가 하나가 됐다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왜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는가? 이 두 개가 갈라져있기 때문이다. 그날이 오면, 하나로 연합되는 이 자리를 알게 되고 보게 되면, 아마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통치와 표현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통치는 결국 표현을 위해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여러 가지 일들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표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를 왜 교회로 불러 놓았는가? 내가 갈 곳이 많았는데 왜 교회로 왔을까? 나는 어찌어찌 하다가 왜 교회로 왔을까? 올 때는 모두 통치 때문에 왔다. 와서는 어디로 갔는가? 그것은 표현의 보좌인 성전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결국 우리를 당신의 통치의 보좌에서 표현의 보좌로 옮기려고 하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이것이 연합된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생명수가 흐르더라고 한다. 이 둘이 연합되면 생명수가 흐른다. 하나님의 갈망은 표현적인 통치이다. 세상에서는 어떤 힘을 가지고 통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갈망은 초기에는 힘을 가지고 통치를 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능력으로 통치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는 방식은 표현적인 통치를 원하고 있다. 당신 자신이 표현되는 그 자체가 통치되는 것을 원하고 있다. 힘을 가지고 통치하는 것은 항상 이원적이다. 나는 나대로 있고 내 힘은 힘대로 있다. 대통령과 대통령의 권력은 다르다. 그래서 그 권력은 뺏길 수도 있고 침해당할 수도 있다. 대통령 자체가 권력이고 권력이 대통령이면 갈라질 수 없으니까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대통령과 대통령의 권력은 다르기 때문에 5년이 지나면 내놓아야 된다. 지금 1년 반밖에 남지 않아 아쉬울 것이다. 그러니 둘이 하나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겠는가.
하나님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능력을 가지고 통치하면 사탄도 능력을 가지고 통치한다. 이 세상을 보면 얼마나 사탄의 능력이 엄청난가. 하나님이 능력을 발휘한다 하여 완전하게 통치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인 통치는 표현적인 통치이다. 그분 자신이 표현됨이 바로 통치가 되는 것이다. 태양은 피곤하지 않다. 억만년 동안 빛을 발하고 있지만 피곤하지 않다. 왜? 표현적인 통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빛이기 때문에 전혀 피곤하지 않다. 그런데 돌이 빛을 발휘하려면 항상 빛을 사와야 된다. 돌도 두드리면 불이 번쩍번쩍 일어나므로 계속 두드려야 된다. 사람들은 그 번쩍거리는 것을 보고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태양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고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통치가 되는 것이다. 태양은 가만히 있다. 옷을 벗으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 벗는다. 외투 입고 나온 사람, 두꺼운 옷 입고 나온 사람보고 너 왜 두꺼운 옷 입고 나왔느냐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존재하고 있으면 저절로 더우니까 벗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쉬운가.
존재적인 통치이고 표현적인 통치!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갈망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우리가 존재하는 존재 자체가 그것이 사랑이 되고 그것이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된다면, 내가 일부러 축복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축원하노라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한다고 사실은 축복이 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 축복이 나간다면 나는 하루 종일 하고 있겠다. 잘 살라고 결혼식 할 때 축복을 해놓았는데 나중에 이혼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가 안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갈망은 표현적인 통치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또 우리 대구교회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또 내가 30년 동안 무엇을 이야기하는 가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표현적인 통치!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은 마침내는 어린양 안에 계신 분이 된다. 보좌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어린양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보좌는 다시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어린양 자체가 보좌이기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친히 성전이 되십니다” 하는 이 말은 친히 지성소가 된다는 말이다. 친히 보좌가 된다는 말이다. 얼마나 이것이 완전한 세계인가!
세상에 모든 것이 왜 실패했는가?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이론과 사람이 틀리기 때문이다. 이론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나눠먹고 살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사람이 욕심이 하나도 없어야 된다. 절에 가서 평생을 수도를 해도 욕심이 없어지지 않는데 공산주의 교육받고 수양한다고 욕심이 없어지겠는가. 돈을 못 갖게 되면 권력을 가져야 되고, 권력을 못 갖게 되면 돈을 가져야 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다 똑같이 나눠먹고 살자고 해서 나눠먹고 사는 것은 되는데 욕심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왜 안 되는가? 표현적인 통치가 안 되기 때문이다.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서 강화하고 또 강화하고 무기를 만들고 더 만들고 채찍을 만들고 더 만들고 해서 통치를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통치는 표현으로 가기위한 통치이다. 이 하나님만이 영원히 승리할 수 있다. 사람은 이것이 불가능하다. 무기를 더 생산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표현적인 통치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격이 바뀌지 않고는, 죽고 다시 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다 실패이다. 보좌는 영원히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원래 하늘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성전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성전은 표현되는 것이고 건축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필요하고 계속해서 건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간증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는 것이므로 영원하다. 그것은 손댈 수도 없고 손댈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표현은 누구를 통해서 어느 시대에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서 다 다르다. 모세시대의 표현이 다르고 여호수아시대의 표현이 다르고 다윗시대의 표현이 다르고 예수시대의 표현이 다르다. 바울시대가 다르고 오늘 우리시대가 다르고 그것은 계속적으로 표현되어야할 성질의 것이다. 그래서 건축이 필요하다. 간증도 한마디 하고 끝나면 말지 왜 또 하느냐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똑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대구교회에 와서 얘기를 들어보니 10년 전에 들어본 얘기나 지금 들어본 얘기나 내용은 다 똑같아서 머리 좋은 사람들은 한번 암기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왜 계속 하는가? 표현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간증은 계속되어야 한다. 간증으로 교회는 건축되어진다. 간증이 없고 수능 시험 보듯이 0표하고 X표하면 교회는 건축이 안 된다. 똑같은 소리를 해도 늘 해야 한다. 똑같은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똑같은 소리가 아니다. 표현이기 때문에 똑같은 소리가 아니다.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지만 사람이 자라나면서 같은 말을 해도 같은 말이 아니다. 늘 자랄 때마다 그 안에 내용은 달라진다. 언어는 제한되어 있다. 우리 한국말은 30만 어휘이면 30만 어휘로 제한되어 있다. 그 이상의 단어가 없다. 그 이상의 단어를 쓸 수가 없지만 속에 있는 것은 늘 새로워지고 달라지고 있다. 문명이 오래되고 문화가 발달하면 언어가 많아지는 법이다. 비문명국가일수록 언어가 적고 문명국가일수록 언어가 많다. 하와이나 이런 섬 같은 곳에 가면 자기들의 고유한 말이 있는데 단어가 500개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배우기는 쉽지만 그것이 다양한 표현이 안 되기 때문에 500개밖에 안 된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영어는 어휘가 엄청나게 많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표현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간증을 계속하는데 새로운 언어가 계속 나오면 정말 좋겠지만 언어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늘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새로운 단어가 나오기는 하지만 늘 같은 말인 것 같다. 그렇지만 속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자기 머리 좋다고 이것은 0표 이것은 X표 이렇게 끝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 사람을 알아야 되고 그 사람 속에 무엇이 움직이는 가를 알아야지 저 소리 작년에 하더니 또 하네, 지난주에 나와서 하더니 또 하네, 이러고 있으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그것은 그냥 문자만 알고 음성 소리만 아는 것이지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라고 하면 안한다. 똑같은 말을 돈 주면서 하라고 해도 안한다. 질려서 안한다. 똑같은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자기 속에는 다르므로 한다. 간증은 계속되어야하고 이 간증으로 교회는 건축되는 것이다.
C. 일곱 천사가 성전에서 나옴
1) 제사장 같음
일곱 천사가 성전에서 나왔다. 제사장 같은 옷을 입었다. 밝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금띠를 가슴에 띠었더라(계44:17 참조) 이것은 분명히 성전이다.
2) 후기의 이기는 자들의 찬양으로 유발됨
후기의 이기는 자들의 찬양으로 유발 되었다. 왜 성전이 열렸는가? 열린 배경이 유리바다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찬양 때문에 열린 것이다. 하늘은 항상 땅에서 열어야 열린다. 땅에서 열지 않으면 하늘은 열려있지 않는다. 다섯째 인에서는 6장에서 보면 순교자들의 신원하는 기도가 있었다. ‘우리 피를 언제까지 버려두겠습니까? 언제까지 불의한 자가 왕성하도록 놔두겠습니까?’ 하는 신원하는 기도가 있었더니(6:9·11) 하나님의 심판이 나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15장에서는 신원하는 기도 대신에 찬양이 나왔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생겼는데 기도에서 찬양으로 바꾸어졌다.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면 좋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경륜을 보니 기도의 경륜에서 찬양의 경륜으로 바꾸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경륜이 통치의 보좌에서 표현의 보좌로 옮겨진 것과 같이 우리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응답도 기도에서 찬양으로 바꾸어졌다는 것이다. 기도하고 찬양은 다른 것으로 알지만 다른 것이 아니다. 신원하는 기도에서는 하나님이 심판을 내렸다. 억울하다고 하므로 심판만 내렸다. 그런데 찬양을 하니까 억울하다는 말이 아니다. 찬양한다는 말은 신원하는 말이 아니다. 물론 이 사람이 원래 신원하던 사람이었겠지만 옛날에는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우리 피를 언제까지 안 갚아 주겠습니까?’ 하던 사람이 지금 그것 대신에 찬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찬양을 할 때는 신원이 없다. 그 속에 신원하는 원한이 있으면 찬양을 할 수가 없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이나 자주 부르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좋다. 마음이 안 좋은 사람은 노래를 안 부른다. 교회에서 노래를 불러도 자기 혼자 입 다물고 안 부른다. 유행가라도 늘 부르는 사람은 속이 좋은 것이다. 전혀 안하면 속이 메마른다. 기도 속에는 원한이 있을 수 있다. ‘억울합니다, 하나님 억울합니다’ 할 수 있지만 찬양을 하면서는 ‘억울합니다’하고 찬양을 할 수가 없다. 신원하는 기도에 대해서는 단지 심판이 나왔다. 단지 심판이고 심판이외의 다른 것이 없다. 찬양을 하게 되므로 성전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건축을 유발 시켰다. 그 속에는 새로 짓는 것이 생긴다. 심판은 파괴시키는 것뿐이지만 건축은 세우는 것이다.
여기서 경륜이 바꾸어지는데, 처음에 신원하는 기도를 통해서는 완전히 부수는 것만 나왔지만 찬양하는 이 찬양을 통해서는 부수고 건축하는 것이 나왔다는 말이다. 어떤 곳에 가면 중기 포크레인 같은 것으로 부수는 곳이 있고 어떤 곳에 가면 부수지만 건축을 하려고 부수는 곳이 있다. 이렇게 바꾸어 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원하는 자리에 있으면 건축이 불가능하다. 파괴는 시킬 수 있지만 건축은 불가능하다. 찬양을 하면 파괴도 하고 건축도 한다는 것이다. 옛집을 허물면서 새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이 찬양이 완전하게 되면 파괴시킬 것도 없어진다. 심판의 중심인 보좌는 증거가 중심인 성전으로 이동되고 있다. 오늘 우리도 신원하는 기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로 바꾸어져야 한다.
D. 금대접 일곱 개가 일곱 천사들에게 주어짐
1) 금대접 -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히 담겨있음
왜 놋대접이 아니고 금대접인가? 놋은 단순한 심판의 상징이다. 금은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금에다 왜 진노를 담아 놓았는가? 이것이 진노가 있지만 생명도 있다. 파괴도 있지만 건설도 있다는 것이다. 건설적인 파괴이고 건설적인 심판이 왔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심판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위해서 부셔버린다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사망이 사라지고, 건축이 생기게 된다. 생명이 없는 곳에는 다 쓸어 놓아도 도로 죽음이 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죽음이 좀 있더라도 거기다 생명을 뿌려놓으면 그 씨가 나와서 결국은 생명이 덮어 버린다. 한 단계 높은 것이다. 금대접은 생명의 승리로 건축한다는 뜻이다. 전에 것과는 다른 것이다. 전에는 그냥 벼락치는 것이지만 이것은 금대접 안에 들어있는 진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 진노이지만 그 안에 살리는 것을 위해서 진노한다는 뜻이다. 단순한 심판이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내려진 심판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심판이다. 성전 안에 있는 심판은 멸망시키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건축하기 위한 심판이다. 교회 안에 있는 심판은 멸망하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건축하기 위한 심판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심판을 받는다하면 그것은 밖에서 받는 심판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밖에서 받는 심판은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고, 성전 안에서 받는 심판은 살리기 위한 것이다. 병원에 들어가서 수술하게 되면 곪은 것을 째내고 고름을 빼내는데 그것은 새살을 나게 하려고 고름을 빼내는 것이다. 고름이 차있으면 새살이 나지 않으므로 병원에서는 째서 고름을 빼내야만 새살이 나오게 된다. 병원 밖에서는 무조건 째버린다.
2) 네 생물 중 하나에게 받음
네 생물중 하나에게서 받았다고 했는데, 네 생물은 4장 6절에는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있었다고 표현 되었다. 이것은 사자 모양 같고 송아지 모양 같고 사람 모양도 같고 독수리 모양도 같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 네 생물은 무엇인가? 이것은 물론 피조물을 대표한다고 말하지만 자세히 보면 에스겔서 1장 10절에 보면 네 생물이 나온다. 계시록 4장 6절에 나오는 네 생물은 에스겔서 1장 10절에 나오는 네 생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얼굴의 모양을 보니 앞은 사람의 얼굴이고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고 왼쪽은 소의 얼굴이고 뒤쪽은 독수리의 얼굴이라고 되어 있다. 결국 전면은 사람이다.
에스겔서 1장 5절에 가니 “네 생물의 형상은 사람의 모양이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사람은 피조물의 대표자를 이야기 한다. 그 날개는 서로 연하여져 있다. 날개는 움직이는 것인데 서로 연하여져 있고 하는 말과 행동은 하나라는 뜻이다. 생물이 넷인데 행동은 하나라는 뜻이다.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 보면 일제히 움직이는데 머리가 가고자 하는 원하는 대로 똑같이 가더라는 것이다. 앞으로 가다가 뒤로 가다가 옆으로 가다가 마음대로 가더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행동은 하나라는 뜻이다. 넷으로 표현되지만 하나라는 뜻이다.
날개 밑에 사람의 손 모양 같은 것이 있더라고 되어있는데, 거기서 가는 베옷을 입은 자에게 하는 말이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가지고 성읍에 흩으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과 여기 나오는 말이 같은 말이다. 금대접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땅에 쏟으라는 말도 여기서 모두 개념이 나온 것인데 이것은 결국은 사람이다.
사람은 곧 人子이고 人子는 곧 그리스도이다. 사람 중에 사람 참사람 그 사람에게서 이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천사에게서 받을 때는 심판뿐이었는데 人子인 사람에게서 진노를 받을 때는 건축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천사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듣느냐 아니면 하나님 아들로부터 듣느냐는 차이가 여기 있다. 천사로부터 들으면 심판 아니면 사는 것이므로 죽기 아니면 살기 두 가지밖에 없지만 人子로부터 받을 때는 살리기 위한 것이므로 심판을 받아도 사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냈는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네 생물은 하나다. 결국 네 생물 전체적인 것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이런 순서로 되어있는데 사자는 왕권을 상징하고 송아지는 제사장을 의미하고 사람은 人子를 의미하고 독수리는 그 영을 의미한다. 이것을 보면 사자와 송아지를 합하면 왕 같은 제사장이고 사람과 독수리를 합하면 人子로 오신 그 영이다. 왕 같은 제사장에다 人子로 오신 그 영이므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고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에게서 금대접에 진노를 받았더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쉽게 말하면 그냥 하나님, 하늘에 계신 그냥 하나님, 과정이 없는 그냥 하나님, 그 하나님은 아직 사자나 송아지나 사람이나 독수리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무자비 할 수도 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으면 무자비 한 것이 많다. 아무리 그렇다고 애굽 사람들을 홍해바다에 다 빠뜨려 죽여 버린다든지 여리고 사람들을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다 죽여 버린다든지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 씨를 남기지 말고 죽이라든지 이러는데 그냥 하나님은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냥 하나님을 좋아하면 안 된다. 과정을 거쳐서 오신 하나님이라야지 그냥 하나님을 좋아하다가는 큰일 난다는 것이다.
과정을 거친다는 말은 그 분이 우리에게 도달해서 우리로 하여금 건축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과정을 거쳤다는 뜻이다. 우리가 전기 자체를 가지고는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전기를 만지면 죽는다. 전선을 통해서 등을 통해서 빛을 쓸 수가 있다. 우리는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밝은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과정을 거쳐 온 전기이기 때문이다. 약도 마찬가지로 독한 약도 오랫동안 다려 먹는다던지 또 어떤 것과 섞어 다린다든지 할 때는 약이 순해진다. 그래서 내 몸에 들어와서 거부 반응이 안 일어나도록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기 자체의 소리를 듣는다면 뇌성벽력을 듣게 될 것이다. 그것이 콘덴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오면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과정을 거쳐 나온다는 것이다.
과정을 거친 그 하나님을 만나야 살지 그냥 하나님을 좋아하면 안된다. 그냥 하나님 좋아하면 잘못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산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을 만나면 반드시 죽는다고 되어있다. 하나님을 만났는데도 안 죽고 살았네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쉽게 있겠는가? 여기 계신 분 가운데도 하나님 만나고 살 사람이 있겠냐는 것이다. 우리가 과정을 거쳐 오신 그 분을 만났으니까 우리가 마음대로 잘못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지 우리가 그냥 하나님을 만나면 털끝만큼만 잘못해도 가차 없이 목을 쳐야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심판하고 건축하신 분이다.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명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취하라”(겔10:6). 복합적인 네 생물로 상징된 그리스도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로 복합되어 있다. 이렇게 상징된 그리스도가 진노의 금대접을 주었는데 이 진노의 금대접은 건축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E.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가득함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가득하더라. 연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상징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이것은 심판과 관계되기도 한다. 그것이 꽉차있는데 이 진노가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거기를 들어갈 수가 없다고 되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말리지 말라는 뜻이다. 이제 참을 만큼 참았고 할 만큼 했으니 누구도 더 말리지 말라는 뜻이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이다. 아무도 하나님이 하신 그 일에 대해서 더 이상 기도한다든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좀 기다려 주십시오 한다든지 고쳐주십시오 한다든지 좀 참아주십시오 하지 말라는 것이다. 금대접에다 진노를 담았으므로 건축하기 위해서 심판을 하는 것이므로 더 이상 와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한다든지 형을 감해 주십시오 한다든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기고 나와서 진노의 대접이 준비 되었다. 건축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12장 이후는 건축으로 가는 것이다. 보호를 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동안은 백성들을 보호했다. 어떤 이유로든 보호를 했다. 그때는 하나님의 행정이므로 심판이 있었다. 승리를 하고나서 백성들이 이기고 난 다음에 하나님 보좌가 성전으로 바꾸어지고 나서 건축을 위해가게 되었다. 표현으로 가게 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경륜의 약속은 행정의 보좌, 통치의 보좌에서 표현의 보좌로 옮겨가는 것이다. 우리도 당연히 건축 안으로 옮겨가야 된다. 행정에서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건축 안으로 옮겨가야 된다. 건축 안으로 옮겨가야 그 분의 표현이 될 수 있고 그 분의 표현이 되어야만 그 분의 갈망이 채워질 수가 있다. 하늘의 보좌는 통치와 심판을 위한 것이었다.
인봉한 책을 받는 어린양이 나오므로 여섯 인의 심판이 나왔다. 이것은 자연계에 대한 심판이었고 향단의 기도가 나오므로 나팔의 심판이 나왔다. 자연계와 거역하는 자들의 심판이 나왔다. 두증인의 예언이 나오고 휴거를 하므로 일곱 나팔이 불어졌는데 성전이 열렸다는 것이다. 비로소 우리가 사람 편에서 두증인의 예언과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므로 성전이 열리더라는 것이다.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 열릴 것이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떻게 옮겨가면 하나님의 보좌도 옮겨간다는 뜻이다. 성전에서 언약궤가 보이고 이것은 표현과 건축을 위한 것으로 옮겨갔다.
12장에서 사내아이가 휴거를 하고 용이 쫓겨나게 된다. 여기서 수확물이 거두어지므로 포도송이가 거두어져서 진노의 포도주 틀에 밟아지고 그 다음에 유리바다 위에서 이기는 자들이 노래를 부른다. 그때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렸는데 진노의 일곱 대접이 금대접 위에 놓여졌고, 땅과 바다와 강과 해와 짐승의 보좌와 유브라데 강에다 쏟아졌는데, 이것이 아마겟돈에서 전쟁을 하기위해 모이더라는 것이다. 마지막은 큰 음녀와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건축을 위해서이다.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은 새 예루살렘이 건축되어야 하기 때문에 바벨론은 없어져야한다. 바벨론이 있고서는 새 예루살렘이 건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비하는 것이다.
19장에 가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나오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말미암아 백마군단이 나오는데 백마를 탄자와 그 군대가 나와서 땅을 정복하게 된다. 이것이 천년왕국이 되고 이 천년왕국 다음에 사탄은 불못에 들어가고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이 시작된다. 그런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오고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새 예루살렘이 나오면서 새 예루살렘 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통일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 이것을 어떻게 연극으로 잘 만들어 놓으면 정말 대단할 것인데 기억력이 없으므로 오늘 이야기한 것을 내일 가면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 번 들어서 기억력이 좋으신 분들은 이것이 한 머릿속에 쏙 들어가서 7막 7장 7절이 다 들어가 있도록 하고보면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과 하나님의 말씀의 마지막 결론이 어떻게 이렇게 명료하고도 아름답게 역사적인 소망을 제시하고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갈 바를 모르고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주님 당신의 명료한 말씀이 우리를 이끌고 당신이 계신 곳을 바라보게 하시고 당신의 거처를 사모하게 하시고 당신과 하나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저희에게 일으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당신의 소원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소원도 그러하고 당신이 그렇다고 할 때 우리도 아멘하는 이런 완전한 세계 안으로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하나로 만나졌을 때 생명수 강물이 흘러서 12가지 과일이 시절을 쫓아 맺히고 눈물이나 애통함이나 곡함이 다시없고 밤이 없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만 있는 한 세계가 우리 앞에 이렇게 밝히 보여진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세계를 바라보고 이 세계를 위해서 앞으로 가기를 원하고 우리 일생이 이 영광스러운 세계를 향해서 전진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