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자(孔子, 전552-전479)년표
551 공자는 기원전 551년(노 양공, 魯襄公 22년) 오늘날 중국의 산둥성 취푸(曲阜) 동남쪽에서 하급 귀족 무사인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이고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549(세) 공자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공자는 어려서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
535(열일곱)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였으며, 오보지구(五父之衢)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는 대개 (부모를 함께 매장하는 풍속을 지키기 위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사마천) 공자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대부 맹희자(孟釐子)가 병이 나서 곧 죽게 되었을 때, 그는 후계자인 의자(懿子)에게 훈계하며 말했다. “공구(孔丘)는 성인의 후손인데, 그 조상은 송나라에 있을 때 멸망당했다. 그 조상 불보하(弗父何)는 원래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아우 여공(厲公)에게 양보했다. 정고보(正考父)에 이르러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을 섬길 때, 세 번이나 명을 받았는데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의자(懿子)는 실행했다.
533(열아홉)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532(스물) 아들 리(鯉) 출생, 자는 백어(伯魚)
531(스물하나) 20살 때부터 계(季)씨 가문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주나라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예(禮) 전문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사마천) 이에 노나라에서는 대부(大夫) 이하 모두가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편찬했다.
522(서른) 자로, 증점, 염백우, 염구, 중궁 등의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함 / 논어(論語), 「爲政篇(위정편)」, 三十而立(삼십이립).
518(서른셋) 노나라 맹리자가 죽으면서 맹의자 등 두 아들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를 배우라고 당부함
517(서른다섯) 노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하자 공자도 제나라로 떠났다가 2년 뒤 귀국했다. /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질문함
512(마흔) 논어(論語), 「爲政篇(위정편)」,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
504(마흔여덟) 공자가 48살 때 계손씨의 가신 양호가 정권을 잡자 공자는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공자는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502(쉰) 공산불요가 공자를 부름 / 논어(論語), 「爲政篇(위정편)」,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
501(쉰하나) 처음 벼슬을 하여 노나라 중도재(中都宰)가 됨
500(쉰둘)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회담할 때 공자가 의례를 맡아 노나라가 빼앗긴 땅을 돌려받음으로서 공자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이 시기가 공자의 정치 생활에서 최전성기였다. / 다시 사공(司空)이 되고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됨
497(쉰다섯)년 이후 공자의 주유.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감.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4년만인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 때 공자의 나이 68살이었다.
496(쉰여섯) 광 땅에서 액운을 만남. 필힐이 부름
495(쉰일곱) 위나라 영공을 만나 벼슬하고 남자(南子)를 만남 / (사마천) 정공(定公) 14년, 공자는 56세의 나이로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맡게 되자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494(쉰여덟) 벼슬을 그만두고 위나라를 떠남
492(예순)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로 가다가 환퇴의 액운을 당함 / 논어(論語), 「爲政篇(위정편)」,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
[BC 492년 노나라 애공 3년. 노나라의 정치를 정횡하던 계간자가 죽고 그 뒤를 이은 계강자가 공자의 제자 염구를 등용했다. 그래서 당시 진나라에 머물고 있던 공자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안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이상을 제자들에게 전수할 수 있게 되었구나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애공 11년에 계강자는 염구의 권고로 공자에게 귀국을 정식으로 요청하게 된다. 비로소 공자는 10여년에 걸친 유랑 생활을 끝냈다. 그때의 이야기. - 논어 해설 ]
489(예순셋) 진나라 채나라 초나라를 거쳐 위나라로 돌아감
488(예순넷) 다시 위나라(출공 재위 4년)에 벼슬함
484(예순여덟) 노나라로 돌아오다. / 노나라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자 노나라로 돌아감, 고국을 떠난 지 14년만임. 이후 유약, 증삼, 자하, 자장 등의 제자를 가르침
483(예순아홉) 아들 리(鯉)가 죽음
482 논어(論語), 「爲政篇(위정편)」,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481(일흔하나) 제자 안회(顔淵)가 죽음, 제나라 진항이 임금을 시해하자 노나라 임금에게 토벌을 간했으나 실현되지 않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사로잡히자 낙심하여 『춘추』 저작을 절필함 .
공자는 기원전 481년 [춘추(春秋)]를 완성했다.
479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죽었다.
479(일흔셋) 공자는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묻혔다.
(2:5, 47OKK)
# 공자(孔子, 전552-전479) 년표와 제자들 관계
공자 가라사대,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날 따르던 이들이 이제는 문하에 아무도 없구나. 덕행으로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뛰어났고, 언변은 재아와 자공이 뛰어났고, 정사에는 염유와 계로가 뛰어났고, 문학에는 자유와 자하가 뛰어났다.”
子曰、從我於陳蔡者、皆不及門也。德行、顏淵・閔子騫・冉伯牛・仲弓。言語、宰我・子貢。政事、冉有・季路。文學、子游・子夏。
546(여섯) 안로(顔路)[중.Wiki, 前545-?]: 안회(顔回)의 부친. 공자보다 6살 아래로 그 역시 공자의 제자였다고 한다. / 안연(顔淵), 안연은 이름은 회(回), 자는 자연(子淵))
543(아홉) 공자의 핵심 제자 공문십철중의 한사람. 본명은 중유(仲由)로, 자로(子路)는 자이다. 계로(季路)라고도 부른다. 공자와는 9살 차이. / 자로(子路, 전542~전480년)는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의 정치가이자, 무인이다. / 본래 알아주는 양아치 깡패 출신이었으며, 힘도 셌다. 얼마나 심한 양아치였는지, 그 때까지 공자를 욕 하던 사람들이 자로가 공자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니까 공자님께서 가라사대 "자로랑 같이 다닌 뒤로 내 험담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537(열다섯) 민자건(閔子騫)은 공자의 제자인데 비교적 나이가 많다. 15살 아래. 공자의 초창기 제자로 볼 수 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서 덕행으로 안회 다음이었다고 한다. / 민손(闵损, 前536年-前487年, 字子骞),
523(스물아홉) 염옹(冉雍): 공자의 제자. 29살 아래였다고 함. 공야장편, 제5. 或曰 雍也 仁而不佞 子曰 焉用佞(혹왈 옹야 인이불영 자왈 언용영)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어인이구급 누증어인 부지기인 언용영) / 염구(冉求, 전522년~ ?)는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유(子有)이다. 염유(冉有)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는 공자의 제자로 자로와는 상반되는 성격으로 여겨진다. 그는 화술에도 능란하였고 유능한 행정가요 장군이기도 하였다.
522 안연(顔淵 522-482), 이름은 회(回), 자는 자연(子淵)) 서른 살 차이였다. [나무위키: 顔回, BC 514 노나라 출신.(현재의 산둥 지방)-BC 483. / 중Wiki: 颜回(前521年-前481年), 字子渊,又稱顏子、颜渊。春秋鲁国人。孔子七十二门徒之首。孔門十哲中德行科之一,
521(서른하나) 자공(子貢): 단목사(端木赐). 공자보다 31세 아래였다고 함. 부유했다고 하고, 그 덕분에 공자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마지막에는 공자의 삼년상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端木赐(前520年-前446年),複姓端木,春秋末年衞國人,字子贡(古同子赣)。孔子的得意门生,孔门十哲之一,“受业身通”的弟子之一,孔子曾称其为“瑚琏之器”,在孔門十哲中以言語聞名。萬仞宮牆典故,出自子贡稱贊孔夫子之學問高深。
521 고시/자고(高柴, 前521年-?),字子羔(자고),孔子七十二弟子之一。史料有记载他是卫人、或說是齊文公的後裔,身不满六尺,长得很丑,孔子認為其讀書不足。
521복부제/ 자천(宓不齊, 前521年-前445年: 字子賤,春秋时期人,孔子弟子.) 자는 자천(子賤) / 다른 설, 503(마흔아홉) 자천(子賤) 출생, 그는 공자의 제자로 49살 아래였다고 함. 공야장편, 제3. 子謂 子賤 君子哉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자위 자천 군자재약인 노무군자자 사언취사) 공자 사망시 자천 나이 스물여섯이구나 ...
518 유약(有若, 前518年-前458年), 字子有(자유),魯國人。唐玄宗尊之为“汴伯(변백)”
517(서른여섯) 공자가 기원전 517년에 노나라의 내란을 피해 제나라로 갔을 때 제 경공(齊 景公)과 대담한 적이 있다고 한다. - 논어(論語) 12 안연편(顔淵篇) 11
512(마흔) 자금(子禽): 공자 제자 이름. 진항이라는 사람. 공자보다 40세 아래였다고 함. / 진항(陳亢, 前511年-前430年: 字子禽,一字 子亢)
508(마흔넷) 자하(子夏) 공자보다 마흔넷 아래, 이름은 상(商)이다. 시와 예(禮)에 능통하며 예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 / 복상(卜商, 前507年-?: 姒姓,卜氏,字子夏)
505 증참(曾参 shēn, 前505年-前432年), 字子舆(자여),春秋末期鲁国南武城(山东平邑县)人,儒家主要代表人物之一,孔子的弟子
504(마흔여덟) 공자가 48살 때 계손씨의 가신 양호가 정권을 잡자 공자는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공자는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504 자장(子張)은 공자보다 마흔여덟 아래, 이름은 사(師)이다. / 전손사(顓孫師, 前503年-前447年: 姓顓孫,名師,字子張,陳國人,孔子的弟子.
501(쉰하나) 노 정공 8년, 공산불뉴(公山不狃)는 계씨에게 뜻을 얻지 못하자 양호에게 의탁해 함께 반란을 일으켜 삼환(三桓)의 적장자를 폐하고 평소 양호와 사이가 좋은 서자를 세우고자 하여 마침내 계환자를 체포했다. 환자는 그를 속여 도망칠 수 있었다. 정공 9년, 양호는 계획이 실패하자 제나라로 도망갔다. 이때 공자의 나이는 50세였다.
495(쉰일곱) (사마천) 정공(定公) 14년, 공자는 56세의 나이로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맡게 되자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어느 곳에는 51세에 대사구]
486 계강자(季康子, ?-前468年),魯國季孫氏,名肥,東周春秋時代魯国的大夫。季桓子季孙斯之子。 <계강자, 논어(論語): 12 안연편(顔淵篇)에 대화자로 나온다.>
484(예순여덟) 옹야편(雍也篇) 13, 맹지반(孟之反)은 기원전 484년 노나라의 성문 밖에 있었던 제나라와의 전투에서 노나라가 크게 패했다. 그래서 후퇴해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는데 퇴각하는 군대의 후위를 지키면서 군대가 안정하게 퇴각할 수 있도록 지킨 것. 그러면서 자기는 맨 마지막으로 성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소크라테스의 예와 같다. [주유를 하다가 고국 노나라로 돌아오다]
482(일흔)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자왈 오십유오이지우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일흔 살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대로 따라도 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무엇을 하건 그다지 애쓰지 않아도 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어졌다).]
479(일흔셋)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죽었다. 강직하고 용맹하였다.
479(일흔셋) 공자는 노나라 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자공(子貢)은 홀로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이 지난 후에야 떠나갔다. 제자와 노나라 사람 중에 묘소 밑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100여 집이었다. 그래서 ‘공리(孔里: 공자 마을)'가 되었다. 공자 무덤에서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세시(歲時:새 해를 맞을 때)에 제사를 드렸고, 선비들은 향음주와 대사의 예를 행하였다.
* 공자 가라사대,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날 따르던 이들이 이제는 문하에 아무도 없구나. 덕행으로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뛰어났고, 언변은 재아와 자공이 뛰어났고, 정사에는 염유와 계로가 뛰어났고, 문학에는 자유와 자하가 뛰어났다.” - 공자 10제자 : 子曰、從我於陳蔡者、皆不及門也。德行、顏淵・閔子騫・冉伯牛・仲弓。言語、宰我・子貢。政事、冉有・季路。文學、子游・子夏。— 《논어》 선진편 제2장 : 공자는 제자의 휘(이름)을 부르는데 여기서는 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후대의 글이라 한다.
* 공자사후: 《맹자》[공손추] 편에 의하면 공자의 사후에 자하(子夏) · 자장(子張) · 자유(子遊)의 3인이 유약(有若)을 스승으로 모시려고 하자 증자(曾子)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유약은 공자 제자 가운데 연장자(선배) 그룹에 속하는 사람으로, 《논어》에 그가 예를 중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마음에 인격(仁)을 닦는 것을 강조하는 증자가 반대한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도 다음 학당장이 선출에 문제거리가 있었던 것과 같다. 이는 학문의 중요도와 분화에 연관도 있지만, 시대의 변화에도 있다.]
- 공문의 2유파(孔門의 二流派): 증자(曾子), 자사(子思)의 계통에 속하는 내성파(內省派; 안으로 반성을 함. 마음 수양을 중시함. 仁 중심)와 자하(子夏), 자유(子遊)의 계통으로 이어지는 숭례파(崇禮派; 예를 높임. 예를 닦음. 禮 중심)의 2파로 나뉘었다.[2] 이 두 파를 공문의 2유파(孔門의 二流派)라 한다.
- 한비(韓非, 전280?-전233년)의 한비자(韓非子) 〈현학편〉에 의하면, 유가에는 자장(子張), 자사(子思), 안씨(顔氏)[안회], 맹씨(孟氏)[맹자], 칠조(漆雕)[유협(遊俠; 무사)], 중량씨(仲良氏), 손씨(孫氏)[순자, 손경], 악정씨(樂正氏) 등의 8파(八派)가 있었다.
(50LKC) (3:20 50LLH)
**
540 칠조개(漆彫開, 前540年-前489年),〈又有人作漆雕開〉,名啟,字子開(자개),蔡人,小孔子十一歲。為孔子一門生,曾受臏刑,传习《尚书》。
중량씨(仲良氏), 다만 중량씨는 '예기'에 짤막하게 등장하는 자여(전505-432)의 제자 중량자(仲梁子) ...
483 공급(孔伋, 前483年-前402年),字子思(자사),戰國初期鲁國人,儒家的主要代表之一,有「述聖」之稱,為孔子的孙子(공자의 손자)
480 묵자(墨子, 전480년경-전390년경) 중국 춘추시대의 송(현재 하남성 상구)출생, 사상가이자 철학자. 겸애를 주장. .
372 맹자(孟子, BC 372 ?-BC 289 ?) 이름은 가(軻) - 양주와 묵자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298 순자(荀子, BC 298?-BC 238?) 이름은 순황(荀況),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유학자.
[247 진시황(秦始皇) 즉위. 즉위한 진나라 왕 정(政)은 어렸기 때문에 모태후(母太后)가 섭정했는데, 장성해서 친정(親政)을 시작하자 재상 여불위(呂不韋) 등을 제거하고 이사(李斯)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는 법가(法家)의 학자로서 이후부터 진나라 정치는 그의 의견에 따라 시행된다.]
202 한 고조(전247-195) 황제 등극
195 한(漢) 고조 유방(전247-195)는 죽는 해 195년 공자의 사당에 가서 추모제를 올렸다. 그후로 천자들이 대대로 공자의 사당을 찾아갔었다. 한 무제는 유가를 한(漢)의 종통으로 받아들인다.
170? 동중서(董仲舒, 전170?-전120?) 중국 전한(前漢) 때의 유학자. 한(漢) 무제(武帝:BC 141~87)의 치세와 동중서(董仲舒:BC 179경~104경)의 출현으로, 유교는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O
127 정현(鄭玄, 127-200)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 경학(經學)의 대성자(大成者). 자 강성(康成). 북해(北海: 山東省) 고밀(高密) 출생. 시종 재야(在野)의 학자로 지냈
768 한유(韓愈, 768-824) 자 퇴지(退之), 중국 당(唐)나라의 문학자 ․사상가.
960 송(宋 960-1279) 중국 역사상 당(唐)․오대십국(五代十國)에 이어지는 왕조(960~1279)
1011 소옹(邵雍, 1011-1077) 중국 송(宋)나라의 학자, 시인, 호 안락선생(安樂先生), 별칭, 자 요부(堯夫), 시호 강절(康節) <伊川擊壤集>(20권)
1017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주염계(周濂溪), 중국 북송(960-1127) 유교 사상가.
1020 장재(張載: 1020-1077) 장횡거(張橫渠) 중국 송나라 사상가.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1130 주희(朱熹, 1130-1200) 중국 남송 유학자, 주자(朱子), 주부자(朱夫子), 주문공(朱文公) 송태사휘국문공(宋太師徽國文公), 성리학(주자학)을 창시.
1139 육구연(陸九淵, 호 상산(象山), 1139-1192)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 호 존재(存齋), 주자가 정이천의 학통에 의한 도문학(道問學: 問學第一)을 보다 존중한 데 반하여, 상산은 정명도의 존덕성(尊德性: 德性第一)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주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성즉이설(性卽理說)을 제창하였고, 상산은 치지(致知)를 주로 한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제창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객관적 유심론(客觀的唯心論)과 주관적 유심론(主觀的唯心論)으로 불린다.
1328 이색(李穡, 1328-1396) 고려 말기의 문신, 정치가이며 유학자
1482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1527 이탁오(李卓吾, 1527-1602) 중국 명대(明代)의 유학자. 호 탁오(卓吾). 이름은 지(贄). 별호 굉보(宏甫). 관직은 운남요안부지사(雲南姚安府知事)까지 지냈다.
[1552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이마두(利瑪竇) 이탈리아의 예수회(會) 선교사로, 중국에 최초로 선교한 인물. 『천주실의(天主實義, 1603)』]
1610 황종희(黃宗羲, 1610-1695)호는 남뢰(南雷), 이주(梨洲). 중국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사상가. 그의 학문은 박람(博覽)과 실증(實證)을 존중하고, 청나라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는데, 명대(明代)의 철학사(哲學史)라고 할 《명유학안(明儒學案)》, 군주 독재제도를 통렬히 비판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명저(名著)로 알려졌다. 특히 《명이대방록》은 청말(淸末) 혁명사상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1619 왕부지(王夫之, 1619-1692) 선산(船山),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사상가, 문학자. 그의 학문은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교의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섭취하는 한편, 그리스도교와 유럽의 근대과학까지 접근하였다.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와 함께 명말 청초의 3대 학자라 불렸다.
1723 대진(戴震, 1723-1777) 호: 동원(東原) 청조의 고증학을 대성하였다. 혜동(惠棟)에게 배우다.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
1762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1811 증국번(曾國藩, 1811-1872) 청(淸)나라 말기의 정치가 ․학자.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진압한 지도자이며,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추진자이다. 주자학자이며, 문장가로도 유명하다.
1803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 1803-1879) 조선 후기의 실학자, 지리학자, 철학자, 사상가, 저술가. 실증철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나, 입말이 있음에도 학문을 인민과 더불어 함께하지 못했다.
1824 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본명 최복술(崔福述), 1824-1864) 조선시대 말기 동학의 창시자. 변역(變易)의 시기에 인내천(人乃天)과 시천주(侍天主)를 내세우며, 백성 속에서 생성되었고, 인민읕 토대로 하였음에도, 우리 입말로 발산하지 못했다. 입말의 중요성을 깨달은 시기는 일제 식민지 착취 시기 “말모이”에서 였다.
1908년 창립한 ‘국어연구학회’에서, 1921년 ‘조선어연구회’ 가 재조직되고, 1931년 ‘조선어학회’ 란 이름으로 다시 창립되었다. 말모이는 1931년의 이야기에서 입말 수집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 엄유나 감독의《말모이(2019)》는 “조선어학회 사건”(1942)을 다룬다.>
(6:31, 57WMB)
논어(論語): 11 선진(先進)편
十七. 柴也 愚 參也 魯 賜也 辟 由也 喭(시야 우 삼야 노 사야 벽 유야 언); 시(子羔:자고)는 우직하고, 삼(曾子:증자)은 아둔하고, 사(師:자장)는 과격하고, 유(子路:자로)는 거칠다.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 중용(中庸) 예기 31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