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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치관의 초점을 물질의 획득, 경제성장, 사유재산 축적과 과학의 무한한 발전에만 맞추어 놓는 '물질만능주의'가 초래한 정신적 빈곤은 <내세관의 전면적 무시>, <작죄필벌作罪必罰 원리의 부정>과 같은 종교적 성격의 두 가지 요소를 백안시하는 아마 석가와 예수가 통곡하고 있을 자못 무신론적인 경향을 보여 또 다른 측면의 염려를 불러오고 있다.
이런 관념상의 경향들은 인간 사회 속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오늘만 잘살면, 또 나와 내가 속한 집단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찰나주의, 한탕주의, 개인.집단 이기주의를 팽배시켜 윤리.도덕.질서의 붕괴, 부정.부패.사치.향락의 만연, 평등.평화에의 둔감.외면을 불러와 원래부터 이기성, 한시성 운명을 타고난 인류로 하여금 더욱 더 극성스런 이기주의성 시한부생을 살게 하는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물질(황금)제일(만능)주의, 찰나주의, 이기주의에 깊이 물든 사람들은 사색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정신의 빈곤'을 앓고 있는 그들의 눈에는 오직 물질밖에는 가치 있는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무엇'눈에는 '무엇'만 보이는 원리이다. 이렇게 정신이 빈곤하고 물질만이 풍요로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 중 하나에 자신의 빈약한 정신수준에 대한 보상심리의 발동으로 인한, 모자라는 지성知性을 물성物性으로 포장.위장하려는 무리한 동작들이 있다. 이 무리한 동작들은 모든 인간사회에서 한시바삐 추방되어야할, 그래서 세계 각국에서 일제히 특명 제1호로써 긴급명령을 발동, 조속히 추방해야 할, 또 우리가 앞서 여러 차례 짚어보기도 한 바로 그 <과소비.과시.사치.허영.탐욕.향락.부정.부패.기만.사기.이기적.개인주의.찰나주의.단순사고.무신론경향> 등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 특유의 정신적 빈곤의 늪에 자신들만 빠져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물질바람'이 워낙 거세어서 고요히 잠자던 타인의 '물질지향적 특성'을 건드려 놓고 말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바로 그 '오늘만 잘 살고 보자'주의인 '찰나주의'와 '나만 잘 살고 보자'주의인 극심한 '이기적 개인주의' 등의 '세기말적'이자 '종말예시적' 상황 속으로 몰아넣고 있어, 하나의 기우에 그치고 말기를 바랐던 그 '인과응보 법칙'에 의한 '인류의 종말'이 하나의 필연적 현실로 다가오는 듯하여 강한 불안을 금치 못하게 한다.
"물질이 풍요롭고 사회 복지정책이 잘 수립되어 있는 나라에는 오히려 자살율이 높다"
이런 보고 내용은 관심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일반상식이다. 그런데 그 보고가 사실이라면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물적 조건이 완벽한데 자살자가 많이 나온다? 왜일까? 물론 이런 내용은 인생을 오직 물질 획득의 과정으로만 보는 탐욕주의자 들의 귀에는 틀림없이 하나의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 보고 내용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하나의 아주 단순한 진리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물질이 높아지면 정신은 낮아진다'란 원리 때문이다.
물론 자살자들의 정신이 낮아졌다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높은 정신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정신적.신체적 결함이나, 극도의 성취불만 등 특별한 경우의 것을 제외하고는) 물력 높은 곳에서 정신적 비전을 기대할 수가 없어서, 물질의 강세에 억눌린 정신의 초라함이 주는 극심한 절망감 때문에 죽는 것 같다. 그렇다면 누구의 정신이 낮아졌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일부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의 정신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그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의 <낮은 정신>과 '자살자들'의 <높은 정신>이 서로 융화하지 못하고 충돌한 결과, 막강한 물력에 힘입은 전자는 육신의 힘이 더욱 강해져서 <높은 육신(물질)>+<낮은 정신>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대로 세상에 남아 있고, 물질의 괴력.마력을 거부해온 후자는 육신의 힘이 날이 갈수록 쇠진해져 종래에는 육신의 그릇 속에 담겨있는 정신마저 유린당할 위기에 쳐하게 되자 그 값진 '높은 정신'을 물적 야만과의 타협 없이 고스란히 보존하고자 탐욕에 물든 육신을 미련 없이 훌훌 벗어 던져버리는 단호함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살이란 형태로 나타났던 것일 뿐이다.
'높은 물질 + 낮은 정신'의 원리에 의한 문제점들은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물론 우리나라 안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사회생활 속에서 흔히 보는 현상으로, 물질이 풍부한 사람들은 대개 정신을 키우는 사색과는 잘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사색은 정신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높은 정신을 도외시한 지적수준은 하나의 기계적 지식 측정도에 불과하다. '지식이 많다'는 것은 지식의 물량적 면의 평가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지적수준'이 높다는 표현은 학력이 높다거나 독서량이 많다는 것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되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정신.사색의 문제는 거의 완전히 배제되어 있어 '지성知性'.'정신 수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래서 높은 학력, 많은 독서량이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인격적 가치를 인정받거나, 존경의 대상이 되거나 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가 아무리 많은 천문학적 수치의 지식을 확보해두고 있어도 인간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거나, 인격적 가치를 인정받거나 하지는 못함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독서에도 량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질을 강조해야 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한 줄 읽고 두 가지를 생각하는 태도이다. 읽은 후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태도의 독서법은 책 속의 내용에 최면걸려 자신의 독자적 판단을 잃거나, 아니면 책을 덮는 순간 읽은 내용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게 된다.
재론한다면 '높은 지성'은 오직 '높은 정신'에서만 나오고, 진정한 '높은 정신'은 '깊은 사색'에서만 나오는 것이다. 지(知.智)는 <정신.형이상>의 산물이지 <물질.형이하>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적 수준'이 높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수준'이 아니라 '지성수준'.'정신 수준'이 높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되고 사용되어야 옳을 것이다.
사실 '낮은 정신'의 물질만능이 빚어낸 인간세계의 참극과 폐해 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무수히 얘기해오기도 했지만 굳이 이런 지면을 빌어 지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가 매일의 사회생활 속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몸소 체험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수차례 언급한 적이 있듯이 인간 사회에서의 물질이 발생시키는 병폐는 아무리 많이 논의해도 결코 지나치지가 않은 것이다.
1995년 5월 4일의 방송 뉴스에서는 1억 5천만 원을 빚진 서울의 어느 40대 여인이 빚 받으러온 채권자인 50대 여인을 살해, 토막까지 내는 극악무도한 살인행위를 보도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다른 나라에서는 몰라도 한국에서만은 토막 살인과 같은 무자비한 범행은 일부 포악한 남성들의 전유물인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남성보다 약한 듯해서 더욱 아름다웠던 여성들까지도 그런 유의 짐승 짓을 해대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여자의 용감성.대담성을 높이 찬양해줄 것인가? 그리고 또 돈의 노예가 되고도 즐거워하는 인간의 '물질숭배 정신'에 동료애를 느끼는 것으로 끝낼 것인가? 아니면 막강한 물질의 힘에 맥을 못 추는 '인간 정신'의 유약함과 인간의 한없이 어리석음을 자조하고 자책할 것인가?
1994년 11월 21일의 뉴스에서는 대전시내 모 고등학교 학생이 여자친구 3명을 각각 40만원씩 받고 유흥가에 팔아 넘겼다는 내용이 방송되었다.
이 뉴스 내용은, 모르는 여자가 아니라 좋아한다면서 만나고, 만나주기를 바랐던 자신의 여자 친구를 돈 되는 물건으로 삼아 매매했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큰 충격과 절망감을 안겨주었는데, 사실은 그 남학생의 그와 같은 무자비한 짓거리가 스스로 고안해낸 '발명특허성 만행'이 아니란 데 본 문제의 더 큰 심각성이 있다. 그 소년의 그런 만행에 앞서 수많은 어른들의 야만적 행태가 줄을 이어 보도된바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네 어른들은 높은 보수를 미끼로 수많은 어린 소녀를 유인하여 윤락행위에 강제 투입시켰고, 춤집(무도장)에서 여인을 교묘하게 유혹하여 온갖 야비한 행각을 저질렀고, 자신의 자동차에 탄 여인을 몸도 뺐고 돈도 빼앗았으며, 길거리에서 여인을 납치 감금, 각종 유흥업소.윤락업소에 팔아 넘겼고, 직장 찾는 남자를 납치, 고깃배에 팔아넘기기를 밥먹듯 했으며, 남자만 날뛰는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지 이제는 앞의 예와 같은 여자들까지도 천벌을 비웃으며 악행의 무대에 당당히 등장한 게 아닌가!
이런 풍토 속에서 위의 남학생의 정신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그의 그 인면수심의 인신매매 행각은 누구에게 배운 비법이겠는가? 바로 우리의 어른들이 아닌가! 우리 어른들이 그 소년에게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시범을 보인 셈이다. 그리고 그 시범은 그와 같은 불량 청소년을 대량으로 생산해내게 되었으니, 그 소년은 자신의 입장만을 표명한 셈이 아니라 모든 청소년을 대신하여 어른들의 만행을 실감나게 규탄한 셈이었다. 물론 그 모든 야만행위 뒤에는 언제나 물질만능.황금만능이라는 현대문명의 수치스런 부산물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며, 이런 류의 악행의 기승과 그 배경이 어쩐지 인간사회의 파멸 혹은 종말의 '임박한' 도래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서 우리를 더욱 슬프고 난감하게 하고 있다는 얘기다.
부언 한다면 위에 보인 것과 같은 종류의 악성 참극들은 고질적 물질만능.황금만능이 빚어낸 정신의 빈곤에 기인한 '인간 심리의 변조현상變調現狀'으로서,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세계 각처에서 인간생활의 전면에 걸쳐 발생하고 있어,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생각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현상을 <인간사회의 종말 예시적 상황>으로 확신케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간심리의 변조현상'은 또한 앞서 지적한 것 같은 <과소비/과시/사치/허영/탐욕/향락/부정/부패/기만/사기/변질된 개인주의/찰나주의/단순사고單純思考/무신론 경향> 등의 다양한 문제점을 야기시켜 인간사회 전역을 어지럽히고 있어 '종말 예시적 상황'에 대한 우려를 대폭 가중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현상들을 앞서 몇 차례 지적해본 바 있고, 또 제2, 3부에서 더욱 다양하게 살펴볼 예정이지만, 여기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고 듣게 되는 사례들 몇 가지만 더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여기서는 찰나주의적 순간모면성 작태들 위주로 살펴보기로 하자)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깊은 계곡, 산소 풍겨 나오는 수목 우거진 한적한 산으로 휴식 취하러 가는 일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싱싱한 초록빛 나무 가지 아래 향긋이 풋내 나는 풀밭 위로 담요 한 장 깔고 누우면 여기는 바로 별천지. 콧속으로 신선한 공기가 넘나들고, 머리 위론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이며, 발밑으론 돌돌돌 시냇물 소리가 정다웁다. 저 멀리 농가에선 한가로운 송아지의 울음소리, 하늘 한 끝 어드멘가엔 비행기 소리도 은은하다.
저만치 떨어진 잔디밭에선 소리 없이 타오르는 가스 불, 그 위에 몸을 익히는 하얀 삼겹살 그 자태가 무척이나 탐스럽다. 그리고 그 고소한 향기라니! 그 상황에 매혹된 철수 아빠는 드디어 소주병에 손을 뻗쳐 철철 넘치게 부어 한잔 콱 들이키고, 노릇노릇 알맞게 익은 삼겹살은 입 속에서 그와 함께 정답게 사랑을 나누는데... 아하, 여기가 바로 낙원이요, 이것이 바로 신선노름이구나! 오늘도 내일도 이렇게만 살았으면, 천년만년 살았으면….
그러나 그렇게 천년만년 살기에는 "신선노름" 즐기려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천년만년 그렇게 살고 싶은 그들의 꿈은 그날 하루, 아니 어쩌면 몇 시간이나 몇 분에 그치고 만다. 너도나도 '신선노름'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특권은 원칙적으로 지상의 누구에게나 부여되어 있는 인류공통의 특권임을 그들은 알고 있으며,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향유하기보다는 주로 빼앗기며 살아온 우리네 한국인들에게는 오늘과 같은 자유상황하에서는 그런 특권을 한순간, 한치도 양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나가는 것이다. 쉬는 날만 되면 '신선'이 되겠노라 무작정 나가고 보는 것이다. 나가자니 차가 필요했다. 대중교통수단이란 불편함과 '자존심 구겨짐'을 동시에 안겨주는 영 맘에 안 드는 존재일 뿐이라서 더욱 그렇다. 할부로 차를 뽑아야 했다. 무리해서라도 되도록 큰 차를 뽑아내야 했다. 그리고는 돗자리에 취사도구, 낚시도구, 음식재료에, 온갖 양념에 음료수 간식까지 별도로 챙긴 후, 어른 아이 빠짐없이 성능 좋은 오디오 기기와 함께 올라타고 떠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길마다 도로마다 꽉꽉 매워 놓고, 너도나도 각종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그것을 자동차와 물질이 풍부한 잘사는 나라의 특별 소비세쯤으로 치부하며 감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놀이 장소에 도착하여서는 뭐 꼭 '신선'같은 것은 되지 못해도 좋았다. 남들이 하는 대로 나도 하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두통, 복통, 안질만 얻고 돌아와도, 즐겁자고 떠나 본 휴가 날의 행락 내용이 극도의 '기분 잡침'으로 끝나도, 모처럼 가장 위신 한번 확실히 세워보자 나갔다가 오히려 부부 싸움만 잔뜩 벌이고 돌아와도, 또 돌아온 후 내내 부부간에 냉전이 계속되어도 내년이 오면 또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자손 대대로 이어질 것이었다. 너도나도, 올해도 내년에도....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쓰레기도 함께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숨길 수 없는 진리이다. 한 가구가 놀다간 자리에도 쓰레기는 흉물凶物되어 남는다. 그런데 수많은 자유민이 눈치껏, 욕심껏 즐기며 놀다간 자리는 당연히 '흉물동산' '도깨비동산'을 이루고 만다. 쓰레기를 도로 담아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음식 찌꺼기나 쓰레기뿐만이 아니다. 배설을 않고는 살수 없는 동물의 생리는 문제를 더욱 가중시킨다. 계곡 같이 물이 있는 곳에 놀던 사람은 대개 크고 작은 배설 역시 거기다 적당히 해결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들은 사람이 놀만한 곳은 어디에나 발생하는 현상이다. 관리인이 있는 수영장이나 해수욕장이라고 별로 나을 것도 없다. 화장실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는 점만 빼면 그의 비슷하다. 수많은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가는 곳마다 북적대니 가는 곳마다 오물이며 쓰레기일 수밖에 없다. 산에, 강에, 바다에, 공원에, 주택가에, 모든 길과 도로에 쓰레기.오물은 없는 곳이 없다. 사실은 놀이꾼의 쓰레기만이 문제가 아니라 장사꾼의 쓰레기가 더 큰 문제이다.
초기에는 그래도 쓰레기를 눈에서 멀리 숨길 수도 있었다. 해가 바뀌어 가면서 숨길 곳도 없어졌다. 이제는 쓰레기 더미 옆에서 자리 깔고, 고기 굽고, 음식 먹고, 노래하고 춤추고 웃어대야만 하게 되었다. 그래도 좋았다. 쓰레기에서 눈만 돌리면 안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무서울 때 눈만 가리면 되었던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을 모두 가리고는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췄다. 마치 내일은 세상이 완전히 멸망할 것이니 오늘이 인간으로서 즐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이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즐겁게 넘겨야만 할 운명에 처한 막다른 시점의 사람들 같이 보인다. 또 한편으로는 모처럼 나왔으니 오늘만은 절대로 즐거워야 하는 것이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라'인 것이다. 자연 오염으로 옆집에서 장애아를 낳아도, 5년 후에 아들들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어도, 10년 후에 딸들이 기형아 손자를 양산量産해내어도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직 오늘 이 시간만 즐거우면 되었으며, 오늘 이 기회에 나의 능력, 남을 밀치고 우리 가족의 즐거움만을 충분히 도모할 줄 아는 가장으로서의 능력을 확실히 입증해 보여주기만 하면 되었고, 그렇게 나의 자존심만 살리면 살맛나는 것이었다. 남들의 그런 모습이 꼴사납기도 하지만, 나 역시 그러고 있으니 남을 탓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뾰쪽한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만 넘기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도출해낸 오늘의 진리이고, 또 내일의 걱정으로 나에게 기립박수 쳐줄 사람도 없을 것이 확실하고 보면 그 진리는 당당히 공인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는데 까지 가본다는 원칙밖에는 다른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20세기 말기에 선 우리들의 입장이고, 이 불행스런 입장을 군말 없이 잘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우리들 인류의 애달픈 모습이 되고 말았다!
풍요로운 물질에 힘입은 한국 속의 '찰나주의' '한탕주의' '놀자주의' '쾌락추구주의'는 언제부터인가 비좁은 국내를 벗어나 국제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한 때 동남아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보신 관광'이란 고유명사까지 탄생시켰던, 가진 거라곤 돈밖에 없는, 쓸만한 생각은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담아둔 게 없는 '아무 생각이 없는', '높은 물질, 낮은 정신'의 '물신物神추종자'들이 해외에서 수립해놓은 '한민족의 높은 기상氣像'(?)은 타국에서 만난 한국인을 철저히 피하는 현지 교포를 다수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중국 땅에서 얼마나 돈 자랑을 많이 해대며 눈꼴사나운 행태를 벌려댔던지 연변의 교포들 사이에는 한국 관광객들에 대한 적대감마저 생성, 날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고 한다. 가난했던 시절 그렇게도 순수했던 한국인들, 머리 속에 쓸만한 생각 대신 돈이 들어가니 그 모양으로 고약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인간심리의 굴절, 정신의 황폐, 정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위에서 살펴 본 예는 사실은 물질만능이 빚어낸 인간심리 속의 순간모면성瞬間謀免性과 향락지향성享樂指向性 경향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들이다. 위에 보인 문제에 더하여 수많은 다른 문제점들을 우리는 매일 보고, 듣고, 당하면서 살고 있다. 특히 인류의 미래 예측의 척도가 되는 청소년들에게서 나타나는 제반 문제점들은 좀 더 시간을 내어 생각해보아야 할 너무나 중요한 문제들이다.
한 가지 예를 보자. 국내 유수의 대규모 대학과 그 학생들. 그들의 학업상은 차치하고라도 그 주변에서의 유흥업소의 증가 추세는 뜻 있는 사람의 눈살을 심히 찌푸리게 한다.
수단.방법,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윤 남기기 작전을 성전聖戰 정도로 생각하는 일부 업주들에게 있어서야 맹모삼천의 교훈 따위는 죽은 소에게 고장난 마이크로 경經 읽어주기 꼴이 되고 만다 손치더라도,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여 북한 방문까지도 감행해내던 대학생들이, 틈만 나면 위정자들의 잘못을 맹렬히 성토하고 나서던 그들이, 이젠 학업보다 유흥업소 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듯하여 생각 있는 사람들을 매우 실망시키고 있다. 계산 빠른 업주들이 수요도 없는 곳에 업소를 증설 할 리가 없고, 대학가에서의 수요자는 당연히 대학생들이 주축이고 보면 그들의 수요의지가 발 빠른 공급을 불러들였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리해보면, 앞서 제1장의 '생존가치란 무엇인가?' 항에서도 '인간의 가치'에 대하여 논의 한 적이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기본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한(물론 이 확인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 주로 무의식의 작용에 의한다) 청소장년기의 학생과 젊은이들, 자신의 '고유가치인정'문제에 가장 민감한 시기의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흡족히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결국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줄만한 곳,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절대가치.기본가치가 아닌 물질적 측면의 가치로써나마 자신을 인정해줄 것이라 판단(이 판단 역시 주로 무의식의 작용에 의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되는 곳을 찾게 되고, 그것이 바로 아주 쉽게 탈선으로 연결되는, 일부 어른들의 퇴폐 모습을 쏙 빼 닮은, 여러 가지 금지된 장소에서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의 탐닉으로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청소년들에게서 나타나는 여러 형태의 탈선, 유흥업소, 환락가의 문제들에 더하여, 대중의 시선 집중, 고소득, 화려함 등의 이유로 청소년을 사로잡는 연예인들과 관련된 문제 연예인 우상화, 연예활동 추구 및 모방심리 표출, 연예인에 대한 동일시, 과잉 대리만족 심리 표출 등과, 말씨, 의상, 노래선율, 리듬, 몸짓에 있어서의 요란.산만하고, 발작적이고, 거칠어진 극단적인 동動 지향적 경향들, 이 모든 것이 희미하게나마 우리들 20세기 인류에게 예사롭지 않은 그 무언가를 일찌감치 예시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착잡해짐을 숨길 수 없다는 사람이 많다. 물론 상당수의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물질제일주의와 연동되고 있는 순간모면성 찰나주의의 병폐는 현대문명의 또 다른 측면의 '종말 예시적 상황'인 공중생활에 해롭게 작용하는 모든 요소, 즉 시각공해/청각공해/미각공해/정신공해 등 각종 공해와 각종 환경오염을 급속도로, 그리고 대대적으로 유발시키고 있다. 환경오염의 종류에는 ①매연·유독가스 등에 의한 대기오염, ②공장폐수.생활용수 등에 의한 수질오염, ③각종 농약의 과다 사용에 의한 토양오염, ④자동차 등 교통기관이나 각종 기계의 작동 등에 의한 소음·진동, ⑤지하수의 대량 채취로 인한 지반침하 등이 주된 항목이 되겠다.
풍요로운 물질이 오히려 병이 된 오늘날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가난이 병'이었던 6, 70년대까지의 한국 국민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자주 오갔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수출할 것이 딱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푸른 하늘과 맑은 물이다"
지금은 이런 말이 전설쯤으로 들리게 되었다. 각종 공장 등의 생산 시설이 곳곳에서 생기고, 기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모두가 부지런히 일터에 나가고 하다 보니 민생고民生苦도 해결되고 하여 제법 살맛이 난다 했더니 우리의 '화려'한 '금수강산'은 어느덧 병들고 있었다. 산업화의 세찬 바람은 수정처럼 맑던 우리의 물도, 산소밖에 없던 우리의 공기도 서서히 더럽히고 있었던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가슴속에 맺혀있던 '가난'에 대한 우리의 짙은 '한恨'은 우리로 하여금 앞뒤 가림 없이 오직 '생산'과 '개발'에만 매달리게 하였었다.
그리하여 공장에서 내뿜는 시커먼 연기는 국가와 민족을 먹여 살리는 성연聖煙이요, 하수구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폐수는 성수聖水였으며, 그 모든 것을 주도하는 기업인은 누가 뭐라도 성자聖者였었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들이 툭하면 내뱉는 '먹고살기 위해서…' '좀 먹고 살자는데…'란 말들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만인공인萬人共認의 성언聖言이었던 것이다.
빈곤퇴치가 모든 것에 앞서는 선결문제였던 시절을 길게 가졌던 우리 국민은 자연히 물질에 대한 각별한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먼 장래를 생각할 정신적 여유 또한 있을 리가 없었다. 오로지 지금 당장의 생활 문제가 주된 관심사였으며, 조금 정신적 여유를 부린다고 해봐도 '올해의 고된 작업으로 내년의 윤택한 생활'을 생각하는 정도가 고작이었고, 그것이 우리들의 장래 생각의 한계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잘 살아보세!"를 날마다 외쳐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도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는 건지, '잘 살아 보세'를 외쳐댈 필요가 없게된 지금에 와서도 삼십 년 전의 그 물질획득 특성과 눈앞에 보이는 것밖에는 생각 못하는 근시안적 사고방식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오늘의 여러 물질 지향적 성향들은 삼십 년 전 그 시절 보다 월등히 높아 졌고 지독해졌다고 한다. 먹고 살만한 오늘날에 와서는 시커먼 연기는 더 이상 기아에 허덕이는 불쌍한 백성 먹여 살리는 차원의 성연聖煙이 아닌데도 아직도 성연 대우받고 싶어 하고, 그들 공장의 폐수를 성수聖水 대접받고 싶어 하고, 기업인 자신들을 국민적 성자聖者 취급받기를 바라는 듯하여 기가 막힌다.
물은 수입까지 해와서 사먹게 되었고, 하늘은 연기구름(연무煙霧)으로 덮여 푸른 하늘을 볼 수도 없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