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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1. 주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주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6. 주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 주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부끄러움
2-3절에는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라고 하였다.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원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간구하였다. 부끄럽지 않게 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아픔, 불안과 두려움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부끄러움(수치)을 당하는 것을 가장 원초적인 문제라고 하였다.
창세기 2장 25절에는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였다.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시고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의 연합을 한 마디로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서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하였다(창3:7). 그들은 뭔가 가릴 것이 생겼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보면 성적 수치심을 느껴서 치마를 만들어서 자기를 가렸다는 말 같지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이것은 인간의 존재적인 부끄러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치마로 가렸듯이 모든 사람들이 그런 원리로 자기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학력과 경력을 내세우고 자기의 업적을 내세우는 행위들이 다 아담과 하와가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과 같은 일이다. 학력이나 경력을 위조하는 일이 왜 생기는가? 그런 것이 없으면 부끄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에 위조해서라도 자기를 가리려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보는데 우리의 이마에 전광판처럼 우리 속에 있는 생각들이 바로 나타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저것이 뭐야?’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마에 “저것이 뭐야?”라고 기록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사람이 미워 죽겠는데 내 이마에 “미워 죽겠다.”라고 나타난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깨져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사는 한 육체 속에는 욕구들이 있다. 식욕이든 정욕이든 탐욕이든, 판단이든 미움이든 정도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다. 그런 욕구들이 이마에 그대로 노출된다면 살기가 어려워질 것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쉽지 않게 될 것이다.
전에 자기 딸을 죽이고 그 시신을 일 년이나 방치하는 천인공노할 큰 사건이 터져서 온 국민의 분노를 산 적이 있었다. 얼마 지나서 어떤 분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다른 사람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 속에도 있다.”는 칼럼을 쓴 것을 보고 나도 페이스북에 그 칼럼과 함께 내 글을 간단하게 실었다. “내 속에는 나도 모르는 수많은 가능성이 잠자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은 내가 남다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내 삶에 드러나지 않은 사건일 뿐입니다.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은혜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은혜가 필요한 사람으로 살뿐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아멘으로 댓글을 달았는데 다른 분들은 “그럴 수가 있느냐?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몰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그 일이 자기 인생에 일어나지 않을 완전한 보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타나지만 않았을 뿐이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 하였다(요일3:15). 살인은 행위고 미움은 동기다. 사람들은 행위로 나타나야만 “저 인간은 나쁜 놈이다.”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행위만 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기도 중요하다.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한 것이다. 속에 있는 동기까지도 들춰서 “너희가 아닌체하고 살지만 다 한가지다.”라고 하신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단지 무엇인가로 덮여져 있어서 우리가 적당히 사람들을 대하고 살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것들이 다 노출된다면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하였다(히12:2). 십자가를 참았는데 그것을 육체의 고통을 참았다고 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한 것이다. 복음성가에도 “얼마나 아프실까.”라며 십자가를 회상하는 찬송이 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단지 육체의 고통을 참은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것이라 하였다.
이 부끄러움이 무엇인가? 무엇을 개의치 않으신 것인가? 물론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 앞에서 잡혀가고 옷이 찢겨지고 매를 맞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을 짊어지고 가신 것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가셨으니까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끄러워하던 그것을 짊어지고 가셨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워서 자기를 가렸는데 그가 부끄러워했던 것이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고(롬1:16),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9:33) 하였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라고 하였다. 이런 표현들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표면적인 수치와 부끄러움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지고 가셨다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흙의 운명
창세기 2장 7절에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하였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안에서 너무나 복된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떠나서 이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불만들은 한 마디로 “왜 나를 흙으로 지으셨습니까!” 하는 것이다. “왜 나를 이런 육체로 지었습니까? 병들고 아프고 변절하고 배반하기 쉬운 이런 육체를 왜 나에게 주셨습니까?”라는 불만들은 “왜 나를 흙으로 지었습니까?”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 흙은 암석의 풍화과정 중에 최종 단계다. 만물의 찌꺼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흙이다. 부서지고 버려지고 밟히는 것이 흙이다. 바울이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13)라고 하였다. 모욕과 박해와 비방 속에서 느끼는 감정이 흙으로서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우리 교회 형제들은 흙이라는 말을 복된 말로 듣지만 세상에 나가서 흙이라고 하면 “나는 찌꺼기입니다. 무시당하는 더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나가면서 침도 뱉을 수 있고 오물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 흙이다.
그런데 그 흙이 씨를 가진 농부에게는 절대적인 필요이다. 흙만 있으면 얼마든지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 플로리다에 갔을 때 문영 형님께서 디즈니월드를 구경시켜주셨는데 그 중에 인상적인 것이 에트콥센타에서 본 나무와 열매들이었다. 스위스의 식품회사 네슬레에서 세운 미래 식량에 관한 이 전시관에는 공중으로 나무가 펼쳐져 있고 열매가 공중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앞으로 인류가 우주에서 어떻게 먹거리를 조달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이 전시관에서 공중에 나무가 있는 것이 신기했는데 아무리 공중에 펼쳐져 있다 해도 나무는 뿌리를 둘 곳이 있어야 하고 뿌리에는 흙이 있어야 양분과 영양소를 공급할 수 있다. 아무리 우주공간으로 나간다 해도 주먹만큼의 흙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씨를 가진 농부에게 흙이 필요하듯이 생명을 가진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에게는 흙으로 지어진 인생이 얼마나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 흙에 씨만 뿌리면 놀라운 광경이 연출되는 것이다. 오곡백과가 다 열릴 수 있는 것이 흙이다.
그런데 흙인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고 나니까 부끄러워지게 되었다. 스스로는 아무 존재 이유를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경작하는 이가 없으면 바로 황무지가 되고 마는 것이 흙이다.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은 생명의 씨가 뿌려지고 생명으로 덮여서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영광스러운 땅이 되는데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리듯 능력과 성취와 자랑으로 포장해야 했던 것이다.
옛날에는 민둥산이 많아서 중학교 때까지 식목일에는 산에 가서 듬성듬성 나무를 심으면서 ‘이것이 언제 자라날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나무가 없는 산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이러한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잘 모르고 토론토에 갔을 때 산이 없는 것이 너무 좋았다. 산에 둘러싸여 올망졸망 좁은 데서 넓은 평원을 못보고 살다가 토론토에 가니 산을 보기 어려웠다. 한국의 어린이들은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산부터 그려놓고 그 앞에 집을 그리는데 토론토의 초등학생들은 선부터 그어놓고 집을 그릴 정도로 경치가 다르다. 처음에는 산이 없어서 좋았는데 십 년이 지나니까 허전했다. 한국에 올 때마다 이 산의 아름다움을 한국 사람들이 다 느끼고 살까 싶을 정도로 옛날의 민둥산이 지금은 아름다운 산들이 되었다. 가을이 되면 우리 교회 주변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붉은 흙만 있을 때는 부끄러웠는데 생명이 덮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붉은 흙 자체로서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다. 빛나는 흙이 되고 싶고 반짝이는 흙이 되고 싶고 깨끗한 흙이 되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다른 것으로 덮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흙은 생명이신 분만 만나면 생명이 심겨져서 힘쓰고 애쓰지 않아도 그 생명이 자란다. 생명이 자라서 우리의 모든 것을 덮으면 인생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고 증거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존재의 열등감
흙으로 지어진 아담에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며 탐스러운 것이 생겼다.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지금 우리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며 탐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지으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아서,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마치셨으므로 우리 자신도 완전한 만족이 되었다. 하나님의 안식은 우리의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은 안식 하실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다 되었다. 보기에 심히 좋다.” 하신 것을 인간은 만족할 수 없었고 무엇인가를 부러워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부러웠는가?
창세기 6장에 가면 네피림이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해서 네피림이 되었는데 그들은 용사요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창6:4). 신화같은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천사와 사람이 결합해서 네피림, 즉 자이언트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무엇인가? 신화로 생각하면 먼 이야기인데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보면 이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지혜와 능력의 상징인데 거기에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까지 겸비하게 된 것이다. 우리 자녀들이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고 아름답기까지 하면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통하지 않는 데가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금화와 같고 지혜는 은화와 같고 능력은 동화와 같다는 말이 있는데 이 셋을 겸비한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흙으로 지어진 인생이, 늘 연약함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존재는 가능만 하다면 천사와 결합하여 네피림이 되려고 하지 않겠는가! 네피림은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소원,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이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며 탐스럽기도 한 그것이 조금 더 구체화되어 나온 것이 네피림이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소원을 적으라고 하고 그것을 다 모아서 형상으로 만들면 어떤 형상이 되겠는가? 내 소원은 우선은 건강하고 장수하는 것이다. 거기에 이빨도 튼튼하면 좋겠고 머리도 좋아지고 돈도 많으면 좋겠고……, 가능하면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하면서 어떤 제한도 없이 되고 싶은 소원도 갖다 붙이고 싶다. 그렇게 해서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천사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천사에게는 인간이 육체를 가짐으로 생겨나는 문제가 전혀 없다. 천사는 인간 소원의 총체적인 표현이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존재적 열등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부끄러움, 약함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천사와 같이 되고 싶은 소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에게 구원자로서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예수님의 전 생애 가운데 십자가를 피해 갈 수 있는 모든 유혹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에 대한 사탄의 송사다. 광야는 육체를 가진 인간의 약점이 다 드러나는 열악한 곳이다. 사막에서 사십 일을 굶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있겠는가? 무엇으로라도 타협하려고 할 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사탄은 먹는 문제를 내놓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생존의 질고를 짊어진 육체를 가진 인간에 대한 시험이다. 사람에게 먹고 사는 문제만 없다면 인간 생활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로 사람들은 고민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 문제를 가장 극대화해서 표현한 것이 사막에서 사십 일을 굶주린 상태에서 떡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이 말은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도전이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누가 영광스러운 존재냐 하는 것이다. 육체가 없는 존재인 천사가 영광스러운 존재인가, 굶주리고 헐벗고 목마른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인간이 영광스러운 존재인가? 먹고 사는 문제로 보면 먹지 않아도 사는 존재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많은 종교들이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한다. 육체를 벗는 것이 해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육체로 지으신 하나님은 저급한 신이 되고 만다. 육체를 만든, 이 이상한 몸을 만든 하나님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셨다. 이로써 사람이 무엇이며 사람의 가치가 어디 있는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어디 있는가? 돌로 떡을 만들어서 잘먹고 잘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육체 속에서 형상화할 수 있는 존귀한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 사람의 가치다. 천사들도 흠모할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찬송가에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라는 가사가 있듯이 천사까지라도 흠모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존재다.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화해서, 우리의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과 존귀함을 표현하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다. 이 영광의 직분이 드러날 때 마귀가 떠나가고 천사가 수종든다. 천사가 받들고 수종드는 위치에 오는 것, 이것이 인간 위치의 참된 회복이다.
사탄의 세 가지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히 말하면 “나는 못한다.”는 것이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이라고들 하지만, 못해서 우리를 포함하셨다. 우리는 못하는 존재니까 예수님도 못해야 우리가 포함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못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는 것이다(마4:11). 신기한 사건이다.
그 세 가지 유혹은 표현은 다르지만 아담이 겪었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탐스러웠던 것과 같은 것이다. 아담은 부끄러워서 천사를 보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탐스러워서 유혹에 넘어갔는데 예수님은 부끄러워하지 않으심으로써 오히려 천사들의 수종을 받는 자리에 이르셨다.
인간의 가치는 잘하고 뛰어나다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은 하나님을 시험할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자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고 살 존재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한 말씀이라도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온전하게 표현된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없고 천사가 와서 수종드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를 이런 존재로 지어놓으셨는데 아담은 이것을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너는 흙이 아니냐? 이것을 먹어봐라.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라는 유혹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네게 주리라.”라는 시험은 같은 것이다.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봐라. 그러면 너를 찬송하지 않을 자가 없을 텐데 왜 굳이 어리석게 십자가로 가려고 하느냐? 다른 길은 얼마든지 있다.”라는 유혹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주님은 승리하셔서 우리 모두를 부끄러운 자리에서 구원하셨다.
율법의 죄책감
7절에는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라고 한다 해서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시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요즘은 구글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쓰는 한 우리의 모든 정보가 구글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서 내가 오늘 어디에 갔고 어디 몇 시간 머물렀는지 구글은 알고 있다. 전화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무슨 사이트에 접속했고 UFC 격투기 경기를 몇 편을 보았는지까지 구글은 다 알고 있다. 만약 소시적부터 아무도 모르는 데서 내가 했던 모든 것을 광고판에 띄운다면 “나를 이렇게 영광스럽게 표현해주고 있구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어릴 적부터 내가 했던 부끄러운 일만 골라서 스크린에 띄운다면 나는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어가야 한다.
시편 기자는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 부끄럽다는 것이다. 하갈은 주인의 학대를 피해 도망하다가 사막의 샘물 곁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고 그때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다(창16:6-14). 감찰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갈이 발견한 하나님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율법이 시내산에서 나왔는데 하갈이 시내산에서 온 여자라고 하였다.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하갈이 시내산 출신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는데 바울은 율법이 종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갈4:24).” 한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하는 것이 종의 근성과 같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하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의 증거를 받지만 종은 주인의 말을 지켜야 한다.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종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갈이 발견한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다. 율법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자기를 감찰하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옛날에 꽤나 열심이 있었고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항상 내 속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다. 하나님이 저울에 달아 보신다면 함량미달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마음이 항상 있었다. 그때는 감찰하시는 하나님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감찰하시는데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율법의 정죄 아래서는 누구라도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말은 양심에 가책도 없이 잘못을 해 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부끄러움이 없는 세계로 가고 있다. 물론 잘못한 것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되지 철면피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어떻게 쓰시는지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의 결말로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하였다. 누가 건져내겠는가?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셨다(창3:15). 여자는 뱀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먹은 여자다. 뱀에게 선악과로 유린당한 여자다. 선악의 판단 아래서 부끄럽게 된 여자인 것이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에는 다섯 여자가 나온다. 다섯 여자들은 한결같이 부끄러운 인생들이다.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고 돌에 맞아 죽을 사람들이다. 사탄에게 유린당해서 선악과를 먹고 그 판단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자들이지만 바로 여기서 난 것이 사탄을 이긴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고 지혜다.
사람들은 선악에 밝으면 반듯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밝아도 최고수는 이길 수 없다. 사탄은 선악과를 가지고 사는 세계에서 최고수다. 요한계시록에는 사탄을 언급하면서 큰 용,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 우리 형제들을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다고 하였다(계12:9-10). 고자질하고 송사하는, 선악의 판단을 하는 데 최고수가 사탄이다. 그 앞에서 판단으로는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이 판단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으면 이기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옛 남편 아래서 벗어날 길은 없다. 율법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가면 나쁜 여자가 되고 그렇다고 남편을 죽일 수도 없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 하셨으니까 율법이라는 남편은 불사조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그렇다고 그 남편에게서 도망가서 율법이 없이 살면 야만인이 된다. 그러므로 길은 딱 한 가지인데 율법에 대해서 죽는 수밖에 없다. 율법의 정죄 앞에서는 죽는 수밖에 없다. “너는 나쁜 놈이다.”라고 정죄하면 나쁜 놈이 되면 되고 “너는 음녀다.”라고 정죄하면 음녀가 되면 되는 것이다. 정죄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지나가는데 정죄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행위로 부끄러움을 면하려고 하니까, 내가 잘한 결과를 당당하게 내놓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하니까 율법의 정죄에 대해서 꼼짝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나는 못한다.” 하면 끝나는 일인데 끝까지 해보려고 하니까 끝까지 매이게 되는 것이다. 반듯하고 옳고 그름이 분명하면 선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살아보면 오히려 그 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다른 악이 생긴다.
육체 속에서 지저분한 것도 밑거름이 되어 생명을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라게 하는 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버리면 우리는 부끄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데 주님은 흙으로 지어진 이 인생을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게 하셨는가!
부르심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고 이스라엘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자리’에서 불러내셨다. 준수한 사울 왕을 폐하시고 부모도 버린 다윗을 택하셨다. 항상 그는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고할 수 없는 백성이 되게 하셨다. 자랑할 것이 조금만 있어도 내세우지 않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의 자랑이 전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찬송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야 하나님의 말만 나오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섞여 나오게 된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삼으실 때 할례 받고 자기 자랑이 끝난 사람에게서 난 씨로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다. 율법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끌어낼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율법으로는 진설병은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게 되어 있는데 다윗은 그 떡을 달라고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굶어죽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굶어죽는 것을 보시겠느냐는 마음으로 율법을 넘어선 하나님의 마음을 끌어낸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나오는 그런 길에서 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항상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셔서 원수와 보수자들을 잠잠케 하신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말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말을 잘 못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국어책도 더듬더듬 읽었다. 국어를 하기 싫어서 신학을 할 생각이 있으면서도 이과를 선택했다. 숫자나 도식으로 표현하면 머리에 잘 들어오는데 글자만 나오면 멍해지는 콤플렉스가 있다. 목소리에 대해서도 그렇다. 어릴 때 릴녹음기에 녹음을 해서 내 목소리를 들어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렇게 영감인가? 녹음기가 잘못되었나?’ 하고 다른 사람들 목소리를 들어보니 비슷한데 내 목소리는 내가 생각하던 것과 너무 달랐다. 그때부터 말하는 것에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고 남들이 어떻게 들을까 하며 의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매주 말을 하고 살게 된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시편 8편 2절에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라는 말씀처럼 나 같은 사람도 말을 하고 살게 하신다면 어느 누군들 하나님의 말을 못하고 살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부끄러운 것을 들어서 쓰신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자리에서도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고 고백했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하였다. 우리를 부르신 자리는 맨 눈으로 보면 부끄러운 자리인데 이 부끄러움 때문에 자고할 수 없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내고 하나님의 말씀만 할 수밖에 없는 백성으로 우리를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내 위치를 알면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자리에서 부끄럽지 않았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다. 살든지 죽든지, 풍부에 처하든지 궁핍에 처하든지 자유자가 된다.
생명의 연합 안에서
생명의 연합 안에는 부끄러움이 없다(창2:22).남다른 무엇을 가져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일 때 부끄럽지 않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는 내 생명 같구나.”라고 할 때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다. 이것을 우리는 교회생활을 통해서 경험한다. 교회에 와서 모임을 하다보면 어디서도 말못했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나의 부끄러움을 말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승리다. 그것이 더 이상 나에게 부끄러움이 아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그것을 통해서 나에게 다른 것이 왔기 때문에,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생명이 자라고 아름다운 열매로 나를 덮게 되었기 때문에 밑거름이 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아름다운 열매가 났느냐는 말을 하려면 내게 거름주어진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 한 생명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나를 드러내 놓을 수 있다. 한 생명이니까 어떤 것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저주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로 발견되는 자리이다. 잘하고 못하고, 잘나고 못나고, 있고 없고 하는 모든 것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는 자리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어느 사람도 다르지 않은 모든 사람의 운명을 보게 되어 ‘저 안에 내가 있구나.’라고 알게 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고백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고백이 되는 것은 예수의 죽음 안에 모든 사람의 운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십자가 앞에서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우리의 약함과 부끄러움을 쓰신다는 이 말씀이 내 인생을 살리는 말씀이 되었다. “너의 약함을 쓰실 것이다. 네게 부끄러운 그것이 네 인생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이 내 인생의 소망이 되었다. 처음 대구에 내려와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소망이 없이 몸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고 나아질 가능성이 없을 때 암담했고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뭐하느냐고 묻는 것이 싫어서 점점 더 대인기피가 생겼다.
무엇이라도 하면 나아질 줄 알고 학원을 차리고 학원버스를 몰고 다니면서 아는 사람과 부딪힐까봐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 일을 잘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당시 나에게는 사는 것이 갈수록 민망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교회 안에서까지 사람들 얼굴을 보고 다니기가 힘들 정도의 많은 일들이 지나가면서 하나님 말씀이 나를 덮지 않으면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의 부끄러움을 쓰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되었다.
할례받은(자랑이 끝난) 100세의 아브라함을 쓰셨고, 혀가 뻣뻣한 80세의 모세를 쓰셨듯이 하나님이 쓰시겠다니까 내놓을 수밖에 없고 오히려 내 부끄러움을 내놓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부끄러움이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가장 부끄러운 그것이 나인 줄 알 때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다. 이제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흙으로 지어진 인생이 이제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부끄러운 인생, 아무 할 말 없는 인생,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인생을 아름답게 쓰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 기 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흙으로 지어져서 경작하는 이가 없으면 황무지가 되고 잡초만 무성하고 안개만 자욱할 인생을 당신이 갈아엎으시고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밑거름으로 삼으셔서 생명의 씨가 자라는 토양으로 우리를 부르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전에 부끄러워하던 그것이 이제는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자랑하는 것이 되게 하시고 오직 우리 인생을 들어서 하나님이 하신 일만 말하는 주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