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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벩송(Henri Bergson, 1959)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PUF, 증보판 1959(초 1931), P. 300.
[차례] 300
서문 Avant-Propre 1
제1장 유기적 총체성 Totalités organiques 5
제2장 자유 Liberté 28
제3장 영혼과 신체 L'âme et le corps 80
제4장 생명 La vie 132
제5장 영웅주의와 성성 L'héroïsme et la sainteté 182
제6장 개념들의 무와 정신의 충만 Le néant des concepts et le plein de l'esprit 200
제7장 단순성 La simplicité. Et de la joie 229
부록: 벩송과 유대주의 Appenice: Bergson et le judaïsme 255
영혼 전체와 더불어 Avec l'âme tout entière 286
참고문헌 Bibliographie 297
차례 Table des matières 300
제4장 생명 La vie 132
제1절 목적성 Finalité 132
제2절 본능과 지성 Instinct et intelligence 144
제3절 물질과 생명 La Matiere et la Vie 166-181
이 생명과 이 본능은 세계에서 유일한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이것들이 원하는 바를 행할 수 없는 물질의 출현 앞에 있다. 벩송은 너무나 실재론자이기에 이것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동전의 뒷면이다. 이처럼 실재적 유기체들은 좋거나 싫거나 간에 생명이 받아들여야 하는 타협(un compromis)[modus vivendi]의 결과로부터 나온다. 물질과 기억은 이 타협에 대해 심리학적 측면을, 즉 두뇌와 사유와 관계를 서술했다. 그때 우리는 신체와 영혼 사이에서 원인작용(une causation)의 어떠한 지적인 연관도, 어떠한 타동사적 소통도, 게다가 라이프니츠가 말한 대로 어떠한 실재적 “영향”도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두뇌는 그 고유한 의미에서 추억들의 기관 또는 도구이다. 다시 말하면 두뇌는 추억들의 봉사에 쓰이며, 추억들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두뇌는 기억을 활성화하는 데 쓰인다. 두뇌는 기억에게 운동들로, 지각들로, 또 행동들로 전환되게 허락해 준다. 이러한 것이 전부이다.
생물학적 목적성의 분석은 우리를 한 번 더 범주적이 되게 허락할 것이다. 생명은 무한히 풍부하고 깊이 있다. 생명은 자기 운명을 물질에 연결해서 얻어야 할 아무 것도 없다. 이 물질은 생명의 모든 뉘앙스들을 표현할 수 없다. 하물며 유기체화 하는 도약은 “유기체의 기적들”을 설명한다. 생명 있는 존재들의 굉장히 복잡한 구조를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더구나(a fortiori),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자는 가장 적은 것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형식들 뒤에, 더 많은 장점을 행할 수 있는 생명적 도약이 있다. 그리고 이 생명적 도약은 작품들 속에서 자기의 천재적 재능의 다변화 되어서 소진할 수 없는 자원들을 스스로 다써버리지 못하다. 목적론적 놀라움의 저 밑바탕에서 일종의 무의식적 유물론이 나온다. 이 유물론은 우리 지성의 습관적인 진행방식에 의해 설명되고, 이 지성은 총체성들을 구성하기 위하여 항상 요소들을 모으고자 열망한다. 한 유기체의 최소한 세부사항들은 그 만큼 많은 긍정적 정복들을 표상했을 것이다. 마치 세부사항들이 그것들 자체적으로 하나의 가치와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물들의 형태론적이고 “시각적인” 실재성들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 유일한 실재성은 공간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또 눈을 위하여 현존하며, 무(le neant)를 정복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시각적 복잡화 작업은 아주 다른 원리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기계 그 자체를 위하여 우리들의 찬탄[찬양]을 뚜렷하게 축소한다. 사실상 신체는 사용된 수단들의 일체라기보다 오히려 되돌려진 장애물들(des obstacles)의 일체를 표상[대신]한다. 그리고 꼭 마찬가지로 언어도 도구이라기보다 오히려 방해물(un empêchement, 훼방꾼)이다. 그 언어는 그것이 표현하는 만큼이나 감추고 왜곡[변형]한다. 언어는, 동사 “배반하다(trahir)”의 두 가지 의미에서, 배반한다. 즉 언어는 폭로하고 그리고 부인한다 ... [그 언어는] 최고의 조롱이다. 언어는 부인하면서 만이 폭로할 뿐이도다! 그러한 것이 기관-장애물의 아이러니한 모순이다. 그것이 바로 퀴아(le quia, .. 왜냐하면, 라는 것)인 것은 쾀비스(le quamvis: 비록···라도, 아무리 ..라도)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체 일반은 도구인 만큼이나 짐(un impédiment, [la impedimentum, 장애])이다. 신체는 지각에서 화면을 만든다. 바로 그런 이유로 지각을 가능하게 한다. 신체의 저항과 신체의 무기력은 그 자체 역설적으로 생명성의 자극(un stimulant, 흥분제)이다. 신체는 생명이 극복 해야만 할 무엇을, 즉 생명이 또한 스스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자체로부터 포기해야만 할 무엇을, 표현한다. 이런 의미에서 또 헛된 역설론에 빠짐이 없이, 동물은 두 눈을 수단으로 해서라기보다, 자기의 두 눈에도 불구하고 본다고 사람들은 말할 수 있다. 벩송주의에서 [이보다] 더 깊고 풍부한 생각은 전혀 없다. 사람들이 덧붙일 수 있다면, 신체들은 원인이기는커녕 심지어는 정신적인 것의 단순한 번역이기는커녕, 반대로 물질과 공동거주하기 위하여 영혼이 정복해야만 할 모든 것을 표상한다. 이 경우에 물질은 영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물질 속에서 영혼은 스스로가 옹색하게 느껴진다. 영혼은 신체 없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신체를 위하여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다. 영혼은 잘하거나 잘못하거나 간에 양립할 수 없는 자기 존엄성을, 그리고 자기 최상의 소명을 주장한다. 신체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신체가 표현하기에 성공한 사물들 속에 전혀 남아있지 않고, 반대로 우리가 예견하고자하는 사물들 속에, 또 신체가 표현하지 못할 사물들 속에, 즉 암시들로 된 무언의 항의[주장] 속에 남아있다. 신체의 완전 작업들은 표현되지 못한 저넘어[저세상]에 속하는 조롱섞인(dérisoire, 하찮은) 암시일 뿐이다. 정신은 살(육, 肉)의 무게에 반대하여 논쟁한다. 살은 정신을 분리하고 정신을 그 자체에 반대하여 분할한다. 이로부터 인식의 형이상학적인 모든 오해들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피타고라스의 신체-무덤(σώμα-σήμα, 신체-기호)에서 변증법적 복잡성과 기관-장애의 역설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죄수는 자기 감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 감옥 속에서 그리고 이 감옥 덕분에, 그는 [현재] 있는 약간의 것이(조무래기가) 아닌가! 살[육]의 무게는 살이 지닌 개인적 현존의 조건 자체이다. 감옥(le vinculum) 무상의 어떤 것이고 우연의 어떤 것이다. 거주하는 세계들의 다수성[다양체]을 말하는 벩송은 생명이 미지의 성운들 안에서 아무도 상상할 수조차 없는 형식[형상]들에게 옷을 입힐 수 있다고 한걸음 더 나아가 말하지 않는가?
이리하여 사람들은 물질과 생명의 연관에 대해 무엇을 사유해야 하는지를 본다. 물질이 생명에게 더 나은 혜택을 주지 않듯이, 산도 터널의 원인이 아니다. 분명하게도 만일 산이 없었다면, 터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터널들 그자체가 불필요[무용]하다면, 누가 그것에 대해 불평할 생각을 하겠는가? 터널은 산들도 있고 또 통과하는데 길을 막는 다른 난관들도 있는 지구상에서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단순히 표상[대리]한다. 그러나 터널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터널은 단지 정복된 산을 표상하며,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관들 각각은 물질의 패배를 표상한다. 따라서 신체는 정복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있다. 생명은 신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대로 생명은 혼자 잘 지내기를 바랐을 것이고 또 산을 관통하지 않고서도 자기 목표에 곧바로 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물체]가 거기에 있다. [생명은] 신체 주위의 경계를 그려야 하고, 그것을 피해야 하고, 모든 종류의 지적인 [노회함]간지로 승화해야 한다. 이러한 조작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의 기계론적인 지성에게 혜택을 입은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야[전복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때에 사람들은, 실증적이면서도 진실로 초기의 유일한 실재성이, 자신에 저항하는 물질을 고상하게 하고 또 정신화하기 위한 생명의 노력 그자체이라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것이 벩송주의가 우리에게 암시하는 명증함들의 전도이다. 실증성의 이 극치는 가장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뜻으로(obvie) 또 공간적인, 그리고 만질 수 있고 또 볼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신체는 생명의 부분[간헐]적인 중단을 표상한다. 마찬가지로 관념은 사고의 부정이며, 정지는 운동의 부정이다. 우리는 개념들, 순간들, 신체들이 얻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오히려 포기를 표현한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익숙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은 사유의 분절이며, 중지된 사유이다. 사람들은, 개념과 단어가 마치 물질처럼 “되돌려진 장애물들”이라고, 그리고 이것들은 그들의 모든 가치를 이것들과 반대 투쟁하는 정신적 에너지로부터 끌어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물질과 기억과 창조적 진화를 넘어, 시론의 결론들과 합류할 것인지를 편안하게 본다. 물질은 또한 마찬가지로 과거의 활성화인 자기의 실증적 기능 안에서는 분명하게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물질은 특히 필연적 잘못(le mal nécessaire)이며, 또한 생명이 받아들여야 하는 대역(le pis-aller, 미봉책)이라고도 말할 정도이다. 생명은 자기의 보다 나은 것을 만들고, 그리고 생명은 비천한 [물질적] 재료들을 가지고 걸작들을 완수하고자 연습한다. 사람들은 교묘하게 그 불운에 적응할 수도 없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소한의 잘못(le moindre mal, μείων κακόν)이라 불렀던 것을 위하여, 보다 우아한 해결책들을 발견하지도 못한다. 만일 생명이 이 부담[짐]과 더불어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생명은 어떤 기적들을 완성할 것인가! 그러나 생명은 치명적인 위험들을 각 발자국마다 부딪힌다. 물질은 자신의 기획들을 생명에게 잔인하게 지불하게 한다. 벩송은 뒤로의 행동을 자주 홀리기(facination, 매료)라 부른다. 이 뒤로 행동은 물질이 생명 도약의 작품을 파괴한다. 이미 벩송이 두뇌작용의 실증적 기능에 관해 강조한 이 시기에, 그는 현재가 살(肉 육) 없이도 추억들에 행사하는 인력[끌어당김, 매료]에 대해 자주 말했다. 이제 시론의 비타협적인 언어를 말하면서, 그는 언어 유혹의 불성실을 특히 강조하고, 그리고 그는 언어를 플로티노스의 몇 정식들을 상기하게 하는 여러 항[개념]들로 만든다. 매순간에 신체는 그것의 협잡의 특권에 의해 영혼에게 마술을 걸고(ensorceller, γοητεύει), 영혼을 경직(ankylose)하도록 위협한다. 몇몇 동물 종들(유곤충류, 연체류), 또는 식물 종들(버섯류)에서 생명은 또한 물질에 의해 최면 된 체 있거나, 마비된 체 있다. 진화는 급히 방향전환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도약은 침범하는 마비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 그것은 반대편에서까지도 정신은 그 자신의 희생자로 남는다. 생명은 자기 자신의 함정에 빠졌다. 그리고 생명이 지배하려고 신중하게 응용했던 형식들은 생명자신에게 반대로 되돌아온다. 이 희극의 대부분의 기능은 물질의 공격적인 복수들이라고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 물론 우발사고가 우리 숙명의 중심에 또는 총체성에 도달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 희극은 신중하게 전과 같이 되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곤두박질이 우리에게 생명을 일으키게 한다면, 그것은 비극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만일 그 곤두박질이 한 존재의 중력으로부터 오는 지나가듯하며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단순한 복수일 뿐이라면, 이 때 그 존재의 소명이란 영매[공중 떠돌기]와 은총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에게] 웃음 짓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방심”(le distrait)의 심하지 않은 낭패들에서 기분전환이 된다. 그 점에서 풍자화는 또한 이러한 신체의 매혹적인 행동을 과장한다. 이처럼 실언(le lapsus)이 웃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답답함(la pesanteur, 억압감)에 대한 뜻밖의 승리이며, 생명적 주의에 대한 사소한 하락이기 때문이다. 또 왜냐하면 그것은 때에 맞지 않는 하품처럼, 우리의 경계심과 우리의 자유에 대한 분명한 기분전환이기 때문이다. 지각할 수 없을 정도의 이런 느슨함은, 모든 경솔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신체적 무기력에 기인한다. 생명은 야만적인 원리와 실랑이를 벌인다. 생명은 그 원리들로는 그자신이 원하는 것도, 기꺼이 스스로 반항하는 것도 만들지 못한다. 종들의 역사는 이런 반항들[ces révolte, 봉기)과 이런 패배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물질을 일종의 한탄할 만한 사치로써 간주하여야만 한다. 자연은 이것[사치]을 심장의 유쾌함으로 자신에게 제공하였으며, 이 통탄할 사치는 자유의 도래를 늦추는 것과 다른 효과를 갖지 않는다. 이 경우에 물질과 기억의 제4장은 아무것에도 소용이 없을 것이고, 생명의 조건들에 대한 연구는 지각의 주의 깊은 성찰이 극복했던 이원론을 확립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가 기관-장애의 변증법이라 불렀던 것은 구현(l'incarnation, 체화)의 필연성을 확립한다. 지옥[연옥]의 고통을 겪고 있는 영혼들(les âme en peine)은 없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다음을 여러 재파악 방식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즉 물질은 장애(un impedimentum)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편으로는 생명의 본질적인 협력자이다. 1) 그리고 우선 물질은, 우주적이 되면서, 개인적 기억에 대립하여 그것이 행하는 역할을 상실하지 않는다. 만일 물질이 자주 생명에게 강하게 무게로 짓누른다면[압박한다면], 창조적 진화의 관점은 더 이상 심리학적이 아니라고, 그리고 신체의 역할을 여기서 물질에 의해 유지된다고 말해야만 한다. 물질은 신체처럼 정신에 의해 이미 스쳐가며 상처를 입히지 못했으나, 순수지각의 절대적 한계를, 즉 그 철학자의 미지의 세계(la terra ignota)를 대신[재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이런 안쪽[안감]은 절대적으로 반(反)정신적인 것조차도 아니다. 생명은 “맞자기”(pour soi)이어야하고 또한 “제자기”(en soi)이다. 1911년 영국의 강연에서 벩송은 물질에게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부여했다. 우선 물질은 분할하고 정확하게 하며, 그러고 나서 물질은 노력을 불러일으킨다. 물질은 개별화작업의 능력에 닮은 어떠한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이것임”(haeccéité)은 정신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이것만이 생명과 거리를 좁히면서, 생명을 자기에 현재[출석]하게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지나서[한 바퀴 돌고 난 후에], 유기체는 한정되어 완성된 것(ὡρισμένον καὶ τέλειον)이 도다! 유기체는 절대자처럼 닫힌 걸작이며, 단일자의 총체성이며, 소우주이다. 지각의 근본적인 유용성은, 우리가 이미 그것을 보았듯이, 의식의 줄어듬(le rétrécissement)에 있다. 우리의 기억은 무한히 광대하다. 그러나 무한성이란 것이 종종 무능함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지를 누가 아는가? 과도하게 넘치는 기억은 현존의 위급한 문제들에 직면하여 우리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 기억은 지식의 체계적인 줄어듬 없이는 창조적 노력도 없다. 세네카(Sénèque, Seneca, 전4-후65)는 (sapientia rerum terminos novit)라고 말한다. 호기심에 가득 찬 전복에 의해, 벩송은 다음과 같이 이와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다. 너절한 무더기로 된 추억들의 꿈을 마치 정신 속에 진실한 물질의 침입으로 취급한다. 생명은 그 자체적으로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만일 생명이 이와 같이 효과성 전체를, 즉 우주의 숙명들에 관한 신중한 영향들을 상실한다면, 그러한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행복하게도 물질은 분화하는 개별성들을 가로질러[관통하여] 생명의 흐름을 걸러내는 거기에 있으며, 이는 담론이 신중한 개념들로 사유를 걸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보았던 대로, 신경체계가 목표로 삼는 것은 흩어진 에너지를 정확[분명]하게 하여 운하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체계는 사물에 관한 우리의 행동을 강화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식물이든 동물이든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서 물질의 기능은 잠재적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이고, 그리고 생명은 그 에너지를 자유롭게 처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은 생명을 집중하게 하는데 봉사하며, 생명을 주의 깊게 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게 하며, 동시에 의식들을 분리하게 하는 데 봉사한다. 이런 협소함(cettee étroitesse, 옹색)으로부터, 생명자체인 본능은 강요된 선행(la bienfaisance, 자비)을 마치 실천적 지각처럼 받치고 있다. 본능은 지각처럼 두뇌의 경찰에 의존하지 않는다. 본능의 한계설정(la limitation), 즉 물질 일반의 필연성은 유용한 지각의 한계설정 만큼이나 왜곡되어 있다. 그 한계설정은 단지 제한적[한정적]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 다시 장악 하는 본능은 명철함과 정확성을 획득한다. 본능은 스스로 움츠러들어서 우리에게 생명의 조작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옹색함은 모든 계시의 조건이며, 이것은 이미 뵈메(Jakob Böhme, 1575-1624) 철학의 중심적 사상이 아니었던가?
다른 한편 물질은 “노력을 불러 온다” 물질은 매순간마다 생명이 스스로 주장해야만 하는 저항을 표상[재현]할 뿐만 아니라, 물질은 원초적으로 발판이다. 이 발판의 이완[해이]은 생명도약을 진화에 있어서 점점 더 많이 가지치기하는 길로 향하여 투사했다. 이것은 도약(l'élan) 또는 비약(l'essor)의 이미지 자체가 표현하는 것이다. 도약은 견고한 지지점을, 즉 생명에게 시초의 충력을 제공하는 디딤판을, 가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폭발은 팽창하는 힘들이 거역하는 장애물을 가정한다. 디딤판 위에서 폴리테이아편의 변증법과 향연편의 성관심(l'érotique)은 전자도 선(le Bien)을 후자도 선을 향하여 뛰어오르기 위한 이것들의 도약을 실행한다. 플라톤에서 에피바세이스(ἐπιβάσεις)는 호르마이(ὁρμαί)에게 이것들의 이완을 부여했다. 무르그의 호르메(La Hormé)는 플라톤학파의 어떤 것이 아닌가? 아마도 물질이 없었다면, 또한 생명이 있을 것이지만 생명도약은 없었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진화는 자유의 증가하는 이환율(la prévalence)인 자기 존재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황량한 세계 안에서 절망적으로 고독한 정신은 환희와 동시에 위험의 번민을 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환희는 승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거대한 환희는 승리의 강조점이다. 환희가 있는 도처에서 창조가 있다.” 거기에서는 우리의 진실한 위대함이 있으며, 우리의 패배들 자체는 영광스러운 것이며 정신의 존엄성을 표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은 정신과 상관있는 이타성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생명은 정신에게 자신의 탄력성을, 즉 자기의 내부 수렴을, 요컨대 자기의 목적성을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자주, 벩송은 두 가지 힘들을 마치 필연적으로 보완물들로써 다루기를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하였다. 왜냐하면 물질은 우리 자유에 저항하기 때문에, 정신은 이제 이 세계에서 소명을 갖는다. 그 정신은 계속적인 종들을 가로질러 자유의 신격화(l'apothéose)를 준비한다.
그러나 결국, 아마도 그것은 바로 말하는 방식일 뿐이다. 만일 물질이 제자기로(en soi) 자치적이고 제어하기 어려운 자료(le donné)로 남는다고 한다면, 물질이 자기의 적대성 자체에 의해 자유의 건축[성립]에 협력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거의 아무것도 아닌 사유로 물질을 축소[환원]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은 진화가 시작하도록 하는 거기에 있다. 사람들이 제작 작업과 대립하는 유기체 작업은 거의 수학적인 점으로부터, 즉 물질의 최소(un minimum, 극소)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최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물질은 이미 거기에 있었고, 이 둘째 원리는 첫째 원리에 독립적일 것이다. 사람들이 덧붙이기를, 생명은 단지 마지못해서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호의로거나 호의가 아니거나 간에, 결국 생명은 공간 속에 들어가고, 그리고 공간은 생명에게 도발적인 부정들(les négations)의 자양분을 제공하기 위하여 생명을 기다리는 분위기이다. 게다가 사실상 (왜냐하면 그 질문은 벩송주의의 가장 복잡한 것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인데) 일원론의 주장이 우세하다. 사물들 자체는 지속하며, 물질도 또한 상대적으로 정신적이다. 그 물질은 공간의 타성[무기력]에게 보다 큰 자기의 호의를 베푸는 점에서만 정신과 다르다. 아무래도 좋다. 물질이 일으킨 문제는 이제부터 공간에 관하여 제기될 것이다. 두 가지 한계들이, 즉 마치 의식 저넘어 처럼, 물질 저넘어를 이론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두 절대자들이 있다. 틀림없이 사람들은 두 번 되풀이하여 우리에게 그것의 공통 기원을 증명하도록 허락 해준다. 그러나 그 연속은 물질이 생명과 연대하여 한 방식으로 지속한다는 것을, 또 물질의 모든 긍정은 생명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하며, 물질은 또한 생명과 가장 연약한 정도로 참여 한다. 확실히 생명은 물질 속에 생명적인 있는 것과 닮았다. 그러나 이 생명성은 물질화하는 힘에 의해 지배된 원리의 사고(l'accident)일 뿐이다. 벩송 속에서 진리는 대립되는 두 “원리들”이 있다기보다 반대로 향하는 두 운동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는 상승하는 운동, 다른 하나는 하강하는 운동이다. “수준들의 혼융”에 관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현재에서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의식으로부터 물질로, 그 근본바탕에서 점점 밀집도가 약해지는 실재성들의 단계만이 있다. 사람들은 한 방향에서든지 다른 방향에서든, 또는 안에서든지 밖에서든지, 이 단계를 잡을[이용할] 수 있다. 결국 물질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 반대라는 성질은 사물들 사이에 있기보다 방향들 사이에 있으며, 하나는 절대적으로 긍정적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인 부정적이다. 마찬가지로 플로티노스에게서 “제자기로써-무”(le néant-en-soi)는 역설적으로 잘못의 원리이며, 항상 저넘에서 있으며, 온아래(le Bas)보다 아래 있다. 결국 절대적인 비존재(non-être)는 자기의 극한에 미치는 범위까지 내려가려는 의도와 일치하지 않는가? 동일 방향에서 생명은 본능으로, 직관은 예지 작용으로 길을 간다. 마치 수행노력(nisus formativus) 같은, 다시 말하면 유기체화 작업 같은, 이것들은 원심적이며, 역동적인 총체성에 의해 영감을 받았을지라도 또는 씨앗 같은 것이며, 실재적으로 혁신적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끊임없이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간다. 반대방향에서 제작하는 지성, 애매한 지각, 구성된 기억 등은 생명과 동시적인 것으로 남아있지 않고서, 이미 만들어진 그것들의 기호를 다른 수준들로 이전시키면서, 생명의 운동을 지체하게 할 것이다. 따라서 “더”와 “덜”이라는 계수(les coefficients, 비율)는 두 경향성(deux tendance)에 영향을 주지 두 실체(deux substances)여 영향을 입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벩송주의는 마치 실체의 일원론, 경향의 이원론처럼 우리에게 나타난다. 생명이란 절대적 실재성이다. 그리고 공간 자체는 몰래 들어온[비합법적인] 생명성에 의해서만 현존한다. 공간은 이 생명성을 빠져나가게 또는 위조[위장]하게 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고, 그리고 이 생명성 덕분에 공간은 우리에게 좋든 나쁘든 착각하게 한다. 이런 요술[속임수] 없이, 또 메카니즘의 모방 작품들(les pastiches)없이, 공간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공간은 무(無)는 아니나, 이 무에 이르는 반생명적 경향은 진실로 그 무엇인 것이다. 방향이 정해진 경향성들만을 인정하는 역동론자의 학설에서, 원리들의 “극성”(la polarité)은 매우 분명한 심리학적 의미를,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면, 실험적 의미를 갖는다. 물질은 생명의 과정과는 반대로 가는 모든 것을, 자연적으로 비가역적인 질서를 전복하는 모든 것을, 의식의 노력에 저항하는 모든 것을, 표상[재현]한다.
이 충돌의 심각성은 그래도 전혀 약화되지 않는다. 이제 의식은 자기의 비약(son essor)에 방해물로써, 실체가 아니라 경향성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의식의 숙명은 훨씬 더 비판적이다. 이 경향성으로부터 의식은 그자체로 초점(le foyer)이다. 왜냐하면 경향성들은 그것들의 근원인 의지에 의해서만 현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질이라 불렸던, 즉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공간이라 불렸던, 심술궂은 본성(une entité)을 조금은 바랐을 것이다. 이 본성으로부터 사람들은 스스로 우회할 수 있는데, 마치 오디세우스가, 자기를 잃어버리게 하고자 하는 사이렌들로부터 멀리 자기의 갈리선을 우회하듯이 말이다. 또한 플로티노스는, 스토아학자들이 이를 예감했듯이, 잘못이 의도적인 악감정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이면의 기체(une hypostase)로부터 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밖에다가 잘못을 잘 경계지우고자 원했고,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이 나쁜 자주 만남을 회피하기 위하여 불가능한 것을 행할 것이다. 그런데 잘못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다이몬이 위치를 차지할 수 있고 또 위치를 정할 수 있었다면, 다이몬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들은 자기 자신 스스로 령[다이몬]을 쫓아낼 것인가? 잘못은 본질이 아니며, 그것은 의도, 즉 나쁜 의지이다. 그리고 의식은 쉽게 그것으로부터 정화되지 않는다. 의식은 자신 속에 자기의 적을 안주하게 한다. 애벌레[구더기]는 열매 속에 있다. 웃음의 철학은 그 자체로 지각할 수 없는 함량의 쓴맛을 허용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먼저, 반대되는 두 운동이 있는데 서로는 서로에게 참석하고 있고, 또 서로 속에(dans) 있다. 그것은 기계론의 과학 그 자체가 우리에게 증명할 것이다. 이 과학은 생명에 대해 파괴의 측면만을, 또는 “퇴행발생”(catagénèse)만을 이해하게 해준다. 불량한 경향성은 긍정적 경향성의 발자국에 매여 있다. 그 불량 경향성이 매 순간마다 진화를 원환의 과정으로 전향하게 했다. 마치 중력이 서로 구성되어 분화하는 두 힘들로부터 결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리하여 정체하고 있는 종들의 제자리걸음은 공중부양(la lévitation)과 향지성(le géotropisme) 사이에, 오르고자 원하는 생명과 내려가고자 하는 반정신적 성향 사이에, 무게의 타성과 진보의 소명 사이에, 또는 벩송 나중에 그것을 말했던 대로, 억압과 열망 사이에, 개입된 타협일 뿐이다. 의식은 의식 자체에 반대하여 찢어져서, 수단을 채택하고 제 자리에서 회돌이로 돈다. 벩송이 지적한 이런 타협적 해결책이, 만일 우리가 그것을 분석한다면, 경향성의 잔인한 길항관계(l'antagonisme, 반목)를 우리에게 폭로할 것이다. 생명체는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부동성(l'immobilité)은 후퇴하는 힘의 승리를 표상한다. 그러나 이런 부동성은 순수하고 단순한 정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주에서는 순수하고 단순한 정지는 없기 때문이고, 경향성들의 힘들이 동등하게 반대일 때 우발적으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경향성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물질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였다면, 물질은 분해(une dissolution, 붕괴)를, 다시 말하면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Ού γάρ μόνον κινήσεώς έστιν ενέργεια αλλά και ακινησίας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말했고, 또한 οὐ πάν τό ἀκίνητον ἠρεμεὶ라 했다. 왜냐하면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정지의 강도 높은 에너지와 부정의 긍정성이 감추어져 있는 활동적(능동적)인 부동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르몬토프(Mikhaïl Lermontov, 1814-1841)도 또한 비밀스런 힘의 기호인 정열들 속에 고요함에 대해, 충만에 대해, 그리고 심층에 대해 그에게[키에르케로르] 말한다. 따라서 생명체의 부동성은 내부의 끓어오름을 감추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회전의 이미지가 포함하는 무엇이다. 긍정적 힘들은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생명체는 존속하며, 적어도 얻어진 지형을 방어한다. 거기에서부터 부동화 된 정신의 깊은 참을성 없음이 나온다. 생명은 비행동에서도 능동적으로 남아있으며, 사라지기를 스스로 거부한다.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것, 그것은 치명적 경향성이 생명성 그 자체의 심장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특이한 비웃음에 의해, 생명은 자기를 죽일 물질에 대해 스스로를 주장하기 위하여 필요로 한다. 생성의 연속된 운동 속에서 해소되는 생겨나는 찢어짐이, 그리고 공간적 원리의 악영향과 동시에 유용성을 설명하는 그 찢어짐이, 생명 속에 있다. 기억을 그 자체와 더불어 모순적이 되는 동일한 아이러니가, 생명을 생명에 의해서 사라지도록 단죄한다. 이것은 대가(la rançon, 보상)인데, 이 세계에서 모든 우선성이 지불한 대가이다. 우리가 말했지만 구성된 기억은 구성하는 기억을 부정하고 부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후자의 필연적 개화(l'épanouissement, 성숙)이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 따르면 지성은, 지성이 생명에 소용되는 데 운명 지워졌다는 생명에 대해 스스로 방향을 돌린다. 지속과 동시성에서 “사람들은 선택했던 능력(la faculté)은, 사람들이 그 능력 덕분에 했던 선택 속에서 읽혀질 수 있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창조적 진화도 “.. 그 작동에 의해 생명이 새로운 형식의 창조로 스스로 길을 가게 하는 작동, 그리고 이런 형식은 스스로 그리고 있는 작동이 있다. 이 작동들이 자주 길항관계의 두 운동들이다.” 거기에는 생명의 법칙 자체인 일종의 정신적 부친살해가 있다. 이처럼 개별자는 자기 후손에서만 완전하게 실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손(la progéniture)이 자연적으로 배은망덕이라는 것을, 또 그 자손이 기꺼이 모성적 희생을 망각한다는 것을, 안다. 이 개별자는 사회 속에서만 완전하게 실현되고, 그리고 사회는 그의 법칙에 종속된 독창성들에게 매우 자주 치명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별자가, 종(種)은 지속 안에서 집단은 종 안에서 자기를 고양해야 하는 종에 의해서 또 집단에 의해서 소멸하는 것처럼, 이처럼 생명 그 자체는 개별자에 의해,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유기체적 형식들에 의해 소멸한다. 이런 형식들은 생명을 볼 수 있게 하면서도 생명을 부정한다. 이처럼 매 순간에 창조적 즉흥(l'improvisation, 임시방편)은 죽음의 위험에 처해(en péril) 있다. 그런데 매 발자국마다 혁신의 천재(재능)는 허튼 소리로, 장황함으로, 말을 더듬거리며, 위협 받는다. 음악적 창조는 아마도 이런 고려에서 보면 모든 창조들 중에서 가장 많이 속이는 창조이다. 음악가는 끊임없이 반대되는 두 가지 운동들의 길항관계(이항대립)를 실험한다. 하나는 거역하는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억제하는 운동이다. 영감이 모든 부분에서부터 그것의 만남에 운집하는 협약적[관습적] 발전들에 이미 굴복한다는 것은 그 영감이 기껏해야 육신화 되었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멜로디의 관념은 아주 잘 준비된 정식들의 무리를 끌어들인다. 이 정식들을 향하여 약간 환심을 사려는 감성이 기꺼이 미끄러져 가게 내버려 둔다. 시초는, 그 시초가 이미 계속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되풀이 하고 있다는 것보다 더 일찍 시작되지는 않았다. 이 무기력함은 저주로써 발명가를 노린다. 진실한 창조자는 판박이들[상투적인 것]의 끌어들일 것을 거절한다. 그런데 그것은 매순간의 투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치명적 경사(傾斜)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 경사 위에 천재[재능]는, 자기가 기권함으로부터 나온 것과 같은 사실에 의해서, 이미 참여되었다. 창조적 작업의 각 관점에서 우리는, 곤경에서 우리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데 제공되는 수천가지 좋은 처방들에 따라서 이렇게 귀머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물질이 정신과 구별된다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 물질이 정신에 친척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 더 잘 이해한다. 확실히 물질의 초대 방식들은 생명에게 치명적이다. 그러나 이 초대방식들을 특별히 약삭빠르게 하는 것, 그것은 초대방식들이 생명자체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만일 생명이 영혼 없는 형식들에서 그 생명 그 자체에 반대하여 뻣뻣하게 되지 않는다면, 생명을 총체적 해방으로 향해 끌고 가는 그 동일한 요청은 생명을 감옥 가둘 것이다. 모든 유혹들로 중에서 가장 섬세한 유혹은 정신으로부터 오는 유혹이며, 정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우리를 정신성으로 인도한다고 소위 주장한다. 우리는, 마치 생명의 획득과 성공인 것처럼 영혼 없는 형식들을 쳐다보기를 영속한다. 그때에는 형식들이 퇴폐를 알리는 때이다. 그러나 이 역설적인 것, 그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잘못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형식들에 대해 거기에서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고, 또 그 퇴폐 자체는 생명의 신격화(une apothéose, 극찬)를 준비한다. 이리하여 지성의 조잡한 실수들과 술책들이 동시에 변명된다. 우리는 말한다. 즉 변명되었지만 정당화된 것은 아니다. 지성은 직관의 연옥[시련 장소]이다. 그것은 필연적 잘못이다. 생명은, 매 순간 마다 자기를 깨부수려고 하는 물질성이라는 짐을 무상으로 지울 수 없었다. 생명이 스쳐가는 모든 것은 내재적이며 유기체적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벩송이 말하기를 죽음은 생명체의 특성들을 아직 얼마간 간직하고 있다. 만일 메카니즘들이 자연의 헛되고도 비용이 드는 환타지였다면, 또 만일 그것들 자체가 정신의 표시[서명날인]을 지니고 있다면, 사람들은 그 정신을 꿈으로부터 끌어내는 메카니즘들에게 한권의 책 전체를 할애 했어야했을까?
이런 잔인한 실재성과 더불어 생명은 그것[정신]을 너무 높이 들어 올리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생명이 자체로 지니고 있는 경향성의 귀결점이기 때문에, 어떻게 생명은 물질을 증발시킬 것인가? 따라서 생명은 그의 적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그리고 벩송은 아주 분명하게 자주 그것을 반복하여 말하는데, 생명의 힘은 제한된 힘이지, 전능이 아니다. 따라서 그 힘은 술책(la ruse)에 의해 우선 초라하게 또 겸허하게 작동할 것이다. 생명의 힘쓰는 묘기(le tour de force, 곡예), 그것은 물질 그 자체를 그것의 도안들에 맞게 봉사하게 하는 것이었고, 물질을 사로잡고 그러고 필연성을 정복하기 위하여 교활하게 물질의 성향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이 핑계로부터 사람들이 두뇌라고 이름 짓는 삶의 양식(le modus vivendi, 타협안)이 결과로 나온다. 물질의 형이상학은 새로운 어느 날(un jour)을 신경체계의 기능을 향해 회고적으로 투사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신경은 사유의 원인도 자리(le siège)도 아니다(왜냐하면 이 단어들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신체성은 단순히 생명 도약의 중단을 표상[재현]한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생명은 물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치 좋은 외교관처럼 생명은 통치하기 위하여 분할한다. 두뇌는 “자동주의 그 자체에 대항하여 자동주의를 분할하는데”, 즉 행동을 행동과 맞잡이 하는데, 물질을 정당하게 사용한다. 두뇌의 기능은 옛 습관들을 중성화할 수 있는 새로운 습관들을 무한히 창조하는데 있다. 직접적으로 두뇌는 메카니즘들 만을, 다시 말하면 공간적인 것들만을 창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메카니즘들[유기체화 조직들]은 서로 상호 무화되며, 의식은 물질로부터 도망가기 위하여 그것을 이용한다. 그 최악의 메카니즘 그 자체는 우리에게 유리한 것에 등을 돌린다. 마치 능란한 기술자들이 우리에게 적대적인 힘을 우리를 위하여 작업하도록 강요하듯이,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는데 자연을 사용한다. 따라서 생명은 자동장치들을 조용히 서로 잡아먹게 내버려 둔다. 이 운동 습관들이 시민전쟁을 하는 동안에, 생명은 동요함이 없이 우리의 자유를 정립할 것이다. 생명은 더 우아하고 더 경제적인 해결책을 꿈꿀 수 있는가? 자동장치들은 이것들 자신이 폭발하도록 자체적으로 충전되어 있도다! 생명은 우리의 결정적 해방을 촉발하는(déclencher) 데에만 단지 수고할 것이다. 아주 가끔 일어나는 것은 생명이 자기의 고유한 덫(le piège, 함정)을 놓기를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생명은 셸링이 창조주에게 맡긴 역할, 그가 유니베르지오(universio)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역할에 닮은 놀이 역할을 거기에서 한다. 신은 우주를 인정하는 체 한다. 우주는 허공에 매달린 신적인 어떤 것이며, 마찬가지로 정신은 자신의 도안들을 더 잘 실현하기 위하여 전복된 정신인 물질성에게 관용을 베푼다. 거기에는 속임수(la feint 겉치장)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유물론자들은 거기서 경솔하게 처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사물들의 철자만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어에게 정신의 핑계거리들을 얻고자 한다. 신체의 아이러니는 세계의 아이러니만큼이나 그들에게 침투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
생명의 술책이 아무리 교묘하다 하더라도, 그 생명의 술책은 역경과 더불어 기울어지게 되는 의식의 비참함을 표현하는 것 그 이하도 아니다. 틀림없이 물질은 “전도[역전]”일 뿐이며 그 이상도 아니다. 틀림없이 그 역전은 실증적 경향성에 의해서만 실재성을 지닌다. 그 역전이란 그 실증적 경향성의 전복이다. 왜냐하면 아무 운동이나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항상 전도된 운동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이런 유혹이 생명의 심장 자체에 잠들고 있어야만 했을까? 이 유혹이 현존[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고, 현존하지 않아야만 했을 것이다. 생명과 물질의 관계는 악[잘못]의 출석[현전] 앞에 있는 라이프니츠에서 신의 태도와 유사점이 없지 않다. 악[잘못]은 변신론(Théodicée, 1710)이 말하듯이, 신(Dieu) 안에 있는 그의 “결함 있는” 원인을 발견한 것이지 “효과 있는” 원인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신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잘못을 허용할 뿐이며, 그리고 상대적으로 가장 짧은 음험한[경사진] 길을 채택했다. 그것은 직선이 절대적으로 선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벩송주의를 라이프니츠 언어로 바꾸어서 말할 것이다. 삶의 도약은 정신과 자유를 앞선 의지로부터(d'une volonté antécédente) 원한다. 뒤따르는(consequente) 의지로부터 삶의 도약은 잠재적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는 두뇌와 더불어 활동하고 움직이는 신체를 원한다. 신경체계를 갖춘 신체는 대척적인 힘들의 결과물일 뿐이다. 마치 최상의 힘은 양립할 수 없는 완전함들이 그 자체로 결론을 내어야만 했던 협정으로부터 나온 결과인 것처럼, 생명은 이 힘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로써 죄악들은 신의 영광으로 방향을 바꾼다. 마찬가지로 생명은 잘못[악]으로부터 선을 끌어낸다. 통탄해야 하는 것, 그것은 물질의 무게가 아니고, 그것은 우리에게 물질을 가지고 구성하도록 강요하는 부끄러운 숙명이다. 이런 이유로 여기에 창조적 진화의 위대한 새로움이 있다. 물질과 기억 속에서 정신은 신체 없이 꿈꾸듯이 무능한 추억들로 흩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물질 없는 생명이 자기의 전능 속에서 절대자 자체일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물질이 근본적으로 소용없을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거기에 있기 때문이고, 스스로 하나의 근거(une raison)를 잘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물질이 현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본능이 지성으로 분리되도록 강요되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알고, 생명은 두 개의 계들, 즉 식물계과 동물계 사이에 보충적 기능들을 분배하지 않았을 것도 알고, 또 유기체화 된 존재들이 영속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완점함들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았을 것도 안다. 따라서 벩송은 정신적 원리의 근본적인 독립에 대한 믿음을, 모든 장애물들을 정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지어는 아마도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점점 더 확고하게 계속해서 믿었다. 정신적 에너지에서, 그는 이런 생각을 훨씬 더 많이 강조한다. 그의 직관주의적 형이상학의 성숙은 이 신념을 가지고 종말론적 다음 날들을 들여다보게 하고, “미래의 즐거운 노래”를 지각하게 해주고, 결국 자유의 결정적인 승리와 공간적 원리의 승화를 희망하게 해 준다. 게다가 필연성 속에 자유의 개입은 물질의 저항을 찬란하게[선명하게] 표출하는 폭력적 노력을 요구한다. 순수지각과 순수 추억은 “한계들”(des limites, 극한)인 반면에, 직관은 하나의 사실[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은 드문 사실이지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생명이 절대적 유일자(l'unique)라면, 그 유일자는 진실한 직관의 측면에서 순수 생명직관일 뿐일 것이다. 우리가 그걸 알고 있듯이, 대립이란 사물들 사이에서라기보다 운동들 사이에 있으며, 하나는 긍정적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운동이다. 이리하여 긍정적 운동을 생명과 결합시키는 모든 인식과, 물질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 자체는 어느 정도로서는 직관적일 것이다. 물질을 물질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절대자의 핵심으로 인도할 것이다. 생명이 메카니즘들 중에 내려가는 운동을 채택할 때, 이렇게 생명 그 자체가 만들어 진다. 그러기 위하여 [생명이] 연구된 대상의 평면[도식]위에 단번에(d'emblée) 자리 잡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상징적 인식이 결코 체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인식의 생명에 대한 혐오는 모든 도식들을 휘젓기도 하고, 직관의 운동에 등을 돌리도록 강요한다. 동등하지 않게 밀도를 지닌 유일한 실재성이, 즉 모든 단계에서 진실한 직관의 대상을 만들 수 있는 그 실재성이 있다. 만일 그때 주체의 리듬이 대상의 리듬과 일치 한다면, 또 우리가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구별들을 없애는[지우는] 상징들을 거부한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직관들은 존엄함에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믿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직관은, 또 생명을 개화하게 허락하는 유일한 직관은 순수 정신의 직관이다. 이 순수정신의 직관은 넌지시 하는 암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하는 것이다. 이 정신의 직관은, 자기의 재주를 물질을 통해 스스로를 수집하는데 소모하는 그런 직관의 냉철한 수완을 경멸한다. 그 직관은, 여러 가지로 애매하고 또 동등하지 않게 불순한 실재성들과 일치하기 위하여 자기의 고유한 내용의 함량을 더 이상 힘들여서 달지 않는다. 그 직관은 우리에게 총체적 실재성과 마주보게 내버려 둔다. 이때에 이 실재성을 우리 속에서 발견하게 되어 우리가 놀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절대자가 우리 자신들과 가까이 있는지를, 우리 자신에 닮았는지를 인정할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그것을[절대자] 찾으려고 적어도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좋은 길은 즉 가장 호의적인 길은 항상 사람들이 보는 마지막 길이기 때문이다. 절대자는 불가사의(une mystère)이다. 그 불가사의는 매순간마다 생명 안에서 그리고 생명에 의해 우리들 각각 속에서 실현된다. 괴테의 단어를 따르면, “단순성을 믿기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멀리있는 절대자의 우상을 거부해야 하며, 그리고 먼 것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정오에 열네시를 더 이상 찾지 않아야 한다. (49R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