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에 관한 명상 / 임보
은행 창구에서 도장을 찍다 문득
도장에 걸린다
인장(印章), 낙관(落款), 직인(職印), 관인(官印), 옥새(玉璽), 국새(國璽)…
목인(木印), 석인(石印), 철인(鐵印), 옥인(玉印), 아인(牙印), 무인(拇印)…
검인(檢印), 소인(消印), 봉인(封印), 계인(契印), 낙인(烙印), 압인(壓印)…
종류도 참 많고
용도도 참 많다
목인이나 옥인이나 행세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옥새나 국새는 아무나 만질 수 없다
도장을 잘못 찍어 패가망신하기도 하고
도장을 잘 찍어 한 몫 잘 챙기는 수도 있다
사람들의 운명이
한 개의 조그만 도장에 달려 있다
처녀와 총각 사이에 도장을 찍었다고 하면
하나가 되었다는 뜻
아내와 남편 사이에 도장을 찍었다고 하면
갈라섰다는 뜻
도장도 참 알송달송이다
세상에는 눈도장이라 것도 있어서
세도가의 잔치마당이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한다
……………………
거기 누구 혹시
내 목도장 받고자 하는 이 아무도 없는가?
천만다행 / 임보
사람의 속 알 수 없다고
너무 궁금해 할 것 없다
만약 남의 마음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온종일 괴로워서 어찌 살 것인가?
내일을 내다볼 수 없다고
너무 답답해 할 것 없다
만약 이 몸이 그리 될 걸 미리 안다면
한평생 싱거워서 어찌 살 것인가?
날치 / 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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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아침바다를 깨고 문득 문득 솟아오른 은빛 부호들…
여름바다와 아이들 / 임보
들어오지 말라고
들어오지 말라고
바다는 계속 밀어내고
들어가겠다고
들어가겠다고
아이들은 계속 달려들고
바닷가 모래톱은
바다와 아이들이 온종일
밀었다 당겼다 시끄럽다
아이들이 잠든 밤 동안
바다는 야영장 근처까지
점령해 들어왔다가
아침이 되어 아이들이 나가면
바다는 슬금슬금
갯벌을 토해내며 뒷걸음질이다
물러나면서도 연상
달려드는 시늉으로 으르렁거리며
아이들의 발등을 물어댄다
한 게으름뱅이의 독백 / 임보
어떤 이는 곡식을 심어 추수를 하고
어떤 이는 가축을 길러 고기를 얻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바다에 어망을 드리워 살아가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한평생 내 했던 일도 이들과 다르지 않다
나는 곡식이나 가축 대신 사람을 기르며
고용주가 주는 보수로 생계를 유지했을 뿐
내가 뿌린 씨가 얼마나 자랐는지
내가 기른 인재가 얼마나 영글었는지
내게는 추수의 때가 따로 없어 가늠할 길이 없다
그러나 가늠해 보지 않아도 뻔하다
게으른 농부처럼 땀을 아끼며
술잔이나 들여다보며 지냈거니
내게 기울었던 놈이 혹 있었다면
지금쯤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가 되어
어느 한데서 빈둥거리고 있으리
허나, 빈둥거리는 나의 사람아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라
명성과 부귀가 그대를 점령하여
번잡과 분망이 그대를 앗아가면
그때 비로소 나를 알리라
게으름이 얼마나 미덕이고
드러나지 않음이 얼마나 평화인가를
사자와 사람 / 임보
배부른 사자는
사냥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먹이를 쌓아 놓고도
투망을 던진다
아직 굶주려 죽은 사자는
지상에 없다
그러나
가장 많이 아사한 동물은
인간이다
사자는
제 몫만 챙기면
나누어 갖도록 두지만
사람은
곳간을 만들어
먹이를 가두기 때문이다
임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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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선생님의 시 평범하고 손에 잡힐 듯 쉽게 읽힙니다, 영어로 옮기며 읽으면 감동이 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