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폭에서 시를 읽다(12)
- 몽마르트르와 물랭 루즈
김철교(시인, 배재대 교수)
2013년 6월 15일 늦은 오후
아침 일찍부터 마르모탕미술관과 오랑주리미술관을 비교적 자세히 둘러보고 오후 늦게 노트르담성당을 들렀다. 주로 성당 내외 조각에 눈길을 주었다. 출입구의 조각은 물론이고 실내에도 성경의 복음서 내용을 조각해 놓은 작품들이 감명을 주었다. 특히, 노트르담성당에서 봉직하시는 신부님의 설명도 듣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2유로를 연보함에 넣고 촛불을 밝혀 세상일 잘 되게 염원하는 기도도 빼지 않았다.
물랭루즈에 저녁식사와 쇼관람을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몽마르트르에 이르러 몇 곳을 둘러보았다. 세 번째 방문이지만 올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을 가득 메운 화가들의 열정 때문일 것이다.
1. 몽마르트르(Montmartre)
<몽마르트르, 사크레 쾨르 성당> <몽마르트르, 쁘티 트랭앞에서>
지하철 앙베르(Anvers)역에서 내려 푸니굴라(몽마르트르 언덕을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지하철역 앞에서 출발하는 궤도열차)를 타고 테르트르광장에 도착하니 마침 몽마르트르에서 이름난 곳을 순회하는 기차모양으로 한 순환버스(쁘띠 트랭)가 있었다.
파리를 수호하듯이 높은 언덕에 세워진 큰 성당(사크레 쾨르 사원)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찬란한 햇빛을 받고 늠름하게 서있다. 테르트르 광장 쁘티 트랭 승차장 옆에서는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한 물랭 루즈 모형을 만들어 놓고 아코디언을 타고 있는 여인의 미소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물랭 루즈 홍보를 위한 듯싶었지만 프랑스어 외에는 통하지가 않아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었다.
상젤리제 거리와 함께 파리의 낭만의 대명사가 몽마르트르 언덕이다. 반 고흐, 피카소, 로트렉 등 19세기 유명한 화가들이 몽마르트르를 누볐고, 인상파, 상징파, 입체파와 같은 미술 사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많은 거리의 화가들이 테르트르 광장에 모여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다.
사크레 쾨르 사원(Basilique de Sacre′ Coeur)은 비잔틴양식으로 된 3개의 새하얀 돔으로 이루어졌다. 보불전쟁(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해 일어난 전쟁)과 파리 코뮌(1871년 3월 28일부터 5월 28일 사이에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의 붕괴로 낙담한 시민들을 북돋우기 위해 1919년에 완공되었다. 몽마르트르 높은 언덕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새하얗게 빛나면서 파리 시민들의 사랑을 빨아들이고 있다.
쁘티 트랭(Petit Train)은 증기기관차 모양의 관광용 미니 기차로 6유로를 내면 몽마르트르 구석구석을 천천히 35분동안 일주한다.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이 북적이는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에서 출발하여 영어해설을 들으며 편안하게 중요 지점을 둘러 보고 다시 테르트르 광장으로 돌아온다.
라팽아질(Au Lapin Agile)은 몽마르트르 포도밭 옆에 있는데 예전에 피카소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모였던 샹송 감상실로, 객석과 하나가 되는 쇼가 매력적이다.
<몽마르트르, 세탁선 갤러리>
세탁선(Le Bateau Lavoir)은 1904년 피카소가 연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던 값싼 아파트를 시인 막스 자코브가 ‘세탁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옆으로 길게 지어진 목조 연립주택이, 내부를 걸어 다니면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것이 세느강에 떠있는 세탁용 배를 연상시킨다고 한데서 그렇게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당시 목조건물은 1970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은 같은 이름의 갤러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04년 피카소는 몽마르트 세탁선에 살 때,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 해 여름 피카소는 소나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고양이를 안고 아틀리에로 들어가려 할 때, 그녀를 발견하고 길을 막고 웃으면서 그 여인에게 고양이를 선물로 주었다. 두 사람은 곧 친해졌고 얼마 후 페르낭드는 그의 아틀리에서 살게 되었다. 피카소는 이곳에서 4년동안 청색시대의 명작들을 그렸으며, 큐비즘(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아비뇽의 처녀들」도 여기에서 그렸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그 둘은 행복했다. 페르낭드의 쾌활함 덕분에 그의 화폭은 점점 밝아져 갔다. 피카소의 그림은 이제 청색시대에서 벗어나 장밋빛 그림이 된다.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캔버스에 유채, 243.9X233.7Cm, 뉴욕현대미술관>
피카소는 앙리 마티스는 물론 피카소의 지지자였던 기욤 아폴리네르마저 이 그림을 비판하자, 둘둘 말아 화실 한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것이다. 화폭에는 여자 다섯이 보기 흉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네 여자는 서 있고, 한 여자는 앉아 있다. 큰 눈과 정면의 모습에 담긴 옆 모습의 코, 오른쪽 여자들의 모가 난 얼굴, 큰 발, 도무지 언뜻 보면 사람 같지가 않다. 여자는 쭈그리고 앉아 등을 보이고 있으나,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하나의 화폭 안에 얼굴 정면과 등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둘 이상의 시점이 동시에 화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함께 큐비즘이 시작되었고, 현대 미술도 시작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에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옮겨 그려서 그것이 마치 화폭 안에 실재하는 것처럼 그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카메라가 등장하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인간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라는 의문과 함께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그대로 실재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고개를 든 것이다.
<아비뇽 처녀들>에서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분해되고 수없이 많은 조각들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하나의 화면 속에서 여러 시점들을 보여주기 위해 재구성된다. 단일 시점에 따른 원근법이 무시된 것이다.
큐비즘이란 말은 1908년 브라크의 그림들을 보고 루이 보셀이 “브라크는 형태를 무시하고 장소든 사람이든 집이든 모든 것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즉 입방체로 환원했다”라는 평을 쓴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2. 물랭루즈(Moulin Rouge)와 로트랙(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 Lautrec-Monfa, 1864-1901)
다시 테르트르 광장에서 푸니굴라를 타고 내려와 지하철을 타고 불랑쉐(Blanche)역에 내려 물랭 루즈에 6시반에 도착하였다. 이미 한국에서 1인당 180유로에 예약을 했기 때문에 시간을 지켜야 했다. 7시부터 9시까지 저녁식사 9시에서 11시까지 쇼를 감상하였다. 쇼와 만찬비용을 합해서 1인당 25만원을 지불한 셈인데, 메뉴에 적힌 이름도 ‘Soise′e Toulouge-Lautrec’으로 특히 포도주가 일품이었다. 아마 지금까지 마셔본 포도주 중에 제일 좋은 것 같았던 것은 분위기도 한몫을 했으리라. 함께 동석한 외국인들과 담소를 나누며 아내와 함께 한 병을 다 마셨다.
<물랭루즈 만찬 메뉴> <물랭루즈 만찬 후식 케이크>
물랭 루즈는 프랑스어로 ‘붉은 풍차(Moulin Rouge)’라는 뜻으로 건물 옥상의 크고 붉은 네온사인 풍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889년에 개장하여 카드리유춤(quadrille: 나중에 프렌치캉캉이라 불림)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15년의 화재로 모두 불타 1918년에 재건하였으며, 1924년 이웃에 댄스홀이 세워졌다. 현재 물랭루즈로 알려진 것은 댄스홀이다.
보불전쟁이 끝나고(1871)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1914) 시기를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풍요를 누리던 ‘라 벨르 에포크(La belle époque),’ 즉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부른다.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의 대도시에서는 예술과 음악, 문학이 찬란하게 피어났고, 도시민들의 삶은 갖가지 다양한 오락과 유희로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지나친 사치와 향락으로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오히려 불안과 절망을 느꼈다. 정신분석학은 이 시기에 급속도로 발달하여, 파리의 정신과의사였던 샤르코(Jean Martin Charcot, 1825-1893)에게 유럽에서 많은 환자들이 찾아왔다. 많은 예술가들이 알코올중독, 우울증, 정신이상으로 시달렸고, 자살을 택하기도 하였다. 로트렉은 알코올 중독자로 37세로 죽었고, 카미유 클로델은 여생을 정신병원에서 마감했다. 고갱은 자살에 실패하였으며, 반 고흐는 자살에 성공하였다. 뭉크는 알코올중독, 우울증,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아름다운 시절’은 1914년,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이때 유행한 캬바레, 뮤직홀, 사창가 등 대도시 밤 문화를 화폭에 충실하게 담은 화가가 로트렉이다. 그는 12세기부터 이어져오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백작의 작위를 가진 아버지와 서로 사촌 간이었던 어머니로부터 귀족의 혈통과 재산, 예술적인 재능과 유전적인 결함도 물려받았다.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성장이 더뎠고 뼈가 약해 양쪽 다리가 부러진 뒤로는 키가 거의 자라지 않았다. 152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하반신이 과도하게 짧은 난쟁이 형상으로 평생 지팡이에 의지해 뒤뚱거리며 걸어야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화가 수업을 받은 것은 18세가 되던 1882년부터였으며, 1884년에 작업실을 몽마르트르(Montmartre)로 옮겼다. 몽마르트르는 파리 외곽의 시골이었는데 싼 집세 때문에 1850년대부터 가난한 사람들, 반사회적 인사들,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860년대에 파리 시에 편입된 후, 1880년경부터 카페와 댄스홀들도 들어서 이곳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로트렉과 그의 친구들은 이곳을 근거지 삼아 떼를 지어 화랑과 미술관을 돌아다니고, 카페에 모여 토론하고, 작업실과 모델을 함께 쓰는 등 젊은 예술혼을 불태웠다.
거울이 붙은 벽이 있는 거대한 홀, 오케스트라, 가스등 샹들리에, 모조 코끼리 상이 들어선 야외 정원 등으로 꾸며진 공간에, 스타 댄서 등이 출연하여 흥행의 선두를 달렸던 물랭 루즈에 로트렉은 지정석을 두고 매일같이 출입하였다고 한다. 그는 대상의 특징을 잘 파악하여, 재빠르게 그가 간 곳, 그가 만난 사람들을 그림으로 기록하기를 즐겨했다.
<물랭 루즈에서, 춤>(1890년, 캔버스에 유채, 116×150cm, 필라델피아 미술관)
<물랭 루즈에서, 춤: At the Moulin Rouge, The Dance>은 로트랙이 본 물랭 루즈 내부의 풍경이다. 이 작품은 물랭 루즈가 개장한 지 1년 뒤인 1890년에 그려졌다. 이 그림 뒷면에 작가가 직접 연필로 쓴 서명이 있음이 발견되었는데, “뼈가 없는 듯 느껴질 정도로 춤을 잘 추는 발렌타인이 초보자를 가르치다”라고 써 있다고 한다. 이 그림에 보이는 인물들은 잘 알려진 툴루즈 로트렉의 화류계 멤버들이다. 밤에만 볼 수 있었던 매춘부와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화면을 압도하고 있는 여인의 정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화면 모서리에 의해 인물이 절단되는 것과 같은 특징은 인상주의 시대부터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우키요에(浮世絵)와 사진의 영향이다. 그의 그림은 여러 화가들의 장점을 취한 절충주의적 영향을 보이고 있는데 비해, 그만의 독창적인 감각이 빛을 발한 분야는 포스터 작업이었다.
디방 자포네, 1892-93, 유화, 60.8 Ⅹ 80.8 cm, 개인소장
가장 잘 알려진 로트렉의 광고 포스터는 디방 자포네(Divan Japonais)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자주 드나들던 카바레나 가깝게 지내던 인물들처럼 관찰하여 얻은 소재들을 포스터의 형태로 구체화하였다. 1893년에 몽마르트의 카페 콩세르(café-concert)인 디방 자포네(Divan Japonais: 일본식 의자라는 뜻)에서 일본풍의 실내장식과 조명으로 재단장하면서 로트렉에게 광고 포스터를 의뢰하였다. 로트렉은 친구 예술 비평가 뒤자르댕(Édouard Dujardin, 1861-1949)과 유명한 캉캉 무용수인 아브릴(Jane Avril, 1868-1943)을 맨 앞에 크게 배치하였다. 뒤자르댕과 아브릴이 지켜보고 있는 무대 위에서 공연 중인 가수 질베르(Yvette Gilbert, 1868-1944)는 머리 부분이 화면 가장자리에서 잘려버렸지만, 긴 검은 장갑과 늘씬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모두 로트렉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델이자 친구였다.
아브릴 이전까지 물랭 루즈의 얼굴은 ‘라 굴뤼(la Goulue)’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댄서 루이즈 웨버였다. 거침없는 행실로 구설수가 많았던 라 굴뤼에 비해 우아한 말투에 어딘가 우울한 그늘이 매력적이었던 아브릴은 곧 물랭 루즈의 스타가 되었다고 한다.
로트렉은 이른 나이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예술가와 비평가들의 인정도 받았으며, 1883년에 첫 번째 그룹전에 참여한 이래 파리와 브뤼셀, 런던의 주요 전시들에 여러 차례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과음 등으로 인한 불규칙한 생활과 창녀들과의 무분별한 교제로 1880년대 말부터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었고 1899년에 몇 달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으며, 결국 1901년에는 몸의 마비 증상까지 와 37세가 채 못 되는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캔버스화 737점, 수채화 275점, 판화와 포스터 369점, 드로잉 4,784점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이 가장 많은 곳은 그의 고향 알비(Albi)에 있는 툴루즈-로트렉 미술관(Musée Toulouse-Lautrec)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