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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8대 불가사의”, 카르멜산 바하이 테라스 정원
2001년 초, 이스라엘 북서부, 지중해에 접해있는 항구도시 하이파가 들떠있었다. 그해 5월 22일 개최될 국제행사, 하이파시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자랑한 ‘카르멜산 테라스정원’ 개막식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이 행사의 주최는 UN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국제적인 NGO, 바하이국제공동체(BIC)였다. 개막식에는 세계 각국에서 초청된 VIP인사와 전 세계 230여 개국 바하이공동체에서 선발된 참가단을 합해 모두 4,500명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스라엘 하이파시와 바하이국제공동체가 맺고 있는 인연은 각별해서, 바하이국제공동체의 정신적, 행정적 기둥 역할을 하는 바하이신앙의 세계본부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이 새로운 종교의 산파 역할을 했던 바비신앙의 창시자 바압, 세속명 세이예드 알리 무함마드(1819-1850)의 성묘(聖廟)가 하이파시를 굽어보고 있는 ‘성스러운 산’ 카르멜에 자리 잡고 있다.
바하이신앙은 태어난 지 이제 꼭 180년, 추종자는 약 6백만 명을 헤아리는 종교로 이스라엘에 자리 잡고 있는 3대 세계종교에 비해 비교적 ‘작고 어린’ 종교다. 그러나 1982년에 발간된 「세계 기독교 백과사전(World Christian Encyclopedia)」이나 1992년 판 「브리태니커」 연감에 따르면, 이미 그 당시부터 기독교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국가에 전파된 세계종교다.
바하이신앙이 하이파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창시자 바하올라, 세속명 미르자 후세인 알리(1817-1892)가 이 지역으로 유배되어 온 데 기인한다. 당시 하이파는 예루살렘과 함께 오스만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다.
이야기는 1844년 페르시아, 오늘날의 이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해는 서구 열강의 압력으로 오스만제국이 ‘묵인의 칙령’을 선포함으로써 마침내 유태인들이 천이백년 동안 입국이 금지되었던 선조들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게 된 해이기도 하다.
그 해 5월 22일, 교역과 교통의 요지인 시라즈시(市)에서는 한 젊은이가 자신이 하느님의 새로운 사자임을 밝혔다. 훗날 바비신앙의 창시자로 종교사에 기록될 인물, 바압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자신의 출현으로 이슬람 율법, 샤리아가 그 효력을 상실했으며, 자신의 뒤를 이어 조만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 세계종교의 창시자들이 약속했던 메시아가 출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곧 수많은 사람들이 바압을 따르게 되어 페르시아 전역은 천년왕국운동의 열풍 속에 빠져들었다.
바압의 추종자, 바비들 중에는 최고위급 종교지도자로부터 황실의 친인척, 정계의 거물, 바자르의 거상(巨商)에 이르기까지 최상류 계층의 인사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이나 이슬람 종교지도자들로서는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곳곳에서 박해와 충돌이 벌어졌고,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바비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바압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850년 7월 9일 12시 타브리즈시(市) 병영광장, 호기심에 찬 만여 명의 군중이 그들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과 함께 지켜보는 가운데 있었던 일이다. 3열 횡대로 도열한 750명의 병사가 쏜 총탄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바압의 유해는 성문 밖에 내버려졌다.
이어 전개된 가혹한 박해로 바비운동은 5천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고 명맥이 끊기는 듯 했다. 그러나 1863년 자신이 바로 바압이 예언했던 하느님의 예언자임을 선언한 바하올라에 의해 바비신앙을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운동, 바하이신앙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러나 바하올라에게 주어진 길 역시 가시밭길이었다. 유서 깊은 가문의 장손으로서 부귀영화가 보장되었던 그는 자신이 택한 새로운 신앙으로 인해 명예는 물론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고국을 떠나야 했다. 유배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이스탄불, 아드리아노플을 거쳐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아지즈가 정한 바하올라의 최종 유형지는 하이파만 북쪽 끝에 위치한 성곽도시 아코였다. 한때 십자군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곳으로 호송되던 바하올라는 1868년 8월 31일 호송선을 갈아타기 위해 하이파항(港)에 잠시 머물렀다.
당국의 통제가 다소 완화되면서 바하올라는 하이파를 3차례 더 방문할 수 있었다. 1891년 여름 하이파에 체류하는 동안 바하올라는 자신의 장남이자 후에 후계자로 임명된 압돌바하(1844-1921)에게 장차 바압의 유해가 안장될 지점을 정해 주었다.
동쪽에는 선지자 엘리야의 동굴이 있고, 서쪽으로는 갈릴리 언덕이, 등 뒤 남쪽으로는 샤론 평야가 펼쳐져 있는 카르멜 산 북쪽 사면 정 중앙, 발아래로는 ‘호프 야페’, 히브리어로 ‘아름다운 해변’이라는 의미를 지닌 하이파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눈을 들면 아득히 수평선 위에 자신의 유형지 아코가 마주 보이는 지점이었다.
추종자들에 의해 은밀하게 수습되어 보관 중이던 바압의 유해가 성지에 도착한 것은 1899년 1월. 그러나 성묘 건립을 둘러싼 모함과 탄압으로 인해 그의 유택(幽宅)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1909년 3월 21일 깊은 밤, 단 한 자루의 양초가 어둠을 밝힌 가운데, 그의 유해는 압돌바하에 의해 카르멜 산기슭에 안장되었다.
바압의 성묘는 이후 여러 단계에 걸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먼저 6개이던 묘실은 9개로 증축되어 성묘가 정방형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1953년엔 성묘를 위에서부터 감싸는 외곽 구조물이 완성되었다. 동서양의 건축 양식이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룬 이 건물의 압권은 황금색 돔형 지붕이다. 일견 황금을 입힌 듯한 이 돔은 12,000개에 달하는 비늘형태의 금박기와를 정교하게 입혀 만든 것이다. 금박기와는 네덜란드의 도자기 전문회사에 특별히 주문, 생산한 것으로 순금가루를 입힌 표면에 투명한 유약을 발라 구워낸 것이다. 성묘 주위에는 성스러운 건물의 품위에 맞춰 정갈하게 다듬어진 테라스식 정원이 조성되었다.
해발 543미터의 카르멜산 5부 능선에서 그림같이 아름다운 시가지와 하이파만(灣)을 내려다보고 있는 바압의 성묘는 그를 에워싼 테라스정원과 함께 언제부턴가 하이파시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원의 조성과 관리를 위한 비용은 전액 바하이들의 헌금으로 조성된다. 그러나 베르사유 정원 등 여타 세계 유명 정원과는 달리 바하이정원은 누구나 그 아름다움을 완상(玩賞)할 수 있도록 무료로 일반에게 공개되어, 순례객은 물론 하이파를 찾는 일반관광객들, 웨딩포토를 찍으려는 신혼부부들, 그리고 평소에도 산책이나 명상을 즐기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매년 수십만 명이 찾는 이 독특한 정원을 한 국제적인 항공사 팸플릿에서는 “중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1987년부터 2001년까지 바하이국제공동체는 카르멜산에 총공사비 2억5천만불(약 3천억원)을 투입해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역시 카르멜산 산록에 자리 잡은 바하이 세계본부 부속 건물 2동의 신축과 함께 바하이정원을 대폭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건설 시작 당시 이스라엘에서 시행된 사업 중 최대 규모의 민자사업이었던 카르멜산 테라스정원 프로젝트. 이를 통해 그 규모와 아름다움을 한층 경신한 바하이정원은 예정대로 2001년 5월 22일 대망의 개막식을 가졌다. 카르멜산 하단에서 진행된 개막식에는 한국에서도 17명의 바하이가 참석했다.
테라스정원 개막식에서는 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작곡된 오라토리오와 심포니가 하이파 심포니 오케스트라, 루마니아 국립 트란실바니아 합창단, 그리고 페트리샤 그린, 노먼 베일리 등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기악가, 성악가들에 의해 초연되었다.
카르멜산 테라스정원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 공중정원’을 연상시킨다. 신바빌로니아 제국, 칼데아 왕조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B.C. 605년경 왕궁 안에 만든 공중정원처럼 바하이정원도 계단식으로 조성되었으며 최첨단 관개시설을 이용해 정원에 물을 대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피라미드형 테라스 구조 위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중정원과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해 만든 카르멜산 테라스정원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공중정원이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자신의 아내, 메데스 왕국의 공주 아미티스를 위해 노예를 동원해 만든 것이라면, 카르멜산 테라스정원은 바압과 그의 수제자들을 추모하고, 바하이공동체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 ‘다양성 속에서 융합을 이룬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조성되었다.
하이파 시가지에 면해있는 카르멜산 하단에서부터 산 정상을 향해 축조된 19개의 테라스정원은 선인장, 협죽도, 로즈메리, 올리브 등을 비롯해 고슴도치, 거북이, 물총새, 나이팅게일, 무당벌레, 거미 등 각종 토착 동식물, 그리고 도시의 소음을 흡수 차단하며 흐르는 수많은 작은 폭포와 분수, 개울과 여울목, 이 모든 요소가 친환경적인 원예기술과 최첨단 관개시설을 통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걸작으로서 정원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19개의 테라스는 모두 오솔길과 계단을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그 한 가운데 황금빛 돔이 돋보이는 바압의 성묘가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성묘 바로 아래, 아홉 번째 테라스에 있는 오렌지 나무 두 그루는 바압의 생가 안뜰에서 자라던 나무의 씨를 받아 키운 것이다.
시라즈시(市)에 있는 바압의 생가가 바하이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통곡의 벽’, 기독교인들에게는 베들레헴의 ‘예수 그리스도 탄생교회’, 또는 무슬림들에게 메카의 ‘카바’ 성전이 갖는 의미와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후발주자’에 대해 기성종교 광신자들이 가한 박해와 탄압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 성소(聖所)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수난의 대상이 되었다. 지난 1979년 집권한 이란 이슬람 혁명정권은 바압의 생가를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파괴한 다음 그 위에 대형 광장을 만들었다.
19개의 테라스는 바압과 그를 따랐던 최초의 제자 18명을 상징한다. 그 중에는 바압이 타헤레, ‘순결한 영혼’이라고 부른 여성운동의 선구자 파티미 움 살라미(1814-1852)도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죽음에 임해 이렇게 외쳤다. “그대들은 나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의 해방은 막을 수 없다.”
하이파시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소개한 카르멜산 테라스정원, 자연과 인공, 그리고 정신적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진 하이파시 바하이정원은 1998년과 1999년, ‘아름다운 이스라엘을 위한 위원회’와 하이파시로부터 각각 에프라임 라이프셔츠(Ephraim Lifshitz)상과 막심(Magshim)상을 수상했다.
카르멜산 테라스정원 프로잭트의 총 책임을 맞은 사람은 캐나다 국적 이란 건축가 파리버즈 사바(당시 53세). 그는 1986년 완공된 인도 뉴델리 바하이사원을 설계 감독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연꽃사원’으로 더 잘 알려진 뉴델리 사원은 매년 350만 명 이상이 다녀가 세계적으로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카르멜산 테라스정원의 개막으로 이스라엘 역시 또 하나의 세계적인 명소를 얻게된 셈이다. 이를 기념하여 이스라엘 체신부에서는 대형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이번 개막식에 누구보다도 큰 기대를 하는 측은 하이파시와 주민들이다. 시정당국은 바하이정원으로 연결되는 3킬로미터의 도로를 새로 개설하고, 테라스 중심축에서 하이파 항구로 길게 뻗은 벤구리온로(路)를 2미터 가까이 이동시켰다. 또 이 중앙로를 따라 산재해 있는 템플공동체 거주지에 대한 복원계획을 수립, 첫 단계 공사를 진작 끝마치는 등 카르멜산 테라스정원 프로젝트를 적극 지원했다.
템플공동체는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발생한 한 메시아운동에 의해 결성된 공동체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집단 이주해 하이파, 베들레헴, 갈릴리 등지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성지에서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벤구리온으로 불리는 도로를 중심으로 카르멜산 테라스정원 바로 아래쪽에 형성된 템플공동체 거주지역은 바하올라와 마찬가지로 1868년 하이파항을 밟은 템플공동체의 창립멤버, 호프만과 하드엑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독일식 주택지는 오늘날에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새롭게 단장된 카르멜산 테라스정원의 개막으로 하이파시는 매년 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더 찾는 아름다운 도시가 된 것이다.
카르멜산 테라스정원 개막식의 절정은 노르웨이 작곡가 라세 토레센(52)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빛의 테라스’가 초연되는 가운데 이날 밤, 바압 성묘와 19개의 테라스정원을 차례로 밝힐 점등식이다.
31살의 젊은 나이로 처형이 되기 전, 바압은 이란 북부 외딴 성채에 투옥되어 엄중한 감시 속에서 지내야 했다. 때로는 살을 에는 듯한 혹한 속, 단 한 개의 호롱불도 주어지지 않은 감옥,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밤을 맞아야 했던 생전의 삶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며 카르멜산 테라스정원, 그의 성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찬란한 빛의 축연(祝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오라토리오 ‘빛의 테라스’, 꽃향기 가득한 테라스정원, ‘약속의 땅’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중동평화의 발목을 잡고 있는 ‘평화의 땅’ 예루살렘, 끝을 모르는 유혈사태, 자살폭탄테러, ‘아름다운 해변’ 하이파, ‘성스러운 포도원’ 카르멜, 혜성 같은 삶을 살다 간 성묘의 주인공, 그의 제자들의 피로 얼룩진 땅 이란, 그곳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박해와 탄압, 그리고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촉촉한 밤바람 ... 이런 상념들은 점등식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종교적,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바압이 당신의 소명(召命)을 밝힌 것은 1844년 5월 22일. 그러므로 “세계 8대 불가사의”, 카르멜산 테라스정원 개막식이 개최된 날은 그로부터 꼭 15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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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Darkness To Light - The Mount Carmel Terraces Official Opening
https://www.youtube.com/watch?v=9TXliGA4IDE